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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미 육군 제8군 사령관으로 한국군의 현대화와 미국의 원조에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
퇴역 이후에도 종종 방한했으며
미국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고 평생 한미관계 발전에 헌신하였다.
2. 생애
1892년에 뉴저지 주 코이테스빌(Coytesville)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네덜란드계인데 5대조인 얀 아드리안선 판플리트(Jan Adriansen Van Vliet) 대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민 온 네덜란드인 집안의 후손이다.
밴 플리트(Van Fleet)는 후대에 네덜란드식 판플리트(Van Vliet)를 의미만 살려 영어식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가세가 기울어 조부 대에는 오하이오의 빈농으로 전락했다.
부친 윌리엄 밴 플리트(William Van Fleet, 1833~1919)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릴 적에 단신으로 시카고로 출향한 뒤에 각종 막일을 하며 번 돈으로
사업을 벌여 자수성가했지만 1871년 시카고를 잿더미로 만든 시카고 대화재 때 큰 재산 손실을 보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후 아직 덜 개발되어 있던 플로리다로 건너가 철도 건설사업을 벌였으나 여기서도 큰 재미는 보지 못했다.
제임스 밴 플리트는 이렇게 사업 실패로 허덕이던 시절에 낳은 막둥이 아들이었다.
그의 출생 직후 아버지 윌리엄은 재기의 꿈을 접고 가족을 이끌고 철도 건설사업으로 친숙해진
플로리다로 이주하여 소소한 말년을 보냈다.
이 때문에 그는 플로리다에서 줄곧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191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915년에 졸업하였다.
재학 당시에는 미국 육군사관학교 미식축구 팀에서 풀백으로 맹활약하기도 했다.
참고로 1915년 졸업 기수는 미국 육군사관학교 역사상 가장 화려한 기수로,
원수 2명(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 대장 2명(밴 플리트, 조셉 맥나니)을 포함해
졸업생도 164명 중 59명이 장군이 되어 이른바 별들의 기수라고 불린다.
보병 소위로 임관 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퍼싱 장군이 이끄는
미국 유럽 원정군의 일원으로 파병되어 보병대대(제17기관총대대) 대대장을 역임하였다.
전간기에는 미국의 여러 대학의 학군단 단장을 맡았다.
캔자스 주립 농업대학, 사우스다코타 주립대학을 거쳐갔고
플로리다 대학교 학군단을 이끌 당시인 1921~24년에는 플로리다 대학교 미식축구부 감독까지 맡기도 했다.
이후에는 파나마 운하를 경비하는 제42 보병연대의 예하 대대장을 지낸 뒤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육군보병학교에서 교관으로 복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메인주 포트 윌리엄스의 제5보병연대, 제29보병연대의 대대장 등을 역임하며
순탄한 경력을 쌓아갔고 1941년 2월에는 제8보병연대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비록 이 평화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부임했던 모든 부대에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육군보병학교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기관총 소대를 지휘한 경험 덕분에 최신 화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이동할 수 있는 병력의 가능성을 예견하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다만 전간기 육군보병학교 교관 시절에 그의 경력을 두고두고 꼬이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무렵 육군에는 알코올 의존증으로 골칫거리인 장교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장교의 이름이 밴 플리트와 비슷했다.
문제는 당시 육군보병학교 부교장 중 한 명이던
조지 마셜이 밴 플리트의 이름만 보고 바로 그 주정뱅이 장교로 오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셜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중용되어
육군 전체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미국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이때 뇌리에 박힌 밴 플리트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밴 플리트 본인의 행적도 마셜의 오해를 굳어지게 한 요인이 되었다.
그는 고급 지휘관으로써 필요한 부대 행정운영이나
전략연구등 문,이과적 자질보단 현장에서 소리지르며 돌격하는 야외 활동과 야전 지휘에
능숙한 예체능형 인물이라 엄격한 군율과 기강을 중시하던 당시 미군 분위기에서는 다소 한량으로 비춰졌으며,
실제로 부대내에서 미식축구에 열중하다가 정작 본연의 임무를 놓치는 사례가 있었으며
그가 맡았던 고등군사반의 성적도 좋지 않았다.
이 부분은 밴 플리트 스스로도 '나는 누굴 가르치는 데는 젬병이다'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하필 이런 사례들은 마셜이 강하게 추진하던 중점 사업들과 맞물렸기 때문에 마셜로선 '그럼 그렇지.
술이나 퍼마시는 놈이니 평소 행적도 그 따위이네.'라는 편견이 단단히 박힌 것이었다.
이 오해는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미 육군이 대대적으로 확장되면서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부대가 대거 창설되고 지휘관 수요가 폭증하자 그의 동기, 선후배들은 빠르게 진급하며 높은 보직을 맡기 시작했는데
누구보다도 유능한 지휘관으로 꼽히던 그는 대령 계급, 제8보병연대 연대장 직위에서
그 어떤 진급도 보직 이동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이나 전쟁대학 같은 최고위 지휘관 양성과정 입교도 이뤄지지 못했다.
상급 지휘관들이 밴 플리트를 추천해도 최종 단계에서 마셜이 계속 밴 플리트를 탈락시켰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억울했지만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결국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전개될 때까지도
3년 넘게 그는 대령 계급의 제8보병연대 연대장이었는데 이때서야 실전에 투입되어 유타 해안에 상륙했다.
여기서도 그는 탁월한 지휘관의 자질을 발휘해
셰르부르 함락 당시 뛰어난 전공을 세웠는데도 여전히 진급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보다 못한 그의 친한 육사 동기이자 유럽전선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는
마셜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왜 밴 플리트가 계속 진급에서 누락되는지를 물었다.
마셜은 밴 플리트가 알콜중독자여서 그렇다고 대답했고
아이젠하워는 깜짝 놀라서 밴 플리트는 술을 안 마신다고 이야기를 해 줬다.
그제서야 마셜은 비로소 자신이 밴 플리트를 다른 장교와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 동기였던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이미 1941년에 준장 계급을 달고
1944년에는 3성, 4성장군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당장 그의 제8 보병연대의 상급부대였던 제7군단의 군단장 J. 로턴 콜린스 소장은 2년 후배(1917년 졸업)였고
같은 사단(제4 보병사단) 소속인 제12 보병연대 연대장 러셀 리더는 무려 9년 후배(1920년 입학, 1926년 졸업/임관)였다. 물론 사단장 레이먼드 바턴 소장은 5년 선배(1912년 졸업)였으니 꼭 터무니없는 계급과 보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간 밴 플리트가 보여준 능력과 주변의 높은 평가를 감안하면 억울한 이유로 인정을 못 받은 것도 분명하다.
본인의 실수로 유능한 지휘관의 경력을 망쳐 버렸다는 걸 깨달은 마셜은
이후 부랴부랴 기회가 될 때마다 밴 플리트를 진급시켰다.
1944년 8월 1일에 드디어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2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을 맡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90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한다.
이어 11월 15일에는 다시 소장으로 진급했다.
벌지 전투 후반부에 그는 후방 부대인 제23군단 군단장으로 잠시 있었으며
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17일에는 다시 최전선으로 나와 제3군단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레마겐 교두보에서 미 육군 제1군의 저돌적인 돌파작전의 선봉을 이끌어 이른바 루르 포위전의 한 날개를 완성했다. 이 전투에서 모델 원수의 독일 B집단군의 잔존병력을 분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4월 17일부터는 군단을 이끌고 패튼 장군의 제3군 소속으로 독일 남부를 소탕하는 임무도 성공리에 완수하였다.
제90보병사단과 제3군단 사령관 당시의 활약은 저돌적인 패튼에게도 큰 인상을 주어
그는 밴 플리트가 자신이 거느려본 부하 장군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며 극찬했다고 한다.
유럽전선 종전 이후에는 태평양전선에서 일본 상륙(몰락 작전) 준비를 위해 제3군단 사령부를 이끌고
미국 루이지애나로 이동하였지만 원폭 투하로 일본도 이내 항복하자 루이지애나에서 1946년 2월까지 군단장으로 대기하다가 이후 미국 국내에서 전후 정리 작업(전시 편성된 부대의 해체, 재배치 등)을 수행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간의 이념 대립, 즉 냉전이 시작되고
유럽 각지에서 공산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자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많은 유럽 우방국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그는 1947년 12월 프랑크푸르트의 미 육군 유럽지구 사령부에 부참모장 직을 맡아 나와 있다가
당시 공산화 위협에 시달리던 그리스 왕국의 군사고문단장으로 파견되었다.
당시는 공교롭게도 마셜은 트루먼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영전했고
아이젠하워가 육군 참모총장을 지내고 있을 때였다.
마셜은 1948년 1월 아이젠하워에게 그리스 군사고문단장 후보를 추천하도록 요청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5명을 추려 보냈는데 그중 한 명이 밴 플리트였다.
아이젠하워는 그의 추천 사유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유일하게 연대장부터 군단장까지 모두 경험해 본 현직 장교]이다. 그는 지적인 타입은 분명 아니지만, 직설적이고 단호하며 누구라도 존경하게 만드는 전투이력을 갖고 있다."라고 적었다.[ 마셜은 추천받은 장군들 가운데 밴 플리트를 낙점하고 2월 5일에 그를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눈 뒤
곧장 최대한 빨리 그를 정규 중장으로 진급시켜 그리스로 보내라고 강력히 권고했으며
일사천리로 다음 날인 2월 6일에 육군성은 군사고문단장 인사 발령을 내고
그다음 날인 2월 7일에 대통령 명의로 중장 진급을 발표했다.
아이젠하워의 추천 의견에도 나오듯이
그는 참모를 역임한 경험도 없고 정치 경험도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과감한 성격과 추진력을 발휘하여 막장 상태였던 그리스군의 혼란을 잘 수습해 냈다.
시원시원한 강골이자 무인의 성격이 맞아서인지 당시 그리스군 총사령관이던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장군과도
돈독한 사이였다고 한다.
파파고스는 기병 장교로 발칸 전쟁,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 참전했고,
왕당파 정부 하에서 국방장관도 역임하였으며 이미 1940년 나치 독일의 그리스 침공 당시에도
그리스군 육군 총사령관일 정도로 노장군이었다.
신기하게도 파파고스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고 밴 플리트는 그리스어를 할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눈빛과 몸짓, 짧은 단어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밴 플리트 장군이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미국은 그리스 내전에서 밴 플리트를 위시한 250여 명의 군사 고문단과 4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 원조를 퍼부어서
결국 그리스의 공산화를 저지해 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시 한번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당시 전황상 불가피했던 이유로 실패한 작전 등에 대해서도
그리스군의 무능함을 과하게 책망한 경우가 종종 있어서 나중에 다소 좋지 않은 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스 내전은 미군 고문단이 지원한 정부군의 군사작전에 의해 적잖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1950년 8월에 메릴랜드에 주둔 중이던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하다가
1951년 4월 14일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제8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진급이 늦은 편이라 전임자이자
이제 UN군 사령관이 된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이 밴 플리트의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2기수 후배다.
동기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이미 1944년에 유럽전선 총사령관이었다.
그가 부임한 직후 1951년 5월 16일에는 대한민국 국군 최악의 흑역사 현리 전투가 발생했고
국군 제3군단은 밴 플리트 장군의 손에 해체당했다.
6.25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밴 플리트 장군은 나름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한반도 내에서의 제한전 방침으로 공산군의 급소를 타격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유엔군은 확전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과 소련의 영토는 공격하지 않았는데 정작 공산군의 전쟁 물자는 여기서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유엔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는 그리스 군사고문단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스군만 이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었을 뿐 그리스 내전만 종식시키는 것이 임무였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무지막지한 물량공세에 맞서기 위해 밴 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이라는
전술을 창안하기도 했다.
이것은 밴 플리트 포격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둘 다 종군기자들이 이 전술을 목격하고 붙인 명칭이었다.
1951년 4월에 벌어진 중국 인민지원군의 5차 공세 때 전선사수 명령과 함께 그가 택한 방식은 화력제압이었다.
바로 포병의 탄약통제보급율(CSR)을 5배로 늘려 이른바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05mm 포는 300발, 155mm 포는 250발, 203mm 포는 200발, 175mm 포는 250발을 쏘며
중공군의 사상률을 높인 덕분에 중공군의 5차 공세는 빠른 시일 내에 좌절되었고
그 후 중공군이 자랑하는 '보병 산악 기동전'도 시야가 제한된 야간에만 쓸 수 있을 정도로 제한당했다.
게다가 '밴 플리트 탄약량'에 힘입어 미군은 적이 있거나 이용할 만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켰는데
미군 조종사들이 공중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는
"더 이상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한편 그가 미군이 작전 시 규정한 탄약의 사용 한도를 5배나 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의회의 일부 의원이 그가 혈세로 만든 탄약을 필요 이상 펑펑 날리고만 있으니
의회에 출석시켜 질의를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밴 플리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의원들 보고 여기 와서 적군 시체랑 포로들 좀 보라고 해.
오지 않을 거라면 '밴 플리트 탄약량'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해!"라고 일갈했으나,
상황이 상황이고 미국도 포탄 가격보다 인명을 중시하는 나라였기에 그가 의회에 출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뜻 보면 군사 부문에 무지한 정치인들이 유능한 장군에게 쓸데없이 태클을 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돈이 넘쳐나는 미군이라도 저 정도의 물자를 생산하고 전선까지 운반하는 건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대대적인 군축의 영향으로 군수물자 생산이 줄었다가
6.25 전쟁이 터지면서 부랴부랴 군수물자 생산을 늘렸지만
군수물자 생산은 아직 정상화 궤도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 막 쏘다간 당장 물자가 바닥날 판이었다.
의외로 6.25 전쟁은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나름 돈에 쪼들리면서 싸운 전쟁으로,
중공군 개입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전쟁비용으로 인해
만약 미 의회가 예산 증액안(Revenue Act of 1951)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면 1951년에 예산이 고갈될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국민의 세금이고 그 세금이 어떤 용도로 활용되는지
확인하는 건 의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만약 밴 플리트가 무능한 똥별이라서 쓸데없이 포탄만 낭비하고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군은 2차대전 때 만성적 물량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과 일본하고만 싸워 봤지,
막상 진짜 공산주의와 냉전 국면에서 2천만이 전사해도 또 병력이 쏟아지던
동부전선 소련군이나 인해전술 끝판왕인 국공내전시기의 중공 인민군을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미국 전쟁사를 통털어 이정도로 많은 병력을 한 전역에 밀어 넣으면서 진격하는 상대를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밴 플리트 장군도 미군 특유의 기동전이고 뭐고 한반도 역사에서 유구한 진지 잡고 버티면서
화력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현장을 볼 일 없는 미국 정치권에서는
혹시 비정상적으로 물자를 낭비하는 게 아닌지 의심을 안 할 수 없었다.
밴 플리트가 겪었던 실전과 보고서의 괴리는 이후 미군의 흑역사인 베트남 전쟁,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사방팔방에
값비싼 FGM-148 재블린 미사일을 고작 기관총 진지나 보병 한두 명을 격파하는 용도로 쓰면서
다시 제기됨에 따라 미군은 화력점 격파 용도로 창고에 있던 M72 LAW를 다시 꺼내야 했다.
쇼미더머니도 한계가 왔던 것.
결국 재블린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전차의 뚜껑을 효율적으로 따면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아무튼 5차 공세 이후 중공군이 보병을 이용한 기동전을 포기하고
6.25 전쟁 중후반부터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지전에서
야음을 틈타 공격준비사격 후 축차투입으로 일관하게 된 것도
밴 플리트 장군이 펼친 화력공세의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간 불리한 머릿수를 그에 상응하는 화력으로 보완해 자칫 밀릴수 있던 전황을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이끈 점을 인정받은 밴 플리트는 1951년 7월 31일 드디어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1951년 중반에 전선을 평양~원산 선까지 밀어붙이고 싶어 했으나(맹조의 발톱 작전)
이미 6.25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휴전회담에 돌입한 행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는 제한된 목표에 한해 '전투정찰' 명목으로 유리한 전선 확보를 위한 일련의 작전들을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양구 해안분지(펀치볼) 일대에서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등이 전개되었다.
이외에도 그는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고 하였으나
1951년 10월 25일에 휴전회담이 재개되면서 유엔군 사령부 명령으로 모두 취소되었다.
그는 이후 대규모 공세가 불가능해지자 한국군의 양적,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데 힘을 기울였는데
한국군의 문제점을 "우수한 장교 인력 및 사단급 이상의 대규모 군사훈련의 부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1951년 10월 경상남도 진해에 육군사관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한국군의 정예화를 꾀했다.
그는 1953년 1월 29일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의 직위를 맥스웰 테일러 중장에게 이임하고
미국 본토로 돌아왔으며 2달 후인 3월에 전역하여 38년간의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4. 퇴임 이후
6.25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3월 31일에 군에서 퇴임했다.
당초 퇴임 직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에게 주한미국대사를 맡기려고 하였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6.25 전쟁을 끝내고자 정전 협정을 밀어 붙이고 있었는데
분단 고착화를 이유로 이를 완강히 거부하는 이승만을 설득하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밴 플리트는 아이젠하워와는 육사 동기이고
이승만과도 의기투합한 사이로 양국 대통령 모두와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적임자로 꼽혔던 것이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본인도 정전에 반대하는지라 소신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다며 이를 고사하였다.
굵직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기 때문에 지역 사회에서
본인은 정치에 뜻이 없다며 이 역시 고사하였다.
플로리다에선 목장을 운영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퇴임 후에도 이승만과 밴 플리트의 끈끈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이승만은 얼마나 밴 플리트를 신뢰했는지 1954년 3월 11일에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군을 35~4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동아시아 반공 국가들의 지상군 훈련을 위해 밴 플리트를 다시 파견해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당연히 아이젠하워는 난색을 표했지만 대신 극동 지역 우방국에 대한 군사원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특사로
그해 5월에 밴 플리트를 파견하였다.
이때도 밴 플리트는 한국 육군을 기존 20개 사단에서 30개 사단으로 증강할 것을 권고하며 한국 측 입장을 최대한 뒷받침해 줬다.
이런 깊은 친분으로 인해 밴 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절 생일 축하 겸 미국 민간기업과의 사업 중개 등의 목적으로 연 1~2회 꼬박꼬박 한국을 방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