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가 들려주는 우리 대구이야기
29. 【육신사】 묘골 육신사의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1)
글·송은석
(전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사무국장·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제비(연아총)의 묘
2007년 필자가 풍수답사때 찍은 사진
프롤로그
긴 연휴 끝이었던 어제(2016.5.8)는 근무일은 아니었지만 육신사를 다녀왔다. ‘제20차 묘골방문의 날’ 행사와 함께 몇 분의 문중 어르신들을 뵙기 위해서였다. 매년 양력 5월 2째 주 일요일에 개최되는 이 행사는 순천박씨 충정공파 종인들의 한마당 잔치이다. 이 행사는 충정공파 종친회와 청장년회에서 주관하는데 금년으로 20회에 이르렀다. 현 순천박씨 충정공파 종친회장인 박도규 회장이 청장년회 초대회장에 부임하던 해인 1996년도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행사의 성격은 여느 종중의 모임과 유사하다. 다만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면 자신들의 문중 세거지인 묘골의 육신사에서 개최된다는 점이다. 현재의 자신들을 있게끔 한 박일산(박팽년 선생의 유복손) 공이 묘골에 터를 잡은 때는 1479년(성종10)이다. 따라서 묘골은 무려 550여년의 내력을 지닌 충정공파 세거지인 것이다. 게다가 이곳 묘골의 육신사는 ‘사육신’과 함께 박팽년 선생의 아버지인 ‘박중림’ 선생의 사당까지 갖춘 곳이다. 어디 그뿐인가? 초창(初創)의 역사로는 오백년이 넘고 중창(重創)의 역사만으로도 사백년이 넘는 묘골박씨(순천박씨 충정공파의 별칭)문중의 랜드마크 ‘태고정(보물554호)’도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묘골 육신사는 ‘묘골박씨문중의 성지(聖地)’인 셈이다.
이날 필자는 넓은 육신사 뜰에서 진행된 ‘묘골방문의 날’ 행사를 ‘객(客)’의 입장에서 즐겼다. 하지만 현 종친회장 이하 그간 유림활동을 통해 알고 지내는 어르신들이 많다보니 전혀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날 해묵은 미스터리가 하루 종일 필자를 괴롭혔다.
‘음···, 그녀는 어찌되었을까?
550여 년 전 그녀는 어찌되었을까?
혹시 ‘충노·충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忠奴·忠婢’라고 한자로 쓰면 이해가 될 것이다. 비슷한 말로는 ‘충복(忠僕)’이라는 말도 있다. 쉽게 말해 ‘주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끝까지 충성을 다한 종’이라는 뜻이다.
재미있다고 표현해야할지 감동적이라고 표현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 역사에는 이러한 ‘충노·충비’의 이야기가 제법 많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사례를 한 번 소개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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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수 정세아의 장남인 백암 정의번은 임란 때 전사를 한 인물이다. 참고로 정세아는 영천사람이며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자, 임란 시 영천지역 의병장이었다. 정의번이 전투에 함께 참전한 자신의 종 억수에게 “나는 아버지를 위해 죽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죽을 까닭이 없다. 내 곁을 떠나라.”고 했다. 그러나 억수는 “군신과 부자와 노주(奴主)는 일체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아버지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는데 종이 어찌 혼자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하고 주인인 정의번과 함께 전장에서 최후를 맞았다. 후에 정의번의 묘소 앞의 그의 충노 억수의 묘를 세우고 ‘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라 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4백 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정씨 집안에서는 묘사 때마다 억수의 묘에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 고경명 장군 등을 기리는 광주 포충사(褒忠祠) 경내에는 ‘충노봉이귀인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라는 거대한 자연석비가 하나 있다. ‘봉이’와 ‘귀인’은 고경명 장군집의 종이었다. 임란 때 의병장으로 최후를 맞은 공경명 장군과 그의 둘째 아들 고인후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바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자신도 나중에는 고경명 장군의 첫째 아들 고종후와 함께 전투에 참전하여 주인과 함께 전사했다. 후대에 이 포충사가 세워질 때 고씨 문중에서 잊지 않고 이들을 기리는 비를 세웠던 것이다.
◯ 김천 구성면 상원리 연안이씨(延安李氏) 집성촌에는 아름다운 정자 ‘방초정(芳草亭)’과 연못 ‘최씨담(崔氏潭)’이 있다. 또한 그 곁에는 최씨부인의 정려각이 있고, 그 정려각 바로 앞에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라 새긴 작은 석비가 하나 있다. 임란 때 최씨부인은 왜적의 능욕을 피하기 위해 마을의 연못인 ‘최씨담’으로 몸을 던졌다. 이때 최씨부인의 몸종인 ‘석이’가 부인을 구하기 위해 연못에 뛰어들었지만 둘 다 죽고 말았다. 이후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남편이 연못가에 세운 정자가 바로 ‘방초정’이며, 부인이 빠져죽은 그 연못은 ‘최씨담’이 되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연안이씨 문중에서 충복 ‘석이’의 비를 만들었으나, 신분의 구별이 워낙 엄격했던 시대라 비를 세우지는 못하고 최씨담에 던져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비는 1970년대에 와서 최씨담에서 다시 발견되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 영천 북안면 도유리에는 천하명당으로 알려진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 이당의 묘가 있다. 위쪽은 영천최씨의 묘역이요 아래쪽은 광주이씨의 묘역이 되는데,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둔촌 이집과 천곡 최원도 선생의 우정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다. 이 묘역의 한쪽 끝자락에는 당시 최원도 선생의 여종 ‘제비[燕娥·연아]’의 묘가 있다. 제비는 자신의 주인인 최원도의 방 다락에 주인의 친구인 이집과 그의 아비인 이당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았다. 이집은 당시 고려조정의 실권자였던 신돈을 비판한 뒤, 벼슬을 버리고 자신의 아비를 모신 채 영천 땅의 최원도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 비밀이 새어나가면 최원도와 이집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현명한 종 제비는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주인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이에 양 문중 묘역 한 편에 제비의 묘를 조성하고 지금까지 양 문중에서 제사를 모셔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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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위에 소개한 4곳을 모두 다녀온 바가 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들 충노들은 결국 자신들의 주인을 빛내기 위한 조연에 충실했던 인물들이다. 요즘은 주연을 능가하는 조연도 있다지만 충노들의 사연을 보면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신분의 구별이 너무나도 분명했던 시절이었기에 혹 주연을 능가하는 조연이 있었다한들, 스토리가 그대로 전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애초에 태어나기를 스스로 종의 신분을 타고 태어난 그들이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오직 주인의 몸종 역할을 하는 것뿐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아비로부터 어미로부터도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배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의 생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곰곰이 곱씹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쯤 되면 오늘 필자가 하고자하는 말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지금의 ‘묘골박씨’를 있게 한 것은 박팽년 선생의 유복손인 박비(박일산)라는 인물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런데 익히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여기에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3대가 멸족되는 과정에서 천우신조로 때마침 임신을 하고,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무사히 박비(박일산)를 출산한 성주이씨 부인. 또한 박비(박일산)를 몰래 거두어 키워준 것으로 알려진 성주이씨 부인의 친정집. 그리고 성종 임금에게는 용서를, 박비(박일산)에게는 자수를 권유했다고 알려진 박비의 이모부 이극균.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가 있다. 바로 자신의 주인이 출산한 남자아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낳은 딸과 바꾸어 길렀다고 전해지는 한 충비(忠婢).
다음은 정조 임금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1799년)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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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아들 생원 헌(憲)ㆍ순(珣)ㆍ분(奮) 등도 함께 죽었다. 순의 아내 이씨(李氏)는 막 임신을 하였는데, 아들을 낳을 경우 연좌되게 되어 있었다. 여종 역시 임신을 하였는데, 여종이 이씨에게 말하기를,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으나, 아들이라면 쇤네가 낳은 아기로 죽음을 대신하겠습니다.” 하였다. 출산을 하니 과연 아들이어서 여종이 맞바꿔 기르며,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는데, 성장한 뒤 자수하자 성종이 특별히 용서하고 일산(壹珊)으로 이름을 고쳤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었으며,··(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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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묘골에서 파회마을로 넘어가는 재를 넘다보면 박비(박일산) 부부의 묘와 함께 아버지인 박순과 어머니인 성주이씨의 합장묘, 일명 ‘의관장묘(衣冠葬墓)’가 있다. 의관장묘는 박순의 경우 사육신 사건 때 참화를 입었던 탓에 그의 의관으로 시신을 대신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리고 묘골 옆 마을인 도채에는 박비(박일산)의 외할아버지인 이철주(이철근) 공과 외할머니인 능성구씨의 묘도 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이 묘는 무려 오백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성주이씨가 아닌 외손인 묘골박씨 문중에서 제사를 모셔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어찌된 것일까? 왜 그녀(?)는 묘는 고사하고 조그만 빗돌하나 남아 있는 것이 없을까?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홍재전서·연려실기술·육선생유고·청장관전서·계당집·궁오집·유회당집’ 등 수 많은 기록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그녀(?)지만 왜 이름 한 줄 남아 있는 것이 없을까?
제20차 묘골방문의 날을 보면서 필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충비인 그녀를 다시 되살리면 안 되는 걸까···’
2016.5. 9
砧山下 풍경산방에서
訥齋 송은석拜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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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의 유교유적, 유교문화, 문중 등은 기존의 자료가 충분치 못한 관계로 내용 중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신 경우 전화 또는 댓글로 조언을 주시면 적극 경청하고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당부 드립니다.
제비(연아총)의 묘
2007년 필자가 풍수답사때 찍은 사진
제비(연아총)의 묘
2007년 필자가 풍수답사때 찍은 사진
충노봉이귀인지비(忠奴鳳伊貴仁之婢)
다음 블로그 '길따라 맛따라 떠나는 여행'에서 가져온 사진임.
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
다음 카페 다이나믹 영천에서 가져온 사진임.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婢)
김천인터넷신문에서 가져온 사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