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8
***역사 복습
근대의 탄생(국가주의의 탄생)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 부르주아지 계급을 떠오르게 했다.
루이 16세가 국가 재정이 어렵자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 등에게 세금 부담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한다. 그래서 제 3계급인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을 포함시킨 3부회의(1계급-귀족 2계급-성직자 3계급-시민(부르주아지)을 열었다.
이때까지는 대부분의 세금을 농민이 부담했다.
특권층이 세금을 내지 않는데, 부르주아지도 세금을 내려할 리 없다.
*제 3계급(부르주아지) -- 관료, 은행가, 징세청부업, 금융업자, 기업가,
상점주인, 장인 등이다.
제 3계급에는 계몽주의에 물든 자들이 많았다. 부르주아지는
제 4계급(서민 하층민)에게 손을 내밀고 연대했다.
*혁명세력 중에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 당은 제 4계급과
손잡는다.
--> 프랑스 혁명이 성공하자 주변의 왕정국가가 연대하여 프랑스를 침공 위기를 느낀 프랑스 혁명정부(공화정)은
1. 반혁명자들을 강압적으로 처형
2. 외국 침공에 대해 프랑스 국가를 내걸고 단결을 호소
---> 국가주의로 나아간다.(전쟁을 통해 애국주의 강화)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한 제 4세력은 노동자 등의 하층민이다. 이들은 제 3세력인 부르주아지도 적으로 돌린다.
부르주아지는 살아남기 위해 보수세력(왕당파, 귀족세력)에게 손을 내민다. 이로서 부르주아지는 19세기의 주도권을 장악하지만, 노동세력과는 적대관계를 형성하여, 19세기 후반부의 역사를 만든다.
제 4세력은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태어나는 토양이 된다.
===>결과적으로 민족국가주의와 사회주의가 나타나고
국가주의는 제국주의를 불러온다.
*나폴레옹의 독일 침공
---> 독일의 민족국가 형성을 도왔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글은 유명하다.
프랑스 —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에 동의하면 누구나 프랑스 국민
독일 --- 출생, 혈통, 외묘 등 객관적인 요소를 갖추어야 국민
*프랑스 혁명 이후에 ’역사철학‘이 유행한다.
국가주의, 민족국가의 형성에는 ’역사관‘이 중요했다.
특히 헤르더의 ’인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역사는 신이 아닌 인간이 이끌어 간다.
**민족주의—참고로 공부하고 갑시다.
민족의 개념을 뒷받침하는 것은 ‘피와 흙’이다.
(보기로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고, 한반도에 산다.)
민족 개념이 형성된 시기는 근대이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이웃을 침범하자(나폴레옹 군의 구호가 ‘프랑스를 위하여’이다.). 이웃도 민족의 이름으로 대항한다. 특히 피히테의 ‘독일인에게 고한다.’라는 글은 유명하다.)
--> 더 깊이 파보면 잘 사는 나라가 경제적 지배를 위해 못 사는 나라로 침입하였다는 경제적 이유와 자본주의 속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전쟁 때의 구호도 ‘왕의 신민’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바뀐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연대를 강조하다보니 오히려 분열로 나아갔다.(중국을 보라. 중국의 소수 민족은 저항적이다. 아프리카는 너무 혈통으로 나누다 보니 부족끼리 박 터지도록 싸운다.)
현대에 와서는 민족 대신에 국가를 강조한다. 국가가 다민족화되면서 세계화 전략에 발 맞춘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2020년의 우리 국민 중에 다문화 인이 167만 명이고
신생아 3명 중의 1명은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다.
국가에 대한 맹세문도 2007년에 바꾸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하여)로
한 때는 민족주의자 = 애국자로 생각하였으나
지금은 민족주의자 = 파시스트 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민족주의는 하나의 신앙이었다. 그 신앙이 바뀌면서
정부는 그 자리에 ‘국가주의’를 가져오려고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