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2~3만 명(일본측 자료)에서 10만~40만 명(조선측 자료)에 달한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어떨까. 조선에 귀화했거나, 혹은 항복한 일본인은 사야가(김충선) 말고는 없었을까? 아니다. 있다.
1597년(선조 30년) 5월18일 도원수 권율이 죽도와 부산의 적진에 밀파한 간첩들의 보고를 정리하여 조정에 알린 내용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왜인들의 시름이 큽니다. 항왜(降倭:항복한 일본인)의 수가 이미 1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일본의 용병술을 다 털어 놓았을 테니 심히 걱정된다고 수근거립니다.
지금 경상우병사가 거느린 항왜만 해도 1000명에 달합니다.』고 했다.
또 1595년(선조 28년)의 보고서를 보면 『북쪽 변방에 이주시킨 항왜의 숫자가 5000~6000명에 이른다.』고 했다.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항왜(귀화 혹은 항복한 일본인)의 수는 42건에 600명에 달한다.
기록된 숫자가 이 정도니 실제로 엄청난 수의 왜인이 갖가지 이유로 항복하거나 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선조실록》 등을 살펴보면, 심상치 않은 이름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즉 사고소우, 연노고, 산여문, 요질기, 훤도목병위, 평구로, 요시지로, 조사랑, 노고여문, 사백구, 세이소…. 일본임임을 알 수 있는 이름들이다.
또 김귀순(金歸順), 김향의(金向義), 이귀명(李歸命) 등은 귀순하고(귀순), 의를 좇았으며(향의), 천명에 귀의했다(귀명)는 뜻에서 조선 조정이 하사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인들은 왜 투항했을까. 전쟁이 나자마자 귀화의 길을 택한 김충선 같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초기에는 항왜(降倭)가 없었다.
왜군이 전쟁 발발(4월13일) 20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으로 질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명나라가 참전함에 따라 전쟁이 장기전 양상을 띠게 된다.
항왜의 기록은 1593년(선조 26년) 5월22일 처음으로 등장한다.
왜적 중에 100여명이 명나라 군에게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나라군은 항복하는 왜병들을 다 받아주고 심지어 상급(賞給)까지 내렸다.
선조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왜적에게 명나라 군이 상까지 내린다니 있을 수 없다”고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엇보다 항복한 왜병들이 조선 땅을 가로질러 명나라로 압송될 경우 평양 서쪽의 지리를 꿰뚫어보게 될 것이고, 이 포로들 가운데 다시 일본으로 도망가는 자가 있다면 조선 지리의 허실(虛實)이 다 드러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선조의 걱정이었다.
선조는 비변사에 “항복한 왜군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명나라 파병군에게 전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비변사는 이를 제지했다.
『전하의 말씀은 맞습니다.
저 왜적들은 만세의 후라도 반드시 복수해야 할 원수이고, 저들의 살점을 베어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 장수들은 ‘조선은 어찌 그리 속이 좁으냐’고 힐난하고 있습니다.』《선조실록》
당시 중국군은 ‘오랑캐가 아침에 쳐들어와서 저녁에 항복하기만 하면 다 받아준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군에게 아무리 말을 해봐야 속 좁다는 소리만 들을 것이 뻔하니 전하께서는 참으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쟁을 일으킨 왜적에게 품은 적개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가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상황이 달라졌다.
전쟁 발발 2년 4개월이 지난 1594년 8월 선조가 내린 명령을 보면 생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선이 전투에서 이기지도, 용기백배하여 방어하지도 못하면서 항복·귀순하는 왜인들을 거절하고 있다.
이는 옳지 않은 처사다.
항복한 왜인이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한다.
왜군의 군졸을 이렇게 앉아서 얻었는데, 지나치게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처음에 항복한 왜병을 요동으로 보냈던 조선 조정은 차츰 경상·함경·강원·충청·황해의 바닷가와 외딴 섬으로 보냈다.
또 시간이 흐르자 제주나 진도 등지의 수군 및 각 진에 나눠 이주시켰다.
점점 ‘항왜’의 관리가 골치 아파지기 시작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1594년(선조 27년) 6월 비변사가 아뢰었다. 『투항한 왜적을 경상도 내륙지방 한 고을 당 7~8인 혹은 15~16인씩 두었는데 골치 아파합니다.
매우 후하게 대접해서 하루 세 끼를 먹여주는데도 왜노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뜻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칼을 들이대고, 저들끼리 싸워 서로 죽인답니다. 이들이 진심으로 투항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선조실록》
그렇다면 왜인들은 왜 조선조정에 투항했을까.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장기주둔이 계속되자, 왜군은 보급로 차단으로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다.
1595년(선조 28년) 4월19일 비변사가 항복한 왜인인 조사랑(助四郞)과 노고여문(老古汝文) 등 11명에게 술과 안주를 먹이자 ‘항복한 이유’를 술술 털어놓았다.
『우리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의 휘하에서 예속된 장졸들입니다.
여러 장수들의 진영을 오가며 감당해야 하는 수자리(전방수비)를 괴로워하던 차에 조선이 후히 대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후략).』《선조실록》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