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용성 조사祖師,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다녀와서
- 진안문인협회 문학기행 동참기 -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임두환
녹음이 짙어가는 신록의 계절이다. 진안문인협회는 매년 봄철 한 차례씩 문학기행을
간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신년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신종바이러스가 멈추질 않아서 이제나저제나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 서울이나 대구, 대전, 광주에서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우리 고장 전라북도는 그런대로 잠잠한 상태였다. 조금은 걱정되었지만 집행부의 강한 의지로 예방책을 단단히 하고서
2020년 6월 27일 문학기행에 나섰다.
오늘 문학기행은 내 고장
진안鎭安 인접지역인 장수長水 ‘죽림정사’와 ‘논개생가’.
무주茂朱
‘태권도공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관광버스에 오른 회원 29명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지만 눈으로만 인사를 건네야 했다. 예전 같으면 수다를
떨고 시끌벅적 했을 법한데 모두가 마스크를 썼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우리가 처음 들른 곳은 장수 ‘죽림정사였다.
그렇지 않아도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오래전부터 백용성白龍城 조사祖師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지만
마음뿐이었다. 내 고장 진안에서 가까운 곳인데도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죽림정사竹林精舍’는 부천, 담양, 청도,
구례, 거창 등에도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장수 번암에 위치한 죽림정사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백용성 조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백용성 조사는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며, 불교계의 대표로서 1864년 5월 8일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진종震鍾,
법호는 용성龍城,
속명은 백상규白相奎다.
화엄경 등 20여 종을 우리글로 번역하고 각해일륜 등 20여 종의 어록을 저술했다.
그는 평생 독립운동과 전통불교전승에 앞장선 공로가 인정되어
1962년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건국공로훈장과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된 애국지사였다.
유교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이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877년, 14세 때의 일이다. 꿈속에서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고 불교경전을 보기
시작했고, 남원南原 덕밀암으로 출가하여 천수경의 다라니인 '천수대비주'를 암기하여 큰 경지에 오른 고승이다.
대한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서명함으로써 서대문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일본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의 일이다. 백용성 조사께서는 재판부를 향해
"조선 사람이 조선독립을
하겠다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다."
고 나무랐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출옥을 하고서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고, 대처승의 법통계승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했다.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저술에 진력하면서도 서울지하철 1,
3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 근처에 근대불교의 상징인 대각사大刻寺를 창건했다. 그는
조국독립운동과 불교발전에 이바지하다 조국의 독립을 눈앞에 두고서, 1940년 2월24일(음)
서울 대각사 대각선원에서 세수 77세로 입적했다.
장수군 번암면 ‘동화댐’과 ‘물빛공원’주변에
위치한 죽림정사는 애국사상愛國思想과
대각사상對覺思想이 조화를 이룬 시설들로 2007년 10월에 준공식을 가졌다. 기와를 올린 생가터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주변에는 수령이 꽤 될 듯한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있다. 1864년 이곳에서 태어나신 박용성 세수歲數와 가늠해 볼 때, 박용성
조사가 ‘형兄’일지 노거수가 ‘형兄’일지
모르겠다.
죽림정사를 둘러보면서도 문학회원들은 마음으로 얼을 담아갈 뿐, 말이 없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주변도 조용한데 동화댐 호수마저 고요하지 않는가? 백용성 조사님께 예를 갖추고 나오는 내 마음이 숙연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2020. 6.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