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8일 (월) 그림과 친하지 않은 사람도 이중섭(1916~1956) 이란 화가는 알고 있을꺼예요. 얼마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가격의 그림이였던 황소를 그린 작가니까요. 하지만 이중섭 하면 황소 보다는 은지화를 그린 화가, 일본인 부인인 야마모토 마사코(남덕) 와 두 아들 태현과 태성을 향한 무한한 사랑을 그린 화가. 전쟁 중 가족과 떨어져서 지독한 가난과 고독 속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난 불우했던 화가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한명회(1415~1487. 73세졸)의 묘에는 문인석은 없고 무인석만 두 쌍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무인석은 왕릉에만 세울 수 있는줄 알았었는데 그렇지도 않았는지 묘에 무인석을 세운 사대부의 무덤이 흔치는 않지만 도처에 있습니다. 조선의 8대 임금인 성종때 국조오례의를 완성하고 김장생(1548~1631) 이 가례집람을 편찬 하기 전 까지는 고려시대의 관혼상제 의식과 병행해 중국의 주자가례에 준해 의식을 했다고 하는데 사대부도 무인석을 세울 명분이 있었나 보네요. 김장생의 가례집람에는 반란을 진압한 공이 있는 무인은 무인석과 문인석 각 한기씩을 세울 수 있다" 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중섭의 은지화입니다. (2015.2.7. 원본 촬영) 은지화는 전쟁 중 미술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기에 주위에서 흔히 구할 수 있었던 담배갑 속의 은박지를 펴서 못 등으로 긁어내 물감을 입힌 이중섭이 착안해 그린 그림입니다. 신숙주(1417~1475) 와 그의 고손의 묘에도 무인석이 한 쌍씩 있습니다. 이 은지화는 2015년 2월 7일 서울미술관에서 전시했던 원본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때는 촬영을 허가 했었는데 이번 덕수궁 전시에는 촬영을 금지 했습니다. 이 작품도 없었고요 오명항(1673~1728)은 이인좌의 난을 평정 했으니 무덤 앞에 무인석 하나를 세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셈이죠. 그런데 무인석만 둘을 세웠네요. 가례집람에 의하면 무인석과 문인석을 하나씩 세워야 하는데 말예요. 오명항의 무인석은 왕릉 같지는 않지만 제법 근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서울미술관에 전시했던 은지화 세 점 중의 하나입니다. 암행어사로 더 잘 알려진 박문수(1691~1756)의 묘에도 오명항 묘의 무인석에 버금가는 무인석이 한 쌍 세워져 있습니다. 박문수도 오명항의 부하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사랑(Love) 이란 제목의 은지화입니다. 알몸의 두 사람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입 맞추고 있는 모습이 외설적으로 보이나요. 그림 윗 쪽에 손가락은 또 무었을 뜻하는 걸까요.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이중섭은 그림의 일부가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 되는등, 전시회의 실패로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고 부인을 만나려던 꿈이 수포로 돌아가자 실의 속에서 결국은 병을 얻어 죽게 됩니다.
박세무의 묘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마주 보고 서 있습니다. 문무인석이 쌍을 이룬거죠. 김장생의 가례집람의 예를 따른것 같습니다. 박세무가 무관인지 난을 평정한 공이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이런 예는 다른 곳에 없는것 같습니다. 박세무의 형인 박세영의 묘도 같은 형식입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부부"란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본인이 음화라고 말 했으니까 춘화가 맞겠죠 하지만 이 그림을 보면 외설스럽다기 보다는 마음이 짠해 집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얼마나 남덕이가 그리웠으면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마음이 쓸쓸해 지는군요 박중손(1412~1466) 묘의 장명등입니다. 장명등은 불교의 석등에서 도입한 형식으로 왕릉이나 정1품 이상의 사대부 묘에만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장명등은 형식이 비슷하고 특별히 꼽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 없어 석등처럼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예가 없었는데 유일하게 이 장명등은 보물(13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유는 화창을 동쪽은 해모양으로 서쪽은 달모양으로 냈기 때문 이지요. 전후면은 네모창, 동쪽은 원형창, 서쪽은 반달형창을 낸 우리나라 유일의 장명등 입니다.
복숭아 밭에서 노는 가족"이란 은지화입니다. 박원종의 서자 박운의 묘비입니다. 묘비 전면에 특이하게 다리 세개가 분명히 보이는 삼족오를 새겨 놓았습니다. 이런 형식이 많지는 않지만 전국에서 7~8개 정도 발견 되였습니다. 수평선에서 떠 오르는 태양에서 삼족오가 날고 있습니다. 삼족오는 불 속에서 살며 용을 먹고 산다는 상상의 새 입니다.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속에 산다는 전설의 새인 삼족오의 기원이 한민족에서 비롯 되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을만큼 오래전인 고구려 시대 고분의 벽화에도 그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진은 이곤의 묘비로 삼족오가 그려진 조선 최초의 비 입니다.
두 아이' 란 은지화 입니다. 정미수의 묘 비 후면에 새겨진 달 속에 방아찧는 토끼 입니다.
부부"란 은지화입니다.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봉황이 새겨진 묘비입니다. 봉과 황이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새긴 비는 박세영(1480~1552) 의 신도비로 그의 아들인 박대립이 72세때인 1582년에 세운 비 입니다 (크릭해서 크게 보세요) 추모" 란 작품입니다. 1950년대 작품으로 은지에 새겼습니다. 운학문을 새겨 놓은 비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그림을 새긴 비도 이 비가 유일 합니다. 운학문은 안동김씨 묘역에 있는 휴암 김상준(1561~1635) 의 묘표에 있습니다. 꽃과 아이들" 이란 은지화 작품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던 인재로 태종의 총애를 받던 조말생 (1370~1447) 의 신도비 귀부입니다. 다른 귀부와 달리 이 귀부는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조말생은 천재적인 머리와 역량이 있었음에도 정승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부패 였습니다 1414년 그가 형방승지로 복무할 때 김도련이라는 자가 노비소송을 제기하자 조말생은 김도련으로 부터 엄청난 뇌물을 받고 김생이 평생 가꾼 광활한 전답과 천여 명의 노비를 빼앗고 김생 일가들도 노비로 만든 조선 최대의 뇌물 수수 사건을 일으킨 탐관오리입니다. 그럼에도 성군을 만나 목숨은 부지 했지만 저승에서도 통 했을까요. 조말생을 등에 업고 저승으로 가던 귀부가 뒤 돌아보며 이렇게 말 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인님 왜!! 그러셨어요. 왜!! 죄없는 사람을 곤경에 빠트렸어요. 지금도 후회 되지는 않으시는지요. 이중섭의 편지 글 태현 군 훌륭한 사람 태현군의 편지 고맙다. 덕분에 아빠는 감기도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학교에서 모두 같이 가서 본 영화는 재미있었니? 아빠가 한 달 후면 도쿄에 가서 자전거를 꼭 사줄께, 안심하고 건강하게...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와 태성이와 사이좋게 기다려다오. 아빠는 하루 종일 태현군과 태성 군, 엄마가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단다. 이제 곧 만날 테니... 아! 아빠는 기뻐요. 아빠 (인용,출처 : 이중섭의 사랑 가족) 태현군,태성군 건강히 잘 지내고 있지? 아빠는 오늘 종이가 떨어져서 한 장만 그려 보낸다. 태성, 태현 둘이서 사이좋게 보렴. 다음에는 재미있는 그림을 한 장씩 그려서 편지와 함께 보내줄께. 태현군, 태성군. 둘이서 사이좋게 기다려다오 아빠가 가서 자전거 사줄께. 아빠 ㅈ ㅜ ㅇ ㅅ ㅓ ㅂ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마다 보고픈 태성 군 건강하지? 아빠가 있는 경성(서울)은 날씨가 신선해서 편안하고 건강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모두와 사이 좋게, 그리고 건강하게, 좋아하는 걸 열심이 용감하게 해주기 바란다, 얼마 안 있으면 아빠가 너희들이 있는 미슈쿠로 갈 테니 태현 형과 사이좋게 기다려다오. 아빠는 또 태성, 태현이 게 물고기와 노는 그림을 그렸단다 아빠 ㅈ ㅜ ㅇ ㅅ ㅓ ㅂ (이중섭의 사랑,가족에서 옮김) 나의 귀여운 태현군. 언제나 보고 싶은 착한 아이. 나와 엄마의 태현군. 건강히 잘 지내고 있지? 공부 잘하고 친구와 활기차게 운동 잘하고... 아빠는 하루 빨리 태현 군과 만나고 싶어서 빨리 그곳으로 가려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아빠는 아픈데 없이 건강하니 태현 군도 건강하게 아빠를 기다려다오. 아빠 ㅈ ㅜ ㅇ ㅅ ㅓ ㅂ (이중섭의 사랑,가족에서 옮김) 태성 군(태성), 나의 귀여운 태성 군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니? 요전엔 엄마와 태현 형과 셋이서 이노카시라 공원에 산보를 갔다 왔더구나. 동물원의 곰이라던가 원숭이라든가 학. 모두 재미 있었지? 아빠가 이번에 가면 반드시 보트 태워줄께. 건강하고 얌전하게 기다려다오 아빠는 감기에 걸려 누워 있지만 이젠 아주 건강해졌단다. 그럼 건강하게 지내라. 아빠 ㅈ ㅜ ㅇ ㅅ ㅓ ㅂ 김제남 (1562~1613)의 신도비 입니다. 김제남의 신도비도 귀부의 머리가 뒤를 돌아 보고 있지만 조말생의 신도비 귀부와는 달리 왜인지 서글퍼 보였습니다. 귀부는 등에 있는 김제남을 위로하는 듯 보였는데요. 주인님, 이젠 모든 것 다 잊으시고 저와 함께 극락으로 가요"라고 나직이 말 하는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신도비 앞에서 저는 연민의 정에 마음이 아팟더랬습니다. 김제남은 인목대비의 아버지로 1613년 인목왕후의 아들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세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한 후 1616년 인목대비가 폐비가 될 때 또 부관참시 까지 당 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권되긴 했지만 생명이 돌아올 수는 없었네요. 대향은 매시,매분 귀여운 그대로 부터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요. 대향 중섭 구촌 그대가 사랑하는 오직 한 사람. 아고리" 님은 머리와 눈이 더욱 초롱초롱해지고 자신이 넘치고, 넘치고 넘쳐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와 눈빛으로 제작, 제작 표현 또 표현을 계속하고 있어요. 한없이 멋지고 ... 한없이 다정하고 ... 나만의 멋지고 다정한 나의 천사여 ... 더욱더 활기차고 더욱더 건강하고, 힘내요. 화공 이중섭 님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어진 아내 남덕 님을 행복의 천사로 높고 넓고 아름답게 돋아 새겨 보이겠습니다. 자신이 넘치고 넘칩니다. 나는 그대들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참으로 새로운 표현을, 또 커다란 표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만세. (아고라는 이중섭의 일본식 별명) 묘갈과 묘비는 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본래는 구분 되었으나 후대에 와서는 서로 통용 되었다 (백과사전의 묘갈 해석) 후한서(440년 범엽이 쓴 책 )에는 네모진 것은 비, 둥근것은 갈,이라고 했습니다. 당나라 때는 관직이 4품 이상은 귀부이수인 비를 세울 수 있고 5품 이하는 방부원수인 갈을 세우도록 규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대로 오며 비"와 갈"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네요. 위의 사진은 김상헌의 신도비와 묘갈 입니다. 머리가 둥근것이 신도비이고 옥개석을 올린 것이 묘갈 입니다. 갈과 비가 바뀐 사례죠. 이렇듯 갈과 비의 구분은 무의미 합니다. 제주도 풍경" 제주도 피난시절 이중섭의 행복한 일상이 들여다 보이는 작품입니다. 게를 잡으며 노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보고 있는 부부의 모습이 정감 있게 표현된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절로 즐거워 지네요. 어려운 시절에 먹을 것이 없어 많이 잡아먹은 게와 조개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중섭의 그림에는 유난히 많은 게를 등장 시켰다고 합니다. 가자!! 파도를 헤치고 극락을 찾아... 체세영의 신도비입니다. 비신을 세로로 졌습니다. |
출처: 바위솔 원문보기 글쓴이: 바위솔
첫댓글 고맙습니다.
은지화로 유명한 화가.
어려움이 많았던 화가 .
많이 배우고 ,
많은 정보 담았습니다.
류순정 묘 탐방에서 알려주셨던
장명등 얘기가 생생합니다.
다음 탐방길에 많은 도움 될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전시회에서 제대로 보지 못한 은지화랑 편지
보고 또 읽고 이중섭의 애절한 마음에 가슴 아퍼지는군요~
찍어진 담배종이에 그려진 그림이 그의 가난하고 애닯은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네요~
많은 정보보여주심에 감사드림니다.^^
전시장에서 사진을 못 찍어 서운했는데 전에 찍어둔 사진과 도록의사진을 함께 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신도비의 머릿돌도 잘 보고 갑니다.늘 건안하십시요.
문인석 사진설명과 함께 이중섭사진 설명 너무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