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다
김효운
설을 며칠 앞둔 추운 겨울, 새벽은 졸졸졸 콩나물시루에 물 흐르는 소리로 찾아왔다.
잠결에 그 소리를 들으면 참고 참았던 배뇨감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나는 잠 끝을 놓치지 않으려 반쯤 눈을 감은 채 비틀비틀 윗목에 놓인 요강을 찾아 갔다.
할머니는 저러다 콩나물시루 깔고 앉아 오줌 누겠다고 걱정하셨지만 다행히 그러진 않았다. 콩나물은 새벽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물을 주어야 했다. 놀다가도 수시로 물을 주어야 하는데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걸핏하면 잊었고 어른들은 귀신 같이 알아내고 꾸중 하셨다. 물을 자주 주지 않으면 잔뿌리가 생긴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뿐인가! 콩나물시루는 늘 검은 보자기를 쓰고 있었는데 절대 열어 보면 안 된다 하셨다. 빛을 보면 파래진다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이렇게 기른 콩나물은 정말 맛이 있었다. 흔히 어른들이 옛맛이 안 난다는 말을 이해 할 수 있을 정도로.
뒷산에선 쌓인 눈을 감당하지 못한 설해목雪害木 부러지는 소리가 메아리 치고
“날 밝으려면 멀었다. 한 숨 더 자거라.”
그 말에 아랫목 이불 속으로 다시 파고들면 새벽 군불의 온기가 따끈따끈 기분 좋은 나른함으로 몰려 왔다.
아랫목은 장판이 누룽지처럼 익어 가고 윗목은 자리낏 물에 살얼음이 끼는 윗풍 센 방안에서 나는 욕창 환자처럼 몸을 뒤집으며 늘어지게 잠을 잤다.
밤새 굶주린 아침 햇살이 밥풀 몇 개 붙은 꽁꽁 언 강아지 밥그릇을 핥을 즈음 부엌에선 구수하고 맛있는 냄새가 이불 속에 있는 나를 끌어냈다.
어머니가 용맹한 병사처럼 무쇠솥 뚜껑을 열어젖히고 손으로 휘이휘이 휘저어 김을 몰아내면 밥솥 안엔 송송 썬 김장 김치와 생굴을 넣은 계란찜이나, 간장에 갖은 양념을 해서 찐 망둥어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이 망둥어는 지난 가을 직접 잡아다 말린 것들이었다. 마트도 없고 냉장고도 없던 시절 어른들은 철마다 나는 제철 음식 재료를 소금에 절이고 햇볕에 바람에 말려 일 년 내내 이용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마트를 두고 냉장고에 딤채에 음식 재료를 늘 쟁여 놓고 살면서도 날마다 끼니마다 뭘 해 먹나 고민하는 나에 비해 그 열악한 조건에서 식구들 끼니를 차려 낸 어머니가 애틋하고 존경스럽다. 심지어 여섯이나 되는 자식에 시부모까지 모시고......
그때 어머니 눈썹에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들은 오래도록 머릿속에 마음속에 각인 되었다. 어느 풀잎이나 꽃잎에 맺힌 이슬도 그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으리.
곁불로 국을 끓이는 작은 옹솥에선 처마 밑에 풍경처럼 매달려 있던 시래기가 굵은 멸치를 두르고 된장 냄새를 풍기며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광에 가서 작은 항아리에 어리굴젓 꺼내 오거라.”
어머니의 말씀에 부엌문을 열면 하얗게 햇빛 속에 놀라 달아나던 먼지들……
아궁이 불에 앞뒤로 뒤집으며 파래김을 굽고 일정한 크기로 싹둑싹둑 자르면 나는 시키지 않아도 나뭇간에서 길고 튼튼한 솔골(솔잎)을 하나 찾아 왔다.
바람에 날리거나 옆으로 쓰러지지 말라고 김 담은 접시에 솔골을 꾸욱 눌러 꽂으면 아침 밥상이 완성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진지 잡수시라 해라.”
어머니 말씀이 꿀보다 달콤했다.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다. 끼니 거르지 마라.”
지금까지도 귀에 딱지 않도록 당부하는 어머니의 말씀.
그랬다. 나는 그때의 밥심으로 여태까지 살아 왔다.
살면서 젖은 빨래처럼 널브러진 날을 만나도 아궁이 앞에 김처럼 슬픔을 말리고 다시 일어섰고, 거친 바람에 휘청대도 솔골 꽂은 김처럼 쉽게 넘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덧붙이시길 속이 비면 더 추운 거란다. 속이 든든해야 힘도 나고 용기도 생긴단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먹어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고 오랫동안 추위에 시달렸다. 그러니까 내가 먹은 건 꽃밥처럼 헛밥이었던 거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인스턴트 음식에 길든 내 아이들을 보면 늘 헛밥을 먹고 있는 듯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요즘은 무슨 ‘마라탕’이라는 음식에 빠져 있다. 음식도 유행이 있고 시대 따라 변천하겠지만 우리 전통 음식은 밀리고 잊혀지는 게 안타깝다. 신토불이라는 식상한 말이 아니어도 우리 전통 음식이 건강에 이로울 것이란 건 전문가가 아니어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지난날들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무명천처럼 소박하나 정성으로 가득한 그때의 어머니 밥상 다시 한 번 받아 봤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