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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오신 이유(2) (고전2:9-12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고통 중의 하나는 ‘외로움’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육신의 부자유함의 고통도 있겠지만 외로움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을 사회적 동물’ 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옥에 격리시켜 갇힌 생활은 사실상 인간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고통이 큰 것입니다. 그러나 외로움이라는 것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이 있어서 어느 곳에 있든지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되지 못하여 답답하고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홀로 있는 사람들에게 ‘고아’ ‘과부’라는 외로움의 대명사를 붙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떠나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고아와 과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의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신 내용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보내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성령께서 오시면 더 이상 외롭지가 않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요,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을 소유하신 살아 계신 아버지이신 것같이 성령님도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의 영이신 것입니다. 그 인격의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신자가 성령님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성적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인격도 있고 지성도 있지만 죄로 인하여 영적 통찰력이 무디어져 있기 때문에 신비하신 성령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님을 우리의 이성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상징적 비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성령님의 어떤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성령님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많은 조심성이 요구됩니다.
1. 생수와 같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성령님을 생수에 비유하셨습니다.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시원한 생수는 목마른 자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며 특별히 한 여름에 마시는 얼음 생수는 최고의 상쾌함을 제공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생수는 인간이나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연장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물이 없는 메마른 광야나 사막에서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큰 잔치를 베풀었을 때에 몸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일이 발생했고 이로 인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져 목이 마르자 하갈이 하늘을 향하여 대성통곡했을 때 하나님이 아이의 울음을 들으시고 하늘로부터 하갈에게 나타나시고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에게 물을 먹여 생명을 유지하고 그곳에서 살면서 아들을 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샘물을 주시지 않았다면 오늘 날의 중동 지방에 사는 아랍인들의 생존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정결하게 하며 식물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합니다. 만약에 이 땅에 물이 없었다면 부패한 만물로 인하여 악취가 나고 썩어 모든 피조물이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도 목마른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줍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모든 환경을 다 소유하더라도 만족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중국의 진시황이 삼천 명의 궁녀를 거느렸어도 만족하지 못했고, 솔로몬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렸어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수명이 천 년을 살았어도 만족함이 없었고, 세상을 호령하고 정복한 위대한 왕들이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어떤 환경이나 삶 속에서 항상 목마름을 느끼며 부족함으로 궁핍하고 홀로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내가 홀로 감옥에 있어도, 내가 병이 들어 죽음이 눈앞에 와도, 만족하고 즐겁게 살아갑니다. 이런 상태를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만족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소원을 들어주시고 이적과 기적과 표적으로 내 인생이 잔을 넘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항상 외우고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시103:3-5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예수님도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은 바로 주님이 주시는 생수입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자는 인생을 살아갈 동안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물이 세상의 더러움을 씻는 것 같이 성령님은 죄로 더러워진 인간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성도에게 구원을 적용시켜 주시는 것은 먼저 죄의 결과로 야기된 죄책과 그에 대한 형벌을 소멸시켜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죄책의 제거와 형벌의 소멸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성도가 예수를 믿었을 때 법적으로는 구원을 얻은 것이 확실하지만 실제적으로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정결하게 하심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님의 정결의 역사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성령이 오시면 일어날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양심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책망하시는 죄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반복되어 일어나는 죄, 즉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죄가 아니라 인간은 본래 죄인이라는 원죄 즉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존재 자체를 불신하는 죄를 가리킵니다. 이 죄는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앙이 영원히 멸망 받을 근본적인 죄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택한 자로 하여금 원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하도록 하고 중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예수를 믿지 않는 죄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의’를 깨닫게 하시는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의 결과가 영원한 멸망이라는 것이 소극적인 것에 반하여, 적극적인 것은 구원으로 이끄는 참 의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원죄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진 인간은 참 의가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대개 인간이 생각하는 의는 인간의 수양이나 교육이나 훈련으로 얻어지는 상대적 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로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참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성취하신 죄의 근본적인 해결책인 보혈의 공로로 인한 하나님의 의입니다.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성령께서는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불신앙의 죄를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한 의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절대 가치를 지니는 의의 자리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께서는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즉 이 세상이 악에 처한 것과, 악한 것이 세상을 통치해 왔으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그 악이 쫓겨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는 세상의 통치자는 인간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인간이 만든 법에 순복하고 그 권력에 복종하며 죄와 악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악으로부터 택한 백성을 불러내시고 참 자유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도 역시 그에 대하여 못 박힘으로 다시는 세상이 그를 주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악한 세상이 진리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히2:14-15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성령은 생수와 같이 죽은 생명을 소생시킵니다.
*계22:1-2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예수님이 세우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은 에덴동산의 강과 다릅니다. 에덴동산의 강은 각종 식물에게 생수를 공급했지만 이 강물은 생명나무에게만 생수를 공급하는 특별한 강입니다. 즉 영원하도록 살아 있는 생명나무에게만 생수를 공급하여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인 성도들은 이 생명수 물을 날마다 마심으로 넘치는 생명력을 유지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얻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씻음을 통하여 정결하게 되며 거룩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불과 같은 성령입니다.
세례 요한은 장치 오실 메시야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마3:11-12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의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불의 혀같이 강림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불로 상징되는 것은 불의 성질이 성령의 역할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불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아버립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는 것은 집안을 환하게 밝게 비추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는 다시는 어둠에 잡히지 아니하고 빛에 거하며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 당시의 로마는 온갖 추행과 더러움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롬13: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비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불은 차가운 것을 뜨겁게 만듭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사랑에 대하여는 냉혈동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 대신에 미움과 증오가 들어오고 헌신과 수고 대신에 시기와 질투가 생겨나며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악을 도모하고 살아갑니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약육강식의 법대로 이웃을 살상하고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국가 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오늘 화물연대가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물류산업이 중지되고 온 나라가 이로 인하여 경제적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유류 가격이 상승하고 물가가 오른 것이 저들만의 일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코로나 사태로 전 세계가 난리법석입니다. 이런 환경을 역이용하여 자기들의 배만 채우겠다고 파업을 하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대안도 없고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는 파업을 중지하고 대화로 국면을 풀어나가야 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믿는 사람은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면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충만하게 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무엇보다 피차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이 차가운 인생은 세상을 얼음 왕국으로 만들어버리고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불은 단단한 것을 녹게 만듭니다. 사람이 은이나 금을 구하기 위해서는 돌을 가루로 만들어 도가니에 넣고 풀무 불에 끓입니다. 열 번이나 끓이고 거른 후에야 순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불이 없었더라면 사람은 은이나 금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불이 없다면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악한 마음을 지혜롭게 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 욥은 이러한 진리를 터득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사도 베드로 역시 이 사실을 증거 하였습니다.
*벧전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도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불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태워버립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그 죄악이 너무나 크고 무거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간과하지 않고 심판을 단행하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유황 과 불을 비처럼 내려 도시 전체를 불태워버렸습니다. 그 성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서 난 것을 다 불태우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지역을 바라보니 성이 불타는데 그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 같이 치솟았다고 했습니다. 옹기 가마의 불의 온도는 대략 1200도-1500도에 이릅니다. 그렇게 뜨거운 불로 도시와 사람과 가축과 식물을 다 태워 죄악을 멸해버렸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불과 같이 영적으로 어두운 마음을 밝히시고 부정하고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차가운 마음에 뜨거운 감화를 주시고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솜처럼 부드럽게 하시며 온갖 부정한 것을 태워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3. 비둘기 같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머리위에 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마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비둘기는 더러운 곳을 피하여 깨끗한 곳에 살며 더러운 먹이도 먹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다 지나고 물이 줄어들고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을 때 노아가 물이 걷힌 것을 알기 위하여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내었더니 까마귀는 썩은 고기를 먹는 새이기 때문에 방주로 돌아오지 않고 떠나갔습니다. 노아가 이번에는 비둘기를 내보냈더니 비둘기는 발붙일 땅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고, 다시 칠 일을 지나서 비둘기를 내보내었더니 비둘기가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으며 다시 칠 일을 지나서 비둘기를 내보내었더니 비둘기가 마른 땅에 정착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비로소 물이 땅에서 걷힌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비둘기는 정결한 새이기 때문에 비둘기를 순결의 상징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비둘기에 관련하여 묘사한 것은 성령이 죄악을 회개하게 하시는 순결하고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비둘기는 분쟁과 다툼이 없는 평화의 새입니다. 비둘기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새들을 공격하지 않으며, 같은 비둘기끼리도 다투지 않습니다. 다른 새들의 먹이를 탐내지도 않습니다. 비둘기는 다정하며 항상 평화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의 주변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이와 같이 분쟁과 불화를 없애고 평강과 희락을 주시는 평화의 영이십니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비둘기는 온유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도 온유하신 분으로서 길이 참으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예수님도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주하시면 열매를 맺게 되는데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온유’가 있습니다.
비둘기는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사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 소개하실 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둘기가 전쟁의 승전 소식을 전하는 것과 같이 성령님은 성도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날마다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4. 바람 같은 성령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바람으로 표현합니다. 욥기에 나오는 엘리후는 성령에 대하여 ‘전능자의 숨결’이라고 했습니다.
*욥32:8-9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성령을 바람에 비유한 것은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 또한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의 바람도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바람이 불 때에 우리가 느끼고 아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 193장에 ‘성령의 봄바람 불어오니 믿음의 새싹이 움터오고 / 성령의 단비로 흡족하니 메마른 영혼을 적셔주네. / 불같은 성령 임하시니 마음에 기쁨 넘쳐나네. / 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믿음이 자라나고 마음에 풍족함을 얻으며 기쁨으로 넘쳐납니다. 항상 기쁘고 복이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자들은 세상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며 하나님 나라의 역군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에스겔 선지자는 그곳에서 마른 뼈들이 일어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이 성령의 역사로 사방에서 생기를 얻어 큰 군대가 되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사망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 나라의 큰 군대가 일어서는 것입니다.
5. 기름 같은 성령입니다.
성경은 신, 구약을 막론하고 성령을 기름 부음에 연관시킵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삼상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 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선지자들이나 제사장들도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하나님의 선지 활동과 제사장의 시역을 감당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묘사로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을 것을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고, 신약에서도 그 사실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예수를 믿는 성도들도 성령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이처럼 성령을 기름에 비유한 것은 기름이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하여금 사명을 감당할 힘을 상징하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기름 부음을 통하여 이 세 가지 직분을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영적인 힘의 근원이시며 기름이 불을 밝혀주는 것처럼 세상을 밝게 하시며 기름이 병자를 치료하는데 사용된 것처럼 성령께서도 영육 간에 병을 고쳐주십니다. 또한 기름이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고 향기 나게 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은사를 주셔서 성도로 하여금 덕을 세우게 하시고 경건의 삶을 유익하게 하십니다.
6. 인장 같은 성령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받는 것을 ‘성령의 임 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고후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이는 인장이 소유권을 표시하는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나타내며 도장이 권위를 나타내는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권위를 지녔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이 애굽 왕의 인장을 받은 것처럼, 바사 제국의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인장을 받아 나라를 다스린 것처럼 우리도 성령님의 권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인치심은 성령께서 성도가 천국에 가는 보증이 되시며 영원히 구원받을 자로 인정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7. 술 같은 성령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받은 성도의 외적 상태를 마치 술에 취한 것과 같이 표현합니다.
*행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바울 사도 역시 성령 충만 받은 것을 술 취하는 것과 대비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상태가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의 기쁨처럼 기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시104:15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술이 술 취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그 마음과 생각을 성령께 지배당하고 통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8. 비 같은 성령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려 대지를 축축이 적시듯이 갈급한 심령에 임하시는 성령을 비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욜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건조한 팔레스틴 지방에 내리는 비는 대지를 부드럽게 함으로써 파종을 가능하게 하며 식물이 뿌리를 내려 잘 자라게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임하시면 굳고 강퍅했던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옥토에 떨어진 것 같이 뿌리를 내리며 성장하여 백 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토마스 아담스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은 구별된 세 격이 있는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성령은 참 되시고 변함이 없으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한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였고, 바우엔은 말하기를 ‘성령은 당신의 친구이다. 성령은 친구를 위해서 함께 거하며 가르치며 훈계하고 축복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상징으로 비유된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자이시며 우리를 돕고 가르치고 중재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환영하고 모시고 함께 살며 항상 경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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