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집에 가서 책장 맨 아래 칸을 정리했다. 대체로 학교 졸업장과 졸업앨범 등을 쌓아놓았었는데 이면지며 신문지며 언제 어디서 받았는지도 모르는 유인물들이 가득했다. 그 속엔 내가 초등학생 때 쓴 일기장도 있었다. 살아오면서 몇 권 남기지 않으려고 했는지 다 합쳐봤자 6~7권 남짓이었다. 내가 받아쓰기는 참 잘했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른 일기장들을 펼쳐 내용을 읽어보았다. 거긴 이제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과 밤이 늦도록 함께 놀았다는 이야기가 큼지막한 글씨로 적혀있었다.
귀가 도중 모래바람이 불어와 하루 종일 목구멍이 답답했던 날, 삽을 갖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삽을 묻어버려(!) 울며 집에 오던 날, 학교에 하나쯤은 있던 케케묵은 전설과 함께 교실을 떠돌아다니던 Y2K 괴담이며 새 밀레니엄이 찾아오기 전날의 전야제 등, 지나간 기억들은 윈도우98의 부팅음과 함께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그땐 어린 우리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 시대였다. 통화기금사태라는 것이 나라 전체를 강타한 이후 실의에 빠진 부모님들이 많았고, 전국적으로 금모으기 운동과 아나바다 운동을 장려하는 목소리가 넘쳐났으며, 화요일마다 집안의 폐품과 신문지들을 모아 가져오면 상점을 주는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선의의 경쟁을 불러일으켜 종이의 낭비를 막고 자원을 조금이라도 더 비축하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상점을 받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급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새 밀레니엄 이후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그런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내 유년기를 뒤덮고 있던 파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나 억센 완력으로 사람들을 후려치는지 알지 못했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광경을, 어느 소녀가 유괴당한 후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을, 감옥에서 탈출해 행방이 묘연하다는 탈옥수의 이야기를, 무수한 기업과 회사들이 도미노처럼 도산하고 있다는 뉴스를, 아버지들이 직장과 가정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냥 나가 놀았고 가까운 곳이라면 부모님도 말리지 않으셨다.
우리가 놀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정해져 있었고, 조금 더 머리가 커져도 아파트 단지 너머로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말하자면 그 조그마한 아파트 단지가 우리들의 영토였고 그 너머는 당시 대서특필되던 초롱초롱빛나리 유괴사건과 신창원이라는 탈옥수의 괴담이 유령처럼 떠도는 블랙아웃의 세계였다. 마치 MS-DOS의 그 까만 화면처럼. 우리는 명령어를 모른 채 그저 까만 화면이 환해지기만을 기다려야하는 미약한 존재였었다. 우린 우리의 영토 안에 우리들만의 '아지트'를 만들어, 아버지의 방이나 옷에서 훔쳐온 라이터로 불장난을 하고 고구마를 구워먹고 모닥불을 만들어 같이 쬐기도 했다. 집은 냉골이었고 걸핏하면 녹물이 나오곤 했기 때문에, 공터에서 휴지에 불을 붙여 손을 쬐던 우리들을 나무라는 어른들은 없었다. 라이터를 어디서 구했냐고, 부모님은 계시냐고 묻는 사람들도 없었다. 어른들은 뭐랄까, 반은 새로운 밀레니엄의 축제로, 반은 90년대의 종언에 동참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런 애매모호한 상태 속에서 살아갔던 것 같다. 몇몇은 가끔 장난이 지나쳐 경찰서 구경을 해본 적도 있었지만 반성문을 쓰고는 곧 풀려났다. 온 단지를 휩쓸고 다니던 푸른 연기의 소독차를 피해 이 집 저 집으로 달아나면서 1999년 가을이 흘러갔다.
그때 게임이라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할 줄 모르는 것들이었고 우린 우리의 영토 안에서만 놀 뿐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스타크래프트1'이라는 게임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미니맵의 까만 부분들-아직 개척하지 못한 장소들-로 정찰을 보내면서 간접적으로 우리의 영토 너머의 땅으로 발을 내딛는 이상한 희열을 느끼곤 했다. 그저 오프라인으로 할 수 있는 그런 싱글플레이를 하면서, 난 사소한 플레이에서조차 어떤 두려움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 더 이상 전화모뎀을 쓰지 않고도 자유롭게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되고 온라인게임이 활성화되면서, 이 단지에서 저 단지로 이사 가는 친구를 마치 이민 보내듯 슬퍼하며 울던 우리들은 ‘아바타’라는 가상 신체를 매개로 한 공간에서 만나 밤새 몹사냥을 하며 놀았고, 이름 모를 형 누나들과 클랜을 맺고 서로 유쾌한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었다. 그때 일들도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당시 유행을 타던 한 소설에 대한 동호회에서 정모를 하는데 나는 어려서 못 가 아쉽다는 글도 있고, 형이 논산으로 가는 날 슬퍼하던 기억 등, 분명 그때 내 얼굴을 나는 기억하는데 지금 거울 속엔 그 얼굴이 없다.
가끔 나는 90년대를 추억해본다. 그래봐야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집의 구조와, 그리고 97-99년의 기억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 덕택에 비교적 또래보다는 일찍 PC를 접한 편이지만, 이제는 너무도 오래 전 일이 되어버린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때 운동장에서 놀다가 불어온 모래폭풍에 허우적거리며 서로의 손을 찾던 친구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손난로 하나를 가져와 5분씩 나누어 손을 비비고, 나뭇가지를 꺾어 칼싸움을 하거나 그냥 말없이 긴 강변길을 걷다 같이 돌아오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술자리에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지인들은 넌 왜 과거만 바라보고 있냐고 핀잔을 주곤 한다. 취업준비생과 직장인의 고통을 '학생'이 알겠느냐는 말도 들린다. 그들에게 있어 오래된 대학원생 신분은 졸업한 후에도 '학교의 울타리'에 여전히 안주하고 있는 '학생'에 불과하다. 마치 본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캄캄한 미니맵만 쳐다보는 사람처럼. 나는 힘들 때마다 90년대를 향수하고, 그들은 뒤를 돌아볼 틈 없이 당면한 전쟁을 치른다. 90년대가 끝나고 2000년대를 지나오면서 우리의 영토는 점점 좁아졌다. 더 이상 블랙아웃으로 캄캄해진 너머는 없는데, 우린 조금도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바로 앞의 풍경과 미래만을 우리의 영토로 삼아야하는 애처로운 유목민들이 되었다. 분명 저마다의 별을 찾아 떠나왔지만 새삼 별과 자기 사이의 막막한 거리를 실감한다. 누구나 길을 떠나기 직전 커다란 포부쯤은 있지 않은가. 결국 하나마나한 이야기야! 집에 가자! 사막을 가로지르다 구멍이 뚫려 물이 다 새어버린 주머니를 뒤늦게 발견하고 황망해하는 그런 표정으로 친구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표정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의 소식을 듣는 날이 있다. 누구는 먼 나라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고 누구는 밤새 밀려드는 환자들을 맞느라 잠들지 못하고 누구는 결국 외국으로 떠났고 누구는 산천을 떠도는 스님이 되었다. 일기장과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같이 펼쳐놓고 이름들을 찾으면서도 끝내 알지 못하는 얼굴이 있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슴푸레한 직감이 드는 얼굴도 있다. 학기말고사를 준비하며 새벽 4시가 넘도록 공부하는 학부생들을 보다가 문득 나도 학부를 다닐 때를 추억해보면, 이젠 그나마 최근의 기억임에도 4년 동안 정확히 뭘 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양친의 표현을 빌리면 ‘손에 붙잡을 수 없는 뭔가’를 찾아보겠다고 허랑방탕하게 삶을 소진한 세월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사람들이랑 대취하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면서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수업 전 반주는 일상이었고 이미 취해버려 결시한 날도 적지 않았다. 뒤늦게 대오도 아니고 소오를 해서 공부를 하겠다고 대학원으로 들어와 석사를 받고 박사로 올라갔다. 소개팅에서 인문학 대학원생은 농부보다 아래, 라고 선배가 귀띔해주었다. 1950년대 전시상황의 한국을 상상해보다가 불현듯 90년대의 기억들이 틈입해온다. 90년대가 마무리될 무렵에 난 이 나이에 뭘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을까? 이렇게 사상적 유목민이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을까? 일기장을 뒤져보아도 이 다음에 나는 무슨 일을 하겠다고 적어놓은 구절은 없었다. 다만 책을 많이 읽었고, 부모님은 언젠가 네가 박사님이 될 거라고 하셨지만,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가서 학자가 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두 분은 말씀이 없었다. 강의조교를 해서 등록금 부담은 없었지만 생활비는 도저히 시간상 어쩔 수 없었고, 학생들 과제 채점과 강의 준비, 대학원 원서 번역과 학위논문 준비와 경제 인구가 되지 못하느냐는 부모님의 일갈이 사방에서 날아들 땐 으슥한 그늘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90년대를 상상했다. 그것이 일종의 처방이었다.
아무튼... 일기장을 정리했다.
상장과 졸업장이 나왔다.
유치원 졸업장부터 박사과정 입학허가서까지 죽 늘어놓아보았다.
내 성장과정이 보였다. 그러나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경제력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너머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던 그런 흥미진진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현재와 현재를 버티고 있는 내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