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은 ‘조갑제식 글쓰기’ 때문에 重病을 앓고 있다.
바다를 건너다는 왜 조갑제(존칭생략)식 글쓰기를 따를 수 없는가?
(1) 조갑제는 우익의 독자는 50대 60대 군인과 기독교인이란 전제로 글을 쓴다.
글쓰기가 노리는 효과는 간단하다.
[생각은 조갑제와 일정한 무리가 다 해준다. 군대에서도 명령에 수동적 복종하듯이, 교회에서도 목사님 권사님 말씀이면 무조건 따르듯이, 아무 말 말고 따라라.]
한마디로 말해서, [생각은 김일성 김정일만 한다. 북한민중아 따르라.] [생각은 레닌 스탈린만 한다. 소련 민중아 따르라.] [생각은 조갑제닷컴만 한다. 군인과 기독교인 구세대는 잔말 말고 따르라]
이 가닥에 ‘조슬까요’ ‘조슬까’ ‘화끈하게 조슬까요’ 하고 말하고 싶다. 조갑제는 입버릇 처럼 ‘민주화시대’에 일정 수준 탑승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글쓰기가 노리는 효과를 보면 환장해 버린다.
특히, 이 판단이 정확했음을 확정해주는 판단은, 조갑제는 박대통령의 천달러 민주주의 시대의 ‘많이 배우면 좌익’이란 지식인 경멸론을 꾸준하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군인으로 힘으로 맑스주의 공부를 찍어 누른 박대통령의 경우에서, 천달러 민주주의라도 경제 발전을 통해서 확장하고자 하려는 가닥에서, 가난해서 배움도 못하는 데 많이 배워서 사회주의 유포까지 하려는 가닥에 대한 적개심은 이해가 되어야 한다.
김영삼은 학술적 수준으로 좌익 연구하라고 했다. 김영삼은 우익과 좌익이 나란히 놓일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 덕에 학술적 좌익물 엄청 먹었다. 우익 사이트에 발 디디자 마자, 이거 뭔가 이상하다는 감이 들었다. 김영삼은 우익당으로 나와서 책임진다고 해서 좌익에 공부했고 그것을 비판하고 우익사이트에서 발 디뎠는데, 많이 배우면 좌익이란다.
그러면, 김영삼은 뭣 때문에 맑스주의 연구 개방 한 것인가? 정말로, 우익에게 70년대 수준의 못 배운 설움 가닥에서 멈추게 할 것이면, 젊은이들의 좌경화 가닥도 안되게 막아야 한다.
조갑제의 논거를 보면, 조갑제 딸이 한총련(인터넷에서 자주 회자되는 설. 조갑제닷컴에 올린 조갑제 딸 대학 동문의 글이 발단인듯) 인게 ‘콩 심은 데 콩 난 것’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다.
조갑제는 50, 60 구세대로 많이 배운 사람을 질책할 시대 감각의 노년을 잡아서 책 장사를 할 수 있다. 젊은 층엔 좌경 가닥을 팔았다. 좌파 대학가에서 김영삼의 거짓말을 믿고 공부하다가, 이거 아니라고 증언하자 그러한 자에게 들이대는 가닥이 ‘많이 배우면 좌익’?
지금은 대학생이 넘쳐 나는 시대이다.
바다를 건너다는 ‘이야기하기’로서 특수한 상황을 전제하고 글을 쓴다.
서울소재 명문대학의 정체성도 아니면서,
운동권을 싫어하는 非운동권 자아 정체성을 가지면서,
주체사상파 좌파에는 惡 감정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좌파 지식인들에 대해서 대한민국이 온전할 수 있다면 존재 가능성까지는 부정하지 않는다.(그게, 바다를 건너다 세대가 김영삼에게 속았던 90년대 초반 분위기니까.)
조갑제는 노골적으로 50.60 구세대 기독교인과 군인들 생각으로 ‘생각은 내가 한다. 너희는 책이나 봐라’는 입장으로서 글쓰기 한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다는 끝없이 그러한 상황적 특수성이 만드는 전제의 ‘이야기하기’를 한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지지자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그러한 바탕에 관심이 없다. 어느 할머니(?) 중에서는 나와 코드가 일치한다는 식의, 조갑제 강연장에서 할아버지의 조갑제에 대한 아부성 표현을 서슴지 앟는 전화를 거신 분도 있다. 그러나, 대학 입학 하자마자 좌경 데모가 너무 극심해서 ‘에이 씨발 휴학 해 버릴까’ 했던 고민을 해봤던 세대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 공간에 대한 깊이 있는 공감 밖엔 없다.
(2) 조갑제는 자신만 생각할 수 있다는 전제로서 우익 사이트를 균질화된 공간으로 본다. 그래서, 우익 사이트 곳곳에 자신의 글이 퍼져 올라갈 수 있음을 기대했다.
조갑제는 자신의 글이 펌글로 올라가면서 자신의 글과 관련된 지식 상품의 판매지수의 상승을 기대할 수있다.
‘위험’이 늘면 ‘이익’이 는다.
그러나, 반면에 바다를 건너다는 펌글로 올려지기 쉽게 글을 써줄 의사가 전혀 없다. 더불어, 모두를 위해서 총대를 메어줄 의사가 조금도 없다.
조갑제는 책팔아 건더기라도 챙기는 전제도 있지, 바다를 건너다에겐 이익 없는 위험만이다.
특히, 글이란 게 무서운 게 어리버리가 쉽사리 책임전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과 전화로 1분여 통화했던 어느 네티즌이 경찰서에 잡혀갔을 때, 바다를 건너다와 친숙성이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잊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펌글’에 상당히 에렵게 글을 쓴다. 펌글은 무릇 신문사 사설처럼 전방위적으로 어디에나 적합해야 한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글쓰기처럼 분명한 자기 입장을 넣는 이야기하기의 글쓰기이다.
글을 읽었다면 누구나 생각한 바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합법적 권리이다. 대신 누군가 ‘죽어줘라’하는 심리 가닥에 입각한 펌글하기 쉽게 쓰는 글쓰기에 ‘젓까라 마이싱’ 이라고 답하고 싶다.
[대자보 정치]도 아니고,
[신문사 칼럼 글쓰기]도 아니다.
(3) 조갑제식 글쓰기는 공론공간의 ‘다양한 문제제기’를 차단한다.
젊은층은 계속 새로운 문제제기를 제시할 수 있다. 노년층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조갑제식 글쓰기는 ‘쉬움’을 빙자한 흘러간 노래만 다시 틀어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는 [가요무대] 찾는 세대 정서와 같은 것이다.
글쓰기에 대하여 내용과 형식을 압박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창의적 문제제기를 억압한다.
이러한 이유로, 조갑제식 글쓰기를 반대한다.
신문 칼럼가의 글쓰기
대자보의 글쓰기
펌글 하기 좋은 글쓰기
다 좃을 까자는 것이 바다를 건너다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러면, 전체주의 사회에 길이 들면 어떻느냐는 압박에 대해서 왜 항거하는가? 김영삼이 했던 젊은 층에 주었던 재앙에 완전하게 추인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천달러 민주주의 어법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익 정치인 팬클럽은 당연히 개인의 의사표현을 넉넉히 하며, 그것이 보편정서에 타당하다면 내용과 형식의 평균심리(독재사회는 평균이 되라는 압박을 많이 준다)압박에 항거해야 한다.
근대화 정치는 자기 주도에 자기 책임이다. 박사모의 집단입장과 동일시 될 이유도 없고(박사모 대변인과 운영자 나라사랑님의 성명도 적잖고), 그리고 조갑제 처럼 그러한 글쓰기 해서 더 팔아먹을 잡지도 없다.
따라서, 조갑제식 글쓰기를 따르라는 주장에 일관되게 반대한다. 바다를 건너다는 이미 문인적으로서 ‘평균심리’를 따르라는 말에 ‘조슬까세요’하는 특수성 입장을 즐기는 차원에 서 왔다. ‘삼대 기인 문인’에는 왜 당신은 졸라 평균적이지 않으세요? 왜 묻지 않는 것인지?
첫댓글 지금 박사모에서 후보진영에서 상대후보를 직접 검증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박사모 탈을 쓴 노사모야. 자네도 가슴속이 찔리지 않는가? 대선후보 검증은 당에서 당연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