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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0월25일 화요일 [(녹)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수도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페 5,21-33
† 복음 루카 13,18-21
◈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인간관계에서 가장 미묘한 부부 관계로
묘사한 바오로 사도의 비유는 참으로 탁월합니다. 요즘처럼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시작하고, 부부로 인연을 맺고 자식을 출산하며,
평생을 신뢰하며 사는 게 힘겨운 때에, 이 여정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여정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역사 안에서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제자로 믿음을 지키려 했던 순교자들로부터, 동정녀,
은수자, 수도자,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봉헌적 삶으로 지탱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그리스도를 떠나 이단 논쟁, 교권 투쟁, 성직
부패, 교회 분열 등은 물론 독선적인 아집과 편견에 물든 죄의 역사도
살아온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이 양면성을
끝까지 믿고 사랑하시는 마음을 바오로 사도가 부부 간에 지켜야 할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묘사하신 것은, 부부간에 서로 순종하고
존중하며, 신뢰를 지키고, 서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성사적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풍성한 나무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여정을 보면, 그들의 믿음은 겨자씨나 누룩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작고 보잘것없는
믿음의 씨앗을 성령의 도움으로 성장시키시어,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되고, 부풀어 오른 큰 빵을 만들어 주십니다.
교회가 그렇듯이 인간관계도 작은 일에서 신뢰를 지키고, 상대방의
숨겨진 상처를 치유해 주고, 작은 기대들을 채워 주는 희생적 사랑에서
성장합니다. 지금 내가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형제간에 힘든 관계에
서 있다면, 내가 겨자씨와 누룩을 헛된 곳에 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말과 행동의 방향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쪽으로
2016년 다해 10월25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제1독서
"둘이 한 몸을 이룸은 큰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5,21-33
복음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1
어렸을 때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물으면 다들 대단한 희망을 이야기
했었던 것 같습니다. 대통령, 장군, 박사, 의사, 판사, 교수 등등…….
저 역시 꿈을 가지고 있었지요. 바로 ‘신부님’이었습니다. 성당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그게 뭐야? 너 남자잖아.’하면서 신랑 신부의 신부를
장래희망으로 가지고 있다고 놀리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저의 첫 꿈은
신부님이었습니다.
지금 신부로 살고 있으니 첫 꿈을 이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제 꿈이 중간에 바뀌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글쎄 누군가가
제게 이런 사실을 말해 주었거든요.
“너 신부님 되면 결혼도 못하고 평생 혼자 살아야 해.”
이 말을 듣고 고민이 생겼습니다. 신부님이 너무 멋지게 보여서
신부님이 되겠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으니 평생 혼자 살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특히 저의 집은 식구가 많아서(당시 8식구) 늘 집이
북적되었는데, 아무도 함께 살지 않고 저 혼자만 산다는 것을
상상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누군가가 이러한 말도 해줍니다.
“정말로 착한 사람만이 신부님이 될 수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자신이 그리 착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이 되지 못할 이유가 또 하나 생긴 것이지요. 또 누군가 이런
말을 합니다.
“공부를 정말로 잘 해야 해.”
지금이야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당시에는 책과 담을
쌓고 살았고,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습니다.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신부가 될 수 없어.”
그 뒤 꿈이 사라졌습니다. 남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제 꿈을 사라지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말이 꿈을 사라지게 했고 방황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작은 말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또한 작은 행동 하나가 그 사람의 미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착한 행동이란 나쁜 행동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나쁜 행동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쇼)
죄의 시작에서부터 차단할 수 있어야 착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늘 그 시작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커지고 커져서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죄의 시작이 될 수 있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 누룩과 같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죄가 아주 작은데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일 역시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죄로 기울여지게 할 것인지 아니면 선으로 기울어지게 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내 자신에게, 내 가족에게,
그리고 내가 만나는 나의 이웃들에게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의 방향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쪽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면서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순간을 사랑하라. 그러면 그 순간의 에너지가 모든 경계를 넘어 퍼져
갈 것이다(코리타 켄트).
어제 동창 모임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옛날 맥주병입니다.
왼손을 들면(‘좋은 생각’ 중에서)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업 시간에 선생이 질문할 때마다
손드는 아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제대로 답을 못할 때가 많아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
선생이 아이를 불러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아이가 답했다.
“제가 손들지 않으면 친구들이 바보라고 놀려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알고 보니 다른 친구들을 의식한 것이었다. 선생은 아이와 약속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정말로 답을 알 땐 왼손을 들고, 그렇지 않을
때는 오른손을 들어. 네가 오른손을 들 때는 지목하지 않을게.”
선생의 배려로 아이는 맞출 수 있는 질문에만 발표했다. 그러자 더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지 않았다.
아이가 발표할 때마다 선생은 칭찬했고, 자신감을 얻은 아이는 점차
왼손을 드는 일이 많아졌다. 선생의 배려가 소심했던 아이를
모범생으로 변화시켰다.
작은 배려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어떤 말과 행동으로
배려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저의 초등학교 때 모습. 이때부터 마이크잡는 것을 좋아했나봐요.
ㅋㅋㅋ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25일 연중 제30주간 화, 루카 13,18-21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루카 13,19)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좁쌀보다 작은 겨자씨가 1.5-3미터 크기의 큰
나무로 자라나 새들이 가지에 깃들이듯 미소한 것이라 해도 하느님을
품고 있습니다. 또 백 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많은 빵을 구울 수 있는
밀가루를 부풀리게 하는 누룩처럼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극히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하느님 뜻이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가 썩어 없어지고,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리고 흔적 없이 사라짐으로써 성장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봅니다. 스마트폰에 눈과 손을 고정하며 살아가는
디지털 정보사회에서 사람들의 뇌도 깊은 성찰과 분별없이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팝콘 브레인’이 되어간다고 하지요. 내 이익과
관련되거나 자극적인 것들이 아니면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입니다.
이런 피상적 관심 속에 평범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이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가시적인 능력이나 성과를 내지
못하면 불만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아무것도 없지요.
우리 삶에서 겨자씨와 누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작은 배려, 보이지
않는 선행, 부드러운 말씨, 고통 받는 이들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
불평등과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의 절규에 함께하는 행동 그런
것들이겠지요. 그런 마음과 손길이 모아질 때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가치 없어 보이고 사소한 것을 이용해서도
엄청난 선과 사랑을 이루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사소한 일상, 나의 작은 생각, 하찮아 보이는
사람, 평범한 말과 행동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한편 겨자씨가 자라나 하늘의 새가 깃들일 정도의 큰 나무가
되려면 씨는 땅에 묻혀 썩어 없어져야 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변화와
성장은 희생과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헌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내가 죽어 모두를
살리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오늘도 사소한 일상사와 하찮아 보이는 이들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소중히 여기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의미와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이 변화되고 희생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누룩이 되도록
힘쓰는 창조의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0월25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루카 13,18)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꿈꾸지요?
그 하느님 나라는 어떤 모습인가요?
크고 화려하고 멋지나요?
온갖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온갖 산해진미와 과일들이 맛나게 차려진 구중궁궐 같나요?
그렇게 그려보지만 사실 하느님 나라는
작은 것에서 더 찾을 수 있다네요.
겨자씨 같은데서... 누룩 같은데서...
그러니 오늘 작은 것에 더 관심을 가져 봅시다.
거창한 것은 화려해 보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가장한
사탄의 나라일 가능성이 다분하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작은 일에 충실하라 하셨지요.
작은 이들을 무시하지 마라 하셨지요.
하늘의 천사들이 그들을 보고 있다고...
나의 작은 미소,
작은 희생,
작은 나눔,
작은 희생,
작은 봉헌,
작은 눈길...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운데 아주 가까이 있답니다.
오늘 그 하느님 나라를 충만히 느껴 보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 19)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0월25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 19)
눈부신 단풍도 작은 씨앗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이렇듯 깨닫게됩니다.
겨자씨또한 겨자씨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튀워내며 향기롭게 자라나
겨자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씨앗이 소중한 것은 어린이들처럼
성장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살아있기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우리자신이 성장하는 기쁨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성장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성장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작디작은 씨앗을 자라나게 하십니다.
성급함과 조바심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에
충실한 나라가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속단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단풍빛이 아름답게 눈부십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2016년 다해 10월25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 13,18-21
적성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본당 설립 2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17년 전에 본당신부로 3년간 있었습니다. 축하행사는
음악회, 감사미사, 저녁식사로 준비되었습니다. 어르신들은 17년이
지났어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못 알아 볼 정도로
키도 컸고, 체격도 좋아졌습니다. 벽돌이 쌓여서 집을 이루듯이, 지난
20년 시간이 지나면서 성당은 더욱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성당에서 사목을 하셨던 신부님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움, 고향, 설렘, 나눔, 자연’이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성(積城) 성당이 이름처럼 ‘믿음, 희망, 사랑’을 가득
쌓을 수 있는 성당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저도 함께했던 추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약수터로 가서 아이들이 마실
물을 떠오기도 했습니다. 임진강에서 낚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벼를
베기도 했고, 추석과 설날에는 차량 봉사를 했습니다. 미사에 오신
분들에게 번호표를 나누어 주었고, 추첨을 해서 선물을 주기도
했습니다. 3학년 진성이와 산보를 함께 했는데, 아이가 ‘신부님 산보는
어디에 있어요?’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산보를 가자고
했기 때문에 아이는 산보가 어느 장소인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성당
차를 놓친 아이들이 3시간을 걸어서 성당에 왔을 때는 감동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장면을 사주었고, 아이들만을 위한 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저는 가끔씩 사진 앨범을 보곤 합니다. 30년 전의 모습, 20년 전의
모습, 10년 전의 모습, 지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전의 나의 모습’에서 얼마나 발전했을까?
순수하고, 깨끗했던 모습은 많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외모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30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별개의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거치면서 계속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했으면
가능성은 현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소홀했으면 가능성은 가능성으로 남아 있거나, 사라졌을
것입니다.
욥기 8장 7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훌륭하게 될 것일세.” 작은 씨앗은 커다랗게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가 자신은 물론 남을
도울 수 있을 만큼 자라는 것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도 이와 비슷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작은 겨자씨와
같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들이 와서 머물 정도가 된다고
하십니다. 누룩과 같아서 부풀어 오르면 맛있는 빵이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안에 감추어졌던 놀라운 가능성을 보았고,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비록 시작은 12명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수많은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조건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다시 악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비록 현실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큰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소리없는 변화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0월25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 13,18-21
소리 없는 변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해서 아주 보잘 것 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역경과 시련도 믿음의 사람에게는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따라서 순간순간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에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마음속을 스쳐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 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로마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 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런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런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17,21) 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드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유대교 랍비와 신부님이 만났습니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어제 밤 꿈에 유대교의 천국을 보았는데 너무 지저분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없고 유대인들만
우글거리고 있더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나도 간밤 꿈에 천주교인들의
천국을 보았지요. 밝고 화사하고 꽃이 만발한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리 찾아 보아도 사람이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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