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아직 정전 중입니다. 종전은 전쟁이 끝난 것이고, 정전은 일시적으로 전쟁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어제는 정전 7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몇 달 전 한국전쟁 74주년을 맞이해서 한국전 참전 용사인 ‘Jonny’씨를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가장 치열했던 후크(Hook) 고지 전투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7월 27일 정전협정이 알려지면서 총성과 포성은 그치고 적막이 흐르자, 시체들의 썩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밀려 왔다고 회상했습니다. 우리는 ‘비목’이라는 가곡을 알고 있습니다. '비목(碑木)'은 "죽은 이의 신원 따위를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나무로 만든 비(碑)"를 뜻합니다. 비목의 가사는 종전 후의 전쟁터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연은 화약연기이고, 초동친구는 어릴 때 땔나무를 하러 함께 다니던 죽마고우를 뜻합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용산에 ‘전쟁기념관’이 있습니다. 전쟁기념관 입구에는 ‘형제의 상’이 있습니다. ‘형제의 상’은 한국 전쟁 때 서로 다른 진영에서 싸우게 된 형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국군 소위였던 형 박규철과 북한군 이등병인 동생 박용철이 전투 중에 극적으로 상봉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황해도 출신이고 해방이 되고 공산당의 학정에 못이겨 부모님을 동생에게 맡기고 형은 월남하여 국군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 6.25 전쟁이 일어나고 동생은 인민군으로 징병이 되었습니다. 이들 형제는 나중에 안동전투에서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념으로 적이 되었지만, 혈연으로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형제의 상’은 한국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상징물입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오는 형제들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가인과 아벨(창 4:8-9)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형제애가 파괴된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은 재물은 받고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자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가인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안은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히 11:4) 가인은 시기와 질투로 인해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는 형제간의 사랑이 파괴된 첫 번째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동역자가 아니라 경쟁자로 보인다면 우리의 신앙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사울이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는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 백성들이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다윗을 경쟁자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비교해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나를 나로 만들었습니다. 내가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어제 파리 올림픽이 개막되었습니다. 탈무드에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자신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며, 세상에서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비교와 경쟁은 자기 자신과 하는 것이 가장 건강하고 의미 있는 방법입니다. 어제의 나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내일의 더 나은 나를 위해 준비하는 것은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촉진합니다. 이렇게 하면 타인과의 불필요한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고, 자신의 발전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삶의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2019년 7월에 26일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군대에 있는 나를 만났습니다. 과거의 나는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말을 하려고 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어제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어느 낯선 거리에서 유연히 나를 만날 때 “너를 사랑하고, 기뻐한다”는 내가 되기를 오늘도 기도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어제의 나, 수고 많았어. 실수했거나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그 또한 성장의 한 부분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자. 오늘을 살아가는 힘과 지혜를 너에게서 배웠으니 감사해."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오늘 네가 내일을 위해 준비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줘서 고마워. 오늘의 선택들이 내일의 나를 더 강하고 믿음이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야. 네가 걸어가는 모든 길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인도해 주실 것을 믿어. 계속해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길 바래"
2. 에서와 야곱(창 33:4)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로 태어날 때부터 갈등을 겪었습니다. '야곱 콤플렉스(Jacob Complex)'는 심리학적 또는 신학적 용어로, 일반적으로 특정한 열등감, 경쟁심, 또는 속임수와 관련된 행동 패턴을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용어는 성경에 등장하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았고, 야곱은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로 인해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에서가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죽을 날이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창 27:41)
어머니인 리브가는 한번에 두 아들을 잃을 수 없어서, 야곱을 하란 살고 있는 오빠인 라반에게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야곱은 20년간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서는 400명의 군사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형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하여 모든 것을 보냈지만, 막상 자신은 형이 두려워 얍복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얍복강에서 천사를 만나 씨름하였습니다. 환도뼈를 부러져도 천사를 놓지 않으니, 천사는 야곱이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축복하여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창 3:30).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을 건너 두려운 형님을 보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 33:10).
이 장면은 우리가 진정한 화해를 통해 형제애를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인 에돔과 이스라엘은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할 때, 에돔은 자신들의 땅을 통과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사울 왕, 다윗 왕, 솔로몬 왕 등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이 에돔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헤롯 대왕이 이두매 출신이었습니다. 이두매는 에돔의 후손입니다.
3. 요셉과 형제들(창 50:20-21)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도 큰 교훈을 줍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를 질투하여 노예로 팔아버렸지만, 나중에 기근이 닥쳤을 때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제들을 도와줍니다. 야곱과 함께 70명이 고센 땅에 내려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인 야곱이 죽자 형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창 50:15). 하지만 요셉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난 것이기에 자신에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선포하며 화해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배반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능으로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주님의 영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용서와 사랑의 근거는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중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신자이고, 그 믿음을 실천하면 제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