영화,,암살,,은 끝나지 않았다.
용공조작의 달인 김창룡 이야기를 통해 우리 근대사의 비틀어진 역사를 기억해야한다
이승만의 양자 특무대장 김창룡은 누구인가?
태어나서 악업만 쌓고간 김창룡은 함경도 영흥출신이다.1940년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입대하여 만주에서 조선과 중국 항일독립조직 50여건을 적발하여 헌병오장(하사급)으로 특진한다.1945년 일본 패망뒤에 철원에서 체포되어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송중 탈출하였다.1946년 또다시 소련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또 다시 탈옥하여 월남한다.
미군정의 도움으로 반공국가를 충실히 만들어가던 대한민국에서 김창룡은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하여 95일동안 단기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자신의 주특기인 군부내 좌익 색출 공로로 소령으로 특진한다.
1949년부터 1956년까지 육군특무부대를 창설하여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하고 독재정권의 초석을 다지는 첨병노릇을 수행하였다.
이승만독재권력의 영구집권을 위해 김창룡이 주역이 되어 조작했거나 과대포장한 대표적인 사건은 부산 금정산 공비위장사건.정국은 간첩조작사건.동해안 반란사건.국가원수 암살음모사건등이다.
1948년 제주 4.3사태 진압을 반대하는 14연대로 인하여 여.순사태가 발생하였다.이승만은 군법무관 김완용에게 한달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라 죽이고 오라고 지시하였다.이때 김창룡이실무자로 있던 육군 정보국 3과가 나섰다.1948년 11월 11일 정보요원들은 여순사태 군사총책인 박정희 소령을 체포하였다.좌익군인으로 체포된 박정희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그러나 군대내 남로당 조직 계보를 진술한 댓가로 사형을 면하고 6.25전쟁이 발생하자 현역소령으로 복귀하였다.박정희의 진술로 군대내 남로당조직의 인맥이 적라라하게 드러났다.1949년 3월까지 김창룡 방첩부대는 1500명에 달하는 좌익장교들을 처형하였다.당시 군병력의 3프로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독립군 때려잡던 일본군 하사출신 김창룡의 주도하에 군대내 숙군은 계속되었다. 1949년 7월까지 4749명이 처형되었다.숙군과정에서 짧은 시간안에 뛰어난 실적을 올린 김창룡은 49년초에 소령으로 승진하고 6월 육군 방첩대CIC대장으로 임명되었다.불과 2년 3개월만에 소위에서 중령까지 올라간것이다.
특히 6.25전쟁으로 피난수도 부산 근교에 무장공비출현을 조작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장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킨다.이승만의 재집권을 성공시킨 사건은 안보문제를 정치에 악용한 첫사례이다.
김창룡이 일제와 해방후에 한민족에게 저지른 악행은 끝이 없다.민족 지도자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끌려간곳은 육군특무부대였다.김창룡이 안두희에게 말했다.안의사 수고하셨소.그뒤로도 김창룡은 안두희를 끊임없이 챙겼다.
6.25전쟁으로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가장 먼저 도망간 이승만은 서울이 수복되자 부역자 처벌을 김창룡에게 맡곁다.그때 검거된 인원만 15만3825명 자수한 인원은 39만 7090명이었다.이 가운데 서울지역에서만 1298명이 처형되었다.
김창룡이 만든 수많은 조작사건 가운데 대표적인것은 1955년 이승만 암살음모사건이다.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나재하.김병호.민영수.김재호.김익중.이범륜.유성연.김동훈에게 이종태라는 청년이 접근한다.이 청년은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노령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도탄에 빠진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열혈청년의 등장에 반가움과 함께 과거 일제때 요인 암살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종태 청년에게 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때 이승만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고 수류탄을 구입해 주었다.하지만 이음모는 거사직전 특무대에 의해 발각되었다.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실컷 두들겨 맏고 있을때 이종태 청년이 군복을 입고 웃으면서 나타났다.
독립투사들은 해방후에도 친일세력들에 의해 조롱당하고 그들이 매설한 함정에 빠져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1956년 1월 30일 특무부대장 김창룡은 출근길에 짚차가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 차를 세웠다.그때 두명의 괴한이 짚차문을 열고 권총 6발을 발사했다.이승만의 오른팔이며 양자였던 김창룡도 그렇게 죽었다.그의 나이 39세였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죽음을 보고 받은 그날로 중장으로 추서했다.국군 최초로 국군장이 열렸다.그날 하루 육해공군 전군부대는 조기를 게양했고 장병들의 음주가무도 금지되었다.
김구선생이 죽었을때 한번도 조문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김창룡 영전에 세번이나 찿아와 애통해 하였다.
그의 비문은 친일 사학자 이병도가 직접 썼다.그리고 그의 유해는 국립 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다. 독립투사들은 죽어서도 잠못 이루는 대한민국이다.
육군 특무부대는 일제때 배운 조작과 고문으로 이 땅의 민주인사들을 탄압하고 독재정권을 보좌하면서 오늘도 조작질을 계속하고 있다.그 이름은 육군 방첩대.보안사령부로 이름이 바뀐다.
16대 보안사령관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쏘았다. 20대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21대 보안사령관 노태우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친일매국의 대표인물중 한명인 김창룡의 악업은 이나라 근대사의 어두운 그늘로 가려져 있다.
사진 1번 김창룡의 생전모습이다.
사진 2번 김창룡의 암살직전 모습이다.
사진 3번 좌익 군인들을 처형하는 모습이다.
사진 4번 서울 수복후 부역자들을 체포하는 모습이다.
사진 5번 대전 현충원 김창룡의 묘를 이전하라고 시위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