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보살의 참다운 행 실천 발원
중국불교서 유행…‘화엄경’ 인용
부처님 지혜는 말로 표현 어려워
고통받는 중생 구제하겠다는 원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글씨-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
智慧無邊不可說 光明照世爲所歸
지혜무변불가설 광명조세위소귀
願得普賢眞妙行 能救法界苦衆生
원득보현진묘행 능구법계고중생
지혜는 가없어서 가히 다 설하지 못함이며
광명으로 세간을 비추시니 의지할 바가 됨이로다.
원하건대 보현보살의 참다운 묘행을 얻어서
능히 법계의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리라.
이 게송은 중국불교에서 대련(對聯)으로 유행되는 내용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출처는 앞의 두 구절의 경우
80권본 ‘화엄경’에서 인용하고 뒤의 두 구절은
40권본 ‘화엄경’을 인용하여 만들어진 문구다.
운문사는 국내 내로라하는 대찰이다.
운문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면 여기에 걸맞은 문구를 주련으로 삼아야 함이
원칙이라고 본다. 그런데 주련에 글귀가 제아무리 좋아도
경전의 여기저기에서 발췌한 문장이 걸려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글씨는 일중 김충현 선생이 예서(隸書)로 썼다.
당시 서예계는 중국의 서첩(書帖)을 보고 공부를 많이 하던 시기다.
아마 선생께서 중국불교의 대련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
주련에 새겨진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첫 구절 ‘지혜무변불가설(智慧無邊不可說)’은 80권본 ‘화엄경’ 권제20 ‘십행품’에서
공덕림보살(功德林菩薩)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부처님의 종성(種性)이 단절되지 않게 모든 부처님의 보리(菩提)를
비추어 알게 하려고 게송으로 찬탄하는 내용이다.
부처님의 지혜는 가없어서 말로 다 마칠 수가 없다는 표현이다.
‘화엄경’ 곳곳에는 부처님의 지혜를 찬(讚) 하는 지혜무변(智慧無邊)이라는
표현이 무려 십여 번 나온다. 이렇듯 부처님의 지혜는 불가설(不可說)이라고 하여
말로서는 다 나타낼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화엄경’의 ‘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보면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기를 선남자여, 부처님의 공덕은 비록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은 부처님 세계의 아주 작은 티끌만치 많은 수의
겁을 계속하여 말할지라도 끝까지 다하지는 못할 것이니,
만일 그와 같은 공덕을 이룩하려면 마땅히 열 가지 크나큰
행원을 닦아야 한다’라고 했다.
두 번째 구절 ‘광명조세위소귀(光明照世爲所歸)’는
‘화엄경’ 권제17 ‘초발심공덕품’에서 법혜보살(法慧菩薩)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찬탄하는 게송 가운데 한 구절을 추려서
앞 문구의 대구로 삼았다. 광명조세(光明照世)는 진리로
세상을 비추신다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는 것이기에 귀소(歸所)라고 하였다.
권제3 ‘세주묘엄품’에서 시현궁전주주신(示現宮殿主晝神)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구절, 권제60 ‘입법계품’에서
원지광명당왕(願智光明幢王) 보살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 등
‘화엄경’에서는 광명조세라는 표현이 여섯 번이나 등장한다.
세 번째 구절 ‘원득보현진묘행(願得普賢眞妙行)’은 40권본 ‘화엄경’의
권제16 ‘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에
나오는 말씀이다. 관자재보살이 해탈문의 뜻을 밝히려고
게송으로 노래하는 가운데 한 구절을 발췌하여 문장으로 삼았다.
여기서 보현보살의 행을 찬탄하는 것은 왜일까?
불교를 신행하는 데 있어 믿음만 있고 행(行)이 없으면
날개 잃은 새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현보살의 참다운 행을
나도 실천하고자 원하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 ‘능구법계고중생(能救法界苦衆生)’은 40권본 ‘화엄경’의
권제17 ‘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에서
춘화주야신(春和主夜神)을 찾는 말씀 가운데 춘화주야신이
해탈문(解脫門)의 뜻을 다시 설명하려고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선재동자에게 게송으로 일러주는 구절이다.
능구(能救)는 능히 구제하겠다는 원력과 동시에 능력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법계(法界)는 불교도들의 사회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널리 보면 곧 사바세계다.
그러기에 사바세계에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겠노라는 원을 세우면서
이 게송은 마무리가 된다.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1615호 / 2022년 1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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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中이 그의 집 普賢齋[보현재]에 있는 큰 바위를 보고 지접 지은 한시를 쓴 작품
오른쪽사진-작품의 서재가 된 보현재의 바위
김충현金忠顯
1921년 5월 9일(음력 4월 2일) 김윤동(金潤東)의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서경(恕卿), 호는 일중(一中)이다.
김창집(金昌集)의 6형제 중 막내 김창립(金昌立)의 후예로서,
증조부 김석진(金奭鎭)은 고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조부 김영한(金甯漢)은
광무연간에 용인 군수를 지내는 등 조선 후기 학예를 주도했던 안동 김씨 집안에서 가학을 이었다.
활동사항
경성 삼흥보통학교와 중동학교를 졸업했으며, 일가이자 조부의 절친이었던
서화가 김용진(金容鎭)으로부터 서예를 익혔다. 1942년 중동학교 졸업 당시 한글 서예 학습서인
국문서법연구서(國文書法硏究書)를 완성한 이래로 한글 서예 보급에 남다른 성과를 보였다.
당시의 저술에서는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등의 옛 판본체에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가미하여
고안한 서체를 선보였는데, 정인보(鄭寅普)에 의해 일명 ‘고체(古體)’로 명명된 글씨였다.
궁중에서 쓰던 궁체(宮體)를 연구하여 한글 서예의 보급에 노력하였고, 1947년에 쓴 「유관순 기념비」는
해방 이후 최초의 한글 비문으로, 이후의 한글 비문 제작에 견인차가 되었다.
경동공립중학교·경동고등학교 국어교사,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 창립, 일중묵연(一中墨緣) 개설,
오산학교(梧山學校) 이사장 등을 통해 후진 양성을 하였고, 한국 서예가 협회장, 국전 운영위원,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등을 역임하며 서단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2006년 11월 23일 별세하였다.
작품으로 「윤봉길 열사 기의비」(1949), 「백범 김구 선생 묘비」(1950), 「사육신 묘비」(1955),
「4.19혁명 기념탑」(1960), 「탑동공원 사적비」(1967), 「삼국통일 기념비」(1977),
「인촌 김성수 선생 묘비」(1989) 등이 있다. 저서로 『우리 글씨 쓰는 법』,
『우리 글씨체』, 『서도집성(書道集成)』, 『근역서보(槿域書譜)』,
『일중 김충현 서집(一中金忠顯書集)』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