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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임진,정유재란>홍순언, 석성, 편갈송은 누구인가?.
이장희 추천 0 조회 116 15.12.25 22: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홍순언, 석성, 편갈송은 누구인가?.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일등공신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는 인물은 해전의 일등공신 성웅 이순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못지 않은 공적을 이룬 분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바로 그분이 여러분의 선조이신 홍순언이십니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은 아니지만 종계변무사 통역관이었던 홍순언과의 인연으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조선 200여년의 숙원인 종계변무를 해결해 주고,

임진왜란시 백척간두에 서 있는 조선 원병을 가능케 하여

조선을 위란의 위기에서 구한  분입니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고종매부간인 편갈송 장군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왜적이 점거하고 있던 평양성 보통문을 함락하여 결정적인 승리로 이끌어

왜적이 조선에서 물러가게 하였고,

 

정유재란시에명나라 마귀제독이 남원 전투에서 패하자

그 지휘권을 중군장군인 편갈송장군에게 넘겨

편갈송 장군은 천안 직산 소사평에서 신출 귀몰한 작전으로 왜적 대군을 섬멸하여

정유재란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일등공신은 조선인으로 홍순언, 이순신이 있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과 명나라 유격장군 편갈송 장군이 일등공신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는 홍순언의 직계손인 남양홍씨 예사공파 종친들이 계시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후손 대표 님과

명나라 유격장군 편갈송의 후손 대표님이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지금부터 삼대 종친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이었는지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홍순언은 선조 (1582년경) 종계변무사 일행으로 통역관으로 명나라에 가게 됩니다.

통주 어느 유곽에서 명나라 전 호부시랑(유개하) 딸인 유낭자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임진왜란(壬辰倭?) 때 명나라 병부상서(兵部??) 석성(石星)의 부인(夫人) 유씨(柳氏)석성(石星)이 예부시랑(?部侍?)에 임명받고 나서 재취(再娶)한 부인(夫人)이다.

 

유씨부인(柳氏夫人)이 젊었을 때 부모가 질병으로 모두 죽었다. 무남독녀  유씨(柳氏)는 부모님의 장례를 치루고 고향인 절강성에 안장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부득이 몸을 기관(妓館: 유곽)에 팔아야 만 하였다. 유씨(柳氏)가 기관으로 팔려갔을 때 요행으로

조선어(?語) 통역관(通?官) 홍순언(?彦)을 우연히 만났다.

홍순언(洪?彦)은 몸값을 지불하고 유씨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줌과 동시에 부모님의 유해를 절강성 고향에 안장하도록 도와주었다. 그후 유씨(柳氏)는 홍순언((洪?彦) 통역관(通?官)의 은덕(恩德)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유씨가 예부시랑(?部侍?) 석성(石星)의 부인(夫人)이 된 후 까지도 홍순언(洪?彦)을 계속 찾고 있었다. 마침 홍순언(?彦)이 사절단을 이끌고 명나라를 내방했을 때 유씨(柳氏) 부인은 예부시랑(?部侍?)인 자기 남편에게 홍순언(洪?彦)이 자기의 몸값을 치루고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준 은인(恩人)이라고 말하였다. 

 

 

그후 홍순언은 귀국하여 공금횡령으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호시탐탐 매번 조선의 사신을 채킹하였으나 홍순언은 오지 않았습니다.

홍순언이 옥에 갇히고 3년째 선조는 엄명을 내리기를 이번도 종계변무사가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올시는 역관의 목을 베겠다는 엄명이 내려졌기에 다른 역관들이 돈을 모아 홍순언 공금을 해결해 주고, 대신 홍순언이 역관으로 가게되어 유낭자를 만나게 되고, 유낭지 남편 예부시랑 석성은 성을 다해 조정을 움직여 결국 조선 200여년간의 숙원인 종계변무를 해결하게 됩니다.

 

---

종계변무(宗系辨誣)

 

종계변무(宗系辨誣)란 조선이 명나라 사적(史籍)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줄 것을 명나라 조정에 요청한 일을 말한다.

 

당시 명나라 사적(史籍)에는 이성계의 조상이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는 고려 말 이성계의 정적(政敵)이던 윤이(尹彛) ? 이초(李初)가 명나라에 도망가서 무고한 때문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을 처음 안 것은 태조 3년(1394)이었다.

 

이인임은 우왕 때 이성계의 정적이었는데, 이성계를 그의 아들이라 한 것은 조선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 사건은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문제로 부각되어 태조 때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고쳐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시정 약속만 하고 실현되지 못하여 이는 역대 왕들의 가장 큰 현안문제가 되어왔다.

 

그럼에도 중종 13년(1518) 중국에서 돌아온 주청사(奏請使) 이계맹(李繼孟)은 《대명회전》 조선국조(朝鮮國條)의 주에 명나라 태조의 유훈(遺訓)이라 해서 “이인임의 아들 단(旦: 태조 이성계)이 4왕(恭愍 ·禑王 ·昌王 ·恭讓)을 시해하였다”고 정정되지 않았음을 보고하였다.

 

남곤(南袞)이 주청사로 가서 시정을 요구하는 등 중종 때만 해도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뒤 선조 17년(1584) 종계변무주청사 황정욱(黃廷彧) 등이 가서 정정키로 확정을 보고, 1588년 유홍(兪泓)이 고쳐진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와 일단락되었다. 선조는 유홍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친히 모화관(慕華館)까지 나아가 명나라의 칙사(勅使)를 맞았으며, 공을 세운 유홍에게는 벼슬을 올리고 노비와 전토(田土)도 내렸다. 또한 선조는 종묘에 가서 종계의 개정을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으며, 백관에게도 벼슬을 올려주었다.

 

....

 

석성부인은 직접 보은이라고 수를 놓아 보은으로 비단 열필씩 열괴짝을 선물하게 됩니다.

 

사신(使臣) 일행(一行)은 유씨(柳氏) 부인의 도움으로 종계변무사의 임무를 달성하고 사신일행(使臣一行)의 공덕으로 인하여 홍순언(?彦)은 광국공신(光?功臣) 이등공신(二等功臣)에 봉해졌으며 동시에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졌다.

 

유낭자 어머님이 바로 편씨입니다.

외조부님은 명황제 태자태사이셨을 만큼 명문가로

일편단심 사건으로 명황제로부터 편씨를 하사받은 가문이었기에

그 몸가짐, 그 기개, 언행 예의에 감동하였으리라 짐작됩니다

 

그후 10연년이 흐르고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하게 됩니다.

 

조선에서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조선과 일본이 짜고 명나라를 침공하려는 술수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이 임진왜란 1년전부터 세작을 풀어 선무공작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끈이 있는 홍순언을 활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를 맞추어 석성은 명나라 병부상서가 되어 있었습니다.

홍순언의 설명을 들은 석성은 명나라 조정을 설득하였습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보낸 서찰 정명가도곧 명나라 가는 길을 비켜라.

서장을 증거물로 , 순망치한,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 라는 논리로 조선이 없어지면 명나라에 후한이라는 논리로 적극 파병을 주장하여 조선 파병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만약 그 때 때를 맞추어 파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

홍순언의 인연 석성이 없었다면 , 조선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명나라 조승훈이가 이끄는 원병이 1차로 오천여명이 참전하였으나 평양성 전투에서 무참하게 패하여 도주하였고, 2차로 이여송을 제독으로하여 48천여명이 참전하였을 때 명나라 최고 정예부대 유격장군으로 편갈송장군이 약 이만오천여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습니다.

 

난공불락인 평양성 전투에서 편갈송 부대가 평양성 보통문을 함락하여 평양성을 함락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왜적들을 패퇴시켜 결국 왜적들은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이나자 명나라에서는 일대 소동이일어났습니다.

이여송, 석성, 마귀, 편갈송, 심유경은 남쪽 출신 인사들이었는데,

북쪽 출신인 양원, 양유익, 이방춘, 이화룡 이런 인물들이 들고 일어나

병부상서 석성을 탄핵하였습니다.

조선파병의 원흉으로 지목을 받아 석성은 투옥 되었고

큰아들과 유씨부인은 유배를 당하였고 심유경은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임진왜란 3년후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였습니다.

명나라는 병부상서 전락, 경락동정제독 마귀, 경리 양호, 중군문섭병부상서 제독 편강송 이하

199,307명으로 참전하였습니다.

 

명나라 제독 마귀는 명나라 우군, 좌군을 거느리고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는 왜적을 맞아 남원에서 싸웠으나 대패를 하고 그 지휘권을 중군제독인 편갈송 장군에게 지휘권을 인계하게 됩니다.

 

편강송 장군은 예상하기를 왜적이 반듯이 한양으로 진격하려면 천안을 거쳐 진격할 것으로 예견하고 직산 소사평에서 필사의 각오로 매복 신출귀몰한 작전을 세우고, 왜군의 도주로까지 매복시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왜적은 그 때부터 후퇴하여 결국 울진 서생포 왜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때 만일 소사평에서 패하였다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서생포 전투에서 명나라 양호장군은 왜장에 속아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 주지만 그 약점을 이용하여 왜적은 대 공격을 하여 큰 피해를 당하게 됩니다.

조선군과 명나라 군이 합동작전으로 작전을 할 때 조선 정기룡장군이 너무 깊숙이 들어가 왜적에 포위되었으나 구사일생에서 편갈송장군은 휘하 장병 수백명을 이끌고 들어가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기룡장군은 경주에 있는 본영에 있는 유성룡, 권율장군께 보고를 할 때

명나라 양호장군의 허물만 보고하였습니다.

 

양호장군은 문책이 두려워 자기 휘하의 정응태로 하여금 명나라 본국에 고변하게 하여

자기의 잘못을 편갈송장군의 허물로 보고하고,

귀국하여 북부 출신들이 조정을 장악하였습니다.

 

편갈송장군은 귀국을 포기하였고 남쪽 출신 휘하 장군들인

천만리,절강신씨, 절강 팽씨, 삼공마씨, 소주가씨등이 그 때 귀하한 성씨들입니다.

 

석성은 자기 처의 은인 조선의 나라를 도와준 죄목으로 하옥되어 결국 옥사하게 됩니다.

석성의 유언으로 둘째 아들은 먼저 조선으로 망명하여 성주 석씨가 되었으며,

석성이 죽자 유씨부인과 장자인 석담은 조선으로 망명하였고, 조선은 해주 땅을 하사하여

해주최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명나라 유민을 계속 잡아 들이니

결국 안전한 현 후손들이 거주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거주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홍순언의 업적, 공적을 아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또한 명나라 사람이지만 우리나라가 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때를 맞추어 명나라 원군을 이끌어 내고 그 죄목으로 목숨까지 받쳐야했던 석성,

 

명나라 장군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결정적 승리로 이끌어 낸

편갈송장군의 업적과 공적을 국민에게 알리어 역사가 제대로 평가 받고

그 업적과 공적을 기념하고 선양하는 사업이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져야하겠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출처 http://blog.daum.net/hl4hez/882

 

 

 

한국(韓國)  석씨(石氏)  유래(由來)

 

이씨조선(李氏朝?) 때 임진(壬辰)、정유(丁酉) 양란(??)과 병자호란(丙子胡?)을 거쳐 20 여 성씨(姓氏)가 조선으로 귀화(?化)하였다.

 

귀화(?化) 한 이유(理由)는 첫째  임진(壬辰)、정유(丁酉) 양란(??) 명(明) 나라 군대로 조선에 파견된 군사들이 개인 사정으로 인하여 명 나라로 귀국하지 못하고 조선에 귀화(?化)한 사람들이 있다.

 

예를들면 소주가씨(??氏)광주동씨(?州董氏)두능두씨(杜陵杜氏)절강서씨(浙江徐氏)절강시씨(浙江施氏)절강유씨(浙江?氏)절강장씨(浙江?氏)영양천씨(??千氏)추계추씨(秋溪秋氏)절강팽씨(浙江彭氏)와 절강편시(浙江片氏)전주호씨(全州扈氏)진양화씨(晋?化氏) 등이 있다.

 

둘째 명(明) 나라 군대로 조선에 가서 싸우다가 귀국은 했지만 명(明) 나라가 청(?) 나라에 망함과 동시에 후손들은 조상들이 조선에서 전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조선으로 귀화하였다.

 

이러한 성씨들은 상곡마씨(上谷麻氏)해주석씨(海州石氏)강시씨(浙江柴氏)섬서이씨(?西李氏)광동진씨(???氏) 등이 있다.

 

셋째  명(明) 나라 때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조선에 주저앉은 사람들인데

예를들면 파능초씨(巴陵楚氏)파능호씨(巴陵胡氏) 등이 이에 속한다.

 

임진왜란(壬辰倭?) 때 명나라 병부상서(兵部??) 석성(石星)의 부인(夫人) 유씨(柳氏)석성(石星)이 예부시랑(?部侍?)에 임명받고 나서 재취(再娶)한 부인(夫人)이다.

 

유씨부인(柳氏夫人)이 젊었을 때 부모가 질병으로 모두 죽었다. 무남독녀  유씨(柳氏)는 부모님의 장례를 치루고 고향인 절강성에 안장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부득이 몸을 기관(妓館: 유곽)에 팔아야 만 하였다. 유씨(柳氏)가 기관으로 팔려갔을 때 요행으로

조선어(?語) 통역관(通?官) 홍순언(?彦)을 우연히 만났다.

홍순언(洪?彦)은 몸값을 지불하고 유씨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줌과 동시에 부모님의 유해를 절강성 고향에 안장하도록 도와주었다. 그후 유씨(柳氏)는 홍순언((洪?彦) 통역관(通?官)의 은덕(恩德)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유씨가 예부시랑(?部侍?) 석성(石星)의 부인(夫人)이 된 후 까지도 홍순언(洪?彦)을 계속 찾고 있었다. 마침 홍순언(?彦)이 사절단을 이끌고 명나라를 내방했을 때 유씨(柳氏) 부인은 예부시랑(?部侍?)인 자기 남편에게 홍순언(洪?彦)이 자기의 몸값을 치루고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준 은인(恩人)이라고 말하였다.

 

사신(使臣) 일행(一行)은 유씨(柳氏) 부인의 도움으로 종계변무사의 임무를 달성하고 사신일행(使臣一行)의 공덕으로 인하여 홍순언(?彦)은 광국공신(光?功臣) 이등공신(二等功臣)에 봉해졌으며 동시에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졌다.

 

그후 석성(石星)은 임진왜란(壬辰倭?) 때 수 만명의 지원병(支援兵)을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어 평양성(平壤城)과 한양(??) 수복에 크게 협조하였다

 

석성(石星)은 정유(丁西) 양난(雨?)에 명군 파병과 관련되어 반대파의 모함으로 투옥(?) 순국(?)하였다.

 

유씨(柳氏) 부인(夫人)의 두 아들조선(?)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에 귀화(?化)하여 해주에 정착하였다. 유씨(柳氏) 부인은 황해도 해주에서 사망하였다.

 

그후 유씨 부인의 두째 아들은 해주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서 그 후손들은 조선의 영남지방(?南地方)에 정착하였으며 본관(本?)은 해주(海州) 석씨(石氏)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다음은 한국한성적기원(???姓的起源)에 수록되어 있는  원문이다 

 

韓國石氏由來(?,???姓的起源》)  

 

????壬辰、丁酉??和丙子胡?有二十余姓氏?化,此些姓氏??化之理由分??:一、壬辰、丁酉????加明朝援???兵各因各人情事不返??化朝?:如??氏、?州董氏、杜陵杜氏、浙江徐氏、浙江施氏、浙江?氏、浙江?氏、??千氏、秋溪秋氏、浙江彭氏、浙江片氏、全州扈氏、晋?化氏等皆??。二、?加明朝援???兵后??明朝??????走避往其先人曾立下?功的朝???化之:如上谷麻氏、海州石氏、浙江柴氏、?西李氏、???氏等均??。三、明末以使臣身???便定居下?者:如巴陵楚氏、巴陵胡氏等?于此?

 

壬辰倭?때?兵部??石星之夫人柳氏,?石星任?部侍??所再娶之夫人。柳氏夫人年????不幸罹疾去逝,?生女之柳氏无力?父母安葬于浙江故?,不得已只得委身???身。柳氏??偶遇朝???官洪?彦,蒙其好意代??身,????下葬浙江故?柳氏念念不忘洪?官之恩德,?使在成??部侍?石星之夫人之后,?????恩人,??彦率辨?使一行前???其恩德,柳氏向?部侍?的丈夫?述洪?彦救?之恩。因此,使臣一行因柳氏之助???成其目的,使臣一行之功得以光?功臣策?,洪?彦亦以二等功臣??,同?受封?唐城君。其后,洪?彦在壬辰倭??,于派遣?万援兵???助收?平壤城???之事上,亦扮演了?定性之角色。后?石星因丁西雨???,柳氏夫人二子???海州?化定居,柳氏死于?地,其二子往南走避,其后?世居?南地方,本??以?初定居之海州?之.

 

절강(浙江) 편씨(片氏)의 유래

 

절강 편씨(浙江 片氏)의 유래는,

 

중국에서 우리의 조상은 延平 李氏(연평 이씨) 이며,

유명하신 우리 조상으로는, 南宋의 현유(賢儒)이시고 주희(朱喜, 朱子)의 스승이시며 는 원중(原心仲)이신, 문정공 이동(李 洞),

 

그리고, 우리 片氏의 시조이시고,

명나라의 영종황제(英宗皇帝)로부터 皇太子를 가르치는 太子太師로 제수 받으시고

성씨를 李氏에서 片氏로 사성(賜姓)받으신 문충공(文忠公) 편지(片 址) 등이 계신다.

 

우리의 중국 시조는 충신 문충공(文忠公) 편지(片 址)이시다.

 

시조께서는 명나라의 영종황제가 궁인 원씨(袁氏)를 총애하여

원씨(袁氏)가 황후가 되려고 암략(획책)하니

이에 반대하고 충언을 하시다 옥살이와 귀양을 다녀오기도 하신

충신 문충공(文忠公, 또는 太師公)이시고,

뒤에 文忠公의 충절에 감읍한 英宗皇帝로부터 皇太子를 가르치는 太子太師로 제수받으시고

성씨를 李氏에서 片氏로 사성받으셨다.

 

그때 비로소, 片氏가 중국에서 탄생되셨고

이시기가 우리나라로는 세종 251443년이었다.

 

文忠公의 세 아드님께서는

첫째 이부시랑(侍郞) 편일(片 金益),

둘째 한림학사(翰林學士) 편전(片 金全),

셋째 아드님 진사(進士) 편명(片 金名)이 계신다.

 

이부시랑공(侍郞公) 편일(片 金益)께서는

절강성(浙江城), 어양성(漁陽城),湖南城(호남성)의 유림(儒林)들에 의해서

절강백(浙江佰)에 봉해지셨고, 정무공(貞武公)의 익호를 받으셔서,

절강(浙江)으로 우리의 편시의 본관을 삼게 되었다.

이 때가 1451, 조선시대 문종 1년이었다.

 

절강성(浙江城)은 중국의 13성 가운데 하나이고 남경과 가까운 要地이다. 

절강백(浙江佰)께서는 시호가 정무공(貞武公)이시며,

도독공(都督公 片碣頌)의 증조부(曾祖父)가 되신다.

 

浙江 片氏(절강 편씨)의 우리 나라 시조는

중국에서 임진왜란 때 원정군으로 들어왔어 빛나는 공을 남기시고

경주 금오산에 은거하신, 도독공(都督公) 편갈송(片碣頌)장군이시다.

 

시조께서는 중국 명나라 충신으로 우리나라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침략하여

잔인무도한 놈들의 횡포가 극심하여 조선이 아주 어려운 곤경에 봉착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아주 옛날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두 차례나 침공하여 우리나라를 괴롭힌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시고,

 

왜놈(倭國)들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그 영화로운 생활과 벼슬을 버리시고,

 

명나라 원정군 이여송장군 때에 어양총절사 겸 군무총병유격장으로,

마귀장군 때에는 경략 중군도독 겸 병부상서 총독군문 부원수로 임명되고

두 번씩이나 용감하게 참전하셨고,

선봉장으로 공격의 제일 선봉에서 울산 등지에 왜장(倭將) 가또오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이끄는

왜군(倭軍)의 주력부대를 공격하여 한 번도 패하지 아니하시고 수많은 전과를 올리셨다.

 

이순신장군은 바다에서,

片碣頌(편갈송)장군께서는 주로 경상도 전라도지방 등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

놈들로부터 우리나라를 방어하시니, 울산 방어진 등지에 승첩비가 세워지고,

또한 사당이 세워져서 제()를 올림 받게 되셨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의 간신배 정응태(丁應泰)의 모함 때문에

명나라 본국으로 돌아가시기가 어려워지고 명나라가 싫어져서 돌아가지 못하셨으나,

명나라에 있던 세 아드님들

첫째 금자광록대부 일명로어양안절사 풍세(豊世),

둘째 풍원(豊源),

셋째 산보(山甫)아드님들께서 모두 부모를 찾아와서 함께 사시며

경주 금오산에 은거하시고

이때부터 우리 편시가 우리 나라에 안착하여 살게 되었다.

 

 

쾌지나 칭칭 나네’의 유래

 

임진왜란(1592)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장 이었던 "가토 키요마사 "는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1597.7.15)"으로 다시 조선을 침입하여 울산에 성을 축조해 주둔을 했다.

 

이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1597년 음력 12월 23일 가토 키요마사의 군사 15.000명이 지키는 울산(서생) 왜성을 공격했다.

 

성이 완전히 포위된 가토 키요마사의 군대는 말을 죽여 식량을 삼고 그 피를 마실 정도로 고통을 받았지만 왜의 구원병이 조.명 연합군의 방위선을 뚫음으로서 연합군은 끝내 울산 왜성을 함락 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가토 키요마사는 히데요시(풍신수길) 의 죽음으로 울산 왜성에서 철수를 하게 된다.

 

이때 가토 키요마사 (가등청정)가 철수 하는 것을 본 울산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고 환호를 하면서 노래를 했는데 이것이 경상도식 발음으로 변형되어 지금의 경상도 민요 "쾌지나 칭칭 나네"가 되었다고 한다.

 

조.명 연합군에게 그렇게 식겁 당하고 돌아간 가토 키요마사는 울산성에서 당한 뼈아픈 경험을 살려 전쟁에 대비해 쌓은 성이 구마모토 성인데 비상 식량으로는 말린 고구마 줄기로 다다미를 짜면서 속은 말린 고사리로 채워넣고 성 안에 120여개의 우물을 파고 식량으로 쓰기 위해 은행나무를 많이 심어 구마모토성을 은행나무 성이라고도 한다네요.

 

가토 키요마사의 구마모토성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슬픈역사가 숨겨져 있는 성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지도 420년이 되었다. 임진란 기간중 우리측에서는 사명당 등이 나서 4차례나 울산(서생) 왜성에 찾아가 키요마사에게 휴전을 제의 했으나 너무나 큰 것을 요구 하였다.

그중 하나가 조선8도중 남쪽 4개도를 양여하라는 것이다

 

결국은 명나라 "마귀제독"과 "편갈송"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물러났지만

그동안에 많은 울산지역 사람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었다.

전후 마귀장군과 편갈송장군은 울산의 자연환경에 반해 울산에 정착해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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