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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묵상글 (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 사랑의 숨.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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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의 숨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목숨’의 의미를 오늘은 새겨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목숨’과 ‘목숨’을 구분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구분이 없을 겁니다.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사실 건강을 잃으면 돈도 소용없고 명예도 소용없는데
목숨을 잃으면 내게는 세상도 하느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치 순위는 목숨이 그리고 건강이
돈보다도 온 세상보다도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목숨을 또 나누십니다.
자기 목숨을 따로 떼어 말씀하심으로써 말입니다.
사실 나만 목숨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내 목숨 말고도 수많은 목숨이 있지요.
내 목숨은 수많은 목숨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고,
내 목숨을 포함하여 수많은 목숨은
하느님의 숨에서 나와 시작된 것이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창세기 2장은 목숨의 시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때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the LORD God formed man out of the clay of the ground and
blew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so man became a living being.”
라틴말의 ‘Vita’, 영어의 ‘Life’가 한자어로는 생명(生命)이고 우리말은 목숨이지요.
그런데 우리말 목숨이 아주 영성적입니다.
목과 숨이 붙은 것이 목숨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목에 들락날락하는 숨이 바로 목숨이라는 말이고,
우리의 목에서 숨이 붙어 있지 않고 끊어지면 그것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을 숨이 끊어졌다거나 목숨이 끝났다고 하지요.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숨이 자기 숨이거나 공기 흡입일 뿐이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는 그 숨이 실은 하느님의 숨의 흡입이고,
그리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이 자기 숨이나 공기를 들이키는 숨만 쉬다가 죽으면
아무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해도 그 목숨은 결국 이 세상에서 끝나게 되어
잃게 되지만 하느님의 숨 곧 사랑과 성령의 숨을 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은 잃게 되어도 그 숨만은 영원히 계속 쉬게 되어 죽지 않겠지요.
그래서 오늘 저는 ‘사랑의 숨’을 처음으로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숨이고 성령의 숨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일상적으로는 사랑을 들이키고 사랑을 내뿜는 것입니다.
하느님/성령을 들이키고 하느님/성령을 내뿜는 것이며,
이렇게 살면 숨 쉬는 것이 그대로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숨을 쉼으로써 이 세상에서 생명력과 생기를 지니고 살다가
하느님 사랑 때문이든 이웃 사랑 때문이든 아무튼 사랑 때문에
죽어야 할 때가 와 자기 목숨을 바치면 자기 목숨은 잃어도 영원한 생명을
저세상에서 누릴 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목숨이 온 세상보다 가치 있습니다.
저세상에서는 목숨이 자기 목숨보다 가치 있습니다.
이것이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의 뜻이라고 묵상하고 여러분과 나누는 오늘 저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모두 사랑의 숨을 쉬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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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의미 치료’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유다인이라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그곳에서 아내와 가족을 잃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라고도 불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지요. 굶주림, 혹독한 추위, 그리고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핍박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 극복의 비결을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렇게 담담하게 말합니다.
“어떤 처참한 상황에서도 그보다 더 처참한 상황을 상상하면 견딜 수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보다 더 처참한 상황을 상상하면 우리가 겪는 고통이 훨씬 더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불평불만의 이유만을 찾고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에 그냥 포기하고 좌절합니다. 이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의 죽음까지도 맞이하셨지요. 이 죽음이 과연 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기쁨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만 해서 부활의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은 십자가로 상징되는 지금의 고통과 시련을 이겨냈을 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피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그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을 떠올려보면 어떻습니까?
자기 십자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가족도 있고, 직장 안에서의 삶도 있고,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는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찾아오는 십자가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떠올리며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너머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순교자들도 모두 하느님을 위하여 육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고,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 기억되어 있습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의 목숨만을 유지하려고 비굴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비록 육신의 생명을 지키겠지만, 우리 마음에서 잊히거나 죽은 이들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십자가의 무게를 바라보지 말고,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 감사하면서 더 큰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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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부부란 둘이 서로 반씩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 전체가 되는 것이다(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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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일종의 ‘제자모집광고’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오늘날 ‘성소자모집광고’를 이렇게 낸다면, 누가 따라 나설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나를 따르려면”으로 시작되는 것은 곧 앞에서 예고하신 수난의 길을 함께 가려는 자를 제자로 모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누구든지”라는 말 속에서 보듯이, ‘원하기면 하면 누구나’ 따라 나설 수가 있으니, 곧 그가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병자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곧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두 번째 조건인 ‘제 십자가를 지고’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 짊어지는 것만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는 사형도구이기에,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곧 죄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약함과 무력함을 품고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다.’ 라는 말의 원어의 뜻이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끓어 안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다’라는 의미이기에, 십자가는 마지못해 억지로 떠맡아지는 것이 아니라, 흔연히 자발적으로 품는 것이요, 사랑으로 끓어 안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곧 자신의 죄와 허약함을 소중히 맞아들여 품고 사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십자가를 지셨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십자가를 만나며, 곧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력을 만나면, 그것을 제거하고 해결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 십자가를 제거하지도 해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제거할 수 없으면 그것을 피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피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십자가를 피해갈 수 없기에 참고 견디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참고 견디지도 않으시고 기꺼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견디기 힘들어서 건너 띠거나 초월하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를 건너 띠지도 초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십자가와 타협하거나 무관심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과 타협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흔연하게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데에 있는 까닭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록 죄와 허약함과 고통 중에 있어도, 그것을 벗어나기보다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라고,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태 16,2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며,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오직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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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사랑하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허물에 대한 보속을 위해,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등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나의 생각이나 바람을 관철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기억될 것이며 믿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 안에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을 품고 살면 죽어도 살아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16,27).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1,22).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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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보 중에 어김없이 보는 것이 있습니다. 동쪽 하늘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볼 수 없지만, 태양이 있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은 저녁에는 서쪽 하늘로 사라집니다. 제가 있는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데, 태양은 이렇게 매일 움직이는 것을 보고 느낍니다. 이렇게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이론이 ‘천동설’입니다. 비단 태양뿐만 아니라, 하늘의 모든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입니다. 천문학이 발달하고, 망원경이 생기면서 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동설’의 등장입니다. 학자들은 지구가 시속 1760킬로의 속도로 자전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하루에 거의 300만 킬로를 움직인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느끼지 못하지만 학자들이 그렇다고 하니 ‘지동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천동설은 우리의 감성과 느낌의 영역이고, 지동설은 과학과 학문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지구가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신기 할 뿐입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동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우주 만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존재합니다. ‘빅뱅’으로 어느 순간에 우주가 생겼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저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옹기장이가 옹기를 만들 듯이,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하느님을 모른다면, 인간의 존재의미를 모른다면 천동설도, 지동설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예동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은 태양이 중심도 아니고, 지구가 중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중심으로 우리는 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이는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예동설을 믿는 우리는 역사를 예수 탄생 이전(Before Christ)과 예수 탄생 이후(Anno Domini)로 구분합니다. 위령 미사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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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를 사랑하는 것과 남을 사랑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요? 어떤 것이 사랑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까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저는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이기적으로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내가 중심인 사랑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되 남이 내 안에 중심일 때 그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내가 나의 중심이 아닌 주님이 나의 중심일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중심을 차지한 가운데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목숨을 살리는 길인 것입니다.
평생을 열심히 사랑한 여인이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쇠약해졌을 때 그녀는 스스로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 인생은 뭐였을까?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왔을까?
내 삶이 갑자기 왜 이렇게 허무할까?
아마도….
내 사랑의 중심이 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시키는 사랑은 실천했지만 정작 나를 내가 사랑하지 못했기에 보람과 만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에 두십시오. 그분 말씀을 내 사랑의 중심에 두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세요. 나도, 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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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다스의 손
마이다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은 황금으로 변합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은 이런 능력을 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분야에 특출한 능력을 갖춘 사람 혹은 어떤 사람이 손만 되면 늘 대박이 되는 그런 사람을 우리는 마이다스,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이런 능력이 부러울까요?
그런데 이런 마이다스 이야기의 끝을 안다면 그렇게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이다스는 손대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너무 간절히 원했기에 그에게 신이 허락한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분 좋았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 사과를 잡았는데 사과는 바로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먹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기 딸이 너무 예뻐서 쓰다듬었는데 그 딸 역시 황금 동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온통 황금이기에 오히려 황금은 더 이상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말입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을 축복이 아닌 저주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축복이 아닌 저주일지 모릅니다. 삶 자체가 무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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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자신을 버림, 제 십자가를 짐, 주님을 따름"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오늘도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 반복되면 습관이 된다. 스스로 변하기를 원한다면 바로 지금, 단호해져야 한다.”<다산>
단호히 다시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이후 선종하기까지의 삶은 전적으로 깨어 회개와 보속의 마음으로 정진했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마라.”<논어>
공자의 처신도 참으로 단호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예禮’ 대신 ‘길道’이나 ‘진리眞理’를 넣어도 그대로 통한다 싶습니다. 지명만 봐도 유교가 국교였고 산이 많은 나라였던지라, 예禮와 덕德과 산山이 들어가는 지명도 참 많습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 1면에 소개된 교황님이 콜룸부스 기사들에게 주신 절박한 말씀이 모든 세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되는 전쟁이요 참으로 ‘그리스도의 평화’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성 에디트 슈타인 수녀 만세!”
오늘은 ‘만세7창’에다 한분 추가했습니다. 바로 오늘 미사중에는 기념하지 않지만 오늘 8월9일은 성녀 에디트 슈타인 동정 순교자(1891-1942) 축일입니다. 성 베네딕도, 성녀 가타리나, 성녀 비르짓다, 성 치릴로, 성 메토디오와 함께 유럽의 수호성인입니다.
성녀는 교회 역사상 유대인으로서는 처음 성인품에 오른 분으로 가르멜 수도회의 수녀로 1942년 8월9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한, 수도명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입니다. 한나 아렌트, 시몬느 베유, 로자의 룩셈부르크와 함께 세계 4대 유대인 여성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1998년 시성 당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의 순교는 유럽사의 극적인 상징이자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잇는 화해의 가교다.”말씀하셨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가톨릭교회의 수호성인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로 미국과 똑같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새삼 우리 하느님은 역사의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 마지막 절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 나훔서의 나훔 예언자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 역시 역사의 하느님이라는 진리입니다. ‘위로자’ 나훔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구약 성경에는 없습니다. ‘위로자’ 나훔은 참으로 어두운 시대에 희망의 힘으로 지탱해 나아가게 하는 위로와 위안을 자기 백성에게 가져다준 예언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나훔 예언자는 유다에 기쁜 소식과 더불어 악의 제국 아실리아 니네베에는 격렬하게 파멸을 선포합니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유다 대신 대한민국을 넣어 읽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지금도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어 니네베에 선포되는 불행입니다.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나는 너에게 오물을 던지고, 너를 욕보이며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라. 너를 보는 자마다, 너에게서 달아나며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하고 말하리니,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해 줄 자들을 찾으랴?”
오물 풍선이 떨어지고 날로 추락하는 국격의 작금의 대한민국을 상징한다 싶어 섬찟한 느낌도 듭니다만, 이도 곧 지나갈 것이니 저력의 대한민국이요, 역사의 하느님은 순교자들의 대한민국을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강론 쓰는 도중 고요히 외쳐보는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로 그 구체적 삶의 방법을 오늘 복음이 보여줍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그대로 바꿔 읽으면 아주 분명해집니다. 목표와 방향이 뚜렷하니 망설이거나 주저함 없이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요, 목표이자 방향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저는 감히 비단 그리스도교 신자들뿐 아니라 온인류에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진리 말씀이라 믿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바로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음으로 제 목숨의 얻는 영생의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참삶의 길, 성인의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한결같이 항구히 열렬히 사랑할 때 자발적 기쁨으로 자신을 버리고, 제 운명의 십자가를, 제 책임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 제 본분을 다하는 구원의 삶입니다. 이렇게 시종여일 주님을 따르는 삶에 충실할 때 오시는 주님을 두려움없이 기쁨으로 환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그때’가 바로 주님을 앞당겨 맞이하는 오늘 ‘지금’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언제나 깨어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다 맞이하게 하시니 저절로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끝으로 늘 새로운 각성覺醒을 주는 제 좌우명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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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으로 살겠지만
사람으로 사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외로운 이를
품음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주린 이를
채움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약한 이를
돌봄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버려진 이를
보살핌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없는 이에게
나눔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이를
섬김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낮은 이를
돋움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쓰러진 이를
일으킴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낯선 이를
반김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를
살림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으로 살겠지만
사람으로 사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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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첫 문장은 애매합니다. 언뜻 보면, 살아 있음을 사랑하고 현세의 삶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으면 생명을 잃는 것이므로 죽음을 두려워하며, 육에 따라 잘 살기 위해 자기 삶을 관리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삶을 복됨의 경계 밖에 두는 것이므로,자기 생명을 구하려 한 것이 그것을 잃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나의 가르침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 인하여 현세의 삶을 경멸하며 진리를 위해 죽음과 맞서기까지 하는 사람은 그 신심으로 인하여 죽음 안에서 자기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는 이런 사람은 오히려 생명을 구하고 지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알아서 자기 생명을 구하기 원하는 사람, 자기 생명에 이별을 고하고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생명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나의 가르침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결국에는 이런 종류의 잃음, 곧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엑카르트가 하느님 나라의 문맥에서 교회의 문제를 꺼내어 말하고 있는 것에는 더 많은 함의가 들어 있다. 그는 하느님 나라를 기성 교회와 혼동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교회 승리주의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과들을 야기한다. 우리는 아래에서 그 결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엑카르트는 야곱이 저 유명한 사닥다리 꿈을 꾼 뒤에 외쳤던 감탄문을 두 가지로 소개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때와 곳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한다.
야곱의 사닥다리는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상징이었다. 때문에 엑카르트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는 물음은 대단히 중요한 물음이다. 지신의 전후에 살았던 그리스도교의 수많은 남성 신비가들과 달리,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향해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그 꿈의 상징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그 꿈을 유대교 주석학자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해석한다.(217)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교부들의 격언
영적 삶의 원칙들
너 자신을 심판하라
그분이 다시 말씀하셨다.
“칭찬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생각하여 자신이 그 칭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인정해라.”
스케티스(Sketis)에서 살고 있는 한 수도자가 죄에 빠져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벌을 주려고 회의를 소집하여 모세 아빠스께 연락을 드렸다. 그러나 그분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동체의 대표 사제가 다시 사람을 보내어
“어서 와 주십시오.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전했다. 그러자 마침내 모세 아빠스는 일어나 구멍난 바구니에 모래를 가득 채워 어깨에 메고 걸어오기 시작했다. 형제들이 그분을 맞이하러 가서 이 광경을 보고
“아버지 이게 무엇입니까? 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그 백발이 성성한 아빠스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죄들이네. 내 뒤로 죄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지만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네. 그런데도 나는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러 오늘 이렇게 왔다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더 이상 그 형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용서해주었다.(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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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16,24)
제가 좋아하는 중국 「소부」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잘못을 한 스님을 포졸이 관가로 호송하는 도중, 날이 저물어 여인숙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스님은 작은 꾀를 부려 포졸이 거나하게 술을 마시도록 했고, 술에 취한 포졸이 잠들고 있는 사이에 포졸복을 벗겨 자신이 입고 있던 승복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난 뒤 포졸의 머리를 스님의 머리처럼 빡빡 밀어버리고 줄행랑을 쳤지요. 한참을 자고 난 포졸이 일어나서 보니 호송해야 할 스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으며, 뒤늦게 자신의 몰 꼴을 보고 나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중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로 갔나?’ 』 흔한 표현으로 현대를 한마디로 일컬어서 자아 상실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는 참된 나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하고 번민하는 현대인을 두고 하는 표현이겠죠. 성 아오스딩은 오랫동안 방황 끝에 주님 안에서 참된 나, 곧 자신을 발견하고 난 뒤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당신을 알게 하소서. 그럼으로 제가 누구인가를 알겠나이다.』 참된 자신을 발견하고 만나는 유일한 길을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선 제자들은 물론 오늘을 사는 저희에게도 동일한 권고를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16,24) 그런데 예수님께서 참 제자가 되는 필요한 요건인 자신을 버리고 따르다, 는 뜻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자신을 버리고 따르다, 는 의미는 에고의 욕망을 버린다, 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우리 삶은 가정과 사회에서 부지불식중에 주입된 무의식적인 에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남과 비교 경쟁하면서 때론 남에게 의도하지 않게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아왔습니다. 이 멈출 줄 모르고 돌고 돌아가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 탑승하고서 말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 에고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렸지만, 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에고는 본래의 참된 나의 모습이 아니고 욕망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는 거짓된 나입니다. 이런 에고의 특징은 동일화이며, 육체의 동일화와 소유의 동일화는 여러 동일화 중 가장 뚜렷한 욕구입니다. 소유 동일화의 에고는 소유와 존재를 동일시하기에 끊임없이 더 많이 바라고 아직 충분하지 않다, 는 심리적 요구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라고 말씀하신 까닭이 바로 이렇게 더 많이 가지려 하고 집착하는 에고를 버리고 에고가 죽음으로써,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16,2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엇과도 동일화되지 않을 때 자유롭게 온전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에 가득 차 있고 이미 굳어져 있는 욕망을 비우고 내려놓고 주님을 온전히 따른다는 것은 결코 말이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래도록 거짓된 자아를 참 나로 착각하고 동일시하고 살아 온 우리가 이를 버리고 끊어버리고 주님을 따름은 참으로 험난한 끝이 없는 여정과 같습니다. 이 여정은 거짓된 자아로부터 신비적 죽음을 통해서 참 나를 되찾아 가는 여정으로 개인적인 영적 탈출기와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은 제 목숨을 잃은 것인데, 거짓된 자아로 산다는 것은 살아 있으면서도 이미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은 것과 같은 삶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없다.”(16,26)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 나를 찾는 것은 곧 제 목숨을 얻는 것이다, 는 뜻입니다. 이렇게 참 나를 되찾고 살아갈 때 사람은 비로소 존재의 의미와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되고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자신을 버린다, 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은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여러 상징과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저는 십자가는 지금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어쩌면 지금껏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아온 자기 자신이 현재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며,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자신의 존재와 성격, 능력과 외모 그리고 자신과 얽혀 있는 인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그런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자의 참된 요건은 바로 이런 자신을 거부하고 부정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부단히 따르려는 의지와 실행이라고 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매일 주님을 따르며 산다, 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만,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지만 죽으려 하면 살 것이라는 삶의 교훈을 터득하면서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금 가장 힘든 길이 마침내 가장 편안한 길이며, 가장 먼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 될 것입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만이 바로 참 나를 찾게 되고, 그때 거짓 환상이 아닌 참 진리를 깨닫게 되고, 깨달은 그만큼 자유를 맘껏 누리는 것이 바로 여기 살아 있음 그 자체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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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십자가 지는 삶에 평화의 기쁨이
박윤식 [big-llight] 2024-08-08 ㅣNo.174881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 캄캄한 하늘을 보자. 밤이 없이 어떻게 아침이 올 수 있겠는가? 죽음 없는 부활이 어디? 부활하신 주님을 고백하는 우리 믿음도 여러 모습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가능하다. 삶 안에서 가끔 맞닥뜨리게 되는 죽음의 그 순간에, 기꺼이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을 수 있는 은총과 용기를 주시어 ‘부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청하자.
이렇게 분명히 예수님을 따르면 목숨을 얻는단다. 당연히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나. 그분은 ‘온 세상을 얻고도 죽은 목숨이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며 희망의 말씀까지 분명하고도 엄히 해 주셨다. “과연 사람이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가 있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의 행실대로 갚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있는 이들 가운데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볼 이가 더러 있다.”
사실 하느님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희생마저 그저 감당해야만 할 우리이다. 이것이 자신이 져야만 하는 그 십자가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누구이실까? 시몬 베드로는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무심중 고백했다. 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라며, 영과의 그 부활을 수차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 때문에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나. 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구하시고자 손수 십자가 지시고 골고타에 오르시어 돌아가셨다. 그리고 사흗날에 되살아나신 게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따를지를 깊게 따져봐야만 할게다.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다른 이에게 베풀고 이웃 앞세우고는 목숨마저 버리라셨다.
그러시면서 온 세상을 얻어도 제 목숨마저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아예 ‘자신을 버리라.’라고 하신다. 그렇지만 그분을 막상 따르기로 다짐한 우리지만, 어쩜 살다보니까 손해가 너무 막심해 보인단다. 여하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면서 당신 자신도 송두리째 비우셨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바라신다. 자신을 버리라는 것은 바로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이는, ‘그날이 오면’ 당신 부활에 참여할 것이기에.
이제 우리는 우리처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은 표징과 기적뿐만 보이신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 엄청난 고통을 겪고 죽기까지 하신 그분께서는 당신의 그 십자가를 직접 보여주셨다. 그분께서는 오직 사랑에 일치하는 십자가 지짐을 알리셨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과거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위해 육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쳤다. 그 결과 그들은 늘 우리 마음에 계신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기에. 반면 이 세상에서의 생명만을 유지하려는 이들은 비록 육신의 생명은 유지했지만, 우리에게서는 죽은 이들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떤 삶을 선택할지는 우리 각자의 몫일게다. 우리가 고난과 가시밭길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택한다면, 내면에는 평화의 기쁨이 가득 차리라. 그리고 그 삶의 참 가치를 깨닫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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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나훔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라고들 합니다.
기원전 612년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멸망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니네베가 철저히 파괴되기를 기원하고 그 함락을 지나치게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의 첫 부분에서는 니네베의 함락을 “기쁜 소식”이라고, 그 소식을 알려 주는 이는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나훔 2,1)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훔서의 첫머리에서는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1,2)이라고 선포합니다.
매우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서 52장 7절에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이 “평화를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이사야서의 구절은 훨씬 듣기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동전의 다른 면입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이 선포되려면 바빌론이 멸망하여야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 또한 압제자가 몰락하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훔서의 상황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억압에서 풀려나려면 아시리아가 무너져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피의 성읍”(3,1)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기쁜 소식”은 듣기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훔서의 “기쁜 소식”은 거북하다고 느낀다면,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아니, 비논리적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훔서가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아시리아라 하더라도 그 힘을 심판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힘이 곧 정의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시리아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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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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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사람의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그토록 중요하기에
사람들은 그 목숨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그것을 지키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넘어
목숨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원하는 결과와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목숨을 지키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건강을 챙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노력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노력의 결과는 건강한 몸과 마음도 있지만
정반대로
건강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오히려 건강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건강에 신경을 쓰면 쓸수록
건강을 잃는다는 것이 때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말씀이
그것에 대한 설명일지 모르겠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
목숨이 중요하기에 목숨을 간직하려 할 때
오히려 그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이
목숨을 함부로 대하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말씀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목숨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그것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즉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우선 나의 노력만으로
목숨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생명은 내 것이면서
동시에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목숨을 간직하려는 노력은 하지만
그 결과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의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러한 노력을 계속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헛수고처럼 보이고
의미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노력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노력은 노력대로 하지만
결과는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리해서 노력할 필요도 없고
목숨을 잃을까, 건강을 잃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지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매일을 살아간다면
나의 생명을 하느님과 함께 이어간다고
생각한다면
더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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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나뿐인 우리의 목숨, 대체 무엇을 위해 바칠 것입니까?
우리가 일상 안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왜 그리 사소한 것에 목숨을 겁니까?” 저도 돌아보니 참 많이 부끄럽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리도 혈안이 되고 목숨을 걸 듯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단 하나뿐인 목숨, 시시한 대상, 스쳐 지나가는 대상,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대상에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보다 고결하고, 보다 가치있고, 보다 의미 있는 대상에 목숨을 걸고 올인을 해야 하겠습니다.
더 늦기 전에 그 최상의 가치가 무엇인지 찾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 안에는 목숨이란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목숨,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도 발버둥을 칩니다.
다들 목숨은 연명하기 위해 갖은 수모와 고초를 겪으면서도 용하게 견디어 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이 우리가 그토록 중요시 여기는 목숨이라는 것이 또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시편 작가의 표현처럼 우리가 아무리 난다 긴다 하더라도 숨 한번 끊어지면 순식간에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소유한 인간이지만, 3분, 5분 숨 못 쉬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목숨과 관련해서 주어지는 과분한 특전이요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숨은 세상 사람들의 목숨과는 철저하게도 차별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물학적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또 다른 목숨이 시작됩니다.
영원히 지속될 영생을 시작하는 영혼의 목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이요 축복인지요.
오늘 우리는 과연 하나뿐인 우리의 목숨, 대체 무엇을 위해 바칠 것인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역설적인 초대 앞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묵상해봐야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 또 다른 세상에서 영원한 목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주님 사랑 안에 길이 생명의 호흡을 누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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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강요가 아니고, 억지로 시키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선택이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목숨을 얻는 것과 목숨을 잃는 것은 구원과 멸망과 같다. 예수님은 “사람이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26절)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한 삶을 살면 파멸을 맞게 되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이 목숨을 잃는 것이며 멸망이다. “나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는 이런 사람은 오히려 생명을 구하고 지키게 될 것이다.”(오리게네스, 마태오 복음 주해 12,26).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26절) 사람에게는 죽음을 면하게 해줄, 생명 대신 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내줄 것이 없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1베드 1,19) “값을 치르고”(1코린 6,20)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따르는가?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27절)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오신다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과 아드님의 영광이 같다는 것이다. 이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하나의 영광이다. 아드님이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있듯이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이다.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그분은 심판관으로서 심판과 엄격한 판결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28절) 우리는 이제 선택만이 남아있다. 십자가의 선택이다.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십자가를 선택하는 일의 연속이다. 계속되는 자신과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나 자신을 끊고, 버리고, 죽이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죽음을 맛보셨고, 신앙인들에게도 이미 죽음의 맛을 보여주셨다. 말씀에 행동이 따른 것이다. 그분을 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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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녀를 많이 낳음이 가장 행복한 투자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진정 인생이 ‘투자’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투자는 이익을 바라고 하는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그것을 갚아주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니 투자라는 개념이 맞기는 한 것 같습니다. 또 예수님 자신도 ‘달란트의 비유’(마태복음 25:14-30)에서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을 투자하는 삶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투자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이나 명예, 쾌락 등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것은 남는 게 없습니다.
투자한 것이 회수되는 때는 죽음 이후일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 돈을 덜 번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가평 크리스월드레지던스 박지형 대표가 위암 복막 전이 4기로 6개월~1년 선고받고 주위에 죽어가는 암환자들을 보며 느낀 것, 곧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도 ‘잊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투자해야 합니다.
잊히지 않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예는 많이 있습니다.
목숨을 바친다는 말은 투자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교회를 낳으시고 교회 안에서 당신이 기억되게 하는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교회의 탄생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매 미사 때 기억합니다.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죽음의 고통을 이깁니다. 또한 그렇게 교회를 낳았을 때 영원한 신랑과 같으신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어떤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나치 수용소에 끌려간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아들을 살리고 좋은 아빠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에서 아버지는 목숨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인생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특별히 최저출산국이고 자녀를 키움이 행복보다는 고통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더 큰 고통은 나를 기억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임을 깨닫게 하도록 우리는 노력할 의무가 있을 것입니다.
성녀 지아나 베레타 몰라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이탈리아의 소아과 의사입니다.
임신 중에 합병증이 발생하자 그녀는 위험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명보다 자녀의 생명을 우선시하기로 했습니다.
지안나의 사심 없는 결정으로 인해 출산 직후 사망하게 되었지만, 그녀가 남긴 사랑과 희생의
유산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2004년 가톨릭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됐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엄마가 생명을 바쳤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진정한 투자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성인, 성녀입니다.
이레나 센들러(Irena Sendler)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약 2,500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바르샤바 게토에서 밀수입하여 구한 폴란드의 사회복지사였습니다.
그녀는 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중 많은 아이가 비유대인 가정에 맡겨졌습니다.
그녀는 심한 고문과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노벨 평화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노벨상은 타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98세까지 사셨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젠 제가 구한 아이들뿐 아니라, 그들의 손자와 손녀들까지 저를 찾아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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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허무한 것들로는 영원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4ㄴ-28).”
1) 28절의 ‘여기에 서 있는 이들’은 ‘신자들과 사도들’입니다.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살아 있는 동안에 나의 재림을 보게 될 것이다.”인데, 예수님께서 정말로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이천 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재림과 종말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서 있는 이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앙인들’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5-17).”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든지 때가 되면
재림과 종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재림과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2) 28절의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앞의 10장에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3ㄴㄷ).”
이 말씀에서 ‘너희’는 ‘사도들’이고,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는 “이스라엘 민족 모두에게 다 복음을 선포하기도 전에”이고,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는 “나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다.”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도 겉으로 보이는 표현 그대로 생각해도 되는 말씀은 아니고, 재림에 관한 말씀들을 바탕으로 해서 해석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교회’로,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는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되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은, 재림과 종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고 말씀이기도 하고, 박해를 받더라도 곧 재림이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승리가 이루어지니까 참고 견디라는 격려 말씀이기도 합니다.
3) 여러 가지 이유로 죽을 고비를 겪은 사람들이 많고, 죽음의 고통을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활신앙이 있어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죽음의 과정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또 그게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경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고통과 무서움을 생각한다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재림과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살아 있는 채로 재림과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해서 맞이하는 사람들보다는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재림과 종말의 날은 곧 ‘최후의 심판 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4) 예수님께서는 ‘심판’에 대해서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믿기만 하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해야만 믿음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마태 7,21), 심판은 ‘행실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 ‘행실’은 ‘지금의’ 행실입니다.
“전에는 나도 신앙생활을 잘했었다.” 라는 말이나,
“나중에 잘하겠다.” 라는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지금 잘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심판결과’는 사실상 각자 자기 자신이
‘지금’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기 때문에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항의할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5) 26절의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라는 말씀은, “온 세상을 얻어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은, 그것들을 아무리 많이 얻어도, 그것들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세속의 재산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것’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 실천 등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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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면 자기 삶에 ‘꽃길’이 펼쳐질거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내 뒤를 든든히 지켜주시기에 좋은 일은 더 많이 생기고, 안좋은 일은 피해가리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뒤를 따라 걷는 신앙생활에는 고통이나 시련 없이 행복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시련 중에도 함께 걸으시는 주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 곁에서 나와 함께 묵묵히 고통을 견디어 내시는 주님의 존재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을 따라, 나도 내 십자가를 지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입니다. 힘들고 지쳐 넘어지고 무릎이 깨져도 뺨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고 다시금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 길의 끝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주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첫째,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건 고통 앞에 절망하여 자포자기하는게 아닙니다. 자기 생각, 가치관, 고집, 바람 등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기에 하느님의 말씀도 내 입맛대로, 내 생각대로 끼워맞추고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향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느님께 나를 맞추고, 그분 뜻에 비추어 내 모습과 삶을 돌아보며, 그분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축복을 가득히 받기 위해 내가 가진 작은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를 ‘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남의 십자가도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도 아닙니다. 철저히 나에게 속한 ‘나의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괴롭다고 피할 수도 없고 힘들다고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대신 좀 져달라고 남에게 맡길 수도 없습니다. 타고난 부족함과 약함, 지닌 능력과 힘이 다르기에 우리 각자가 지고가는 십자가는 크기도 모양도 무게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니 남의 십자가를 내가 질 수도 없고 나의 십자가를 남이 질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왜 져야 하느냐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아봐야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과 복을 ‘내 것’처럼 당연하게 누리듯, 그분께서 주시는 십자가도 내 것처럼 당연히 짊어져야 그나마 힘이 덜 들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끌어안듯, ‘가장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다’라는 뜻입니다. 즉 십자가는 마지못해, 억지로 떠맡는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품어 안아야 하는 겁니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그분 사랑을 느끼고 깨달을 때 그럴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평생동안 자신을 괴롭힌 육체적 고통을 하느님께서 자신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해 주신 ‘가시’로 여기며 기꺼이 끌어안은 것처럼, 나도 내 십자가에 담긴 하느님 뜻을 생각하며 기꺼이 끌어안을 때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과 의도가 내 삶에서 실현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비로소 십자가는 나를 괴롭히고 벌주는 회초리가 아니라, 나를 구원으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게 하는 다리가 됩니다. 주님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십자가로 나를 구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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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정복했던 아시라의 니네베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나훔 2,2-3)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북부 왕국을 멸망시키고 혼합종교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위협했던 아시리아 제국을 후대의 바빌론 제국과 함께 반대했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흔들린 우상숭배가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천하를 호령하던 아시리아도 멸망의 때가 있고 그 역사를 주도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시리아는 북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도 수시로 남부 유다 왕국까지고 침략하며 위협했던
것입니다. 예언자는 포도나무 가지를 비유로 하며 유다 왕국의 건재함을 또한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제자들에게 해주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25)
여기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무슨 의미일까요?
자신을 버린다는 것의 반대 의미로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소외된 이들에게는 관심도 없고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챙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기와 가족 챙기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하지요.
그러다보면 가족 외에 다른 이들에게 무관심하게 대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만 관여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말을 자동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의리도 또 옳고 그름도 따지지 않는,
그야말로 자기 중심의 판단을 갖고 사는 것이지요.
그러한 바탕에서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지요. 나라와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힘이 없는 나라는 전쟁으로 가난으로 악순환을 거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세계의 정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무고하고 힘이 없는 나라의 어린이들이까지도 희생되는데도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따지고 침묵을 지키는 요즈음 세태입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경제 발전에 많은 기여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물질적 풍요와 소비가 과연 인간을 참다운 행복으로 이끌어 주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대답에 더 비중을 싣고 있습니다.
인간 이기가 만들어 낸 쓰레기 더미만 보아도 그렇고 또 핵 폐기는 이 지구상에서
풀기 힘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을 진정으로 구원으로 이끌어 주실 분은 주님이시고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만이
그 모두를 해결하는 열쇠라 하겠습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소중한 생명까지도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바친다는 뜻이지요.
신앙에는 자기희생이 바탕을 이루기에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참다운 생명은 자기를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의 소중한 것 까지도 자기 십자가와 함께
주님께 바치는 자기희생과 순교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기와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뜻 깊은 하루를 맞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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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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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따름과 그 보상에 대해 들려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 "자신"과 "십자가"는 양립 불가능한 가치입니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제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더 편하고 더 올라가고 더 가지는 쪽에 매력을 느끼지요. 당장의 찬사와 욕구 충족과 쾌락을 좇으며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윗자리, 윗자리처럼 보이는 허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십자가는 그 반대입니다. 더 내려가고 더 비우고 더 낮아지길 바랍니다. 저 아래 맨끝에 계신 주님 곁으로 가려고, 그분을 닮으려고 애쓰지요. 그러니 모욕과 업신여김과 무시를 감수하며 자신보다 타인을, 인류와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염려합니다.
자신을 굳게 고수한 채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인생살이에서 마냥 십자가를 피할 수도 없으니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 십자가가 자신을 지는 형국으로 질질 끌려가기도 하고, 예수님께 자기 십자가까지 덤으로 얹어버리기도 하고, 아니면 주변의 애먼 이들에게 제 십자가를 넘겨 고통을 가중시키기도 하지요.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결국 모든 사람은 십자가를 진 만큼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건 타인의 십자가건 제 안위와 이익과 생명보다 더 귀하게 받아 안은 그것 덕분에 하느님과 영원히 누릴 생명, 즉 진짜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과, "피의 성읍" 니네베에게 내린 가혹한 선고가 울려퍼집니다.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나홈 3,7)
니네베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수도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이지요. 주님께서는 당신께 불충한 이스라엘을 아시리아를 통해 벌주시지만, 제 분에 겨워 살육과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은 니네베를 결국 벌하십니다. 그들이 자신을 쓰신 주님의 뜻을 넘어 제 탐욕을 채우는데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화답송)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생사여탈을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누구도 이 권한을 주인에게서 빼앗을 수 없지요. 그저 인간은 흥망성쇠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파도 위에서, 그분의 공정과 정의, 진실과 자비에 의탁해, 주어진 십자가를 성심껏 지고 균형 잡으며 나아갈 뿐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자아에서 자신을 떼어내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너끈히 질 수 있다면 십자가가 아니니, 마냥 쉬운 길이 아님은 분명하지요. 하지만 가볼만한 길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와 함께 걸으실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길의 끝에는 그분과 누리는 영원한 생명, 진짜 목숨이 보장되어 있으니 힘내어 나아갈 가치가 충분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각자 제 십자가로 힘겨워하면서도 묵묵히 인내롭게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여러분의 것"(복음 환호송 참조)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으니 기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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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삶
<2024.8.9> 아침을 여는 묵상 (렘 48:26~35절)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삶❞
❚ 걸음걸음마다 우리의 지혜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 조롱거리가 되게 하는 헛된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26~29절).
모압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그 원인을 우상 숭배로 지적했으나(13절), 여기서는 ‘여호와에 대항 교만함이라’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술 취한 자가 자신이 토한 것에서 뒹굴며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처럼 모압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뒹굴며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26절). 모압은 이스라엘 민족과 혈연적으로 매우 가까운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민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망할 때 마치 도적이 현장에서 잡혀 수치를 당하는 것과 같이 여기고 조롱하는 패륜을 저질렀던 것입니다(27절). 그런 모압이 그들의 성읍과 거주지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28절). 모압의 교만한 태도는 자고와 오만과 자랑 그리고 마음의 거만으로 나타났습니다(29절).
모압은 평안과 번성을 누리자 점점 교만해졌습니다.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영광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머리를 흔들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조롱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죄인을 대할 때나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교만은 패망과 수치를 피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교만하게 굴거나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보면 역겹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부터로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능력에 대하여 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들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마치 스스로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이며, 결국 하나님의 징계에 의해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당하며 조롱거리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헛된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탄식거리가 되게 하는 헛된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30~33절).
하나님은 모압의 자랑과 그들의 우쭐댐이 헛것임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30절). 즉, 오압은 자신이 자랑하는 것을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압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십니다. 모압을 위해 울며 애곡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압의 핵심 요새인 길헤레스도 하나님의 애곡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31절). ‘십마’는 포도밭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포도농사가 얼마나 잘 되었던지, 가지가 사해를 넘어 야셀까지 뻗어 나간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여름 과일과 포도송이로 인한 그들의 환희와 기쁨은 탈취하는 자의 등장으로 탄식과 눈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32~33절). 이는 곧 모압 전역에 걸친 몰락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랑은 허탄한 것입니다. 잘난 척하는 것으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모압은 튼튼한 성곽과 요새를 자랑했습니다. 그 덕분에 오랜 세월 동안 건재한 역사를 이어 올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자랑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자랑을 꺾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자랑은 버려야 합니다. 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절대 도움을 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높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될 때에 은혜 위에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헛된 자랑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징계거리가 되게 하는 헛된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34~35절).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헤스본에서 엘르알레를 지나 야하스까지 들립니다. 그리고 소알에서 호로나임과 에글랏 셀리시야까지 들립니다. 왜냐하면 니므림 물까지 말라 버렸기 때문입니다(34절). 모압의 애곡 소리가 북에서 남으로 이동해 가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이 모압의 전 지역에 미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때 모압 백성은 산당에서 자신들의 신을 찾으며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상에게 분향하며 도움을 구하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35절).
이 땅의 것들은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만족과 기쁨만을 위해 사는 자는 반드시 후회와 비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때, 희락과 평강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징계의 도구가 될 헛된 탐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썩어 없어질 것을 따라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기 위해 투자한 모든 것은 하늘에 영원한 보화로 쌓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헛된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결과적으로 우리 인생을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영적 교만을 버리고, 늘 겸손한 마음으로 섬김의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헛된 자랑과 탐욕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여 매 순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48:26~3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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