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14
4월1일[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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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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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ym8KI9d_iU
[서울대교구 윤호진 토마스데아퀴노(묵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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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발현하셔서 처음으로 건네신 말씀들을 묵상해봅니다.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로 돌아가신 예수님이셨는데, 그리도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철저한 외면과 배신을 당하면서 죽어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던지신 말씀은 이랬습니다.
“평안하냐?”
구원자로 오신 자신을 그토록 혹독하게 다루었으며, 결국 그토록 험악한 꼴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후 인간세상을 향해 던진 첫 마디가 “평안하냐?”였습니다.
그분의 어조에서는 조금의 분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간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도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들 걱정뿐입니다.
“평안하냐?”는 한 마디 말 안에는 이런 예수님의 심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간 나 때문에 얼마나 걱정들이 많았느냐? 실망도 많았겠지? 내면의 두려움도 컸겠지? 이제 안심하여라.
내가 이렇게 다시 살아나지 않았느냐?”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다정한 어조로 ‘내 형제들’이라 칭하면서 미리 용서를 베푸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제자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당신을 찾아오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친히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분께서 위기에 처했을 때 외면하고 떠나간 부당한 제자들이었지만, 조금도 꾸짖지 않으십니다. 제자로서 그릇된 행동 앞에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잘못이 하늘을 찌를 듯 크다 하더라도 그저 참아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한 여인들의 행동을 한번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꿈에 그리던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놓치고 싶지 않은 내면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또 사라지실지 모르는 예수님, 그분이 떠나고 난 뒤 남게 될 허탈감, 실망감이 두려워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을 꼭 붙든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을 잡았겠지만 어느 정도 인간적, 이기적인 욕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나를 살리신 예수님, 그래서 목숨 바쳐 사랑했던 예수님을 또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보다 큰 세계로 나아가셔야 할 부활의 예수님이십니다. 좁은 인간관계의 사슬을 끊고 더 많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비상하셔야 할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종전의 현존방식을 탈피하십니다. 그분은 이제 이스라엘을 벗어나 전 인류를 상대하셔야 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나만의 예수님, 마리아 막달레나만의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만민의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낡은 방식으로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예수님 추종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전처럼 돌아가시거나 사라지시거나 우리를 버리고 떠나가실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영광스럽고 영적인 새로운 현존양식에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언제든지 다가오시는 사랑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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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L1q3gssk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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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만 있으면 부활은 저절로 믿어진다. 그러나 관심이 없는 이유가…>
신자들과 면담할 때 제가 가장 중점으로 삼는 것은 미사만 나오지 말고 레지오와 같은 단체에 들어가
친교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것입니다. 미사만 나와서는 신앙의 발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신앙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 결과가 공동체이며 그 소속감에서 신앙의 참 행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이것을 매우 꺼립니다. 성당엔 나가야 하는지 알지만, 내가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자꾸 물어보는 게 싫은 것입니다.
만약 자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엄마가 자신의 가정사를 모르는 본당에 이사 왔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그 본당에서 적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사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죽은 게 본인 탓이라고 부모는 느낄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상처를 건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본당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하느님 사랑을 그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삶이 참 부활의 삶이라고
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상처는 그 부활의 삶으로 가는 길을 막습니다. 만약 그 부활의 삶이 레지오 단체라고 한다면 상처 있는 사람은 그 레지오 단체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들의 발목을 잡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여 많은 유다인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는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있는 상처가 나의 탓이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탓이건, 아니건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습니다. 그런데도 그 상처 때문에 공동체와 하나 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나의 영광’을 추구하고 ‘세상이 주는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집착하면 결국 하늘로 오를 수 없습니다.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신문기자로 그리스도인들의 헛된 신앙을 깨버리려고 성경과 역사를 연구하다가 결국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실화인데 그가 쓴 책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로 볼 수 있는 것은 믿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알려고만 해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는 신문사와 같은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그 신문사는 종교색채를 띠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전 경비병들에게처럼 부활의 증거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고 믿으려고만 하면 누구나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은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보려고 달려가는 노력만 있으면 믿어질 수 있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통해 예수님을 알려고 했던 것 덕분으로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이나 세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애착이 끊어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 열 권의 책을 5년에 걸쳐 끝까지 읽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참 부활의 갈릴래아인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비행기를 탄 순간은 신학생 때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날 때였습니다. 몇 년 동안 돌아올 수도 없고, 말 한마디도 못 하는 나라로 갈 때 저는 정말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비행장에는 저를 배웅하러 많은 사람이 나왔었는데, 저는 그들과 지내는 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그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이후로 참 많이도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쁘게 비행기를 탔던 순간이 언제였을까요? 바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이탈리아 쪽으로는 오줌도 누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이 떨어졌습니다.
하늘로 오르는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면, 그 부활은 내가 지금 발붙이고 있는 곳에 정이 떨어져야 합니다. 그냥 사는 게 힘들어서 무조건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붙이고 있는 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영광이 기대되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말려도 스스로 부활을 믿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영광만을 바라면 결코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오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실 자기 영광만 찾는다면 그는 유익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신학생들은 자기 나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방학 때 여러 신학생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일자리를 얻어 자기 집에 돈을 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신학교로 돌아갈 수 없고 사제가 될 수도 없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내가 지상의 부활을 원한다면 천상의 부활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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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노래방이 생기면서 전 국민이 가수가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에 전화번호를 저장하면서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듯이,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면서 몇 번을 간 곳도 내비게이션 없이는 찾아가지 못하듯이, 노래방에 가사가 나오면서 예전에는 외우던 노래들을 외우지 못합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지만, 예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기억하던 기능들은 점차 약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있습니다. 새것을 알기 전에 예전의 것들에서 배우자는 것입니다. ‘Old is but Good'이라는 말도 이와 비슷합니다. 요즘의 음악도 좋지만 예전에 들었던 노래가 가슴에 더 깊이 와 닿는 때가 있습니다. 그 노래에 나의 기억과 나의 삶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18번으로 부르는 노래 중에 최성수의 ’해후‘가 있습니다. 애잔한 멜로디와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을 아파하면서도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소망하는 가사가 좋았습니다. 또 하나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성가로 만든 ‘아무것도 너를’이 있습니다. 성가가 곧 기도가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성가입니다. 가사 중에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 만으로 만족하도다.’가 있습니다. 이 두 노래는 제가 그 가사를 온전히 기억하는 노래입니다.
부활 팔일 축제를 지내면서 문득 성가를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성가 329번 ‘미사시작’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쁨이 넘쳐 뛸 때 뉘 나와 함께 나누리./ 슬픔이 가득할 때 뉘게 하소연 하리/ 영광의 주 우리게 기쁨을 주시오니/ 서러운 눈물 씻고 주님께 나가리/ 당신이 아니시면 그 누가 빛을 주리/ 인생은 어둠속에 길 잃고 방황 하리/ 희망의 주 내 삶의 길 인도 하시오니/ 나 언제나 주 안에 평화를 누리리./ 부당하온 이 영혼 주 앞에 어찌 가리/ 주께서 살피시면 결백함 있을런가./ 사랑의 주 우리의 뉘우침 굽어 보사/ 불쌍히 여기시어 받아 주옵소서.” 멜로디가 장엄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숙연하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몸과 피를 내어 주시면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느끼게 해 줍니다. 먼 길 떠났다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그네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젊은 날 객기를 부리면서 방황하던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미사시작은 바로 그런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잔치를 벌여 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쉽고, 야속하고, 화가 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믿었던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안하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걱정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변화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슬픔을 다 떨쳐버리고,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한 주간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편안한 하루 되십시오. 저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오늘부터 메주고리, 파티마, 루르드 성지순례를 갑니다. 주님의 사랑에 깊이 머물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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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8,8-15: 병사들에게 많은 돈을 집어주며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8절) 그들은 상상도 못 한 놀라운 일들을 보았다. 그 여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였다. 바로 얼마 전에 그분이 안장되시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이 비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빈 무덤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천사들이 그들을 무덤으로 데려간 것이다. 여자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며 “평안하냐?”(9절) 하신다. 그들은 몹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부활에 대한 증거를 보았고 확신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10절) 주님께서는 이 여인들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
경비병들이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하러 왔을 때, 사제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며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13절)고 거짓말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무덤은 권력자의 명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무덤 주위에는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리고 무덤을 막고 있는 거대한 돌을 옮길 수 있었을까? 그들이 돌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 몰래 그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유다에게 돈을 주어 배신하게 했던 사제들은 경비병들에게도 돈을 주고 입을 막아 신앙을 무덤 속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날 밤 무덤에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골방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었다.
수석 사제들은 무덤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빌라도에게 말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치고서는 부활하셨다고 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그렇게 되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마태 27,64)이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진리를 은폐하려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다. 마치 태양을 손으로 가려보려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비병들만 매수해서 가릴 수 있었다면, 그 진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순간적으로 현실적으로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잘못된 것을 은폐하기보다 진리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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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무덤을 떠나는 여자들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이때 강조된 주제는 ‘두려움’과 ‘기쁨’인데, 이 주제는 이후에도 되풀이됩니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급히 가던 여자들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평안하냐?”라는 인사를 받게 됩니다. 이 인사를 그리스 말에서 직역하면 “기뻐하여라!”이며 명사 기쁨(‘카라’)의 동사형(‘카이로’)이 쓰였습니다. 이 동사는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드린 인사말에도 쓰인 바 있습니다(“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이어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이 단어도 오늘 복음의 시작(8절)에서 쓰인 명사 두려움(‘포보스’)의 동사 형태가 쓰인 경우입니다. 곧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무덤을 떠난 여자들은, 이제 예수님께 “기뻐하여라.”(9절, 우리말 번역으로는 “평안하냐?”)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는 부활의 시간을 걷게 된 우리에게 두려움과 기쁨은 수없이 다가오는 감정이고, 그렇게 꾸준히 길을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예수님을 만나게 됨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복음의 후반부에는 예수님을 만나 “기뻐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인사 말씀을 들은 여자들과 달리 두려워하고 근심에 빠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등장합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인간적 술수, 곧 담합하고 매수하는 것으로 부활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뻐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증인들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독서에서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인 대중 앞에서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그분을, 여러분은 ……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두려움 없는 기쁨은 감출 수도 묶어 둘 수도 없는 힘이며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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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고백, 증언, 선포>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마태 28,8-15)
1) 여자들의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일에 대한 경외심과 놀라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무서워하지 마라.”가 아니라 “놀라지 마라.”입니다. 여자들의 ‘기쁨’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 기쁨입니다.
만일에 여자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즉 천사가 전해 준 부활 소식을 안 믿었다면,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평소의 신앙생활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올바른 믿음에서 참된 기쁨이 생깁니다. 혹시라도, 누구든지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또는 기쁨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표시가 됩니다.>
여자들이 ‘예수님 부활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한 일은, 신앙고백이며 증언이고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언이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널리 알리는 선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선교활동도, 또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활동도,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선교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일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고, 그리고 복음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포입니다.>
2) 경비병들이 본 일은,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일과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옆으로 굴린 일입니다. 경비병들의 ‘두려움’은 ‘무서움’입니다. 그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습니다.(4절)
경비병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것은 아닙니다. 또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12절의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라는 말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무덤에서 한 일을 알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순간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천사가 돌을 굴린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 밖으로 나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기 위한 일이 아니라, 무덤이 이미 비어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일입니다.(6절)>
3) 사제들은 예수님의 무덤에서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뻐하기는커녕 예수님의 무덤에서 일어난 일을 덮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 부활’은 달갑지 않은 일, 믿기 싫은 일, 인정하기 싫은 일이었습니다. ‘부활’이라는 일 자체를 안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부활을 믿더라도 자기 자신의 부활만 희망하면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의 부활은 바라지 않는 태도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유대교의 권위와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사제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의 권위와 영향력의 추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의 상실로, 즉 재산과 권력의 상실로 이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4) 사도들과 신자들은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라고 증언하면서, 그 ‘만남’을 예수님 부활의 증거로 내세웠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증언 자체를 헛소리라고 비웃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증언했을 때, 페스투스 총독이 바오로 사도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한 일이 대표적인 예입니다.(사도 26,24)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덤에서 시신을 훔친 다음에 부활하셨다고 선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안 믿는 사람들의 머리로는 ‘합리적인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이라는 일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물적 증거’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도들과 신자들의 증언만 있을 뿐입니다.
무덤에서 시신을 훔친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주장도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일 뿐입니다. 결국 이 논쟁은 ‘물적 증거로 증명할 수 없는 신앙’과 ‘물적 증거로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의 충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기쁨과 희망 속에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인생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안 믿는 사람들은 목적지 없는 유랑 같은 인생을 살면서 ‘인생은 허무하다.’ 라는 말만 하다가 끝나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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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우리는 모두 부활의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보고 겪으면서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이 참 다르지요. 우리 속담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손바닥으로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하늘은 가려지지가 않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여인들과 제자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온 세상에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알리는 반면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수석사제들과 장로들은 그것을 막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그 전에도 유다를 뇌물로 매수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경비병들을 매수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저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란 저지한다고 해서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들의 그런 어리석은 일 처리 과정까지도 통째로 드러나서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더욱 증명해 주는 계기가 되었음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진리 편에 서지 않으면 끝없이 거짓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교묘한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세상 논리가 마치 그런 것처럼 여기지만 오늘 복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악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 사건을 접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인들, 또 그것을 막으려고 애쓰는 수석사제들과 장로들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 편에 서면 이익이 될 것 같고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사는 방법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혹일 뿐이지요.
우리는 진리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결국에는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또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첫 번째 사명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이천 년의 역사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그것을 온 세상에 전했던 부활 증언의 역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고 그것을 열심한 여인들과 함께 전했으며 그것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다시 이웃에게 전하며 그리스도교는 발전했습니다.
그 역사를 보며 부활 대축일을 맞는 신자들의 첫 번째 사명은 전해 받은 부활 체험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부활 체험을 기쁘게 잘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예수님을 전했듯이 우리 또한 잘 전하고 있는가 하고 물으면 '글쎄요'하는 생각이 듭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 둘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주일 아침에 또 한 친구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어이, 친구, 오늘 골프 치러 가지 않겠는가?” 친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고맙네만 나는 오늘 성당에 가야 한다네.” 그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런가? 나는 자네의 믿음에 정말 감탄사가 나오네. 내가 그 동안 자네에게 일곱 번이나 골프를 치자거나 낚시를 하자고 했는데 성당 때문에 모두 거절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런데 자네는 번번이 성당 때문에 내 청을 거절을 했는데 내 생각에는 성당이란 곳이 골프장이나 낚시터보다는 갈 만한 곳이 못되는 것 같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영문을 몰라 되물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성당이 골프장이나 낚시터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친한 자네의 청까지도 매번 거절하지 않았는가?”
그 친구가 대답했지요.
“정말 자네에게 성당이 중요한 곳이라면 왜 나에게 한 번도 같이 가자는 말을 안 했는가? 나는 낚시터와 골프장이 정말 좋아서 자네한테 가자고 그렇게 청했는데 자네는 그런 적이 없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정말 좋아서 다른 사람들의 청을 거절해가면서 성당에 다니고 있다면 왜 그 사람에게 같이 가자는 소리를 안 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이 중요한 일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우리는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전해 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정말 좋다고 체험했다면 가자고 청하고 또 권하고 자꾸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창피하다거나 또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하지 말아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지요. 정말 좋은 것이라면 제안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도 미사가 끝나면서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고 저는 여러분들을 파견합니다. 우리는 바로 어제 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큰 소리로 노래하고 서로서로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활은 그것으로 끝인 것 같습니다. 잘못 되었지요.
정말 주님의 부활이 기쁘고 그 주님을 알게 된 체험이 너무나도 좋다면 담고만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그 기쁨은 전하면서 겪는 시련이나 창피함, 무안함을 밀쳐내고도 남을 만큼 크고 깊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고 그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것, 이것이 가장 복된 소식, 즉 복음(福音)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우리가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부활하신 주님, 복음을 전하고, 우리의 이웃 역시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또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진리 편에 서고 그 진리가 참된 행복임을 증언하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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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부활절 50일의 대장정>
우리는 지난 3일 동안 예수님의 파스카 성삼일(Triduum Paschalis: 최후의 만찬, 십자가 죽음, 무덤에 묻힘과 부활)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직접 펼치시는 인류구원사의 절정이자 최종적인 사건이 부활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앞서간 글들에서 거듭 강조하였지만, 예수부활에 대한 믿음이 단번에 주어지는 신앙이 아니다. 이는 부활 대축제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따라가 보면 더욱 확실해 진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우선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성야부터 시작하여 만 하루의 축제일로 지냈다. 이것이 서로 모여 빵을 나누며 기도하는 일을(사도 1,14; 2,12 참조) 빼고는 유일한 축제였다. 3세기 초엽 초대교회는 유다인들이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를 8일 동안 거행한 것을 본받아 하루의 부활대축일을 부활 팔일축제로 확장하여 기념하였고, 4세기 초엽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고, 연이어 국교(國敎)로 선포되면서 축제일은 50일로 최종 확정된다.
50일의 숫자는 이미 유다인들의 과월절(해방절) 축제이후 50일째 지내던 오순절 축제를 연상시키기에 우리에겐 전혀 낯설지 않다.
유다인들에게 과월절(해방절)은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물리적 해방을 의미하며, 오순절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야훼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을 기념함으로써 영적인 해방을 의미한다고 했다.
따라서 이미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후 유다인들의 오순절 날 한 곳에 모여 있던 12사도(마티아가 가리옷 유다의 자리를 채움)에게 성령이 내림으로써 본격적인 교회의 탄생이 시작된 것(사도 2장)을 감안한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사건, 그리고 성령강림사건을 하나로 묶은 축제일로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사상으로 자리잡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오늘부터 예수님의 기막힌 부활사건을 승천(40일째)을 포함하여 성령강림사건까지 50일간의 부활대축제 시기를 지내게 된다.
교회가 예수부활사건을 축제일로 50일을 지내든, 일년 내내 모든 일요일을 예수부활 기념일로 지내든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부활을 신앙(信仰)하느냐?'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부활신앙을 돕기 위하여 교회는 파스카의 성삼일뿐만 아니라, 부활 팔일축제도 준비하였다.
나아가 40일간의 부활준비시기(사순절)와 50일간의 부활축제일도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일년 내내 모든 일요일(52~53번)을 부활기념축일로 거행하지 않는가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오늘부터 부활 팔일축제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복음공동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부활신앙에 도달하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며, 이와 행보(行步)를 같이하여 우리의 부활신앙을 고무시켜야 할 것이다.
부활신앙을 고무시키는 방편으로 복음서가 보도하는 예수부활에 관한 기사를 주의 깊게 따라갈 필요가 있다. 마르코는 16.1-22에, 마태오는 28,1-20에, 루카는 24,1-53에, 요한은 20,1-25에 각각 부활(승천)기사와 복음의 에필로그(마무리)를 적고 있다.
부활기사의 분량은 마르코복음(70년경)과 마태오복음(70~80년경)보다 루카복음(80년경)과 요한복음(90-100년경)이 더 길다. 이는 복음서의 집필연대가 늦은 것일수록 비교적 많은 내용을 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복음서 모두가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 내용은 '안식일 다음날, 즉 일요일 이른 새벽에 일찍부터 예수를 따라 다니던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고, 이 순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사실상 부활신앙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를 토대로 각 복음서는 자기 나름의 부활신앙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오늘 미사의 마태오복음은 빈무덤 그곳에서 부활예수와 여인들의 첫 상봉을 보도하면서,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그리고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는 '경비병 매수설'(12절)과 '예수시신 도난설'(13절)을 들려준다.
이는 마태오복음의 독자(讀者)가 유다인들과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마태오는 이 대목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예수의 무덤을 경비해야 한다는 독자적인 '무덤 경비설'을 미리 덧붙여 놓았다.(마태 27,62-66)
아무튼 부활시기 50일 동안 듣게 되는 모든 복음은 비록 그것이 부활사건을 보도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활신앙을 향하여 읽혀져야 하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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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복된 하느님의 애인’이라 불리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네 복음사가는 모두 주님 부활 이야기의 첫 장면과 그 중심에 등장시킵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모 성인은 이처럼 부활의 첫 증인인 그를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그대 선택된 여인이여, 사랑 가득한 선택자여!”
무덤 밖에 선 채로 마리아는 울고 있습니다. 적막한 이른 아침에, 비록 돌아가셨을지라도 곁에 있고 싶어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으셨던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도 슬픈데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그 실망과 허탈감이 끝내 울음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 뒤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잇달아 큰일이 닥치면 넋을 잃고 하염없이 울다가 끝내 실신까지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마리아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한처음에 빛과 어둠, 하늘과 땅을 만들어 이름을 주셨고, 사람에게 온갖 생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것은 관계를 맺는 시작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스승과 제자, 바로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눈물이 주님 부활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께 눈물 대신 응답해야 합니다. “라뿌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이에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부활의 신비는 사랑의 관계로 거듭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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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28,10)
부활의 움직임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낙담에서 희망으로, 불안에서 평화로 되돌아감이며 또한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되돌아가는 움직임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는 부활을 체험한 사도 베드로의 담백하면서도 확신에 찬 신앙고백과 증언이 쏟아집니다. 이 설교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생생한 증언이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물론 설교하는 베드로 사도나 듣는 청중들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증인입니다.”(2,23~24.32)
매년 부활은 생명의 기쁨으로 찾아오고 어김없이 찬란한 봄과 함께 옵니다. 새삼 부활과 봄이, 봄이 부활과 언제나 함께 온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신비롭고 은혜롭게 다가옵니다. 죽어야 다시 살아난다, 는 진리를 부활도 봄도 함께 알려줍니다. 계절은 이미 우리에게 파스카 신비를 늘 말해왔지만 이를 깨닫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 영적이고 신비적인 죽음을 온전히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네요.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이 우리 또한 변화하는 계절처럼 온전히 죽어야 제대로 되살아나는 이 단순하면서 심오한 진리를 새삼 절절히 느낍니다. 부활은 봄과 함께 생명처럼 아름다운 꽃으로 찾아왔습니다. 꽃망울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상징하는 표지이며, 이를 통해 우리 역시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입니다.”(2,32참조)
때론 목련화나 벚꽃처럼 한순간에 꽃망울을 터트리기도 하지만 많은 꽃은 서서히 피었다가 오래도록 그 아름다운 생명의 충만함을 지속합니다. 이처럼 부활의 확신은 한 순간에 터득하고 깨달을 수 있는 신비가 아니라 서서히 피어나고 깨달아 갑니다. 주간 첫날 아침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한 여자들의 내적 상태는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였다.” (28,8)는 표현에 잘 드러납니다. 이 두려움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무덤에 달려갔다가 거기서 빈 무덤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 천사의 말을 듣고 느끼는 두려움(=敬畏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두려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그녀들의 내면은 한 마디로 긴가민가, 아리송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상태를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와 평안하냐, 고 물으신 것은 그녀들 자신들이 본 것들로 인해 당황스러운 마음 곧 두려워하는 마음을 안심시키려는 주님의 세심한 배려이자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녀들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헤아리셔서 먼저 ‘평안하냐?’고 그녀들에게 인사하신 다음 “두려워하지 마라.”(28,10) 하고 이르신 것입니다. 이는 걱정하지 말라, 나는 이제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는 위로와 약속이 담긴 언질이라고 느껴집니다. 이는 단지 그들에게 향한 위로의 말씀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자들을 차분하게 하신 이후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28,10) 하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늘 함께한다는 것을 믿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전달 소임 곧 부활의 증인으로 그녀들을 파견한 것입니다. 하지만 화려하게 핀 꽃들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처럼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돈으로 경비병들을 매수하여 ‘거짓 정보’, ‘가짜 뉴스’를 퍼트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무모한 짓을 범합니다.
“주님 저희 또한 부활의 여인들에게 맡긴 부활의 기쁜 소식의 전달자로 소임을 다 할 수 있도록 힘과 평화를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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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버드대 우등생 공부 비법이 있다고 합니다. 우등생들은 평소에 설렁설렁 노는 것 같은데 성적은 기가 막히게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숙사 사감이었던 교수가 이들을 눈여겨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잘 드러나지 않는 공부 비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정보다 열흘 먼저 해치우기.’
읽어야 하는 책이 있으면 열흘 먼저 읽습니다. 제출해야 하는 에세이도 열흘 전에 다 씁니다. 발표할 자료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단순히 하버드대 우등생만 그러했을까요? 소위 성공했다는 말을 듣는 결정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 모두가 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가 뒤로 미룰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벼락치기를 해야 자기의 뛰어난 능력이 나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리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늘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나중에 힘이 생기면,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나중에 구원해 줄게.”라고 하시면 어떨까요? 자기의 일은 늘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하고, 그 외의 것은 언젠가 이루어져도 된다는 이기심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공평하심을 믿는다면, ‘나중’이라는 말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은 실제로 제자들에게 곧바로 찾아갑니다. 뒤로 미루지 않고 곧바로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나 기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기쁜 일이 있으면 그냥 비밀로 간직하지 않습니다.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그만큼 여자들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컸기에 기쁨을 가지고 곧바로 찾아갑니다.
이 사랑을 아셨기에 여자들에게 가장 먼저 부활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경비병들도 무덤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했던 수석 사제들을 찾아갑니다. 경비병들에게 예수님 부활은 전혀 기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움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사랑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의 뜻인 사랑을 전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행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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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쁨>
마태오 28,8-15 (여자들에게 나타나시다, 경비병들이 매수되다)
그때에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기쁨>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마태 28,9)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마태 28,10)
참으로
기쁨이라면
붙잡지
않는 겁니다
나누어야
기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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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활은 믿음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돈은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입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총선을 앞두고 후보자들의 실상을 보게 되는 데 물질에 지배당한 어리석은 모습도 봅니다. 여당도 야당도 표를 사려고 헛공약을 남발하며 현혹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서 결코, 속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빈 무덤에 관해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마태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 사건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하며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간 여인들은 “평안하냐?”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들이 그분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주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 매 순간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약속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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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부활>
-사실인가? 또는 가짜뉴스인가?-
“예수님은 살아나셨다!(Christ is risen!)”
어제 3월31일은 3월 성 요셉 성월의 끝날이자 주님 부활 대축일이었고 오늘 4월1일은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에 이어 4월 한달은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과 함께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부활시기가 펼쳐 집니다. 옛 어른의 4월 말씀과 오늘 말씀도 참 좋습니다.
“거피취차(去彼取此); 이상에 취하지 말고 일상에 몰두하자”
다산이 노자를 인용한 4월 주제 말씀입니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부활을 체험한 우리들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냉철한 삶의 자세입니다.
“사자는 갈기가 없더라도 사자다. 선비는 궁한 처지에도 비굴하지 않다.”
다산 어른의 말씀입니다.
“부귀함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비천함도 이 뜻을 바꾸지 못하며, 위험도 이 뜻을 굽히지 못하니, 이래야 대장부라고 할 수 있다.”
맹자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 부활을 체험한 자라면 모름지기 다산 어른의 선비의 자세가, 맹자 어른의 대장부의 자세가 마땅하겠습니다. 어제, 성주간 동안 수도원에 머물다간 제 옛 고향, 대전교구 원로신부의 유머스런 말씀도 힘이 되었습니다.
“수도원 도서실에서 <요셉수도원 설립 25주년(1987-2012)> 화보집에서 당시 원장이던 ‘신부님의 회고사;이제 다시 시작입니다’를 읽었습니다. 초창기 수도원을 일궈 놓으신 대단한 분이더군요. 그분이 누굴까 유심히 살펴 보니 신부님이었습니다. 절로 말하면 수도공동체의 원로가 되는 신부님은 방장이고, 원장신부님은 주지가 되는 셈입니다. 신부님은 불암산의 ‘산중(山僧)’이라면 저는 세속의 ‘들중(野僧)’입니다.”
정말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해 불암산 성 요셉수도원의 산승(山僧)답게, 수도공동체의 겸덕(謙德)과 학덕(學德)을 겸비한 출중한 영적지도자 방장답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어제는 참 많이 부활 축하 카톡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주님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신부님, 주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요지의 축하글이었습니다. 너무나 자명한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글이었습니다. 교황님의 부활성야 강론 시 “예수님과 함께, 무덤은 더이상 삶의 기쁨을 압도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주제로 말씀하셨고, 부활절 메시지에서는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다!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한다!(Christ is risen! All begins aneu!)” 희망찬 주제를 택하셨습니다. 부활의 희망, 부활의 기쁨이 우리를 살게 하는 참된 내적힘입니다. 정순택 서울대교구장의 부활메시지도 적절했고 일부 인용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자주 ‘반대자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험담하는 이들을 축복합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은 국가의 발전과 국민들의 행복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곧 치르게 될 총선에서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권리를 잘 행사해서 국민의 참 봉사자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어려움을 넘어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나라의 명운이 달린 총선입니다. 나라의 좋은 일꾼을 택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후보의 배경인 당과 삶을 역사를 봐야 할 것이고, 무수한 쓰레기 가짜뉴스들에 휘둘리거나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분명 부활하셨고 일부 제자들은 너무나 생생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 이에 당황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은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며 매수하니 종교지도자들이 가짜뉴스의 진원지가 됩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자기들이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고 그들이 시킨대로 했고, 이 가짜뉴스 유언비어가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합니다. 정말 믿음의 없는 이들에게는 예수님 부활이 유언비어 가짜뉴스처럼 들렸을 것이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정말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참 분별하게 난감합니다.
무엇이 유언비어요 가짜뉴스인지 오늘 복음을 보면 분명합니다. 종교지도자들과 경비병들이 유언비어 가짜뉴스의 진원지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유언비어 가짜뉴스가 만연된 세상에서 이에 속지 않도록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좋은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배경의 당과 인물의 과거 행적을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살아온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회개가 아니곤 사람은 결코 고쳐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너무나 자명한 진리입니다. 부활의 희망, 부활의 기쁨이 우리를 험난한 광야여정 중에도 무너지지 않고 독야청청 살게 하는, 샘솟는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도대체 부활한 파스카의 예수님이 아니곤 어디에다 참 희망과 기쁨을 둘 수 있을런지요! 바로 그 생생한 부활의 증인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그대로 베드로의 주님 부활체험을 반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서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어 예로 드는 다윗 시편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고백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고백을 여러분의 내 고백으로 삼으셔서 바쳐도 은혜롭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시는 참 좋은 선물이 시편16,8-11절입니다. 저는 오늘 부활절 다음날 4월1일 오늘 파공은 주님 부활의 희망과 기쁨을 관상하며, 또 교황님의 부활 강론과 메시지를, 아래 시편을 묵상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려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고백이자 주님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의 행복한 고백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시편(16,8-11)을 그리스도화하여 렉시오디비나 하는 경지가 참 놀랍습니다. 과연 렉시오디비나의 모범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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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새로운 성소를 사는>
오늘 복음에는 여인들과 남자들이 나오고, 주님의 부활을 알리려는 여인들과 그것을 감추려는 남자들이 나옵니다.
남자들은 왜 감추려고 합니까? 보통은 악행을 감추려 하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한 짓이 악행이라고 생각하기에 감추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 이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한 짓이 악행이라고 생각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는 예언자도 메시아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는 위험한 인물이고 자기들에게는 위협이 되는 자, 그래서 죽어 마땅한 자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니 자기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결코 악행이 아니라 정당한 행위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주님의 부활 사실을 숨기려고 한 것은
자기들의 오판을 숨기려고 한 것이고, 자기들의 권위와 권력이 손상되는 것이 두려워 숨기려 한 것일 겁니다.
어쨌거나 이들은 하느님께서 하신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들의 권력이지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고,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지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들의 권력이지 진실이 아니며 하느님의 사랑도 백성들의 구원도 아닙니다.
자기들은 언제나 옳고 옳지 않은 짓을 했어도 그것이 드러나거나 드러내서는 안 되고 옳지 않음이 드러나 자기들의 권력이 위협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권력자들에게서도 똑같은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진실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백성을 사랑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무리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권력만 중요하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들과 달리 오늘 여인들은 오로지 사랑의 존재들이고 사랑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여인들은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을 보이시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여 살아계신 것을 보고 싶어서 무덤에 간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사랑 때문에, 보고 싶어서 사랑하는 이의 무덤을 찾은 것뿐입니다.
이들은 제자들과도 다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을 보고 따랐고 권력을 보고 따랐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권력을 잡으려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목격한 것은 주님의 능력도 권력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권력자들 앞에서 주님의 무력함과 무기력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크나큰 좌절과 허탈감 속에 있었는데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
갈릴래아는 그들에게 어떤 곳입니까? 그들이 성소를 처음 받는 곳 아닙니까?
그러니 갈릴래아로 가라는 것은 다시 성소를 받으라는, 새로운 성소로 다시 출발하라는 새로운 성소일 겁니다.
세상의 권력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을 다시 체험하고, 아니, 주님의 능력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더 체험하고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주님의 사랑을 당당하게 전하는 용감한 증언자들이요 주님의 형제들이 되라는 성소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당신의 형제들이라고 하시며 여인들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우리도 죄지은 우리를 형제라고 하실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새로운 성소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어제 또 제목만 올라가는 일이 있었는데
제가 뒤늦게 알아서 조처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재발할 경우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 내일 정확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저희 관구 홈페이지에서 문제가 있을 경우, 여기 선교협동조합 홈페이지에 올릴 예정인데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정확히 알려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너무 죄송하고 하루 늦게 오늘 부활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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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갈릴래아!>
오늘 복음(마태28,8-15)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시는 말씀'과 '예수님 무덤을 지키고 있었던 경비병들이 수석 사제들에게 매수되는 말씀'입니다.
'빈무덤'은 '예수님 부활의 결정적 표지'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마주오시면서 말씀하십니다. "평안하냐?"(마태 28,9)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갈릴래아!'
갈릴래아는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고 땀을 흘리셨던 예수님 공생활의 자리'였습니다.
갈릴래아는 또한 '우리들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들이 먹고 마시며 땀 흘리고 많은 형제자매님들과의 만남이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삶의 자리인 갈릴래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들 삶의 자리에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곳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도 부활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늘 성경 말씀을 가까이합니다.
오늘 독서(사도 2,14.22-33)는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다른 열한 사도와 함께 외친 말의 요지는 '유다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이고, '사도들이 모두 그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처럼, 내가 부활해야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할 수 있고,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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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uzgCJo4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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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 10)
우리에게는 돌아갈
첫마음의 갈릴래아가
있습니다.
빼앗길 수 없는
첫마음의
갈릴래아입니다.
설레임과
뜨거움 이 모두를
우리에게 안겨주었던
예수님과 우리의
갈릴래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의 첫마음이
치유를 받습니다.
부활은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관통합니다.
가장 뜨거운 마음을
다시 만나게됩니다.
가장 순수했던
그곳에서 예수님을
다시 뵙게됩니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부활합니다.
예수님 부활은
함께한 시간만이
아니라 함께할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버려진 무덤의
시간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부활의 시간입니다.
방울방울
눈물이 흐릅니다.
마음과 마음이
사랑과 사랑이
겹쳐지는 거기에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시기가
우리의 첫마음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잊지 맙시다.
사랑의 갈릴래아는
여전히 푸르고
역동적입다.
첫마음을 향해
가는 갈릴래아에서
모든 마음이
되살아납니다.
비로소 우리는
삶의 이유를
예수님에게서
만나게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마음을 주셨듯이
우리또한 예수님께
출렁이는
우리마음을 드립시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거기에서
첫마음은 다시
되살아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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