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15
4월2일[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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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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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Jx0ETEte7QA
[서울대교구 신현범 베드로(석관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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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우리를 동반하실 주님>
세상 부끄러운 초대형 참사들을 유독 많이 겪은 우리 백성들입니다. 어쩔수 없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사전에 충분히 예방할수 있었던 인재라서 더욱 안타깝고 서글픕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할지라도 희생자 유가족들의 참담한 슬픔은 결코 가시지 않습니다.
유가족들 가운데서 가장 혹독한 고통을 겪고있는 분들이 있으니, 사랑하는 가족의 시신이 처참하게 훼손되거나 아예 찾지도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분들의 간절한 바람은 오직 한가지 시신이라도 돌아왔으면! 입니다. 그러면 흔들고 대성통곡이라도 할텐데, 붙들고 울부짖기라도 할텐데...
그만큼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신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추모하고 애도할수 있는 공간이 그리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기절초풍할 일을 겪었습니다. 스승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누군가가 탈취해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내려앉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해주신 주님이었습니다. 죽은 목숨이나 다를바없던 그녀에게 유일하게 손내밀어주셨던 분,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분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세상 다 끝난 심정이던 마리아 막달레나 눈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윽고 하시는 말씀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너무나 놀랍고도 당혹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뛸듯이 기뻤고 감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라뿌니!" 하고 외치면서 예수님 발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두 발을 꼭 붙들었습니다. 더 이상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던지신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종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고 우리를 동반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우리 각자의 내면 깊숙히, 우리 영혼의 성 안로 들어오시겠다는 표현입니다. 때로 미풍같은, 때로 태풍같은 성령의 현존으로, 때로 우리를 영생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성체성혈의 형상 안에 영원히 살아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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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vcodVUIo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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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체험에도 단계가 있다: 우선 내가 왜 우는지 알아야!>
1년에 100억 이상을 버는 인기 강사 이지영 선생도 중3 때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이 워낙 가난했고 부모님은 동시에 암에 걸리셨고 심지어 지하에 사는데 홍수 물까지 들이닥쳐 옷가지는 물론 그동안 필기한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선배가 버리고 간 교복을 입고 남들이 빌려준 연필과 노트로 공부하고 있는 그 비참함은 누가 봐도 살 의욕을 잃게 만듭니다.
지영 학생은 국어 수업 중에 벌떡 일어나 나갔습니다. 선생님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죽으러 간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잡아주려니 생각했겠지만, 선생님은 화장실 빨리 다녀오라고만 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가까운 건물 맨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무서워서 못 뛰어내리겠더랍니다. 그때 느낀 것은 삶은 죽음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보자고 결심하고 악착같이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갑니다.
인생 두 번째 전환점은 법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대법원 판례를 배우며 한 대법원장에게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묻지마 살인사건 용의자에 대한 재판이었는데, 본인도 자살 시도하며 죽여달라고 하고 검사나 모든 여론이 사형을 구형하라고 압박을 가해왔지만, 대법원 판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하였습니다.
그는 죽으려고 했던 것에 착안하여 재판 때 피고인에게 “자살. 자살. 자살….”이라는 단어를 열 번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살이 “살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눈물을 쏟았고 대법원장은 자신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도 죽고 싶었던 이지영 선생은 아이들에게 자기 경험을 나누며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힘들어서 우는 이유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천사를 먼저 만납니다. 천사는 “여인아, 왜 우느냐?”라고 묻습니다. 왜 울고 있었을까요? 그녀에겐 스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다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돌려달라고 청합니다. 아직 자신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지기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릅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는 존재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드디어 만났습니다. “나의 선생님”(라뿌니!)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게 나를 이끌어줄, 나의 이름을 불러줄 참 스승을 만나지 못했음을 알지 못하면 나의 모든 에너지는 돈을 버는 곳에, 애인에게, 혹은 세속적 성공을 위해 다 써버릴 것입니다.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에서 보듯 알려고만 하면 믿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싶은 욕구가 헛된 곳에 소진되게 됩니다.
김양회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남아프리카 여행 중에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에서 앙골라 가는 비행기를 놓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면세점에서 아프리카 토속품들을 보다가 정신이 팔려 미처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영어 실력도 좋지 못해서 출입국 직원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것은 괜찮았지만 자신이 신부라는 것은 밝히기가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사제가 영어도 못하고 비행기도 놓치고 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직업에 대해 질문을 했고 신부님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사실대로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를 작은 수수료만 내고 타고 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참조: 김양회 신부, 부르면 희망이 되는 이름, 바보 같은 신부]
맨날 똑같은 내용일지 모르지만, 저도 알지 못했습니다. 삶이 우울한 이유는 돈이 없어서, 미래가 불안해서, 연애가 안 돼서 등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사.시.를 발견하고는 ‘스승’이 없어서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자주 말씀드렸지만, 나의 스승이 되어주었던 이 책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신학교에서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우는지 살펴봅시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들은 나를 울게 만들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진짜 내가 울어야 하는 이유는 나를 잡아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책이라도 읽어봅시다. 반드시 나의 이름을 부르며 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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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가슴이 벅찼던 때가 있다면 언제가 있을까요? 저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떠오릅니다. 월드컵 사상 첫 16강은 가슴 벅참의 시작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8강전에서 이탈리아와 연장전까지 가고 안정환 선수의 결승 골로 4강으로 진출했습니다. 4강전에서 대한민국은 스페인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전 끝에 골키퍼 이운재 선수의 선방과 홍명보 선수의 결승 골로 4강에 진출했습니다. 비록 결승전의 문턱에서 독일에 패배했지만 2002년 대한민국은 둥근 축구공 하나로 축제의 날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멋진 말들이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현수막입니다. 히딩크 감독이 했던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라는 말입니다. 서울의 광화문과 시청을 가득 메운 응원단이 있었습니다. 저도 본당의 마당에서 교우들과 함께 대한민국 축구를 시청하면서 응원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붉은 악마’로 불리던 빨간 응원복과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며 응원했던 박수입니다. 아! 또 가슴 벅찼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트럭에 소를 싣고 판문점을 넘던 장면입니다. 그 일이 물꼬가 되어서 남과 북의 경제협력 상징이 되었던 ‘개성공단’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뜨거운 축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도 가슴 벅찬 일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제가 투표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입니다. 8번의 대통령 선거에 투표했고, 3번은 제가 투표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투표한 후보가 두 번 더 대통령이 된다면 제가 투표한 후보가 50%는 당선되는 것을 볼 것 같습니다. 국민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는 한바탕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학력고사를 보고 신학교에 지원했을 때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합격 여부를 알 수 있지만 당시에는 직접 학교에 가서 벽보에 적혀있는 이름을 확인하였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저의 이름을 확인했을 때 가슴이 벅찼습니다. 공부에 그리 취미가 없었는데 10 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준다는 달콤한 유혹에 공부했었습니다. 드디어 10등 안에 들었는데 친구들도 선생님도 저의 실력을 믿지 못하고 커닝했다는 의혹의 눈초리로 대하였습니다. 서운함과 억울함에 코피가 나도록 공부했고, 커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등수를 얻었을 때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가슴 벅찼던 것은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을 때입니다. 바닥에 엎드려 기도할 때입니다. 서품식에 참석한 교우들은 모두 ‘성인 호칭기도’를 불러주었습니다. 성인들의 전구 함을 청하며 주님의 제단에 봉사할 수 있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가슴 벅찬 체험을 하셨는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전에 베드로 사도는 나약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을 느꼈고,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면서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하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절망에 빠지고, 어둠 속으로 빠졌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전에 세상 것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 사도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당당했고, 두려움도 없었고,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밤에만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는 많은 순교자가 있습니다. 배움이 부족했던 백정도 주님을 증거하며 순교하였습니다. 아직 어린 소년도 기꺼이 목숨을 바쳐서 순교하였습니다. 기력이 약한 노인도 순교하였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는 지식도, 나이도, 건강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성령을 받으면 주님께서는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마리아’라고 부르셨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마리아는 ‘라뿌니!’라고 가슴이 벅차 소리쳤습니다. 사도들도 마리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렇게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신앙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우선순위를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즐겼던 오락, 취미, 만남이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선교 그리고 나눔의 삶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제 내 삶의 우선순위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도록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슴 벅찬 목소리로 ‘라뿌니’라고 소리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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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4월2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복음: 요한 20,11-18: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가 무덤에 남아 울고 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도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리아가 이미 들여다본 무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것은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있는 천사들을 만난다.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고 묻는다(13절).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
그리고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 한다. 마리아의 눈은 닫혀 있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리아야!”(16절) 처음에는 여인이라고 부르시고, 다음에는 이름을 부르셨다. 마리아는 “라뿌니!”(16절) 스승님으로 알아본다. 그분은 마리아가 지금까지 찾고 있던 분인 동시에 마리아가 당신을 찾도록 내적으로 인도하셨다. 마리아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17절) 말씀하신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17절). 이 말씀은 우리와 똑같이 되신 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분, 죽음 이후에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건너가심의 첫 열매를 당신 안에 지니고 계신 인간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가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신다. 그래서 결국 그분이 계시는 곳에 그분의 사람들도 있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 주시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 그리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였다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으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부활절의 삶이 이러한 삶이 되어 참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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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과 독서에는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울다’(‘클라이오’)라는 동사를 네 번이나 쓰는데, 좌절하고 분노하였지만 끝내 항의조차 하지 못하여 상처 입은 감정을 묘사합니다. 한편 독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로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는 유다인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가책을 느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데 그 답은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울고 있던 마리아는 무덤에서 “뒤로 돌아서”고 “마리아야!”라는 부르심에 또 “돌아섭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무덤에서 돌아서고 부르시는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스 말 동사 ‘스트레포’는 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동작을 의미하지만, 심경과 인식의 ‘변화’를 뜻하기도 합니다. ‘돌아서다’라는 행위로서 그는 ‘모름’(“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에서 ‘앎’(“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으로 건너갑니다. 진정한 파스카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시신이 없어졌다.’고만 생각한 탓이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깨닫자, 본능적으로 그분을 붙잡습니다. 더 이상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즉각적이고 단순한 반응이었을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여야 할 일은 당신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은, 이 이야기 바로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썼던 그리스 말 동사 ‘호라오’(부재를 통하여 현존을 믿게 되는 의미의 ‘보다’)를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도 적용합니다. 이제 그가 주님의 부활을 보고 믿게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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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여인아, 왜 우느냐?>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요한 20,11-16)
1) “여인아, 왜 우느냐?”라는 천사들의 말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는데 왜 시신이 없어졌다고 슬퍼하면서 우느냐?”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천사들은 “울지 마라.”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 주었을 텐데,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만남에 집중하려고 생략한 것 같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네 앞에 있는데, 왜 나의 시신을 찾으면서 울고 있느냐? 울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셨을 텐데, 시신이 없어졌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마리아는 그 말씀을 흘려들었을 것입니다.>
2)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고, ‘첫 선포자’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사도들이 아니라 왜 막달레나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 분이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만 편애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신앙인들의 사랑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들과 다른 신자들도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 가장 앞서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큰 것이었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도 부활 소식을 증언하고 선포하려면 가장 먼저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 사도를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요한 21,15-17) 이 가르침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부활을 증언하고 선포할 자격이 없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믿음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3) 그런데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으면서도,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어서 그랬다고 흔히 생각하는데, 그런 단순한 뜻 외에도 좀 더 깊은 뜻이 들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일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셔야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해야 하고, 만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듣기만 했을 뿐, 예수님을 본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먼저 그에게 당신을 드러내셨고, 당신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사도 9,4-6) 그 당시 바오로 사도는 단순한 박해자가 아니라, ‘구원의 진리’를 갈망하면서 찾는, 또 ‘진짜 메시아’를 만나기를 원하고 노력하는 ‘구도자’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을 때 바오로 사도의 반응은 처음부터 전혀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고, 응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자신이 응답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만남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거나 믿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알려주더라도 예수님이라는 것을 부정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5)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는 왜 그냥 가버렸을까? 그렇게 가버리지 않고 마리아와 함께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면 세 사람이 함께 예수님을 만났을 텐데...... 두 사도가 그냥 가버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은 마리아의 사랑과 정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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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복된 하느님의 애인’이라 불리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네 복음사가는 모두 주님 부활 이야기의 첫 장면과 그 중심에 등장시킵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모 성인은 이처럼 부활의 첫 증인인 그를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그대 선택된 여인이여, 사랑 가득한 선택자여!”
무덤 밖에 선 채로 마리아는 울고 있습니다. 적막한 이른 아침에, 비록 돌아가셨을지라도 곁에 있고 싶어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으셨던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도 슬픈데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그 실망과 허탈감이 끝내 울음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 뒤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잇달아 큰일이 닥치면 넋을 잃고 하염없이 울다가 끝내 실신까지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마리아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한처음에 빛과 어둠, 하늘과 땅을 만들어 이름을 주셨고, 사람에게 온갖 생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것은 관계를 맺는 시작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스승과 제자, 바로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눈물이 주님 부활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께 눈물 대신 응답해야 합니다. “라뿌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이에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부활의 신비는 사랑의 관계로 거듭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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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다가, 무덤 안쪽 하얀 옷의 두 천사를 발견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을 떠나보낸 슬픔에 잠겨, 눈앞에 계신 그분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곧이어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그제야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슬픔의 눈물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주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그분을 알아봅니다.
마리아에게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눈물이 환희로 승화되는 순간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더 이상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성자께서 성부께 건너가심으로써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부활하신 성자께서는 성부를 ‘내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내 하느님’, ‘너희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으로 하느님과 맺는 일정한 관계성의 차이를 전제하시고, 동시에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공생활 중이신 예수님과 맺었던 관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는 ‘새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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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20,15)
윤복희의 「여러분」이란 노래는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었었죠. 울고 싶을 때 어떤 그 누군가가 나와 함께 나의 슬픔을 공감하고 함께 울어 줄 사람이 있다면 우리 삶에는 새로운 희망으로 다시 일어나 힘차게 달려갈 것입니다.
울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뒤 울지 않으면 그 마음은 더 닫히게 되고 완고해 지지만, 울고 나면 조금씩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막달레나의 눈물은 사랑했던 예수님의 시신만이라도 보고 싶었고, 향유로 상처 난 예수님의 몸을 닦아드리고 싶었건만 사라져 버렸기에, 말할 수 없는 허탈감과 상실감에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는 천사에게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0,13) 하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황망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녀는 주님의 죽으심과 시신이 사라짐에 따른 이중의 슬픔과 아픔으로 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울어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눈물은 바로 그리움과 보고 싶은 마음에서 솟구쳐 오르는 사랑의 눈물입니다. 그러기에 눈물 흘리는 마리아에게 던진 천사의 질문은 단지 눈물 흘린 까닭을 확인시켜 주는 질문이었다면, 예수님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20,15) 는 질문은 당신을 보고도 슬픈 울음으로 눈이 가려 버린 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 그녀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는 사랑의 초대입니다. 결국 그녀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신 주님은 다정한 음성으로 “마리아야!” (20,16)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때야 비로소 그녀는 주님이신 것을 알아차리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서서 “라뿌니, 스승님!”이라고 응답합니다. 여기서 그녀가 주님을 향해 돌아섬, 곧 부활의 회개는 바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는 것임을 회개의 때임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스승님에서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녀가 단지 감각적인 차원을 넘어 영적인 귀와 눈이 열리면서 주님을 온전히 알아보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내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을 체험할 때 부활의 참 신비를 알아듣게 됩니다. 비로소 그녀가 영적인 감각을 갖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20,17) 우리 역시도 부활을 전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런 기쁨과 희망으로 넘쳐난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20,18) 하면서 제자들에게 다시 달려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후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힘차게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으로 회심하며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2,37) 하고 묻습니다. 이런 물음 이면에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통회痛悔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그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2,38) 하자, 그날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모두가 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작위보다 성령의 활동이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기도를 대신해서, 김춘수의 「꽃」를 선물로 보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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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3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특이한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것도 조그만 이벤트성 행사라 할 수 있는 지역 대회가 아닌 국제 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 대회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쓰레기 줍기 세계 대회”
정해진 시간 내에 쓰레기를 가장 많이 줍는 팀이 우승하는 경기입니다. 자그마치 21개국에서 참가했고, 이 참가자들은 인근에서 90분간 550kg의 쓰레기를 수거했습니다. 한 참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든 지든, 모두가 기분 좋은 스포츠였습니다.”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어떤 훈련을 했을까요? 90분 동안 계속해서 쓰레기를 주울 수 있는 체력을 키웠을 수도 있습니다. 또 쓰레기인 것과 쓰레기 아닌 것을 구별하는 훈련을 했을 수도 있겠네요. 무엇보다도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마음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쓰레기 줍는 것도 하나의 의미 있는 대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 실천하기 세계 대회’를 한 번 개최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더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채점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특히 자기들의 우승을 사랑의 마음으로 양보할 것이기에 우승자를 가리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대회가 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만을 보시고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받는 사랑, 조건적인 사랑, 그래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그녀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왜 울고 있을까요? 누가 때려서 우는 것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 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주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주님께서 직접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었음에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자기 이름을 부르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마음이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했습니다. 이는 우리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또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알아볼 수도 그래서 주님과 함께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만이 주님을 알아보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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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봄 너머 알아봄>
요한 20,11-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그때에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봄 너머 알아봄>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요한 20,14)
내 앞의 당신을
보고 있으면서도
미처 알아보지 못함은
내 안의 당신이
오히려 더욱 더
또렷하기 때문이니
내 안의 당신이
내 앞의 당신을
한 치도 가리지 않게
늘 새로이
내 앞의 당신을
내 안에 모시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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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더 많이 사랑합시다>
우리는 큰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을 보고는 ‘넋이 나갔다.’ 또는 ‘혼이 나갔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겨 이른 아침 무덤을 찾아왔는데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도 놀라 그저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는데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오직 빈 무덤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십자가 죽음을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을 것이고, 더더욱 향유를 준비하여 이른 아침 무덤에 달려올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큰 사랑을 지닌 마리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20,16)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고, 마리아는 “라뿌니!” 하고 불렀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결국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직접 보여주기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사명을 줍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이시고, 주님의 하느님이 곧 나의 하느님이시니 나는 그분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듯이 우리고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주님을 전해야 할 소명을 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뵙고 전하였듯이 우리도 더욱 간절한 사랑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아울러 그 주님을 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더 많이 사랑합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그 사랑이 주님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주님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합시다. 사랑하지 않고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사랑합시다.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합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꽃 - 김춘수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이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계가 그럴까? 나와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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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과 회개의 여정>
-만남, 회개, 치유-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 위에 있나니,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제 살리려 하심이네.”(시편 33,18-19)
세상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회개할 때 주님을 만나고 참나를 발견합니다. 사랑의 열정이 회개에로 이끌고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영혼의 치유와 건강에 회개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전적인 방향전환이 회개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회개는 함께 갑니다.
살아 있을 때 사랑이요 기도요 회개이지 죽으면 사랑도 기도도 회개도 끝입니다. “사랑하라, 기도하라, 회개하라”고 우리 삶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도 기도하기도 회개하기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미워하며 원망하며 불평하며 싸우며 살기에는 너무 허망하고 억울합니다. 참된 겸손도 지혜도 사랑도 회개의 열매입니다. 오늘 다산 옛 어른이 말씀도 저에게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제 식구는 챙기지 못하면서 밖에서 큰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먼저 살림을 마련한 다음 시(詩)와 예(禮)를 배워 가슴에 쌓으라.”
“늘 가난하면서 인의(仁義)를 말하기 좋아한다면 그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참으로 회개한 지혜로운 이들은 아주 현실적이 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땅의 현실에 지극히 충실합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깨우침이 되는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itual...the more real)”란 말마디도 회개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이 공감하는 진리입니다. 땅깊이 뿌리내릴수록 하늘 높이 가지들 뻗는 살아있는 나무들 이치와 똑같습니다. 일어나자 마자 열어본 다음 카톡 메시지도 회개의 표징입니다.
“신부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신부님의 건강과 행복은 우리들의 행복입니다.”
이런 사랑의 메시지가 회개를 촉발합니다. 정말 변할 것은 누구도 아닌 나부터요, 끊임없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회개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끊임없이 내적변화의 회개를 통해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아주 오래전 읽은 영어 말마디도 문득 생각이 납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 세상도 그 정도다)
내가 먼저 변할 때, 이웃도 세상도 환경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부단히 주님을 닮아 변하고 새로워질 때 주변도 세상도 점점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도 평생 회개의 여정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도 회개를 통해 이뤄집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회개가 주제입니다. 슬픔중에도 샘솟는 사랑의 열정으로 주님을 찾아 나선 마리아 막달레나, 아직은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무덤에서 찾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와 주님과 만남의 과정은 언제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빈무덤 안에서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가 이뤄집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곧 이어지는 부활하신 주님과 마리아의 대화입니다. 주님을 앞에 보면서도 주님을 모릅니다. 회개로 눈이 밝아져야 보이는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똑같은 주님이지만 눈이 열려야 보이는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주님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묻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정원지기로 착각한 듯하지만 마리아의 말이 맞습니다. 정원이 상징하는바 에덴동산이고 바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돌보는 정원지기는 부활하신 주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파스카의 예수님은 정원지기이자 생명나무도 됩니다. 내 삶의 자리, 새로워진 에덴동산에서 만나야 할 정원지기이자 생명나무가 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 생명나무의 열매인 성체를 모시는 미사시간입니다.
회개의 은총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에 감격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 이뤄지는 마리아의 전격적 회개입니다. 주님이 마리아를 부르시지 않았다면 결코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르니, “스승님!”이란 뜻이다.’
이때의 감격은 토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 외치던 장면과 흡사합니다. 착한목자 주님의 부르심에 돌아서서 즉각적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돌아서서”란 말마디가 상징하는바 파스카의 회개를 상징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어둠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 새롭게 살아나니 이제 옛 마리아가 아닙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부활하신 주님과 유일무이한 관계에 있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남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 칭하시니 이제 우리들에게 파스카의 예수님은 스승이자 형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와 더불어 예수 형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애(友愛)의 여정,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교의(doctrine)’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experience)’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회개의 여정중에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는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어제에 이어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가 계속됩니다. 회개와 주님과의 만남으로 완전히 새로 난 베드로는 옛 베드로가 아닙니다. 열화와 같은 설교로 회개하는 모습들이 흡사 산불처럼 번져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날 3천명이나 세례를 받았다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설교에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니다...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회개를,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이 거룩한 평생성사인 성체성사의 은총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회개의 여정, 주님과 만남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저희를 치유해 주셨으니, 천상선물도 풍성히 내리시어, 지금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 자유를, 하늘에서 온전히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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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야>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제 생각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전혀 하지 않고 사는 사람보다 고민은 많이 하겠지만 삶을 잘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하지 않던가요? 세속적으로도 아무 생각이나 고민 없이 장사하는 사람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람이 더 장사를 잘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오늘 사람들은 그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베드로의 답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는 질문입니다. 회개로 치면 큰 회개의 순간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당신들이 주님을 죽였다고 직공을 합니다. 여기서 직공이란 제가 만들어 낸 말로 에두르지 않고 직접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아프게 할까 봐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공을 하니 사람들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데 이렇게 꿰찔리듯 마음 아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을 수 있어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심기 경호란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참모들이 알아서 마음 불편할 말들은 차단하는 것인데 이것은 대통령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아주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곧 조금만 직언과 직공을 해도 마음의 상처를 받으니 그 다치기 쉬운 마음과 허약한 심기를 잘 살펴 조심조심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심약(心弱)함으로는 ‘네가 죽였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과 같은 직공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런 충고를 받아들여 큰 회개를 할 수도 없습니다.
전 존재적인 큰 회개(悔改)는 회심(回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회심은 심통 곧 마음이 꿰찔리듯 아픈 것에서부터 시작되지요.
그러니 우리는 우선 이것을 알아야겠고 심통을 두려워하지도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우리도 지금 하느님을 죽이는 삶을, 이웃도 죽이고 자신도 죽이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유주의적인 정신과 문화에 지배당해 한편으로는 물신주의로 신을 죽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주의로 신을 죽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요즘 하느님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스마트 폰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에서 헤어나지 못해 하느님 말씀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유튜브 방송 없이는 심심해서 한시도 살 수 없는 사람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쟁과 스트레스를 피해 하느님께로 가지 않고 자연을 찾아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가 아니라 ‘나는 자연인이다’ 하며 삽니다.
제 생각에 이런 것들에서 돌아서는 것, 이것이 오늘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회개와 세례이고,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회개요 받아야 할 세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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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
<회개하자!>
오늘 복음(요한20,11-18)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사화'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간직하셨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 첫 번째 나타나심(발현)의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이 모습을 네 복음서가 똑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 완전한 죄 중에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랬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완전 회개하였고, 그 이후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됩니다.
"회개하십시오."(사도 2,38)
이는 오늘 독서(사도 2,36-41)인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성령강림절) 설교를 들은 유다인들에게 한 베드로 사도가 권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은 자신들에게 한 베드로 사도의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37)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고, 우리를 이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죄에서 해방되는 길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로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여정'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것처럼 '회개하는 여정', '부활하는 여정'입니다.
회개합시다! 이 회개를 위해 인내심을 발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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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9nleRm1D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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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산수유, 생강나무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이
저마다의 이름으로
피어납니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누구를
찾고 있는지요.
주님을 찾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주님을 찾으면서
알게 되는
사랑의 기쁨입니다.
주님을 믿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가
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사라지지 않을
이름을 부릅니다.
메아리가 아니라
뜨겁게 만나는
사랑의 인격입니다.
사랑으로
되돌아오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죽은 자의
이름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이름입니다.
미처 몰랐던
또 다른 부활의
모습을 기쁘게
만납니다.
우리는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요.
당신의 이름으로
행복하고
가슴 떨리고
마냥 기뻤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거리만큼
서로의 이름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먼저 따뜻하게
불러주십니다.
보살펴 주셨던
함께 하셨던
시간이
되살아납니다.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면
부활은
현실이 됩니다.
살아야 할
시간까지
가슴 설레는
부활이 됩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부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현실을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렇게 나눕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은
서로를 다정하게
불러주는 거기에서
다시 깊어지고
다시 높아집니다.
"마리아야!"하고
부르시는
부활의
오늘이며
가슴 벅찬
부활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어느 누구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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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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