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로 국가 간 국제 취업에 나서 국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광부와 간호사들이 남해에서 펼치는 맥주축제를 신나게 즐기시기 바랍니다."
지난 4일,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의 독일마을에서 열린 맥주축제 현장에서 사회자가 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1960년대 대한민국 정부와 독일 정부 간 협약으로 독일에 파견된 광산 근로자와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의 역사는 과거 가난했던 시절의 아픔을 고스란히 되새겨줍니다.
우리나라 국제 취업의 역사가 어디 이뿐일까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의 일본 본토 징용과 하와이 집단 이주, 1960~70년대 베트남 파병, 1980년대 전후의 중동 인력 수출 등 다양합니다. 그러니까 발전 뒤에는 항상 아픔이 자리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각설하고, 경남 남해군 독일마을 맥주축제 현장 입구에는 우리나라 산업 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된 광부 및 간호사 파독 근로자들의 생생한 활동상을 담은 사진전이 펼쳐졌습니다. 아울러 유럽 스타일의 노천카페와 대형 파라솔, 독일인들의 퍼레이드와 공연 등이 어우러졌습니다.
독일마을 입주민 몇 분께 약식 인터뷰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는 거 싫다, 조용히 살고 싶다"면서 정중히 거절하더군요.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한 발 물러섰습니다. 대신 과거의 기억을 주섬주섬 끄집어내야 했습니다.
독일에서 각각 광부와 간호사로 일했던 은퇴 노동자로부터 10여년 전에 들었던 말입니다. 이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계기가 아주 특별합니다. 전 당시, 다국적기업인 바스프(BASF)사의 회장 면담 차 독일에 갔었고,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등지의 교포 집에서 며칠 숙식하며 지냈습니다.
그때 신세를 진 광부 한 분을 우리나라로 초대했습니다. 그는 부인과 사별한 처지라 많이 외로워했습니다. 하여, 중매까지 고려하고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없던 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를 돌이켜 보면, 파독 노동자들이 고국에 돌아오기 쉽지 않은 이유는 대략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문화 차이 등을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결혼해 가정을 꾸렸는데, 나라 간 문화 차이가 커 가족들과 국내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파독 노동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기거할 만한 마땅한 거처가 없다는 겁니다. 고향도 전과 같지 않아 엄두가 나지 않는다더군요. 또 다른 곳에 정착하려 해도 말벗이 없는 관계 등으로 해서 살 곳을 콕 집어 선택하기가 힘들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셋째, 경제적 여건이 안 된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이었을 때에는 환율 차이가 커 그나마 경제적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환율 차이가 별로 없어 전 재산 팔아 귀국해도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노후를 즐길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 독일에 눌러 앉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 거주 교포들이 고국에서 정착할 삶의 터전을 경남 남해에 일군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기여한 바로 볼 때 무척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34가구가 기거하는 남해의 집단 독일마을은 파독 노동자들의 꿈꿨던 꿈의 정착지인 셈입니다.
경남 남해 독일마을 맥주축제는 올해로 4회째. 지난 4일과 5일 이틀동안 진행된 프로그램은 맥주 빨리 마시기, 못 박기 등의 경연과 독일민속공연, 유진박 공연, 환영 퍼레이드, 독일 클래식 공연, 댄스 퍼레이드, 가면 파티,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영상 상영, 세시봉(7080 통기타) 라이브 공연, 불꽃놀이 등이었습니다.
독일마을에서 주관하는 만큼 아기자기함이 더해졌더군요. 책상과 의자로 채워진 무대 광장은 사람들이 앉아 독일 맥주를 마시고 독일 소시지 등을 먹으며 공연 등을 즐길 수 있도록 노천카페가 됐습니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우리네 축제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모두 같이 즐겁게 건배합시다!"
하이라이트는 맥주 파티였습니다. 독일의 '마이셀', '비트버거', '벡스', '뢰벤브로이', '비트버거드라이버', '쾨스트리처' 등 독일의 6가지 생맥주, 캔맥주, 병맥주 등을 독일 소시지와 같이 맛볼 수 있었습니다. 괜찮은 독일 정통 맥주였습니다.
독일마을 맥주축제를 총평하자면 상업적이지 않으면서 오크통과 독일 전통의상 등 독일 문화까지 즐길 수 있는 마을축제의 전형이었습니다. 이 축제도 역사가 쌓이면 전 세계에서 500여 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는 세계 최대의 맥주축제인 독일 '옥토버페스트'에 견줄 만하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파독 노동자들의 희생 등 근본 뜻은 쭉 살려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