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원이 절실한 진해현 객사,
동문 여러분들의 소중한 의견이 필요합니다
동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6회로 졸업한 박성원이라고 합니다. 늦었지만 새해 인사드립니다.
자랑스러운 삼진중학교 동문 여러분, 갑오년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큰 성과 있으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며칠 전 제승대 총동창회장님을 뵈었습니다.
새해 인사를 드리고 난 뒤 진해현 객사를 복원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동의를 하시면서 한번 추진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진해현 객사 복원뿐만이 아니라 삼진중학교의 발전 방향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진해현 객사 복원은 오래 전인 15~6년 전에도 발의가 되었다가 본격 추진되지 못하고 좌절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고향의 중요한 역사유적을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어렵겠지만 성공적으로 복원을 한다면 우리 고장을 발전적으로 변모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동문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문 여러분들께서 고견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동문들만이 나선다고 될 문제는 아니지만 우선 우리 동문들이 먼저 의견을 모으는 일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아래의 내용은 지난 연말에 저희 기수들끼리 한번 회람해 본 것입니다. 한번 훑어보시고 좋은 의견을 내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진해현 객사 복원이 절실하다
- 진해현 객사 복원은 우리 세대의 과제
2013. 12. 14.
정리 박성원
진동면 진동리 241-1번지. 삼진중학교 운동장 한편의 빈터. 운동장 보다 높이 돋운 땅에 수십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는 건물터가 있다. 바로 진해현 객사(客舍) 터다. 진해현 관아 건물과 함께 진해현관아및객사유지(鎭海縣官衙및客舍遺址)란 이름으로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4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창원군으로 통합되기 이전에 진해현(鎭海縣)이란 독자적인 행정단위의 읍치(邑治)가 있던 곳이다. 진해현은 벌써 고려시대에 현이 설치된 옛 고을로 한때 진주의 속현이 되거나 창원부에 속하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독자적인 현으로 유지되어 왔다. 진해는 비록 큰 고을은 아니었지만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져 왔다. 우산(牛山), 팔진(八鎭)이라는 별호(別號)로도 불리던 진해는 오랜 역사를 지닌 땅이다. 그 땅의 중심이었던 곳이 진해현 관아이고 객사였다. 그 동헌(東軒)의 이름은 화류헌(化流軒)이었고 객사는 고을의 별호를 따 우산관(牛山館)이란 당호(堂號)를 달았었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청에서 제일 중요한 건물이었다. 임금의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안치하고 문안을 드리는 주사(主舍)와 온돌방을 두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한 익사(翼舍)로 구분되었다. 진해현 객사는 앞면 11칸 옆면 3칸의 건물이었다.
진해현 객사 건물은 또한 배움의 터전이기도 했다.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가던 1908년 10월, 진해현의 지방유지들이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이 진해현 객사 자리에 사립 진명학교(進明學校)를 설립한 것이다. 진명학교 초대 교장은 서문규(徐文奎)가 맡았으며, 8세에서 17세까지의 학생 70명이 입학하였다고 한다. 1914년에는 진동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고 이후 진동동공립심상소학교, 진동성내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1943년에는 학교 위치를 이전해 현재의 진동초등학교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47년에 이 자리에 또 하나의 학교가 설립되는데 바로 삼진중학교(三鎭中學校)다. 그런데 오랫동안 삼진지역 중등교육의 요람 역할을 해 오던 이 학교에 시련이 닥친다. 1983년 5월 2일,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교사(校舍)로 사용되던 객사 건물이 학교 자료와 함께 불 타 버린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삼진중학교는 객사 터 옆에 새 건물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해현 객사가 불의의 화재로 소실된 지 만 30년이 지났다. 그동안 주초석만이 그 빈터를 지켜오고 있었다. 조상이 남긴 옛 흔적을 찾아 복원하고 스토리텔링 하는 일이 시대의 흐름이 된 지 오래이다. 작은 거리라도 있으면 새롭게 복원하려고 애쓰는 게 요즈음이다. 하물며 진해현 객사와 같이 역사적 유래가 깊고 중요한 자원을 그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다른 지역이었으면 벌써 복원이 추진되었을 것이다. 이제 진해현 객사를 복원해야 한다. 늦었더라도 시작해야 한다.
진해현 객사는 다른 지역의 객사 터와는 달리 빈터로 있어 복원에 아주 유리하다. 진해현 객사의 내력을 상세히 기록한 상량문도 다행히 남아 있다. 또 같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진해현 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군령을 출납하는 사령청(使令廳), 말을 사육하던 마방(馬房)과 지방의 형사를 담당하는 형방소(刑房所), 수령을 보좌하는 기구였던 향청(鄕廳) 등의 부속건물이 남아 있다. 또 사주문(四柱門) 앞에는 역대 현감의 공덕비 16기가 있다. 조선 후기의 관아건축 중에서도 그 부속건물의 대부분을 갖추고 있는 드문 예로서 건물의 배치나 형식, 기능 등은 건축사 연구자료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들 현전하는 건물과 함께 내아(內衙), 질청(秩廳), 관노청(官奴廳) 등의 부속 시설을 복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진해현성지의 성벽이 일부분 남아 있어서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진해현 읍성의 남문(南門)이었던 진남루(鎭南樓), 동문(東門)이었던 인명루(仁明樓) 등과 함께 복원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현재 종합정비 중인 국가사적지 제472호 진동리 유적이 또 바로 옆에 있다. 진해현 읍성과 객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고 진동리 유적과 연계하여 역사문화유적으로 가꾸어가야 한다. 여기에다 이제마(李濟馬),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등의 스토리텔링을 더한다면 흥미로운 역사문화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현재의 삼진지역은 급격히 도시화되면서 전통문화 역사자원 역시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진해현 객사와 진해현 읍성을 복원해 나가는 과정은 또한, 이 지역을 전통과 현대가 아우러진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특히, 이 학교를 다녔던 이들이라면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우정도 복원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꼭 30년이 흘렀고 모두는 그만큼 늙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는 모른 척 방치할 수 없다. 그 공간에 추억이 있는 세대가 나서야 한다. 추억이 없는 세대는 의무감도 없다. 추억이 있는 세대가 의무감을 가지고 앞장서야 한다. 많은 논의와 예산이 필요한 일이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진해인(鎭海人), 삼진인(三鎭人), 진동인(鎭東人)의 지혜와 의지를 한데 모은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1) 참고 : 고지도 속에 나타난 진해현 객사
참고로 진해현 객사가 기록된 고지도를 모아 보았다. 현재 전해져 오는 고지도 중에서 진해현 객사가 기록된 고지도는 아래 네 종류의 지도이다. 진해읍성 속에 관아와 객사가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진해현의 읍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지도의 출처는 모두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kyujanggak.snu.ac.kr/sub_index.jsp?ID=GZD)
이다.
<그림 1> 해동지도(1750년대) 중 진해현 지도(부분)
<그림 2> 여지도(1767년 이전 추정) 중의 진해현 지도(부분)
<그림 3> 지승(1767년 이후 추정) 중 진해현 지도(부분)
<그림 4> 1872년 지방지도 중 진해현 지도(부분)
2) 참고 : 사진으로 보는 진해현 객사
진해현 객사와 진동공립보통학교, 삼진중학교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을 모아 보았다. 사진 출처는 삼진중학교, 삼진중학교 29회 카페, 경남도민일보 등이다.
<그림 5> 진동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기념 (1915년)
<그림 6> 삼진중학교 개교 당시 모습 (1947년)
<그림 7> 삼진중학교 졸업식 (1950년)
<그림 8> 1980년대 초반 모습 (1982년경)
<그림 9> 1980년대 초반 모습
<그림 10> 삼진중학교 정문 (년도 모름)
<그림 11> 안타까운 화재 현장 (1983년 5월)
<그림 12> 화재 후의 임시 교무실 (1983년)
<그림 13> 임시 천막교실
<그림 14> 화재 후의 객사 터
<그림 15> 화재 후 본관 건물 신증축 공사 (1983년)
3) 참고 : 경남 18개 시군의 객사 현존 상황 (2013년 12월 현재)
참고로 경남의 여타 지역의 객사 유적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취합해 보았다.
창원시
없어졌다. 현재 창원 북동시장 일대를 객사 터로 추정하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3호인 창원 불곡사의 일주문이 원래 창원객사의 출입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2007년부터 창원읍성 복원 사업 진행 중이다. / 웅천읍성(熊川邑城)의 객사는 웅천초등학교 교사로 쓰이다 1968년 11월에 철거되었다. 웅천읍성은 복원사업 중인데 2011년에 1단계 사업이 마무리되었다. / 진해현(鎭海縣) 객사는 삼진중학교 교사로 사용되다 1983년에 소실되어 현재 터만 남아 있다.
함안군
없어졌다. 함안객사 터는 함안면의 함성중학교 일대로 추정된다. / 칠원읍성(漆原邑城)의 객사 터는 칠원초등학교 자리이다.
고성군
없어졌다. 객사 터는 고성읍사무소 일대로 추정된다.
통영시
현존하고 있다. 통제영의 객사 건물인 세병관(洗兵館)은 국보 제305호로 지정되어 있다.
거제시
거제읍성(고현성)의 객사는 없어졌고 그 터에는 현재 거제시청이 들어 서 있다. 고현성은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거제현의 객사인 기성관(岐城館,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1호)은 거제면 동상리에 현존하고 있다.
김해시
없어졌다. 2008년에 객사 터를 발굴하였다. 또 김해객사후원지(金海客舍後苑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67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해읍성 북문 일대는 복원사업이 완료되었다.
남해군
없어졌다. 객사 터는 현재 남해읍사무소 자리이다.
하동군
없어졌다. 다만 하동객사 하남관(河南館)의 문루(門樓)는 옮겨져 섬호정(蟾湖亭)이란 이름으로 현존하고 있다. 하동군 고전면의 하동읍성은 현재 232억원의 사업비로 2015년까지 복원사업 중이다.
진주시
없어졌다. 객사 터는 진주시 평안동 구 진주MBC 자리로 현재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다만 2012년 12월 개통된 진주KTX역이 옛 진주객사를 본뜬 양식으로 지어졌다.
사천시
없어졌다. 1911년에 실화로 소실되었다고 하며 객사 터는 현재 사천초등학교 자리이다. / 곤양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곤양읍성(昆陽邑城)의 객사도 사라졌지만 객사의 출입문이었던 응취루(凝翠樓)는 경상남도의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 복원사업의 하나로 2011년에 위치를 옮겨 복원하였다.
창녕군
창녕객사는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영산읍성의 객사는 구 영산극장 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읍성지(靈山邑城址)는 현재 복원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밀양시
현존하고 있다. 밀양 객사였던 밀양관(密陽館)의 부속건물이었던 영남루(嶺南樓)는 보물 제147호로 현재 국보로 승격 추진운동 중이다. 한때 객사 건물이었던 천진궁(天眞宮)도 현존하고 있다.
의령군
없어졌다. 현 의령초등학교 일대에 객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산시
없어졌다. 객사 터는 양산축협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산청군
없어졌다. 현재 산청초등학교가 객사 터이다. 현재 산청군에서 환아정(換鵝亭)과 함께 복원사업을 추진 중이다.
함양군
없어졌다. 현 함양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함양공립국민학교 교사로 쓰이다가 1960년대에 소실되었다. 함양객사의 문루였던 학사루(學士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0호)는 현존하고 있다.
거창군
없어졌다. 현재의 거창군청 자리에 있었다.
합천군
없어졌다. 합천군의 객사인 강양관(江陽館)은 야로면에 있었다. / 초계객사(草溪客舍)는 현 초계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 삼가객사(三嘉客舍)는 삼가공립소학교, 면사무소로 사용되다 1949년에 소실되었고 현재도 삼가면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끝//
첫댓글 수고 많은이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것인데
사이트에 나부터 잘안들어 오니 문제구먼 . . .
그러나 지속적인 입소문을 내서 본격적으로 추진해 봅시더 !
회이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