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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에 손을 댄 여인
막 5:21-34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21-34 /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마9:18-26,눅8:40-56]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다시 돌아오시자 큰 무리가 또다시 바닷가로 모여 들었다. 22) 그때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 앞에 엎드려 23) 어린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였다. `제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발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살려 주십시오.' 24) 예수께서 그를 따라 나서자 많은 무리가 함께 예수의 뒤를 좇았다. 25) 그 무리 가운데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으로 고생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치료받았으나 돈만 허비하였을 뿐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졌다. 27) 그럴 즈음에 예수께서 놀라운 이적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 속에 끼여 따라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것은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29) 과연 그 여자는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자마자 하혈이 멈추면서 병이 나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신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서서 무리들을 둘러보며 물으셨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31) 그러자 제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무리가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는데 누가 선생님께 손을 댔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32) 예수께서는 여전히 주위를 둘러보며 손댄 사람을 찾으셨다. 33) 그때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가 한 일을 그대로 말씀드렸다. 34)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네 병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건강해져라.'
본 단락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동쪽 거라사에 이적을 행하신 후 다시 건너와 갈릴리 바다 서쪽 가버나움에서 혈루증 여인을 고치신 이적입니다.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21-24) 예수님은 거라사에게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왔을 때 큰 무리가 모였습니다. 그 중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서 자신의 딸이 죽게 되었다며 고쳐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당시 회당에는 회당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덕망 있는 사람이 회당장으로 재직했습니다. 회당장은 건물의 관리 및 안내, 예배의 제반 업무를 담당했으며 사람들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당시 덕망이 높은 회당장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엎드려 간구한 것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상대방을 최대로 높이는 존경의 표시입니다. 회당장은 자신의 딸이 위급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25-29) 한편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고쳐보고자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고 가지고 있던 재산까지 모두 허비하여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런데 혈루증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어 그와 접촉하는 것도 부정한 것이었으며, 성전에 나가지도 못하였습니다(레 15:19-33). 하지만 그녀가 예수님의 옷에 자기 손을 대었을 때 혈루의 근원이 마르며 고침을 받았습니다.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0-34) 예수님은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자를 찾았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사방의 많은 사람들이 밀어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느냐며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을 만진 여인은 자신이 한 일을 알고 있기에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실토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적용: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절망적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당신 주변에 예수님을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을 전하세요.
예수님을 경험한 적도 없었고, 본적도 없었습니다. 단지 소문으로만 들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소문인 그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기로 작정합니다. 그녀는 피가 멈추지 않는 난감한 상황에서도 먼 길을 가기로 작정했으며, 여성의 신분이지만 그녀는 무지막지한 군중들을 뚫고 가장 가까이 들어갔으며, 혈이 마르지 않는 자로서 접촉하는 사람들을 부정케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과감히 만졌습니다. 이쯤 되면 그녀에게 예수님의 소문은 더 이상 소문이 아닙니다. 마치 주머니 속의 조약돌을 만지면서 조약돌이 자기 주머니 속에 있음을 믿듯이 그녀에게 예수님의 소문은 ‘소문’이 아닌 ‘믿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실행하지 않으실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기적의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 설 교 >
현실을 뛰어넘는 믿음
막 5:21-34 / 노경모 목사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고, 피할 길이 없다고 생각될 때, 그래서는 안되지만 마지막 길을 선택 합니다. 바로 자기의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 작가 겸 방송인 최윤희 씨(63), 그는 방송에 나와서 행복을 전파하는 행복전도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준 사람이었는데 2010년 10월 7일 경기도 일산의 한 모텔에서 남편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느꼈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현장에서 시신과 함께 발견된 편지지 1장 분량의 유서에는 최씨가 숨지기 전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남기는 메시지가 적혀있었습니다. 유서에는 “2년 전부터 몸에서 경계경보가 와 많이 힘들었다. 특히 최근에 폐와 심장 쪽에 이상이 생겨 해남까지 가서 수면제를 먹고 혼자 떠나려고 했는데 남편이 찾아와 119에 신고하면서 그러지 못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또 “통증이 심해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남편이 혼자 떠나보낼 수 없다고 해 결국 동반 떠남을 하게 되었다”며 동반자살을 하게 된 이유를 적었습니다. 최윤희 씨는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늦은 나이에 방송에 데뷔, ‘행복전도사’‘행복 멘토’ 등의 애칭으로 활동해왔습니다. ‘행복, 그거 얼마예요’ ‘유쾌한 행복사전’ 등 희망과 행복을 주제로 한 26권의 책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최씨의 유서 전문입니다.
떠나는 글…
저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에서 경계경보가 울렸습니다. 능력에 비해서 너무 많은 일을 하다보니 밧데리가 방전된거래요. 2년 동안 입원 퇴원을 반복하면서 많이 지쳤습니다. 그래도 감사하고 희망을 붙잡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추석 전주 폐에 물이 찼다는 의사의 선고. 숨쉬기가 힘들어 응급실에 실렸고 또 한 번의 절망적인 선고. 그리고 또다시 이번엔 심장에 이상이 생겼어요. 더 이상 입원에서 링거 주렁주렁 매달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혼자 떠나려고 해남 땅끝마을에 가서 수면제를 먹었는데 남편이 119신고, 추적해서 찾아왔습니다. 저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가 없고 남편은 그런 저를 혼자 보낼 수는 없고… 그래서 동반 떠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텔에는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 또 용서를 구합니다. 너무 착한 남편,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입니다. 그동안 저를 신뢰해 주고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 또 죄송합니다. 그러나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2010. 10. 7
만일 이 분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당신을 찾아와서 상담을 한다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이 분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저는 한 사람으로서, 목사로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 분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구나, 이것은 도저히 해결될 수도 없고 해결 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했구나, 이 분에게는 이 선택 외에는 다른 선택은 도저히 없었는가?
조금 더 인내하고 참고 견디었으면 어땠을까?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는데 왜 목숨을 끊지 말았어야 했는데..
본문에 나오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이 여인, 이 여인도 인간적으로 보면 소망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12년 동안 피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병을 앓았으니 이 분의 몸 상태는 어땠을까요? 저는 얼굴을 창백했고 훅 하고 바람 불면 날아갈 정도로 뼈만 남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다 찾아 다녔을 겁니다. 이 의사 저 의사 다 만났을 것입니다. 검사받는다, 치료받는 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제 갖고 있는 돈도 다 썼고, 병은 조금도 낫지 않고 더 심각해 져 갑니다. 이 여인에게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병이 나을 소망이 있습니까? 돈도 없어 이제 병원도 갈 수도 없고 의사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점점 더 병이 깊어가니 걷는 것조차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본문 26절은, 이 여인이 얼마나 소망이 없고 절망가운데 있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그런데 오늘 본문은 26절로 끝나지를 않습니다.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는 이 여인이 건강을 찾았다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병중에 ‘혈루증(血漏症)’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피가 밖으로 계속 흘러나오는 병입니다. 오늘날의 병명으로 ‘만성자궁츨혈증’입니다. 수시로 출혈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고약한 난치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병이 12년 동안이나 지속이 되었으니 이 여인의 몰골을 상상해보십시오. 창백한 얼굴, 바짝 마른 체구, 항상 빈혈에 시달렸고, 출혈로 인한 영양실조로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구약 성경 레위기를 보면, 몸 밖으로 피가 흐르는 혈루증은 부정한 병으로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만지는 모든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사람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 가까이 간다면 사람들이 피하거나 아니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위협을 가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 여인이 힘들었겠습니까!
이 질병으로 인한 육제적인 고통,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정신적인 고통,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고 따돌림을 받아야 하는 사회적, 심리적인 고통, 자기 자신의 존재감마저 잃어버려야 하는 상실감,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자괴감, 외로움.. 정말로 이 여인은 고통스러웠고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이 병을 고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 것 같아요. 의사란 의사는 다 만났고, 먹여야 할 약들은 다 먹은 것 같아요. 의사들한테 진료를 받고 검사를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것도 수많은 의사들에게서 진료와 검사를 받는다면.. 정말 힘든 일이지요. 우리도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것 때문에 지치고 힘들었던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검사받는 것, 진찰받는 것, 치료받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26절에 ‘이 여인은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찰받고 약을 먹고, 아마 이 여인은 지기 병을 고쳐볼까 하고 약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돈이 소비되었겠습니까! 그래서 26절에 가진 것도 다 써버리고 없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병은 점점 더 악화 되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은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거지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 여인의 육체가 회복이 될 수 있을까요? 과연 이 여인 삶이 회복이 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회복이 되었습니다. 병에서 회복되는 순간 이 여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한다면 ‘만세’를 불렀을 것입니다. 이 만큼 회복은 귀중한 것이요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복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아니 우리의 회복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기를 아버지가 원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이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회복을 선포했습니다.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선포의 의미는 육체가 회복되었을 말합니다. 인격적으로 회복되었음을 말합니다. 정신적으로 회복되었음을 말합니다. 인간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말합니다. 가정이 회복되었음을 말합니다. 사회적으로 회복되었음을 말합니다. 나아가서 영적으로 회복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여인에게 완전하고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이 여인에게 회복을 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잃어버렸던 낙원인 에덴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우리는 에덴, 즉 천국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복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각양각색의 병든 자를 회복시켰습니다. 정신적으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회복시켰습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회복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사르밧 과부의 집을 회복시킵니다. 혹독한 가뭄 때에 기름통과 가루통을 풍성하게 채우심으로 굶주림으로부터, 가난으로부터 회복시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제자 중에 하나가 빚을 잔뜩 진 채 죽었습니다. 그 아내는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두 아이를 종으로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서 그 집의 그릇에 기름을 채우십니다. 빌려온 그릇에 기름을 채우십니다. 그 것을 팔아 빚을 갚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가정의 재정을 회복시켰습니다. 빼앗길 자녀를 다시 찾는 회복을 주셨습니다.
빌려온 도끼를 물에 빠뜨린 엘리사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절망과 근심 속에 놓인 이 제자의 도끼를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서 다시 찾는 회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과 가족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관계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정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업체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영역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계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한 강한 열망과 소원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그렇게도 원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나는 반드시 회복된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나는 회복되리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회복에 대한 의지가 있습니까? 회복을 위한 소원이 있습니까? 회복에 대한 열정과 열망이 있습니까? 그냥 무덤덤해 있지는 않습니까? 회복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나에게, 우리에게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 인정하고 있고, 회복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다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려고 하는데 우리는 반응이 없습니다. 우리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 회복되어져야 할 당사지인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봅시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오면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모든 것이 붕괴되어 버렸고, 모든 것이 끊어져 버렸던 그 여인이 온전하게 회복되었던 배경에는 회복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 여인을 회복을 시키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의 열망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지금 회당장인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기 위해서, 즉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바삐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한 여인이 예수님의 움직임 속에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비집고 들어온 이 여인을 제자들은 쫓아 버리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지나쳐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불쌍한 여인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을 회복시키고자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을 회복시키고자하는 예수님의 열망만 있습니까? 아니요 회복되고자 하는 이 여인의 열망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회복을 바라는 단순한 열망을 뛰어넘은 회복을 사모하는 갈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은 온전하고 완전한 회복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회복을 위한 이 여인이 갈망이 얼마나 큰 줄 아십니까? 이 여인이 회복의 갈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여인은 회복을 향한 소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27절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는 말이 있지요. 이 여인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과연 나의 불치의 병을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반드시 회복이 되어야 하는 장본임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주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회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복을 가져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소문 즉 말씀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에 대치동에 있는 큰 학원에서 대학입시설명회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렸는지 아예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내 자녀가 대학에 잘 붙을 수 있는 소문을 반드시 들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을 이 여인이 듣지 않았다면 이 여인은 결코 회복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이 여인은 예수님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유명한 의사한테 진료를 받기 위해서 3개월 전에 혹은 6개월 전에 예약을 하고 기다립니다. 중간에 지루하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의사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의사를 만나야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 할지라고 그 예약시간을 반드시 지킵니다. 그 의사 만나는 것이 그 사람의 최우선 순위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보면, 이 여인이 무리 가운데 끼어 예수님 뒤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혈루증 앓는 여인이 수많은 사람을 비집고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병자의 연약한 몸으로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은 아주 힘들지요. 뿐만 아니라 혈루증을 앓고 있는 부정한 여인인데 자기의 병이 드러나면 당장 거기서 끌려나오든지 아니면 어떤 위해를 당할지 모릅니다. 망신과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회복되어야겠다는 갈망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죽으면 죽으리다하는 각오로 접근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갈망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회복을 원하십니까? 정말로 회복이 되어야겠다는 소원을 갖고 있습니까? 회복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것 각오하고, 손해 볼 것 각오하고, 다른 것 가 채져놓고 예수님께 나아와야지요.
병 낫기를 원하십니까? 가정적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까? 재정의 회복을 원하십니까? 심령의 회복을 원하십니까? 사업의 회복을 원하십니까? 인간관계의 회복을 원하십니까? 믿음의 회복을 원하십니까?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예수님 가까이 접근합시다.
이 여인은 기필코 예수님께 손을 댔습니다.
드디어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내가 직접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많은 간증을 듣습니다. 병이 고침을 받았고, 문제가 해결되었고.. 물론 간증을 듣는 것도 은혜가 되고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응답받는 것입니다. 내가 고침 받는 것입니다. 내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간증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아무리 열 달 동안 애기를 배에 품고 있었다 할지라도 애기를 출산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출산을 해야 합니다. 자연분만을 하든 제왕절개수술을 하든 애기를 출산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복을 열망하시는 주님의 주위만 맴돌면 안됩니다.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열망하는 주님께, 나의 회복의 갈망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회복되고자 하느냐?’ ‘그렇습니다. 주님 나는 회복되기를 갈망하고 또 갈망합니다.’
기필코 회복을 주시는 주님께 손을 대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우리의 반응입니다. 34절에 보면 이 여인이 주님의 옷 가에 손을 댄 행동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너를 회복시켰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여인은 도저히 주님께 가까이 나가서 주님의 옷가에 손을 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의 현실과 처지를 뛰어넘는 믿음으로 주님을 향해 돌진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즈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치고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영적인 상처, 마음의 상처, 인간 관계에서의 상처, 물질적인 상처, 육체적인 상처... 그러므로 요즈음의 중요한 테마가 치유, 회복, 힐링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진정한 치유자가 되시는 예수님으로 부터의 치유와 회복을 받기를 그렇게 갈망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지 못하고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제 회복을 갈망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회복시키고 치유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과 현실과 처지가 아무리 어렵고 나의 상처가 도저히 회복될 수 없을 것이 보인다 할찌라도 우리는 혈루증 앓았던 이 여인처럼 이 믿음을 가지고 치유자되시는 예수님을 향해 달려 나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저와 여러분이 이 치유와 회복의 당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달리다굼의 기적
막 5:21-24, 35-43 박인걸 목사
이달 초 장태종 신협(信協)중앙회장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신협과 거래를 하는 김 씨라는 회원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감사의 내용과 함께 현금 40,000원을 동봉했는데, 이름도 근무지도 모르고 차번호만 아는데 그 사람에게 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씨 어머니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폐지를 줍는데 어느 날 길가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날 하루 종일 34,000원을 벌었는데 그만 실수로 잃어버린 것입니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딸, 김 씨가 달려가 보니 어머니는 길가에서 넋이 나간 듯 한 표정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딸은 어머니를 위로하며 집으로 돌아가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두 모녀와 우연히 마주친 30대 남성이 걸음을 멈추고 모녀에게 다가와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연을 들은 남성은 잠깐 이곳에 계시라고 하고는 주변에 있는 슈퍼마켓에 가서 잔돈을 바꾸어 오더니 “내가 옆에서 주었다고 하면서 김 씨 어머니 손에 34,000원”을 쥐어 드렸습니다. 딸은 30대 신사가 그 돈을 줍지 않았으며,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어머니는 눈치를 못 채고 너무 기뻐하였습니다. 김 씨는 신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왜 그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사는 “나도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랬다.”면서 “도와 드리고 싶어 그랬으니 전혀 부담 갖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머니 손에 신협통장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저 같은 신협직원들이 어머니같이 신협과 거래하는 사람이 있어서 월급을 받는다.”며 오히려 고마워했습니다. 김 씨는 며칠 후 보답하기 위하여 마천 신협을 찾아갔지만 그 남성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신협 직원이 말하기를 “아마도 그분은 이곳 직원이 아니고 신협 중앙회 직원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김 씨는 결국 신협 중앙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자기 어머니에게 준 34,000과 6,000원은 적지만 점심식비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덕분에 어머니의 마음이 편해 졌다.” 면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신협 회장에게 편지를 한 것입니다. 신협이 수소문 한 결과 이 사연의 주인공은 중앙회 상시감사팀 박진열 주임으로 드러났습니다. 회장은 그를 불러 점심을 함께 먹으며 40,000원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연을 사내 인트라넷에 올리고 “진정 조합원을 내 가족처럼 생각하고 ‘조합원 덕에 월급을 받는다.’는 그 마음을 본받자.”고 했습니다. 이 내용이 일간지 신문에 기사로 실렸습니다.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기사입니다.
오늘 본문은 12년 동안 혈루 증으로 앓던 여인의 병을 고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됩니다. 가버나움의 회당 장 야이로가 자신의 딸이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가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과정과(막5:21-24) 그 집으로 가는 중에 혈루 증 앓는 여인을 만나 치료하는 일로 시간이 지연되는 바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이 오실필요가 없다.”는 기별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곁에서 들이시고”(막5:36)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파라쿠오)라는 말인데 “불순종, 거부”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와 봤자 어떻게 하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 장에게“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고 하신 후 그 집에 가서 죽은 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딸이 살아난 것입니다.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회복과 함께 죽은 여아가 살아난 기적은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확증하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는 긍휼을 보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생사화복의 주관자가 되시며, 부활 성취의 축복을 소망하게 하는 귀한 사건인 것입니다. 신협 직원이 울고 있는 할머니 손에 34,000원을 쥐어드려 웃음을 주었다면, 우리 주님은 죽음의 절망에 처한 인간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기적을 베푸는 분입니다.
달리다굼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 과정을 살펴봅니다.
(1) 예수님은 회당장의 간청을 들어주셨습니다.(막5:22-24)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회당장입니다. 당시 회당에는 회당 장, 랍비, 핫잔, 그리고 평신도 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회당장은 집회의 우두머리며, 건물 관리인이고, 회당의 집회순서 작성, 질서유지, 심지어 재판도 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의 종교적, 윤리적 실추로 인하여 종교민주화가 일어났고 그 일로 인하여 평신도들이 유대교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회당 장은 일종의 명예직이며 지역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인물에게 주어지는 자리였습니다. 분문에 등장하는 야이로라는 사람 역시 가버나움 회당의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딸이 병들어 죽어가자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아래 엎드려 간곡하게 청원합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아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린 것은 ① 예수님을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신앙입니다. ② 예수님의 치유가 그 지역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③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확신을 가진 태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곡히 구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많이 간구하여”라고 했습니다. 필사적으로 거듭 간구함을 말합니다. 죽은 딸에 대한 애끓는 부성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죽게 되었아오니”(에스카토스 애세이)죽음의 문 앞에 서 있는 최악의 병세를 대변합니다. 이 소녀는12살(막5:42;눅8:41) 먹은 딸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입니다. 이런 소녀가 죽음과 촌각을 다투는 상황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119에 전화하여 앰뷸런스를 부르는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회당장의 간청은 매우 확신적이고 구체적이었습니다.“오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사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3) 당시 안수로 병을 고치는 일은 일반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딸을 그렇게 고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간청을 받아 드려 그 집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막5:24)
■ 뱀 중에 제일 무서운 뱀은 아마존에 서식하는 아나콘다입니다. 아마존 밀림에서 원시부족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한 선교사가 강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가슴까지 물이 차는 곳이었는데, 급한 일이 있어서 부리나케 강을 건너다가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말았습니다. 길이가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구렁이 아나콘다가 대가리를 물 위로 내놓고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멀리 강둑에 서서 그것을 지켜보던 원시부족 사람들은 그 선교사를 비웃었습니다. 강물 속에서 아나콘다의 밥이 되는 선교사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는지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원시부족 사람들은 그 선교사가 아나콘다의 몸에 휘감겨 질식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선교사는 틀림없이 큰 구렁이의 먹이감이 되어 강물 속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선교사는 강둑 위에 서있는 마을사람들을 보고 더욱 긴장이 되었습니다. 만약 자신이 아나콘다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 구렁이의 밥이 되고 만다면, 다른 선교사들이 들어와도 그 마을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능력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나콘다를 멀리 쫓아주시옵소서. 원주민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하옵소서.”그 선교사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한 후에, 손가락으로 그 아나콘다를 가리키며 담대하게 명했습니다. “내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악하고 더러운 아나콘다야, 속히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교사의 말의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나콘다는 갑자기 몸을 휙 뒤틀더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원주민들은 환호했습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대단한 분이라고 하면서 그 후 그들은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순수한 믿음과 어려운 상황에서 간청하는 기도에 우리 하나님은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일로 주님 앞에 기도합니까? 간청하십시오. 물질입니까? 건강입니까? 사업입니까? 직장입니까? 심각한 고민입니까? 영적인 일입니까? 간청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간청을 들으시는 분입니다.
달리다굼의 기적은 또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2) 예수님은 회당장의 믿음을 보셨습니다.(막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 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36) 예수님이 혈루 증으로 앓는 여인을 고치는 일로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회당 장은 순간 흔들렸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달려올 때만 해도 위중한 것은 보았지만 죽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빨리 자기 집에 오시면, 딸이 죽기 전에 손을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전갈이 왔을 때 아버지는 비틀거렸습니다. 얼굴빛이 창백해 졌습니다. 눈동자가 풀렸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 같았습니다. 그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을 향해 외쳤습니다.(메 포부 메논, 피스튜애)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아까 나를 찾아 왔을 때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그 신뢰를 잃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믿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께는 못 고칠 질병이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주십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십니다.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십니다. 속상해 우는 성도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힘으로 능으로 안 되는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속이 답답할 때 찾아와 도와주십니다. 앞뒤로 길이 막혔을 때 길을 열어주십니다. 빚에 쫓기고, 사람에게 쫓길 때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를 건주 주십니다. 반드시 회복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죽음의 권세, 흑암의 권세에서, 사탄의 권세에서 꺼내주시는 분입니다. 그 주님을 의지할 수 있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 종류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① 본능적인 믿음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② 이성적 믿음입니다. 교육과 학습을 통하여 받아드리는 과학적 믿음입니다. ③ 영적인 믿음입니다. 영적인 믿음은 성령이 주시는 믿음입니다. 천국, 구원, 부활, 영생, 신유, 기적, 치유, 은사, 은혜, 기도응답, 기적, 이런 것들은 성령이 주시지 않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 영적인 믿음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생성되며 사람마다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점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이 성장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배울 때 성장합니다. 실천할 때 성장합니다. 연단을 받을 때 성장합니다.(약1:3) 성령이 은사를 줄 때 성장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으면 우리들 삶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적을 기대하고 기적을 구하고, 기적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7월 8일『나가수 Ⅱ』 에서 처음 출연한 CCM가수 소향씨가 4 옥타브를 넘나다는 가창력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기독교계에서 소향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You raise me up’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김경욱 목사님의 딸이며, 경희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동안 복음성가만 불렀는데 너무 가창력이 좋으니까 여러 방송사에서 여러 차례 콜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동안 복음 성가가 아닌 일반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 했는데 일반적인 노래를 불러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번 “나가수 2”의 출연 요청에 응했고 우승을 했습니다. 혜성처럼 나타난 그의 가창력에 시청자들과 청중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이제는 결혼할 때가 되었다. 결혼하지 않으면 유익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는데 산부인과에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 갔더니 자궁암이었습니다. 그 때 나이가 20세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결혼하라는 음성을 주실 때 결혼을 안 했다면 20세 나이에 산부인과에 갈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의 어머니가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암을 앓을 때에 기도 중에 “찬양을 통하여 복음을 전할 주의 종이 적으니 네가 이 일을 해 보라.”는 음성을 듣고 딸을 찬양 사역자로 키웠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향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CCM 가수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암에서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매사에 믿음을 보시는 분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어디서든지 지금도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이 시간 어떤 문제를 가졌어도 주님 앞에 믿음으로 맡길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야이로의 간청과 그의 믿을 보셨습니다. 이제 달리다굼의 기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3) 주님이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했습니다.(막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당시에 사용하던 아람어에서 유래한 (탈리타 쿰) 이는 ‘탈리타’(소녀) ‘쿰’(일어나라)입니다. 이는 마치 동창이 밝아 올 때 어머니가 소녀의 방에 들어가서 “얘야 날이 밝았다. 이제는 그만 자고 일어나라.”하는 말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소녀가 죽었다고 집 앞에서 울며,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을 행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의 방에 들어가 손을 잡고 “소녀야 일어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소녀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가족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좋았겠습니다. 그 집에 모여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으며 신기해했겠습니까? 그 이야기는 그 동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달리다굼을 통하여 죽은 소녀를 살린 이 사건은 ① 생명의 창조자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자연적 생명을 다스리신다는 증거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② 부활의 예시로서 죽은 자는 다시 부활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③ 사람이 죽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④ 이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이런 이유들 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은 우리들에게 달리다굼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라.” 고 하시는 분입니다. “탈리타 쿰” 하시는 분입니다. 죽은 사람을 향하여“일어나라.” 가능성이 없는 현실에 직면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주님은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손을 내 밀고 “일어나라.” 하시면서 끌어당기시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다 됩니다.
딸이 죽어 절망하는 야이로의 집까지 친히 찾아 오셔서 죽은 딸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일어나라.”외치시던 주님이 우리 성도들의 어려운 상황의 현장에 오늘 찾아 오셔서 “일어나라.” 외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모든 상황이 끝난 상태입니다. 경기로 말하면 Time out입니다. “땡”하고 종을 친 상태입니다. 버스는 지나갔고, 비행기는 이륙했습니다. 시험은 끝났고, 법관의 망치는 세 번 때린 상태입니다. 다시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하시면 됩니다. 가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며, 생명의 주인이며, 우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끝났어도 회장이 와서 “다시 해”그러면 다시 해야 합니다. 군대에서 대장이“처음부터 다시 해”그러면 부하 군인들이 다시 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이 안건은 다시 검토하시오.”하면 다시 해야 합니다. 한 나라의 왕의 명령에 따라 신하들은 일사불란에게 움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주만물의 주인이며,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고치십니다. 모든 것을 회복하십니다. 주님의 달리다굼 앞에 죽음도 도망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달리다굼을 외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심각한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주님께 간곡히 기도하십시오. 믿음으로 맡기십시오. 주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