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시대는 인쇄술이 발달하고 더 나아진 경제적인 부유함이 과거 시대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좋아졌다(일부 계층 제외).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과거 시대의 신자들에 비하면 더 많이 알고 폭넓은 신앙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 올 때만 하더라도 대부분 ‘쪽 복음’이라 하여 성경의 한 부분만 인쇄된 성경책을 읽고 전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쪽 복음조차도 신자들이 마음대로 소지할 수 있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의 성도들이 성경 전체의 맥락이나 흐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믿었다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정황상 매우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당시의 신자들은 몇 마디들은 성경말씀을 어떻게 들어서 소화를 하였는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갈 수 없는 믿음의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경을 거의 꿰고 있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제풀에 지쳐서 넘어지는데 당시의 신자들은 무슨 힘으로 그 모진 시험과 어려움들을 이겨 내었을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성경적인 지식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제한된 말씀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붙들 수 있는 고 효율의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효율의 믿음과 저효율의 믿음이 있다.”
얼마 전에 오일 가격이 그다지 비싸지 않을 때에 엔진이 크고 힘도 좋은 자동차를 선호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엔진의 힘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엔진의 크기를 많이 줄인 ‘다운사이징’ 엔진을 장착한 차량이 대세이다. 이렇게 작은 엔진을 장착하고도 힘과 경제성을 동시에 얻으려는 사람들의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적인 세계에서는 이러한 요청이 없을까? 지금부터 삼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스바’ 여왕(지금의 에디오피아일 것이다)이 지나가는 뜬소문 같은 소식을 들었다.
“하나님과 영생에 대한 희미한 소식을”
그 뜬소문 같은 소식에 ‘스바’ 여왕은 나라의 국정 운영을 내려놓고(누군가에게 맡겼을 것이다) 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수천 리길을 여행하여 그 소문의 진위를 바로 알기 원했다. 일국의 최고 통치자인 여왕이 국정 운영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그 먼 길을 떠나기로 결정한 데에는 그래야할 충분한 정도의 깨달음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스바’는 소문에 실려 희미하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소문 한 조각을 섭취하여 자신의 운명과 나라와 수많은 영혼들(에디오피아는 기원전부터 유대 종교를 받아들이고 신약에 이르러 다시 복음을 받아들임)의 운명을 바꾸는(영원한 멸망에서 영생으로) 사람이 되었다. 지나가는 소문에 실린 희미한 한 조각의 말씀을 잘 섭취하여 놀라운 영적 능력을 이끌어내는 ‘고효율’의 영성을 지녔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많이 섭취하는 것도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중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 중 한 말씀이라도 영혼의 간절함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놀라운 변화와 영적 능력이 임할 것이다. 성경 안에는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그 내용들은 짧은 한 말씀 안에 다 압축되어 있을 만큼 소중한 부분들도 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영생 등”
어떤 이들은 성경 한 구절이라도 잘 소화하여 최대한 믿음의 능력을 이끌어 내는 고효율의 영성을 겸비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아무리 채워도 도무지 줄줄 새는 것을 따라잡지 못하는 깨어진 독 같은 비효율적인 영적 엔진의 소유자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런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자세에 중대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말씀의 능력이 영혼을 직접 강타하지 못하고 엇비슷하게 비켜 가면서 옷자락만 살짝 스치고 지나감 때문이 아닐까? 그런 신자들에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마저도 CCTV 카메라 렌즈만큼의 부담감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없는 이들이 성경 말씀과 그 안에 제시된 기독교 교리만 붙들고 있다면 그의 신앙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신앙이 없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대한 믿음은 단지 하나의 보험처럼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믿음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 있다. 한 기둥은 성경 말씀과 그 안에 기록된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을 바르게 믿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기둥은 인간에게 성경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신자들에게는 구원이라는 주제가 거의 전부인 것처럼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해를 할 수 있는 성경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어떤 신자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도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경륜 안에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 막 시작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신자들이 이루어가야 할 많은 부분들은 무엇인가? 문자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물론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종하며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신앙적인 안목과 태도를 가진 성도들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정상적인 구원의 여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이나 믿음의 선진들이 그토록 몸부림을 치고 때로는 두려워하면서까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려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미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그들이지만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경륜이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뒤를 돌아보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자신의 미래를 향해 뛰어갔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도들을 향하신 경륜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에베소서 1장 5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앞서서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이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에만 집착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받았다는 구원은 하나님의 경륜 밖에 있는 것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의 피(십자가의 도를 믿은 것에 해당)를 문설주에 발라 장자를 죽이는 재앙은 면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로 나오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자 그 어려움들을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자신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경륜이 그들 안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하는 신앙적인 회의감마저 들어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불신앙의 사람들처럼, 원망하고, 불평하고, 좌절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이다. 십계명과 율법을 받고 난 후에도 그들은 돌 판에 새겨진 문자에만 집착하였고,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은 소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그들을 대표적인 불신앙의 사람들로 언급하면서 모든 신자들이 그들과 같은 불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중요한 교리들을 바르게 믿으면서 이와 함께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전폭적으로 믿어져야 이것이 바른 믿음이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많이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말씀이라도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의 말씀을 영혼 깊숙이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해들은 성경 말씀이 믿어졌을 뿐 아니라 그 말씀들을 주신 살아 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실제처럼 믿어졌으며 자신들이 그 앞에 살고 있음이 온전히 믿어졌던 것이다.
매우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거의 실종된 상태인 것 같다. 성경을 많이 알기는 하지만 영혼 깊숙이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인하여 정작 필요할 때에 믿음의 능력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앞서서 여러 번 언급 하였지만 인간의 이성과 자아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앙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의 자아로 말미암은 믿음은 하나님만 추상적인 위치에 두는 정도로 믿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속죄마저도 추상적인 개념 정도로 막연하게 믿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성과 자아에 의하여 촘촘히 걸러져서 영혼의 깊은 곳을 강타하지 못하다보니 옷깃만 겨우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십자가의 은혜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
바른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자아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완전히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믿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하나님께도 믿음으로 인정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확실히 믿는 것 같은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이유도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믿어지는 사람은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고 인도하심을 바라며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므로 하나님과의 양방향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냥 고향을 나왔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이 들었다면 결코 순종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실제처럼 믿어졌던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아실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 안에는 이미 충성스러움과 신실함이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의 믿음이 성립되기 위하여 기본으로 하나님께 대한 충성스러움과 신실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불신이나 의심의 흔적이 자리를 잡지 않은 완전한 단어이다. 이처럼 믿음은 완전한 단어이지만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로는 그 완전함을 구현하거나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오직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믿게 하실 때 비로소 성경에서 제시하는바 하나님께 대한 충성스러움과 신실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불완전하나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믿음을 주문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품은 성도들은 육체의 정욕과 세속의 유혹을 거뜬히 물리친다. 신자들이 오랜 역사속의 인물들과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어떠함을 알기는 쉽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기는 그리 쉽지 않다. 쉬웠다면 교인이란 이름만 가졌어도 다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신자들이 스스로의 믿음이 어떠함에 대하여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아직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믿음이 어떠함에 대하여 간단히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신의 믿음을 계량하여 보라.”
소량의 금은보석을 계량하는 아주 정밀한 저울이 있다. 파리 한 마리만 앉아도 눈금이 움직이는 예민한 저울이다. 그러나 그 저울은 단점이 있다. 무거운 물체를 계량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 이와 반대로 화물을 가득 실은 대형 화물차도 계량을 할 수 있는 거대한 저울이 있다. 이 저울의 단점은 작은 물건의 무게를 정밀하게 계량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람이 올라가 발을 굴러도 눈금이 움직일까 말까 할 정도이니 가벼운 것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심과 하나님 나라의 무궁무진한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이다. 천국의 무한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것은 천국의 가치가 그의 마음속에서 깨달아진 만큼 계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의 마음속에 계량되어진 천국의 가치는 분명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더 값지고 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값지고 중하며 무궁무진한 천국의 가치가 마음속에서 계량되어진 성도들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계량한 저울과도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은 그에게 나름대로의 가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고 난 뒤에는 전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마치 배설물처럼 가치 없게 여겨졌다. 바울의 마음은 더 소중하고 큰 것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배로운 가치를 마음에 담은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그보다 더 작은 것들에 의해서는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대형 트럭을 계량하는 저울에 파리가 떼로 몰려 앉아도 미동도 하지 않듯이,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작은 것에 의하여 동요가 크게 일어난다면 아직 믿음에는 큰 것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이 세상 것들에 크게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이 있음을 간혹 본다. 그러나 이는 억지이다. 스스로의 입으로도 말하는 보잘 것 없는 이 세상의 것들에 동요를 일으키는 작은 마음의 저울에, 무한하고 중한 하나님의 나라가 계량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의 마음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약간 얹어도 크게 움직이는 작은 저울일 뿐이다. 이 세상에 속한 작은 것들을 계량하기에도 벅찬 작은 마음의 저울에 영적이면서 무한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공정하고 정확하게 계량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자서전에 담아 남에게 읽혔다고 가정하여 보라.”
예수를 믿은 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실제를 그대로 꾸밈없이 옮겨서 한 권의 자서전을 만들고, 그 자서전을 사람들이 읽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자서전을 보는 이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자신의 삶이 있는 그대로 기록된 자서전을 보는 이들이 “그렇지. 나도 이 사람처럼 하나님을 믿어야 해. 이분의 삶이야말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들의 표본이야.”라고 하며 은혜와 감동을 받고 본받으려 한다면, 그는 헛되게 예수를 믿지는 않은 것이다. 바른 믿음과 그 믿음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는 성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을 읽은 이들이 “어! 이 사람은 불신앙적인 사람의 표본이구만. 이러고도 자신을 하나님 믿는 신자로 알고 있었다니 정말 기가 막히네.”라고 하는 평가가 나온다면 적어도 그의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아주 잘못 믿고 있었던 사람이 거의 확실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으로 미처 보지 못하는 것도 다 아시며 세밀히 보시는 분이시다. 하물며 사람의 눈에 불신앙의 사람처럼 보이고서야 어찌 전체를 보시는 하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기독교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종교는 아니지만 복음을 헛되이 믿지않고 성령의 감동으로 믿었다면 당연히 모든 이들에게 삶을 통하여서도 믿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믿음은 성장하는 증거가 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성장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세상에서는 수명의 한계가 있기에 성장이 멈추게 되는 시점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영원히 자라도 이르지 못하지만)에 이르도록 재촉하고 있다(엡 4:15 참조). 날마다 더 거룩해져야 하고, 열심이 더해져야 하며, 날마다 새 노래를 부르도록 영적 감수성과 은혜가 더욱 넘쳐야 한다.
많은 이들이 믿다가 신앙적인 권태기를 맞이하지만 이는 주님을 향한 믿음의 방향감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을 향한 방향에 문제가 없다면 반드시 처음 믿을 때보다 더 뜨겁고 열심히 더해지며 은혜가 넘치는 믿음의 성장이 가속화될 것이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기 위하여 잠시 동안은 활주로를 달리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활주로 끝에 이르기 전에 이륙에 충분한 가속을 하여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오래 믿었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속한 일로 인하여 넘어지거나 시험에 드는 이들은 비행기로 치자면 날개를 이용하여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계속 바퀴로만 굴러가는 기형적인 신앙의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도록 하늘을 날아오르지 못하고 시내까지 진입하려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만나는 것마다 거치고 충돌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래 믿은 이들이나 성직자들이라 하더라도 세속적인 욕망에 붙잡혀서 소란을 일으키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눈에 띄는 성장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믿음의 성도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믿을 때 약간 뜨겁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지는 믿음은 방향이 잘못 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영적 어둠을 가진 자들에게는 성경을 볼때 자기 위주로 보면 자기에게 걸리는 빼 버리게 합니다 이런 자들이 계6장 검은말을 탄자에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그 저울로 자기 지식과 믿음을 달아 볼때 맞다고 주장합니다 그 저울이 하나님의 저울이 아니므로 믿음의 계량이 틀리게 된것입니다 저울은 한쪽은 추를 한쪽은 물건을 달아 수평을 이루게 하는것입니다 그 한쪽의 추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생명입니다 그 한쪽은 그 생명으로 된 사람입니다 서로 같아 수평을 이루고 있으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삶으로 살지만 그렇치 않고 기울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않음으로 그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만 주장하고 행함이
없다면 그 저울은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면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하나도 빼지 않고 다 받아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저울의 맞게 되지만 그러나 성령이 오시지 아니한 사람은 자기 필요한 말씀만 취하고 자기에게 걸리는 말씀을 빼게 됨으로 그 저울에 맞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성령을 받지 아니함으로 그 말씀이 지식으로 알고 있지 삶이 되지 못한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하는 삶이되지만 그 열매에 삶이 없다면 예수님에게 붙어 있지 않고 제거 해 버라게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하나입니다 그 믿음과 성령을
@진리와사랑받으려면 반드시 죄를 알게 하는 율법을 거쳐야 합니다 그 죄 마귀와 하나된 나를 알떄 예수님이 나를 구원 하시는 것을 믿을때 성령이 오십니다 그 성령이 오셨어 예수님과 함꼐 죽고 예수님으로 살때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나 율법을 무시하고 죄를 보지 못히는 자에게는 성령도 은혜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저울에 맞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작금의 교인들이 쪽복음 시대보다 말씀을 더많이 안다는데에 선뜻 동의가 안되네요. 대부분이 목사설교로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은 담목이든 부목이든 성경 질문을 받으면 상당히 부담스러워 했으니까요. 아마도 포럼에서 거의 해소하거나 서핑으로 해결한거 같습니다. 목사들이 성경ㅓ많이 아는 성도 별로 안좋아해요. ㅠㅠ
첫댓글 이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어느 시대 보다도 성경지식에 대하여 풍부한 지식을 가졌음에도 행함이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에 쓰여진 문자는 믿으면서도 그 만큼이나 중요한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는 곧 성령의 감동에 따른 믿음이 아니고 인간의 머리로 기독교 교리들을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살아계신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이 분명히 믿어 진다면 그에게 어찐 행함이 따르지 않을수가 있겠는가?
특별한 진리가 세상 어디 특별한곳에 있는게 아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은 백에 백 사기꾼이라 본다
진리는 성경책에 있으며 우리의 마음밭이 오염되어있지 않다면 본문 성경을 읽기만 하여도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칠 것이다
바깥에서 진리를 찾지말고 당신의 마음밭을 옥토로 만들라
저의 깨달음이자 신앙고백이며 작년 출간한 "교회여어찌하여"의 내용중 발췌한 것입니다
이 글을 율법적 신앙의 소산물이라 여기는 분들은 그 근거를 제시하십시요
제가 포럼에 지금껏 올린 글들은 한치도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적 없으며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올렸습니다
영적 어둠을 가진 자들에게는 성경을 볼때 자기 위주로 보면 자기에게 걸리는 빼 버리게 합니다 이런 자들이 계6장 검은말을 탄자에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그 저울로 자기 지식과 믿음을 달아 볼때 맞다고 주장합니다
그 저울이 하나님의 저울이 아니므로 믿음의 계량이 틀리게 된것입니다
저울은 한쪽은 추를 한쪽은 물건을 달아 수평을 이루게 하는것입니다 그 한쪽의 추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생명입니다 그 한쪽은 그 생명으로 된 사람입니다
서로 같아 수평을 이루고 있으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삶으로 살지만 그렇치 않고 기울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않음으로 그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만 주장하고 행함이
없다면 그 저울은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면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하나도 빼지 않고 다 받아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저울의 맞게 되지만
그러나 성령이 오시지 아니한 사람은 자기 필요한 말씀만 취하고 자기에게 걸리는 말씀을 빼게 됨으로
그 저울에 맞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성령을 받지 아니함으로 그 말씀이 지식으로 알고 있지 삶이 되지 못한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하는 삶이되지만 그 열매에 삶이 없다면 예수님에게 붙어 있지 않고 제거 해 버라게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하나입니다
그 믿음과 성령을
@진리와사랑 받으려면 반드시 죄를 알게 하는 율법을 거쳐야 합니다
그 죄 마귀와 하나된 나를 알떄 예수님이 나를 구원 하시는 것을 믿을때 성령이 오십니다
그 성령이 오셨어 예수님과 함꼐 죽고 예수님으로 살때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나 율법을 무시하고 죄를 보지 못히는 자에게는 성령도 은혜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저울에 맞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와사랑 최근 포럼에 하도 구원파스러운 글들이 넘쳐나기에 탈퇴할까 까지 생각을 했는데
님의 글을 읽고는 반갑기그지 없네요.
계속 좋은 글 부탁드려봅니다. ㅎㅎ
@토마스 먼 큰일날 말씀을요
토마스님의 정체성 '작렬' 을 기대해 봅니다요
새해엔 더욱 " 아자아자" ㅎ ㅎ
@땅끝으로 ㅋㅋ
이제는 나이테도 하나 더 늘어나니
좌충우돌보다는
적재적소 큰거 한방쪽으로 ...
써니님처럼
써니님 보셔요.
짱가처럼
(짱가~)(짱가~)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일이 생기면
짜짜짜짜짜짱가 엄청난 기운이 (야!)
틀림없이 틀림없이 생겨난다
지구는 작은세계 우주를 누벼라~
씩씩하게~잘도 날은다
짱가짱가 우리들의 짱가~
당당하게 지구를 지킨다 짱가짱가 우리들의짱가~
@토마스 저하고 세대가 좀 달라서요 느낌이 잘 안..ㅎ ㅎ
전 어릴때 들은 밀림의 왕자 '모근리' 밖에 몰라요 ㅋ ㅋ
@땅끝으로 밀림의 왕자 레로는 즐겨 봤어도
모근리는 처음입니다요.
세대차이가 ㅋㅋ
@토마스 토마스님께는 역사속 이야기 일겁니다요 ㅎ ㅎ
@땅끝으로 지 어렸을때 주로 보던것은
황금박쥐
요괴인간
우주소년아톰
마루치아라치
마징가제트
바다의왕자 마린보이...
ㅋㅋ
@토마스 전 본게 아니고 들은거 뿐입니다
본것과 들은것의 차이니 이건뭐 당최 비교불가지요 ㅎ ㅎ
@땅끝으로 예전에 만화가게가서 만화책 많이보면
서비스로 TV도 보여줬죠.
100원정도만 있으면 풀서비스 가능했죠.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이
한참 만화책 보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갑자기 TV보다가 소리질러서 쳐다보니
육영수 저격장면이 ... ㅎㄷㄷ
@토마스 그때 전 국모께서 돌아가셨다고 정말 목놓아 울었읍죠
참 순진한 애숭이 청년이였죠
ㅎ ㅎ
박정희 죽었을때는 대로에서 엉엉 울었다니까요
돌아보니 많이 창피하네요ㅜ ㅜ
@땅끝으로 창피하긴 저도 마찬가지입죠.
박그네만 아니였으면
아직까지 육영수씨는
제 마음속에 국모로 자리잡고 있었을 겁니다요.
박그네 똥칠질에 똥물들이 다 드러났지요.
조웅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증언들을 보면
그들의 이미지세탁~
확 잠이 깨죠. ㅎㅎ
@토마스 김일성 '신격화' 나 박가네 '의인화' 나 '도찐개찐' 이지요
특히 육영수의 전기는 이건뭐 완전 날조로 시작되어 사람들에게 와전되어 있으니까요
아참! 여기서 이러다 또 명절에 '썰릴' 라..
"써는 이" 를 줄이면.. ㅎ ㅎ
@땅끝으로 육영수 암살도 의혹투성이라고 하더군요.
인터넷에 이런 내용들도 있더군요.
<한 수사관의 양심선언으로 촉발 되었다 그사람의 이름은 "이건우"씨 였고
사건당시의 직책은 서울시경찰국 감식계장(경감) 이었다 이건우씨는 1983년
6월30일 61세로 정년퇴직을 했다
이건우씨의 주장은 그야말로 폭탄선언 이었다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죽은것이 아니다" , "육영수의 암살범은 따로 있다"
당시 이건우씨의 양심선언은 대단한 파장을 몰고 왔는데.... >
ㅎㄷㄷ
@토마스 저도 한국의 근세사에 할말이 많지만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애쓰고 있습니다요
구약 율법을 통체로 폐기하려는 간큰 이들도 있으니 자기에게 부딪치는 말씀이야 오죽이나 잘 건너뛰겠습니까
작금의 교인들이 쪽복음 시대보다 말씀을 더많이 안다는데에 선뜻 동의가 안되네요. 대부분이 목사설교로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은 담목이든 부목이든 성경 질문을 받으면 상당히 부담스러워 했으니까요. 아마도 포럼에서 거의 해소하거나 서핑으로 해결한거 같습니다. 목사들이 성경ㅓ많이 아는 성도 별로 안좋아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