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국 코카콜라 보틀링 공장
- 2차대전 이전의 코카콜라.
코카콜라는 창사 때부터 코카콜라 시럽을 각 지역으로 수송 후 현지 공장에서 각종용기에 넣는 방식으로 콜라를 생산하고 있다.
코카콜라는 1884년 미 본토를 커버하는 보틀링 공장을 설립했고 미 본토와 모든 미국령에 대한 판매망을 갖추었다.
1906년엔 쿠바, 파나마, 캐나다에 첫 해외 보틀링공장을 설립했고 1912년 필리핀, 1919년에 프랑스 등지에서도 현지생산을 시작하였다

◆ 코카콜라 광고중 하나인 파일럿의 무용담을 듣고 있는 꼬마
- 세계대전 반발 후의 코카콜라
1941년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자 코카콜라사는 애국마케팅에 집중했다.
이때 코카콜라의 가격은 6온스 한 병에 5센트였고 펩시콜라는 12온스 한 병에 5센트였다.

1943년 이탈리아 항복 후 광고에 등장한 이탈리아.
미군의 승전지는 코카콜라 광고의 배경이었다.

◆ 이탈리아에 있던 코카콜라 공장
2차대전 기간 동안 코카콜라사는 전 세계 - 유럽, 아프리카, 태평양전선에서, 총 64개의 해외공장을 운영했고 그 중 59개 공장은 미국 정부 조달 전용이었다.

◆ 미군들이 마시고 난 콜라병을 재활용하기 위해 모아둔 창고
세계각지의 공장에서 생산된 코카콜라를 미군들은 2차대전 동안 5억 병을 소비했다.

◆ 휴식중 코카콜라를 마시는 연합군인들
그럼 왜 미군들을 코카콜라에 열광하였을까?
전장의 미군들은 물은 정수해서 먹어야 했다. 수통에 담겨 혹은 드럼통에 담겨 보급되는 물은 지금 같은 정수기의 정수 물이 아닌 정수 약으로 정수한 물이다. 마실 수 있는 물, 즉 수영장물맛이 이란 이야기다.
물론 후방이라면 대규모 정수장에서 불소 처리된 수돗물도 있었다. 하지만 전투 후나 훈련 후에 마시는 콜라 한 모금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진주만 폭격이후 노골적으로 광고 공세를 펼쳐 애국심을 자극했고 이후 미군 병사들에게 코카콜라는 종교적인 음료수가 되었다.

코카콜라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군의 보급 물자로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연합국 최고 사령관 아이젠 하워, 소련군 주코프도 콜라의 열렬한 팬이었다.

아이젠아워 총사령관은 워싱턴에 전보를 부쳐 "코카콜라 300만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연말이 되자 코카콜라를 마신 미군의 숫자는 7,500만명을 넘어섰다.

◆ 코카콜라를 마시는 미군들
군인들의 코카콜라 사랑을 애국심으로 연결시켜 광고함으로써 코카콜라를 미국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도, 한끼가 아쉬운 노숙자도, 세계의 정세를 좌우하는 대통령도 마시는 코카콜라는 같은 것이였고 이것은 미국의 평등주의를 부각시켰다.

◆ 1925년 나치를 상징하는 스바스티카는 원래 행운의 의미였고 코카콜라는 히틀러보다 먼저 스바스티카를 사용했었다.

◆ 독일 코카콜라 공장을 지키고 있는 독일 경비병들
코카콜라의 흑역사는 코카콜라와 나치 독일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치시대에 코카콜라가 독일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독일 병사들이 벽에 붙은 코카콜라 광고를 보고 독일 음료수가 미국에도 있는 줄 알고 놀랬었다고할 정도였다.
코카콜라는 나치에 협력한 독일 지사장 막스 카이트를 내세워 미국색을 가리고 나치 지도자들이 좋아하는 음료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독일 코카콜라의 노동자 중 상당수가 독일에 끌려온 전쟁 포로들이다.
이들의 노동력으로 만들어낸 생산량은 무려 1억 병이나 됐으며 1939년 이후 독일과의 통상금지 조치를 뚫기 위해 몰래 독일로 수출한 콜라 원료를 회계장부에 분실로 처리하기도 했다.

◆ 1928년부터 시작된 코카콜라의 올림픽 후원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도 적용되었고 그 당시 이미 베를린에 보틀링공장도 가지고 있었다.

◆ 히틀러는 1939년 체코를 침공했고 코카콜라는 주덴텐 점령지에 보틀링 공장을 건설했다.


하지만, 1941년 미국의 전쟁 참전 후 독일의 콜라공장들은 코카콜라 농축액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독일 지사장이었던 Max Kieth는 과일 시럽과 설탕을 첨가한 소다를 개발하고 사내 공모를 통해 상표명을 정한 후 판타(Fantasie-fantasy)를 생산하게 된다.
이 판타는 여러 가지 맛이 잇었고 이는 전시 독일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즉 오렌지를 구하면 오렌지 판타를 사과를 구하면 사과 판타를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판타는 1942년 300만 병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종전 후 코카콜라는 판타의 모든 권리를 소유했고 1960년 세계시장에 데뷔시켰다.

◆ 이탈리아전선에서 콜라를 마시는 병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코카콜라는 군인 모두에게 사랑받는 음료수였다.

◆ 도로 공사중 코카콜라를 마시는 군인과 필리핀 소년

◆ 사이판 티니안 섬에서 발견된 콜라병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미군이 마셨던 콜라병은 발견되고 있다.
미군 병사에게 보급되던 코카콜라의 블랙마켓 가격은 한때 솔로몬제도에서는 한 병에 5불, 아프리카전선의 카사블랑카에서는 10불에 거래되기도 했다.
※ 2차대전 당시 1944년 당시 미혼이며 해외 파병 중인 미군 일등병의 월급이 70불 정도였고 1940년도의 미국의 최저 임금은 시간당 43센트 였다.

그럼 영원한 라이벌 펩시는 2차대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펩시는 1940년 당시, 코카콜라와 같은 해외 보틀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나 펩시콜라는 단지 넘버투였다.
2차대 당시 미군의 조달정책은 언제나 넘버원 위주였고 코카콜라는 미군이 원하는 공급량을 충족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