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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묵상글 ( 연중 제19주일. - 믿을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 등 )
*** 오늘 늦잠으로 늦게 묵상글을 올렸기 일찍 이 곳에 오셨던 분들께 미안합니다.
방문하시는 모든 분, 영육간에 강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김 루도비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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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11 02:16
- 믿을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Panis Angelicus, 천사의 빵/음식.
오늘 엘리야는 잠자다가 천사가 주는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이 열왕기 얘기를 듣고 믿지 않는 많은 사람은
‘자다가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도 사람들은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저 사람’이고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 아니며,
‘저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은 더더욱 아닙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엘리야가 먹은 빵은 진짜 천사의 빵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이 준 빵인데 엘리야가 잠결에 또는 꿈결에 천사의 빵으로
착각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바 있듯이 저는 요즘 기적 체험을 많이 합니다.
물론 옛날에는 그것들을 하나도 기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대북 사업을 하면서 몇 차례 하느님께서 해주신 일이라는 체험을 했지요.
그 첫 번째가, 이것도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이지만, ‘금목걸이 기적’입니다.
평양에 종합 복지관을 세우기 위해 자선 음악회를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그즈음 북한에서 미사일을 팡팡 쏴 음악회 표가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의 속은 타들어 가고 만나는 사람마다
표를 사줄 사람인지 아닌지 그런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성체조배 중에 그런 가련한 수도자인 저 자신을 보게 되었고,
음악회를 하느님 뜻에 맡기기로 그래서 더는 그런 음악회 걱정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 저희 형제가 그 ‘금목걸이’를 가져온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자기가 누군지 알리지도 않고 그 ‘금목걸이’를 제게
전해달라고 하고 가셨다는 것인데 그 ‘금목걸이’는 결혼 패물이랍니다.
그분이 그 귀한 것을 봉헌하신 것이 그리고 하필 그날 봉헌하신 것이
순전히 우연이요 그저 그분의 선의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하느님께서 그분을 제게 보내신 것이라고 믿었고,
그때 이후 그런 경험이 점점 많아졌는데 그때마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것을 돌아보는 지금의 저는 이런 묵상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보내주신 기적과 은총보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믿게 해주신 기적과 은총이 더 크다고.
다르게 얘기하면 그 ‘금목걸이’를 주신 것보다 믿음을 주신 것이 더 큰 은총이라고.
주님께서도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의 빵을 아무리 보내주시고
당신의 아드님을 하늘의 빵으로 보내주셔도
그것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하늘의 빵이 아니라,
자기가 애써서 얻은 빵이거나 선의의 인간이 준 빵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빵도 주시고 믿음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믿는다면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해 주심을
믿지 않거나 그런 체험을 하지 못한 신자들이 꽤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과 비교해 그 믿음이 약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자기들의 수입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기에
그 십일조를 봉헌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헌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재물보다도 성체를 주신 은총이 더 큽니다.
금목걸이보다 믿음을 주신 것이 더 큰 은총인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사람은 프란치스코처럼 감탄에 감탄을 더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감탄합니다.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토록 겸손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을 저희에게 하늘의 빵으로 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것을 믿을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 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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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난주에 인천 교구 동창 신부 서품 25주년 기념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처음에 인천 교구 동창은 모두 12명이었고 한 신부가 사고로 하늘 나라에 일찍 떠났을 뿐 11명 중에 아픈 사람도 없고, 중간에 사제 생활을 그만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사목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했던 이번의 성지순례를 통해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이렇게 25년을 사제로 기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각 개인의 능력보다 주님 덕분임을 잘 알기에 더 큰 감사함의 기도로 함께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은 교만을 통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는데, 자기의 능력과 재능만을 뽐내려고 하는데 상대방에게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어렸을 때, 어머니께 불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형님의 옷들을 무조건 물려 입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옷이 낡아서 구멍이 나면 그 구멍을 메워서 입게 했습니다. 친구들이 입는 새 옷이 늘 부러웠고, 헌 옷만 입어야 하니 늘 불만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6남매를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었음을 잘 알기에 이제 비로소 감사의 마음을 가집니다.
교만도 불평불만도 그 밖의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서는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없게 해서 함께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정적인 마음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면서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군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나자렛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믿음을 갖지 못하고 또 당신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도 갖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셨고, 당신을 믿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성체 성사를 통해 이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십니다. 제1독서에서 보듯이, 엘리야가 광야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제공한 음식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양식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채울 수 있습니다.
때때로 광야를 헤매며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서는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으로 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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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이라는 책에는 결코 뒤에 정답이 나와 있지 않아!(찰리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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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19주일입니다. 우리는 연중 17주일부터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6장의 연중 21주일까지 5주간 동안에 거쳐 계속해서 들을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말씀들 중에서도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요한 6, 51), 곧 “성체성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 독서>는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거짓 예언자 450명을 죽인 후, 바알의 신봉자인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 하자 피신하던 중, 하느님께서 극도로 지쳐 잠든 그를 깨워 빵과 물을 먹고 마시게 하여 마침내 호렙산에 이르게 하신 이야기로, 이때 엘리야가 받아먹고 힘을 회복하였던 이 “빵”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성체”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줍니다.
<제2독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입니다. ‘이 사랑’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으로 내 놓은 당신의 살, 곧 ‘성체성사’를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내 살이다.”(요한 6,51)
이는 당신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살아있는 생명의 음식이고, 그 생명은 하늘에서 와서 우리를 하늘생명으로 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에게 당신의 살을 주시고,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그 ‘빵’을 먹음으로써 가능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주어지는 빵이기에, 받아먹어야 하는 빵입니다. 이 ‘빵’은 결코 우리 스스로 만들 수가 없는 빵일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우리의 노력으로 획득할 수 없는 선사되는 건네진 빵입니다. 그러니 이 ‘빵’은 먼저 건네주는 분이 없이는 결코 먹을 수가 없는 빵입니다. 그러니 생명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베풀어진 것 곧 선사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생명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선사된 생명을 받아서만이 생명이 됩니다. 그러니 먹지 않고서는 결코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곧 ‘생명의 빵’을 받아먹어야 ‘생명의 빵’이 됩니다.
‘먹는다.’는 것은 음식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 입에 넣는 것이며, 입에 넣고서 맛보는 것만이 아니라 삼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삼킬 때라야 생명이 됩니다. 곧 살아있는 빵을 받아 삼키는 자라야만이 영원히 살아있는 생명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니, 빵은 눈앞에 두고 보고만 있으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입에 넣고 오물거리라고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맛보기만 하고 뱉어버리거나 골라서 삼키는 것이 아니라 주신 분을 믿고서 꿀꺽 삼켜야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내 살이다.”(요한 6,51)
오늘도 우리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 그분의 살”을 먹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 곧 빵을 받아먹고 ‘빵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는 빵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빵이 되는 사람’ 말입니다. 진정으로 그분을 먹은 자라야 그분처럼 먹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빵이 되어 자신을 건네주고 있는지요? 먹히는 빵인지요? 기꺼이 형제의 입 속으로 들어가 씹히고 부서지고 바수어지고 뭉개지고 마침내는 사라져지는 지요? 그런 이라야 빵이 된 사람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살이요, 성체가 되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분이 우리 안에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한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빵)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빵)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한 6,51)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의 생명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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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변해야 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영양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을 제대로 모심으로써 생기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생명의 양식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아들이고 그분의 마음을 닮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변할 수 있는 은총을 갈망합니다.
예수님께서“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유다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빵의 기적과 같은 세상적인 것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분을 보지 못하고 오직 만나만 바라보았던 것과 같습니다. 유다인들은‘빵’만 바라보고 그‘빵’을 주신 주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너를 뻔히 아는데 어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는가? 아버지는 요셉, 어머니는 마리아이거늘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과 주변 사람들을 잘 안다고 생각한 선입견, 편견과 고정관념의 자기 틀에 갇혀 예수님을 판단해 버렸기 때문에 결국은 은총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섣불리 아는 게 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1,22-23).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분으로 생각하고 또 예수님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내가 만든 예수님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내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내가 그분의 뜻을 따라야지, 그분이 나에게 맞춰주시길 바라는 것은 생떼를 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늘을 향한 열린 마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 은총을 더 충만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또한‘새로 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만한 사람에게 은총을 더해 주면 그로 인해 주님이 가려지고 그의 헛바람만 커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 주장과 소신의 판단이 혹 잘못된 판단이 아닌지 살펴봐야 하고, 참으로 주님께서 나의 앞길을 인도해 주시길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끌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생명의 빵’이요, ‘내가 줄 빵은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빵을 미사 안에서 영성체를 통하여 먹습니다. 영성체 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나에게 주십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뜨거운 사랑으로 영성체를 원하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눈물이 나도록 감사하고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성 마리아 막달레나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까닭입니다. “접목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두 나무가 비슷할수록 접목이 더 잘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그리고 고해성사야말로 영혼과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시켜 주는 매우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로 영적인 준비를 잘하고 성체를 모시게 될 때 그만한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신부님의 이미지에 관해 들었습니다. 우연히 교회 홍보물을 보게 되었는데 친구가 유명한 신부가 되어있어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 괴짜 친구가 신부가 되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별수 있겠나! 옛 행실을 보면 지금도 그가 신부가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미사 봉헌하는 것을 보면 분심이 들 것 같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사람 됐다고!’ 성경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 혁명당원 시몬, 세리 마태오 그 밖의 많은 인물이 허물을 안고 살았고, 그 허물이 오히려 하느님만을 갈망하게 했고 새사람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옛날에 한 짓이 못됐고 가관이라 해도 새사람이 된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과거의 기억, 선입견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하셨고 오늘날 신부도 출신 본당으로는 발령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어 새사람이 되었다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삶이 변했다면 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하느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면 그것은 기뻐하고 축하할 일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비젼을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주관과 소신, 내 노선, 내 지식, 내 색깔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자칫 고집이 될 수 있고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잣대로 나를 살피고 내 노선을 수정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 인양 머물면 주님의 넘치는 은총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변해야 합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이‘너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고집이 센 민족이다.’,‘마음이 완고한 백성이다.’라는 말로 혼이 났습니다. 혹여 성당 다니는 ‘저 사람은 왜 저래!’,‘저놈은 왜 그래!’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은 그러한 내 생각을 내려놓으면 어떠실지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하신 예수님을 맑고 밝은 눈으로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색안경을 끼면 안경의 색깔에 따라 달라 보입니다. 남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의 색깔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내가 지닌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을 주님의 잣대에 견주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 를 생각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혹시라도‘내가 너 때문에 못살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만큼은‘내가 너 때문에 산다.’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너 때문에, 내가 산다.’ 주님, 제가 주님 덕분에 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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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처음 컴퓨터를 접한 것은 1995년입니다. 그전에는 수동타자기와 전동타자기를 사용했습니다. 3년 후인 1998년에 서울대교구는 모든 본당에 광케이블을 설치하였습니다. 이제 컴퓨터는 인터넷과 연결되었고, 컴퓨터는 문서작성의 도구를 넘어서 세상과 접속할 수 있는 창이 되었습니다. 컴퓨터가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했습니다. 한글을 비롯한 다른 프로그램들도 계속 업데이트를 해 주어야 했습니다. 업데이트와 백신 프로그램이 없으면 컴퓨터는 성능이 떨어지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고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컴퓨터는 스마트폰에게 자리를 많이 내어주었지만, 아직도 제게는 강론을 준비하는 고마운 친구이고, 세상과 접속하는 창문입니다. 팬데믹 때, 컴퓨터는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교우들은 컴퓨터에 접속해서 온라인으로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저도 컴퓨터를 이용해서 강의했습니다. 팬데믹 이후 여전히 재택근무가 가능한 것도 컴퓨터와 인터넷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삶에도 ‘업데이트’된 순간이 있었습니다. 1977년입니다. 공부를 잘 해서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준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10 등 안에 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전거는 제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고, 17 등을 했습니다. 이제 7명만 넘어서면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7명을 넘어서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 아이들도 공부를 열심히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열심히 공부했고, 9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도, 선생님도 그런 결과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다지 공부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시 열심히 공부했고,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성적을 얻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제게 업데이트 된 것이 있습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입니다. ‘태산이 높지만 하늘 아래 있는 산입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는데 사람이 아니 오르고 산만 높다 한다.’는 시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컴퓨터는 계속 업데이트 해 주어야 하듯이, 우리의 삶도 업데이트가 있어야 합니다. 규칙적인 식사와 꾸준한 운동으로 업데이트 해 주어야 합니다. 독서와 긍정적인 마인드로 업데이트 해 주어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나누고, 봉사해야 합니다. 강물을 거꾸로 헤엄치는 연어처럼 시간과 공간에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우리의 육체를 배부르게 하는 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얻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신앙의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무병장수를 원하지만 그것도 신앙의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빵은 우리가 미사 때 받아 모시는 ‘성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지만 썩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렇습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를 업데이트 시키는 것은 물질과 재물이 아닙니다. 무병장수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업데이트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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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세상에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항상 이런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내 밥에 독이 들어 있으면 어쩌지?’ ‘내 엄마가 아니면 어쩌지?’ ‘내 자식이 아니면 어쩌지?’ ‘옆에 있는 친구가 사람이 아니면 어쩌지?’ 뭐…….이런 납량 특집 같은 질문들을 끊임없이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항상 불안하게 살 것입니다. 버스를 타도 사고 나지 않을까? 집에 앉아 있으면 가스가 폭발하지 않을까? 밖에 나가면 지나가는 차에 치이지 않을까? 아파트 사이를 지나가면 뭐가 머리로 떨어지지 않을까? 항상 불안불안하게 살겠지요? 믿음이 없다면 말입니다.
어쩌면 사람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글자일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믿음’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를 믿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아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누구랑 싸우고 공부는 얼마나 했고,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내가 어릴 적부터 아는 아이가 커서 그리스도라는 메시아가 되었다면 말입니다. 아마 믿지 못하겠지요?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잘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살아생전에 기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라고 말입니다. 보고 믿으라고 말입니다.
‘생명의 빵’ 이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 보셨습니까? 저는 보았습니다. 저만 그렇습니까? 아니요. 여러분도 보았습니다. 빵의 모습인 주님을 보았습니다. 숨 쉬는 예수님을, 우리 안에 들어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주님을 우리는 보고, 먹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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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물이 맑아야 목욕할 수 있다.
아마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속담을 재치 있게 풀어낸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재치 있으면서 동시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윗물이 맑으면 정말로 그 윗물을 만난 사람들은 목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목욕은 당연히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목욕은 ‘마음을 비추어 보는 목욕’입니다.
딱히 윗물이 아니어도 됩니다. 아랫물이어도 좋고 옆을 흐르는 물이어도 좋습니다.
우리 주변에 맑은 물 같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물에서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며 우리 마음을 씻어낼 수 있습니다.
윗물이 맑으면 목욕할 수 있다.
이 재치 있는 말에 잠시 미소를 지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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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의 말씀과 성체 성사
영웅적이고 불굴의 투쟁으로 평생을 살았던 엘리아, 북 이스라엘의 왕이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 이스라엘 전체를 바알 숭배로 오염시키던 시대, 그들을 대항해 혼자 싸웠습니다. 기우제를 지내려 파견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겨뤄야 하는 시련을 맞이했지만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승리는 주님을 버리도록 만든 왕비를 추격하여 이긴 것입니다.
용감한 선지자 엘리아는 굶주림과 고난, 시련 속에 하느님께 세상에서 거두어 주실 것을 간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 빵을 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은 그는 다시 힘을 얻어 사막을 지나 하느님의 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나라로 돌아가는 긴 여정입니다. 깊은 함정과 험난한 사막을 지나야만 갈 수 있는 그 길에 어떠한 도움과 위안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끝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아버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은총은 주님의 말씀과 성체 성사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았을 때 예수님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의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이신 예수님의 몸을 주십니다. 성체성사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주님과 한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의 행복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 것입니다.
미사는 만찬입니다. 주님 말씀의 만찬과 성체 성사 모두 예수님이십니다. 바른 길, 행복한 길,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말씀과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 영혼의 양식인 성체를 받아들일 때만이 건강한 영혼으로 힘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습관과 의무감으로 미사에 참석하지 마십시오. 미사 중에 입으로만 기도를 따라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미사에 참석한 각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요 생명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힘들고 지칠 때 나를 깨우쳐 주고 힘이 되고 삶의 지침이 되는 복음의 구절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2. 복음을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 나의 성경을 읽는 모습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3. 성체를 받아 모실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주님과 하나됨을 느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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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가(歸家)의 여정’
“참 좋은 삶, 영원한 도반 주님, 이정표이자 쉼터인 미사”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2,6)
오늘 역시 자유로운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교황청 홈페이에서 이색적인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교황님 스위스 경비병에서 사제가 된(From Swiss Guard to priest)’ 34세 ‘그란디에안(Grandjean)’의 ‘겸손한 섬김(Servive with humility)’에 대한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멋진 근위병 제목에서 로만 칼라를 한 제복의 대조가 참 신기했습니다. 그의 인터뷰 기사는 더욱 영적 길로 매진하기 위해 교황과 교회를 섬기기 위해 전환한 영적 전투중에 훈련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역시 사람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삶의 여정은 참 다양함을 느낍니다. 직업는 바뀌었지만 ‘겸손한 섬김’이라는 믿는 이들 직업의 본질은 그대로임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의 놀라운 소식은 제 어릴적 추억이 가득 담긴 시골 고향집이 동네 카페로 바뀌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고향을 방문한 자매가 동영상을 보내줬습니다. 허전하고 쓸쓸하면서도 상전벽해로 변한 환경이 많은 묵상을 하게 했습니다. 곧 시간을 내어 고향집 카페를 방문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충남 예산 봉산에 소재한 '구암리카페' 검색하면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로 제 고향집 자리입니다.
제가 태어나 서울교대에 입학하기전, 고등학교 시절까지 무려 20년 동안 저를 키워낸 보금자리 고향집이 구암리 카페가 된 것입니다. 제 고향집 구암리 카페 사방 30분 거리에는 해미성지, 솔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생가의 성지, 신리 성지, 의사 윤봉길 생가, 추사 김정희 생가, 그리고 4대 총림중의 하나인 유명한 덕숭산을 배경한 수덕사 절이 있습니다.
고향집이 카페로 변한 상황이 가톨릭교회를 몰랐던 시골 출신인 제가 수도사제로 변한 혁명적 상황과 흡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변화된 환경에 일희일비함이 없이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가 여정에 더욱 충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 역시 ‘귀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귀한 깨우침이 됩니다.
“인간의 격(格)은 축적이 아닌 드러난 태도로 증명된다.”<다산>
“미인을 좋아하듯 현인을 존경하고, 힘을 다해 부모를, 신명을 다해 임금(주님)을 섬기며, 벗을 사귈 때 말에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배운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이다.”<논어>
‘임금’은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잘 어울립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를 지닌 격조있는 삶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인생 광야 ‘귀가의 여정’, 괴물(怪物)이나 폐인(廢人)으로 변질됨이 없이 성인(聖人)답게 살도록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함을 배웁니다. 바로 그 참 좋은 삶의 모습을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잘 보여줍니다. 아름다운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광야 인생 귀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적절한 가르침입니다.
“형제 여러분,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본받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삶, 얼마나 품격있는 삶인지요! 말그대로 영적 명품(名品) 인생입니다. 우리의 귀가 여정중 평생과제입니다. 바로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평생 스승이자 주님이요 인도자이자 도반이신, 주님 은총의 도움으로 가능합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은 그대로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가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의 싸움에서 주님의 힘으로 대승을 거둔 엘리야가 아합의 아내, 희대의 악녀 이제벨의 보복을 피해 도주하는 장면입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그대의 목숨과 그들의 목숨을 한가지로 만들지 못한다면, 신들이 아네게 벌을 내리고 또 내릴 것이오.”
보복의 결의를 다짐하는 이제벨입니다. 바로 엘리야가 이제벨의 마수를 벗어나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기까지가 상징하는 바 광야여정입니다. 엘리야가 주님을 만나는 극적인 장면이 참 반갑고 놀랍습니다. 주님은 당신 수호천사를 통해 일하십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절망중에 죽여달라 기도하다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든 엘리야를 흔들어 깨우는 천사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수호천사를 통해 엘리야와 늘 동행한 평생 도반임을 깨닫습니다. 엘리야가 혼자가 아니었듯이 여러분도 혼자가 아닙니다. 수호천사를 통해 늘 동행하시는 평생 도반 주님을 잊어선 안됩니다.
“일어나 먹어라.”
엘리야가 깨어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고,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워 잠이 듭니다. 바로 광야여정중의 이정표와 쉼터를 상징하는 싸리나무밑 미사잔치입니다. 그대로 광야여정중 쉼터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모시는, 성체성사 미사 은총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성체와 같은 구운 빵에, 성혈과 같은 물 한병에 다시 원기를 회복해 다시 일어 난 엘리야입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오늘 미사를 봉헌하거나 이 강론을 읽는 모든 분들을 향한 복음 말씀입니다. 20년전 수녀원 피정지도시 식당 벽에 붙어 있던 이 말씀에 얼마나 신선한 충격에 위로를 받았던지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좌절하거나 의기소침해 있을 때 식사 시 반드시 이 말씀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여정은, 평생 영적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영원한 현역임을 한시도 잊어선 안됩니다. 영적 전의를 부단히 새롭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영적 무기 좋아도 영적전의와 열정을 상실하면 영적전쟁은 끝입니다. 심기일전, 초발심의 자세로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꼭꼭 씹어 먹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엘리야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그대로 광야여정중의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한폭의 살아 있는 그림처럼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주님이 주신 음식으로 힘을 얻어 목적지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른 엘리야처럼, 하루하루 인생 광야에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귀가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인생 광야에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중 성체성사 미사가 없다면 이 험난하고 거친 광야 여정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이런 영적감각을 잃게 하는 ‘영적 세속성(spiritual worldliness)’의 위험을 참 많이도 강조하는 교황입니다. 아주 예전 은퇴후 양노원에 지도신부로 계시고 지금도 계신 87세 고령의 아빠스님 말씀도 생생합니다.
“나 휴가 못간다. 낙(樂)이라곤 미사 하나뿐인데 이 노인들 놔두고 어떻게 휴가갈 수 있나?”
바로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성체성사, 생명의 빵에 대한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무지에 눈멀어 생명의 빵,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 보지 못했지만, 하느님께 은총으로 불림 받은 우리는 생명의 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압니다. 온힘을 다해 사랑하고 모시는 생명의 빵, 예수님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I AM the bread of life),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나다(I AM)’는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 이름입니다. 바로 생명의 빵이신 하느님을, 예수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힘으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새삼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이 거룩한 성체성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의 결정체가 바로 생명의 빵,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가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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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입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십니다.
땅위의 모든 것을 드높이기 위해서
굳이 낮은 자리를 찾아오십니다.
더 높이 오르려 바동거리는 사람은
애써 척박한 곳에 내려오시는 그분을
참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분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
더 밑으로 내려가 다른 이를 섬길 때
비로소 그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생명의 밥으로 오십니다.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해서
기꺼이 먹히러 오십니다.
더 많이 먹으려 안달난 사람은
살리기 위해서 먹혀 죽으시는 그분을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분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
조금씩 마침내 온 자신을 바칠 때
비로소 그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온갖 죽음을 물리쳐 오직 생명 안에서
온 세상 모든 이와 영원히 함께하시려
하늘에서 내려와 밥으로 사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밥을
그저 머리로만 먹고 이내 뱉는 사람은
영원한 삶에로의 초대를
스스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밥을 먹고
하늘에서 내려온 밥이 되는 사람만이
이미 지금여기에서부터
그분과 갈림 없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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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19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시면서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현실에서 체득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침묵입니다. 믿음과 침묵은 겉으로 보기에는 깊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침묵은 믿음의 근간이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침묵에 대해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침묵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새로운 힘을,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침묵은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거의 모든 침묵에는 무엇인가가 거룩한 것이 느껴집니다. 침묵하고 있을 때 사랑하기가 더욱 쉬워집니다. 많은 말은 종종 하느님과 이웃을 거스르게 하지만 침묵은 정의의 나무를 키우며 거기서부터 평화의 결실을 얻습니다. 침묵은 마음과 육신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게 마련이고 말이 적고 짧으면 죄에서 멀어집니다.
침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며 하느님과 대화하는 마음이고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침묵은 자아를 잊어버리는데 있어 중요한 방법입니다. 자아를 잊는 다는 것은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없애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사람을 비하시키거나 상심시키지 않고서도 알아듣게 만드는 깨우침이요, 소리지르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에 건네지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침묵은 하느님의 첫번째 언어입니다. 이 침묵의 언어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우리는 조용히 앉아서 하느님 안에 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문제,결함,억압,영혼의 콤플렉스를 만나게 되고 그것들을 회피하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이고 극복해야함을 깨닫게 됩니다. 대면하고 싶지않고 피하고 싶은 내면의 모든 억압과 상처를 통해서 하느님이 살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될 때 이 모든 것들을 희망과 인내로 견딜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침묵속에서 우리는 교만과 겸손을 만납니다. 교만은 자기 안에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잃어버릴 까봐 자기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 합니다. 우리의 침묵을 깨뜨리는 것은 말이 아니라 자기의 말을 남이 들어 주기를 바라는 조바심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말은 다른 모든 이들을 침묵시키고 그들이 그 말에만 귀를 기울이도록 강요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이가 자기에게 말을 걸도록 하기 위해서 말을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리며 겸허히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침묵은 고독과 외로움을 깊이 관조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독을 외로움으로 착각합니다 외로움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멀어질 때 나타납니다. 외로움은 일방적 사랑을 추구하고 모든 걸 자기 식대로 집착하고 행동하지만, 고독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깨달아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내어줍니다. 외로움은 존재의 떠남으로 다른 존재를 추구하면서 생기지만 , 고독은 존재를 떠나 절대자를 추구하면서 또 다른 존재를 만나게 합니다. 외로움이 사람을 끊임없이 다른 존재를 원하는 애정 수집가로 만든다면, 고독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함께 걸어가는 사랑의 전달자가 되도록 이끕니다.
침묵의 묵상을 통해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한 주간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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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북 바이에른 지방의 에르딩(Erding)에 있는 순례성지 “성혈”
독일-1417년
그러자 부유한 이웃은 자신의 집에 성스러운 성체를 모시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가정 소성당에 모셨을 것이다. ) 그 가난한 농부는 이 말을 거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또 하나의 성체를 자신의 농장으로 모셔와 그것을 통해 부유하고 행복해지리라는 어리석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가난한 농부는 어느 청명한 목요일 날 성체를 받을 때, 그 성체를 삼키지 않고 깨끗한 아마천에 몰래 싸가지고는 만족해하면서 집으로 갔다. 그가 비록 성체를 커다란 외경심을 가지고 다루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행동은 중대한 죄를 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교육도 받지않았고 학교도 다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곧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가 걱정이 되어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른 채 에르딩 시(市)로부터 걸어 나오고 있었을 때 갑자기 그 성체가 그의 아마 보자기로부터 나와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더니 거기서 몇 분간을 떠다녔다. 그런 후에 성체는 땅으로 내려와서는 그 농부가 경악하여 주저앉아 있는 동안에 사라져버렸다. 그는 전율을 느끼며 사제에게로 달려가서는 창피를 무릅쓰고 그가 한짓을 숨김없이 말씀드렸다. 그러자 곧 신부는 아직 성당에 모여 있던 신자들과 뉘우치는 죄인(농부)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난 장소로 갔다. 그러자 그 성체가 모든 사람들의 눈 앞에서 다시 공중에 떠올라 잠시 조용히 움직이다가는 신부가 성체를 잡지 못하자 다시 땅에 내려 앉았다가는 또 다시 사라졌다.
주교는 이 명백한 기적에 관한 보고를 받자 성당 참사회의 여러 신부들과 함께 몸소 정확히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 곳에 왔다. 엄청나게 많은 군중들이 함께 기도하면서 따랐다. 주교가 거의 도착하였을 때 그 성스러운 성체가 다시 땅으로부터 공중으로 솟아올라 그 곳에 멈추어 있어서 주교는 성체를 손으로 잡을 수가 없었다. 군중들은 놀라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그 성체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서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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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정성으로 성채를 모실 때만이 /
박윤식 [big-llight] 240810. 21:02 ㅣNo.17492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온 이다. 나를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이 빵은 하늘에서 온 것이기에, 이 빵을 먹는 이는 누구라도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그러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살아 있는 빵이란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만날 수 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하신 이 말씀은 유다인들에게는 오만이었다. 그들은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힘을 얻어 젖과 꿀이 흐르는 생명의 땅으로 간 것이 사실일지라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신한다. 만나를 내려주신 그분께서 보내신 이가 당신임을 아예 믿지를 못하겠다는 거다. 그들의 논리로는 예수님의 이 육화는 언제나 현실적인 걸림돌이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당신의 지상 순례 신비를 이해할 수가 있단다. 사실 우리도 지상의 양식에만 관심을 두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는 단절된다. 이는 유한한 것의 노예로 살 거니까. 반대로 천상 양식을 바라고 그것을 먹고 살면, 비록 유한한 시간에서도 영원히 사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생명을 먹고 살기에. 인생을 허무하게 살아갈 수도, 또 영원히 살 수도 있다. 허무와 영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인 빵에 대해서는, 언제나 과거형이나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아버지 말씀을 듣고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고 말씀하신다.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진단다. 먼 영원함이 이 시각에 들어온다는 거다. 현재나 과거에 이루어진 이 시각이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미래에까지 이루어질 것이란다. 그래서 이 믿음의 선물은 먼저 하느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말씀을 듣고 배운 이는 누구나 나에게 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풀 한포기 없는 사막에서 먹었던 만나와 당신 자신을 비교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배고픔을 달래 주는 영원한 생명의 빵이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은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인 당신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의 이 주장은 오직 당신만이 생명의 근원임을 뜻하는 거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없이 성체를 모셨다. 아직도 영적인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돌아봐야 한다. 어떻게 성체를 모셨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성체는 예수님 몸이다. 성체 앞에 선다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께로 나아가는 거다. 그러기에 정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생략되었기에, 당연한 듯 모시는 성체가 되었을 수도. 즉, 구경하는 미사가 되었고, 마지못해 죄짓는 단순한 강박관념을 벗어나고자 받아 모신 밀떡 정도로만 맛보았으리라. 영원한 생명을 안기는 보약인데도.
그러니 정성껏 성체를 모시자. 사실 성체를 자주 모시면 믿음이 솟아난단다. 그러면 불안과 허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도. 생명의 빵이 주는 천상의 힘이니까. 누구라도 정성으로 성체를 모시면, 은혜를 체험할 게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셨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시는 이는 영원히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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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이루시는 표징들을 보았는데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하느님이심을 믿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음을 믿으며, 인간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음을 믿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먹으라고 내주셨다는 것도 믿고, 우리가 받아 모신 성체가 그 몸이라는 것도 믿으며, 그 몸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도 믿습니다.
지금까지 열거한 내용은 모두 기본 교리이고,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신자가 아니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리의 논리성을 따지기 전에 어려서부터 이미 신자가 되어 있던 경우도 있고, 성장해서 다른 어떤 이유와 사정으로 믿음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으며, 드물게는 책이나 말로 설득되어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려 할 때도,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거부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을 지니고 있다 보면, 내가 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6,44)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조그마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예수님께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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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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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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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더 깊은 감사의 정으로 성체를 영해야겠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매일 매일 하루 세끼 꼬박꼬박 아이들을 위해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면서 이런저런 묵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빵, 식사라는 것,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우리 삶 속에서 먹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맛있는 식사를 정성껏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복음적인 일인지?
그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식사로 인해 우리의 생명이 지속되니, 그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지상에서의 육신적인 빵의 중요성도 이토록 중요시여기고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지상의 빵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수 없는 천상의 빵, 매일의 성체 성사를 통해 영하게 되는
생명의 빵에 대한 가치와 의미 부여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 깊이 성찰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세상의 빵이 지니는 한계가 있습니다.
충분히 먹었는데, 돌아서면 또 먹어야 합니다.
또 다시 허기와 갈증은 반복되고 먹어도 먹어도 온전히 충족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빵이 지니는 유효 기간은 길어야 사흘이요 일 주일입니다.
그래서 늘 내일 먹을 빵에 대해 걱정하고 언제나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는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께서는 너무나 은혜로운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과분하게도 예수님의 크신 배려와 희생으로 그 영원한 생명의 빵을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찾을 수 있고,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더 깊은 감사의 정으로 성체를 영해야겠습니다.
그 성체로 인해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으니 더 없이 기쁜 마음으로 찬미의 송가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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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이 접근할 수 있다. 이 신앙은 항상 도전을 받는다. 오늘 복음 내용이 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시고는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1열왕 19,8). 엘리야는 그렇게 음식을 통하여 힘을 얻고,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시나이산으로 간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에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음식, 주님의 몸과 피로써 양육될 때 하느님께 이르게 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41절). 이 말씀 때문에 유다인들이 웅성거린다.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 있다. 자신들의 체험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한 그 이상의 것은 사실일 수가 없다.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2절). 이런 마음 때문에 빵의 기적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신적인 면도 잊어버리고,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 예언자”(6,14)도 까맣게 잊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받아들이기에 힘든 하느님의 행위와 말씀의 신비를 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자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되이 순종하는 자세로 듣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며, 어떤 사람은 그 신비에 초대하고 어떤 사람은 거절하는 분이 아니시며, 신앙은 하느님께서 변덕스럽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신앙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45절). 그러나 모두가 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그 군중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기적을 체험하고 직접 그분을 만났지만,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 그 신비를 체험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즉 듣고 배운다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일 수 있고, 듣기만 하고 배우려 하지 않고 논쟁만 하려고 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요셉의 아들”(42절)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믿음이 변변치 않은 지성이나 닫힌 마음 때문에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수군거린다는 말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식량과 물이 부족하다고 투덜거렸던 것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사용되었다(참조: 탈출 16,2-3; 17,3; 민수 11,1; 14,27; 1코린 10,10). 즉, 굳어진 마음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하고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을 받지 않음으로써 그들 스스로 구원 밖에 있게 된다. 신앙은 하나의 커다란 모험이다. 그러나 커다란 유익에 도달하는 길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이 말씀은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말씀이다. 참으로 유다인들에게는 알아듣고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지성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과 믿음으로 받아들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킬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 신비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이 말씀을 듣고 유다인들은 드러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의 살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신적 존재에 결합한 이 살을 인간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주셨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를 통해서 강생의 신비가 계속된다. 이 얼마나 귀중한 성사인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이것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그 살이 바쳐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바칠 내 몸이다”(1코린 11,24; 루카 22,19)라는 성체 축성의 형식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을 봉헌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의 신비는 또한 수난 신비의 계속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죽음에 처한 것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성체성사는 생명의 신비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51절) 그리스도께서는 성체를 통해 우리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신다. 그 생명은 주님의 몸을 계속 먹음으로써 양육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 성체성사를 통하여 강생의 신비와 수난의 신비를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기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원으로서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새로운 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은 성령께 대한 충실성이다. 그분은 일치의 영이시기 때문에 교회 안에 분열이 있으면 슬퍼하신다(에페 4,30).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대로 서로 나누며 또한 용서하는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에페 4,32).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거대한 불꽃을 상기시켜줄 뿐 아니라 항상 처음부터 새롭게 해주는 성사이다. 우리는 이 성사로 참 생명을 얻게 된다. 당신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그 사랑의 성사의 삶을 우리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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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트루먼 쇼와 생명의 빵
오늘 복음도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으면 하늘 나라에
도달할 것이라는 성체성사와 관련된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라고 하실 때 의아해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것을 본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례 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하느님 자녀로서 인정받으셨음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당신을 먹는 이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 하십니다.
나중에 이들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씀에 이해하기 어렵다가 다들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런데 열두 사도만이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왔을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지 못한 ‘표징’이 분명히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오늘 복음 사이에 우리가 간과하는 하나의 표징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기적입니다. 제자들은 이 표징과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같은
것이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두울 때 제자들은 호수 중앙에서 큰바람에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이들은 지쳐있는 데다 겁까지 집어먹습니다. 예수님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나다”(I am who “I AM”)라는 말은 탈출기 3,14절에 하느님께서 “나는 나다”라고 하실 때의 하느님 이름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맞아들이려 할 때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려던 곳은 어딜까요? 우리는 누구나 하늘 나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그만한 사랑의 수준을 가진 이들만 들어갑니다. 우리는 피를 빨아먹는 모기와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 세상 것에 집착할 때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집착은 잃는 두려움 때문에 생깁니다.
이 두려움이 없어져야 부모가 자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듯 사랑 실천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오셨다면 우리는 이제 이 지상 것에는 집착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성체를 영해야 합니다.
BTS나 김미경 강사 등이 세상 모든 것을 얻고도 우울증이나 번아웃에 고생하였습니다.
김미경 강사는 모든 것을 다 잃고 “괜찮다, 사랑한다!”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좋은 예는 영화 ‘트루먼 쇼’(1998)입니다.
트루먼은 조작된 세상에서 연기자들과 살며 세상에 생중계되는 스타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사는 세상이 전부라 믿었고 감독은 트루먼의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연출하여 트루먼이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준 이가 트루먼을 진정으로 사랑한 유일한 사람인 실비아입니다.
실비아는 직장을 잃을 각오를 하는 키스와 진실한 말로 자신은 피지라는 곳에 있다고 말해줍니다.
이때부터 트루먼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실비아에게 갈 준비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버리는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실비아의 진정한 희생은 트루먼이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 거대한 거짓 방송 세트를
탈출하는 데 성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저도 성체를 많이 영했지만,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하시는 말씀에 삶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체는 하느님께서 ‘다’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다 받은 사람이 세상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아직 성체가 하느님이라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사랑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이 악해지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고 성체는 그 죄를 없애는 분이십니다.
성체 안에 계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우리 부모처럼 살과 피를 나를 위해 내어주시는 분으로 믿읍시다.
그러면 이미 목적지에 닿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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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말씀의 표현이 아니라 뜻을 보아야 합니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3ㄴ-51).”
1) 여기서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씀은, “너희 조상들이 먹은 ‘만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 아니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광야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주신 것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47절의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50절의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절의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을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뜻이 같은 말씀들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은 나 자신이다.”입니다.
2) 예수님을 받아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아주 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먹는다.’는 말로 표현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나타내는 데에는 ‘먹는다.’는 말이 가장 적절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완전한
한 몸을 이루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완전한 한 몸을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완성’인데, ‘먹는다.’는 말이 그 ‘믿음의 완성’을 나타내기에 가장 좋은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에는 우선 먼저 믿고, 깊이 묵상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믿으면 언젠가는 온전히 깨달을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지금 이 말은, “이해가 안 되어도 그냥 믿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말이 아니라, “지금 당장에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언젠가는 선명하게 이해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라고 격려하는 말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0).”
이 말씀들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차단하시고 사람들이 그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시지 않았는가? 정말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면 그 길을 왜 차단하셨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2-24).”
하느님께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죄인들’의 접근을 막으신 일입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은 바로 승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창세 5,24), 에녹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은 허락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셨다는 것은, 그 전에는 그 길이 개방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 때문에 ‘죄’ 라는 것이 인간 세상에 들어왔는데, 그 일이 없었다면, 그 길이 차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또 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담 때문에 차단되었던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완전히 개방됩니다(묵시 22,2).
그 나라는 의인들만 들어가서 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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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식으로 ‘밥’을 먹습니다. 밥의 주재료는 ‘쌀’이지요. 그런데 ‘쌀’을 나타내는 한자어 ‘쌀 미(米)’자는 보통 벼 이삭에 쌀 알갱이들이 촘촘이 달려있는 모습을 본 따 만든 한자어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 글자 안에는 비밀이 한 가지 숨어 있습니다. ‘쌀 미(米)’자는 거꾸로 서 있는 ‘여덟 팔(八)’자와 제대로 서 있는 ‘여덟 팔(八)’자를 ‘열 십(十)’자가 연결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이를 풀어서 쓰면 ‘팔십 팔’이라는 숫자를 가리키는데, 이는 농부가 벼 씨앗을 뿌릴 때부터 추수할 때까지 여든 여덟번이나 수고를 해야 할 만큼 쌀을 키우는 일이 힘들고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추수가 끝나고 나서도 쌀이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기까지는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먹기 편하고 맛이 좋아지도록 도정을 해야 하고, 도정이 끝나면 깔끔하게 포장하여 판매처까지 운송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해서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쌀을 어머니가 구매하셔서 정성 가득한 밥을 지어주시면 비로소 쌀이 한 끼의 밥이 되어 우리 식탁 위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밥 한끼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이 배어있음을 깨닫는다면 쌀 한톨도 그냥 흘려버릴 수 없습니다. 더구나 반찬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밥 투정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밥 한끼를 위해 고생하신 한 분 한 분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꼭꼭 씹어먹어야겠지요. 또한 맛있게 먹은 만큼 ‘밥 값’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밥 값’을 하고 산다는 것은 최소한 ‘니가 먹은 밥이 아깝다.’는 말은 듣지 않도록, 각자 맡은 바 소명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입으로만 밥을 먹지 않고 마음으로도 먹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 받아모시는 예수님의 몸이 바로 우리가 마음으로, 영혼으로 먹는 밥이지요. 입으로 먹는 밥이 우리의 몸을 살찌우고 건강하게 해준다면, 마음으로 먹는 밥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어줍니다. 입으로 먹는 밥이 길어도 일 년 안에 내 안에 들어온다면, 마음으로 먹는 밥은 2천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입으로 먹는 밥이 상 위에 올라오기까지 땀과 노력이 필요했다면, 마음으로 먹는 밥이 제대 위에 올라오기까지는 자기 자신마저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희생, 고통을 묵묵히 참고 이겨내는 인내, 남들 앞에서 스스로를 한 없이 낮추는 겸손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으로 먹는 밥은 그냥 대충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고통과 희생을 기억하며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만나를 먹고도 죽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몸을 받아모시기에 합당한 상태가 되도록 내적, 외적인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내적인 준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열 가지 계명에 따라 자기 자신을 성찰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외적인 준비는 영성체 하기 한 시간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이중계명에 따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받아모신 예수님의 몸이 비로소 ‘생명의 빵’이 되어 우리 몸 구석 구석에 하느님의 은총과 생명을 충만하게 전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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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예언자 엘리야는 참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카르멜 산으로
사백오십 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사백 명 정도의 아세라 예언자들이 모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들과 제물을 바치며 대결을 벌입니다.
바알 예언자들이 바알을 부르며 제사를 올리지만 제물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엘리야가 바친 제단위의 제물을 태워주시지요. 그곳에 모인
백성들은 하느님 만이 참다운 하느님이심을 목격하지요.
그래서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들을 키손천으로 끌고 가서 죽입니다.
이 소식이 아합왕과 그의 부인 이제벨에게 전하지자 엘리야 예언자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운 나머지 그곳을 도망쳐서 브에르 세바에게 까지 갑니다.
그곳에서 시종을 남겨두고 하루 길을 더 걸어 광야로 나갑니다.
그는 더운 사막에서 지칠 대로 지치고 허기진 상태에서 싸리나무 아래에 드러눕게 됩니다.
그는 죽기를 간청하며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지요.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1열왕 19,4)
하느님께서는 그를 그냥 두실 리가 없습니다.
천사가 달군 돌 위에 구운 빵과 물 한 병을 준비 해 놓습니다.
그가 일어나서 먹고 다시 잠을 듭니다.
다시 엘리야는 천사가 마련한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고 광야로 나가 사십일
주야를 걸어 호렙산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후에 이 빵에 대해서 계속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6,41)이라고 말씀하지만 유다인들은 수군거리며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모까지 들먹이며 깔보는 눈치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과 그 가르침을 두고 수군댑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며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6,48-50)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 세우신 성체성사의 의미를 새롭게 해주십니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의 친구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던 안드레아는 어느 날부터 친구가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좋던 친구 사이가 막상 식당을 동업하고 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일을 가지고도 통하지 않아서 서로 다툴 때도 있고 언제부터인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을 바로 잡고 ‘이러면 안되지’하며 좋게 생각해도 자신이 점점 마음이 닫혀 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섭섭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고등학교 때까지 성당을 열심히 다녔는데 대학에 들어가고 군생활을 하면서
성당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식당일을 놓고 말이 그렇지 지옥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식당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성당을 찾아가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성당에 발을 끊었는데도 이상하게도 성체 앞에 앉으면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드는 것 같았습니다. 성체 앞에서 때로는 불평도 하고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도 성당을 찾는 일이 자기가 신기할 정도로 매일 기다려지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어럽던 식당도 운영이 잘되고 또 친구와의 관계도 좋아 졌습니다.
안드레아는 뒤늦게서야 자기가 성체 앞에서 기도하고 미사 때 성체를 모시는
인간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주님의 큰 선물이었고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부축해 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때로 지칠 때가 있습니다.
예언자가 실의에 빠진 것처럼 우리 자신도 회의에 빠지기도 하지요.
천사가 마련해 준 빵과 물을 먹고 마시고 나서 힘을 얻은 엘리야처럼 우리도 주님의
영원한 빵을 받아먹음으로써 힘을 내어 힘을 내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의 은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손에 받아 든 성체가
우리에게 큰 선물인지를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빵은 영원한 생명의 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지치고 때로는 이웃과 상처를 받더라도 우리가 다시 일어 설 수 있도록
성체는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십니다.
성체는 주님께서 우리를 한 없이 사랑하시는 그 마음이 되게 해 주시고 용서하는 마음,
너그러운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하게 해 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소중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1-32)
영원한 생명의 빵은 바로 성체이고 성체는 우리 서로가 사랑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성체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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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빵이 되는 삶
오늘 복음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을지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6,44)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셔야’(6,44)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거운 물건을 온힘을 다해 끌듯이, 강력한 사랑의 힘으로 우리를 당신께로 끌어당기십니다. 그런데 세상살이에 바쁘고, 자신에 몰두하여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의 이 끌어당기시는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갈 때가 많지요. 이런 무감각과 무관심의 끝은 영혼의 어둠과 사회적 불의의 온상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주님의 손을 잡고, 그분의 이끄심에 맡겨야 합니다. "마음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끌려가는 것이며 사람은 바라는 바대로 끌려갑니다. 진리, 행복, 정의, 영원한 생명에 끌려가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께로 끌려갈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주님의 끌어당기는 사랑에 기꺼이 끌려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끌어당기시는 주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6,45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난 희생의 삶을 배움으로써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믿음은 강하게 끌어당기시는 주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분의 믿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6,48.51) 우리는 예수님의 살인 생명의 빵을 먹고 있습니까? 나아가 나 자신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으로서 살고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 먹어야 할 빵은, 예수님께서 전생애에 걸쳐 보여주셨던 ‘남김없이 내어주는 사랑의 헌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먹고 희생을 먹어야 합니다. 한없이 낮추시고 비우신 그분의 가난을 먹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던’ 거룩한 연민을 먹어야 합니다. 모든 이들을 하느님의 존엄한 인격으로 존중하시어 차별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공평과 의로움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참 행복을 위해, 예수님께서 적대자들로부터 받으셨던 오해와 배척과 조롱을 받아 삼켜야 합니다. 인간의 아픔에 끝까지 함께하신 임마누엘의 혼을 지녀야 합니다.
죄인의 회개를 기다려주시고, 박해하는 이들을 끝까지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받아들여야겠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억울함과 아픔 안에서 신음하는 하느님의 슬픔과 예수님의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품고 있는 생각과 마음, 내가 행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빵’이 되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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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생명의 빵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1열왕 19,8)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그들을 몰살시킨 엘리야가 바알을 섬기는 왕비 이제벨의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을 칩니다. 허탈감과 두려움으로 죽기를 간청하며 잠이 든 그에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빵과 물을 주셨지요. 엘리야는 그 음식을 먹고 힘을 내어 걷습니다.
엘리야가 걸은 사십 일은 우리가 걷는 이 세상의 순례 여정과 같습니다. 엘리야가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였듯이 우리도 이 여정이 지나면 하느님의 거처에 이르러 그분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니까요.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갈등을 보여줍니다.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근거리기 시작하였다."(요한 6,41)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하시자 유다인들이 수근댑니다. 먼저 그들은 하늘에서 오셨다는 표현에 걸려 넘어졌지요. 그들은 그분의 태생과 가족 등 인간적인 배경에 대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종교기득권층의 주류와 거리가 먼 나자렛 목수 출신일 뿐이니까요.
거기에다 "빵"이라는 표현은 또 어떻고요! 그들은 당신을 먹으라는 말씀에 극도의 불편함을 느낍니다. 사람이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하다니, 문자대로만 해석하자면 도저히 이해가 불가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하지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반복해서 점층적으로 당신에 대해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추앙하는 '모세'를 뛰어넘어 파스카를 완성하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 조상들을 광야에서 먹여 살린 '만나'의 실체를 당신 살로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영성체송)
시편 작가가 노래한 "기름진 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어놓으신 당신의 살, 성체입니다. 이 은총의 양식은 지상의 순례 여정 중에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주는 동시에 이후 하느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을 보증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체를 모시는 이에게 삶의 지침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4,2)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예수님께서 성체로 이 세상에 남으시어 우리가 영원의 경계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영원에 들어가면 그때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고 누리며 그분과 하나 될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화답송)
말씀과 성체에 맛들일수록 우리는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깨달아갑니다. 또 주님의 좋으심을 알아갈수록 더욱더 말씀과 성체에 허기를 느끼며 갈망하게 되지요.
사랑하는 벗님!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말씀에서 더 크고 깊은 위로를 받는 나날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체는 고갈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말씀도 그렇습니다. 성체와 말씀을 먹으며 나날이 사랑이 되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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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연중 제19주일.
우상 숭배의 허무함을 깨닫는 삶
<2024.8.11> 아침을 여는 묵상 (렘 49:1~6절)
❝우상 숭배의 허무함을 깨닫는 삶❞
❚ 우상 숭배의 허무함과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보응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 악한 자들의 악행을 묵과하지 않으십니다(1~2절).
암몬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입니다. 암몬 족속은 룻의 작은 딸에게 얻은 벤암미의 후손들입니다(창 19:38). 암몬은 아르논 강을 사이에 두고 모압의 북쪽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이들은 모압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는 혈연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들 역시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대적 행위를 그칠 줄 몰랐습니다(신 23:3~6; 삿 10:7~11; 삼상 11:1,2).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지만 갓의 영토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암몬 족속과 그 신인 밀감이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의 원인입니다(1절). 암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쟁으로 인하여 랍바가 완전히 파괴된다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의 영토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절).
하나님의 언약의 땅인 가나안은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인 이스라엘에게 상속하신 것으로서 이를 탈취하려는 암몬의 시도는 결단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돌이켜 회개할 때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악한 세력들의 악행에 대해서도 묵과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의 끊임 없는 공격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악한 자들의 교만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3~4절).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암몬이 경험하게 될 고통들이 표현됩니다. “헤스본아 슬피 울지어다... 랍바의 딸들아 부르짖을지어다... 굵은 베를 감고 애통하며...” 당시 그들에게 최고의 요새지로서의 ‘랍바’에서 스스로의 안전을 장담하는 것과는 달리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놀라며 당황해 하는 모습이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쟁의 함성과 파괴가 밀려오지만 그들이 섬기는 말감은 그들을 결코 구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말감은 그의 제사장들과 고관들과 함께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처지가 될 것입니다(3절). ‘말감’은 암몬 족속이 섬기는 우상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신 제사를 바쳤던 몰록 혹은 몰렉으로 불리는 신입니다. 암몬은 비옥한 골짜기를 자랑하고 재물을 의지하며 어느 누구도 자신을 공격할 수 없을 것이라는 교만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4절).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에게 등을 돌린 ‘패역한 딸’에 불과하며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암몬 사람들의 교만한 생각은 모압 사람들의 그것과 같습니다(48:42).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8~19절). 교만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우리 자신들은 피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의 본질일 텐데, 이런 관계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함과 영적인 뻔뻔함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며, 그 심판을 피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생의 흥망성쇠를 결정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늘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악한 자들의 행위에 침묵하지 않으십니다(5~6절).
하나님이 공포와 두려움을 사방으로부터 임하게 하시면 암몬 자손들은 도망하는 자들을 불러 모을 새도 없이 황급히 각자의 길로 쫓져나게 될 것입니다(5절). 그렇지만 암몬도 모압과 같이 하나님이 암몬 자손들의 사로잡힘에서 돌이키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6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도모하는 것은 멸망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산성이 되시며, 우리를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시 1:1~2) “복”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시 1:4) 악한 자들의 행위에 결코 침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겸손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는 거룩한 삶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인생에 산성이 되시며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렘 49:1~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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