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16
4월3일[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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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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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5r_LQc_GQTI
[의정부교구 이정우 도미니코(사회복지법인 대건 카리타스 회장) 신부님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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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저 멀리 위에도 계시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자리하십니다!>
엠마오 소풍 길에 만난 형형색색의 꽃들, 어찌 그리 눈부시고 화사하던지요. 나이 탓인지, 여리여리하고 청초한 것들을 보면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끔찍하게 먹어버린 제 나이를 생각하며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꽃 길을 걸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길고 혹독한 겨울을 잘 견뎌낸 우리에게 또 다시 찬란한 눈요기를 선물로 주시는구나. 이런 저런 매일의 고통을 잘 이겨낸 우리에게 위로의 선물로 화사한 봄날을 보너스로 주시는구나.
엠마오 길에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꽤 긴 여정을 그분과 함께 걸었지만, 시종일관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실 때야 마침내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 있으니, 바로 우리들의 눈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새로운 시선, 새로운 시각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우리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고통이 기쁨으로, 슬픔이 은총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초라하고 누추한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뵌 제자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존재 방식은 이제 종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입니다. 엠마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시고, 식사를 같이 하셨지만,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짠하고 눈앞에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기도 계시지만 지구 반대편에도 계십니다. 성전 안에도 계시지만, 시끄러운 시장 한 가운데도 현존하십니다. 저 멀리 위에도 계시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자리하십니다.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함께 길을 걸으시고, 대화를 통해 이것 저 것 자상히 가르쳐 주시고, 빵을 떼어주시고, 그러나 또 다시 사라지시고...참으로 묘하신 하느님, 신비의 절정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 한 가지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우리 앞에 확연히 나타나십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우리가 거행하고 참여하는 성체 성사 안에서 꾸준히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좀 더 잘 준비되어야겠습니다. 좀 더 경건하고 깨어있는 태도로 임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다가오시고, 영성체를 통해 우리 눈이 열려 주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매일 내게 다가 오신다신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매 순간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신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듯합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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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YWVpI11n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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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효도가 당연한 사람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러시아에서 호랑이 새끼들을 젖 먹여 키운 개에게 다 성장한 호랑이들이 순종하고 애교까지 부리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있습니다. 이것이 당연하게 보이면 분명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날이 머지않았고, 당연하지 않고 이상하게 보이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짐승들까지도 자신에게 젖을 준 동물을 자기 부모라 여깁니다. 호랑이가 되었지만, 호랑이가 되는 법을 개는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냥 젖을 준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호랑이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여기엔 놀라운 두 가지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호랑이 새끼들은 젖을 주는 개를 자기 어미라 믿었습니다. 젖은 살과 피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젖을 준 어미는 당연히 영광도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게 두 호랑이가 싸울 때 다 늙은 어미 개가 얼굴을 물며 말려도 어미 개에게 호랑이도 순종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들은 여인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믿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과 그것 때문에 당연히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항상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부모 없이 자랐어도 우리를 고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당연히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또 어머니는 부족하다고 말은 했지만, 아버지로부터 월급봉투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아버지의 돈을 받는 게 당연합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창조자는 피조물을 위해 당연히 피를 흘리고 그 피 흘림에 대한 영광을 당연히 받습니다. 이것이 당연하지 않다면 효도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걷고 말을 하게 된 게 부모의 피 흘림 없이 가능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짐승에게 길러지면 짐승으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부모를 당연히 공경합니다. 영광을 드립니다.
구약성경은 이 내용들이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는 피조물을 위해 당연히 피를 흘려야 하고 그 피 흘린 메시아는 어머니처럼 당연히 부활의 영광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셨습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분별할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이미 부활에 대한 진리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분을 만나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어머니가 가발을 처음 쓰셨을 때 어머니에게 “아주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정말 어머니 친구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가발을 쓰실 것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에 다른 사람으로 오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로 유학 간 직후에 버스에서 분명 아는 얼굴을 보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부부였습니다. 계속 보며 결국엔 TV에서 보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먼저 다가와 저에게 인사하며 같은 본당 신자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유학 나오기 직전에 분명 인사를 한 잘 아는 부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로마로 여행하러 온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에서 같은 버스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만약 자녀가 있다면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할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구약성경의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의 당연성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고 있어야 눈에 보입니다. 특별히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며 당신 살과 피라고 하실 때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어머니라 여기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면 아주 쉽습니다.
자녀를 살리기 위해 모든 돈을 쓴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돈을 더 벌어다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기에 인간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기초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부모를 이해하고 공경합시다. 그러면 구약성경을 이해한 것입니다. 이제 빵을 떼어주시는 분이 우리 창조자일 수밖에 없음이 이해되고 그러면 성체 안에서 주님을 알아보게 될 일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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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헬렌켈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째 날. 나는 나에게 친절과 따뜻함, 그리고 우정을 통해 나의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 준 사람들을 보고 싶다. 둘째 날, 새벽 여명과 함께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며 지구가 깨어나는 그 경이로움을 지켜보고 싶다. 마지막 셋째 날. 다시 나는 일찍 일어나 동트는 아침을 지켜보며 이날의 새로운 계시를 체험하고 싶다. 이날 나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밤중이 깊어가 나의 마지막 밤이 문을 닫을 때 나는 이 사흘간 보았던 모든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며 감사할 것이다.”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볼 수 있다는 것은 감격이고, 경탄입니다. 마찬가지로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 단 한 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감격이고, 경탄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자 평생 걷지 못했던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날 걷지 못했던 사람은 결코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뉴욕에서 왔을 때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댈러스에는 볼 것이 별로 없답니다. 운동도 골프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댈러스에 와서 1달이 지났는데 댈러스에는 볼 것도 많고, 운동할 것도 많았습니다. 사제관에서 성당까지 차로가면 5분이지만 걸어가면 50분이 걸립니다. 매일 성당 갈 때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새벽의 바람과, 오전의 바람 그리고 오후의 바람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 자리를 바꾸어가면서 대형을 유지하며 날아가는 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 모양의 구름, 양 모양의 구름도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가로질러가는 뱀도 볼 수 있습니다. 비가 제법 온 날에는 둑 가까이 불어난 불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벽에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껑충껑충 뛰어가는 토끼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새벽 숲속을 걸으면 산책 나온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쓰레기를 치우고, 길을 청소하는 차량도 볼 수 있습니다. 걸으면서 기도하고, 걸으면서 강의를 듣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1달이 조금 넘었는데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댈러스는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제게 보여 줄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고, 함께 할 공동체가 있고,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물리적인 시간)은 어쩌면 단조롭고, 심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의미의 시간)은 언제나 감격과 감탄의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에서는 사제관에서 성당 가는 길이 곧 엠마오입니다.
절망과 두려움에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은 말 그대로 충격, 경악, 감탄,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시작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시작 되었을 지라도 곧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박해와 고문과 죽음을 계속 이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어어 올 수 있는 것이 바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박해와 고문을 받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당하게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피와 땀이 바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2000년이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라뿌니’라고 소리쳤던 마리아와 같은 감격과 감탄을 체험하긴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빵을 나누었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진한 감격과 감탄을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헬렌켈러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에 머물지 않고 카이로스의 시간에 머물 수 있다면 우리는 뺨을 스치는 바람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방긋 웃는 아의 모습에서도, 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의 땀방울에서도 감격과 감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우리들 또한 감격과 감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성가 461번 ‘엠마우스’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을 이 집에 모셔 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 뛰오니 길에서의 얘기, 마저 하시며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우리와 한 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밤바람 차갑고 문풍지 떠나 주님의 음성이 호롱불 되고 주님의 손길은 따뜻하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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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4,13-35: 엠마오의 제자들
두 제자가 길을 가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유대인들의 불의한 짓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함께 걸으시면서 다정하게 말을 건네신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17절) 제자들은 눈으로 그분을 보았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18절) 그리고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좌절과 상처를 감추지 않고 곧장 의사이신 그분께 모두 털어놓았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절)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그들의 모든 바람을 수포가 되게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려고 성경을 풀이해 주신다.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예언자들에게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풀이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불타올랐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설명하신 다음에야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어,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아직 빛을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다.
떼어진 빵 조각이 눈을 열어주는 열쇠다. 엠마오의 식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인 동시에 성사로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교회의 성찬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축복이 담긴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사라지신 것은 이제부터 말씀과 성찬 안에서 믿음으로 당신을 모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 빵은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된 빵이다. 두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게 한 것도 그 빵이었다.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그분께서 그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이다. 우리는 이 성체성사로 그분을 알아봄으로써 하나가 된다.
그리고 오늘 복음 역시, 이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다른 제자들과 나누기 위해 얼마나 서둘렀는가를 볼 수 있다. 즉 예루살렘까지 30리 길을 서둘러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께 대한 체험을 이웃과 나눌 수 있을 때 완전히 자기의 체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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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복음은 예루살렘을 온통 술렁이게 하였던 십자가 사건 이후 모든 것이 갑자기 잠잠해진 듯한 분위기에서 시작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십니다. 제자들에게 그러셨듯이, 우리가 서로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어 함께 걸으시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십니다. 이 동행은 그들이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는 상태로 끝납니다. 부활을 알아보지 못함에서 알아봄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무슨 수로 그들의 가리어진 눈을 열린 상태로 변화시키신 것일까요? 복음은 성경에 대한 설명과 빵을 떼어 주시는 행위를 통해서라고 답합니다. 사실 ‘말씀’과 ‘성찬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과 그 사랑을 ‘기념’함으로써 타오르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마침내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게 하는 성사적 자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과정을 날마다 미사 안에서 우리에게 재현하십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 비로소 나와 함께하며 내 삶을 동반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또렷해집니다. 그 유일한 존재를 알아보며 그분의 이름으로 일상을 사는 것, 이것이 그 동반에 대한 사랑이며 예의입니다. 날마다 주어지는 말씀과 성찬례만으로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알려 주시고 성체성사로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실제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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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3-16)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0-35)
1) 여기서 ‘그날’은,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다가 천사들을 만난 날,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두 제자는 여자들이 전하는 ‘예수님 부활 소식’을 이미 들었는데(23절), 그 소식을 믿지 않고, 엠마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눈’이 가리어져 있었던 것처럼(16절) ‘귀’도 가리어져 있어서 부활 소식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귀가 열린 때는, 성경을 풀이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을 때이고, 눈이 열린 때는,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말씀과 빵’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흔히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표현하는데, ‘전례’가 아니라 ‘말씀과 빵’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2) ‘말씀’과 ‘빵’에는 ‘나눔의 실천’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빵’은, 함께 나누어 먹는(함께 나누어 먹어야 하는) ‘생명의 빵’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혼자서만 먹는 빵은 ‘썩어 없어질 양식’(요한 6,27)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혼자서만 말하고, 듣지 않고 나누지 않는 것은, ‘혼잣말’(루카 18,11)을 중얼거리는 것일 뿐입니다.
‘나눔의 실천’은 곧 ‘사랑’입니다. 말씀을 나누고 빵을 나누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과 빵’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말은, “예수님은 ‘사랑을 통해서’, 또 ‘사랑 안에서’ 현존하시는 분”이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원래 ‘사랑’은 혼자서는 못하는 일이고,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합니다. 우리 교회의 신앙생활은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고 혼자서 도를 닦는 생활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사랑을 나누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3) 두 제자가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는 모습을 보면, 사랑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제자가 자기들과 함께 묵으라고, 아직은 낯선 나그네였던 예수님을 붙든 일은, 다음 말씀을 실천한 모범이 됩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이 말에서, ‘손님’은 ‘낯선 나그네’를 뜻하는 말입니다. ‘천사들’은, 뜻으로는 ‘하느님’입니다.> 두 제자는 낯선 나그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접대하게 되었습니다.
4) 두 제자에게 부족했던 것은 믿음, 즉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채워 주셨습니다. 성경을 풀이해 주신 일과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일은 모두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서 부족했던 믿음을 채웠고, 눈과 귀가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성경을 풀이해 주신 일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두 제자는 분명히 ‘좋은 땅’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열매를 맺었을 것입니다.(루카 8,15)>
5) 두 제자의 ‘눈’이 가리어졌다는 말과(16절) ‘눈’이 열렸다는 말에서(31절)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 11,34-36)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인생 전체가 어둠에 잠겨 있는 사람입니다. 어둠 속에 있으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자신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음도 믿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은, 인생 전체가 환하게 빛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안 믿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모두 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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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재만 마르코 신부님]
<예수님께서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대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난 이야기는 믿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사도들이 이끄는 초기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마음으로 모인 신앙공동체 생활을 이루어 나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들의 초기 교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부활 승천 하셨음으로 육신적으로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신자들의 공동체를 떠나셨습니다. 또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과 로마의 박해로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초기 신자 공동체와 함께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굳은 믿음이 꼭 필요했습니다. 더구나 오늘 복음을 쓴 루가는 그 유명한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의 제자이며, 바오로 사도의 전교여행을 따라 다녔으며, 바오로 사도의 전교여행이 중심이 되고 있는 '사도행전'을 쓴 분입니다.
바로 이러한 뜻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신자공동체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신자들에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사람은 하나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그 공동체는 바로 초대 교회의 신자공동체를 말합니다. 두 제자들의 스승 예수님의 죽음으로 갖게 된 실망과 좌절 등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신자공동체를 떠났다고 실망할 수도 있는 초대 교회신자들의 마음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 주실 때에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들 곁에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고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감사의 기도는 미사전례에 있어서 말씀의 전례에 해당되고 빵을 떼어 주심은 미사의 성찬의 전례에 해당됩니다. 이 두 부분의 전례로 미사가 이루어집니다. 말씀의 전례는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영혼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먹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이 말씀은 구약과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영적인 생명을 창조하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 인간의 말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도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세상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죄를 짓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성서를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얼마나 큰 일을 하셨는지를 알려주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예언자들과 종들을 통해서 우리 죄를 씻어 주실 구세주를 보내 주시겠다는 예언을 여러 번 갖가지 방법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는 드디어 때가 무르익어 당신 아드님을 구세주로 보내 주시고 우리 죄 용서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도록 한 구원사업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구원사업을 믿고서 힘을 얻어서 영적인 싸움에서 죄악에 승리를 거두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도를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란 하느님께 무엇을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올바른 기도를 한다면 우리의 양심과 마음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인 성녀들은 이러한 올바른 기도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완전한 덕행의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서와 기도에서 들을 수 있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옛날에는 '신자들의 기도'라고 불렀던 '보편지향 기도'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미사에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은 성찬의 전례입니다. 이 성찬의 전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잘 사용해서 얻은 우리 수고의 열매를 하느님께 재물로 봉헌하면 하느님께서는 이 보잘것없는 우리의 봉헌물을 우리에게 너무나 귀중한 영혼 생명의 양식과 음료인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로 변화시켜서 주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이 예수님의 성체를 받아먹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되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눈에 볼 수 있는 예수님을 곁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욱 더 예수님과 가깝게 예수님과 나의 몸이 완전히 하나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사의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성체를 우리 안에 모시게 됨으로서 우리는 세상의 어떤 악의 세력에 대해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던 엠마오의 두 제자, 그들을 다시 희망 가득찬 기쁨으로 변화시켜 준 것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빵을 떼어주심이 있듯이 오늘날 세상에서 악의 세력과 싸움을 벌이는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미사의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를 통해서 우리 안에 모시고 희망찬 기쁨을 지니고 믿음의 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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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지훈 D.안드레아 신부님]
<우리도 질 줄 알아야 겠습니다.>
벚꽃이 만발하는 시즌입니다. 고운 꽃잎을 한아름 품은 벚나무를 보노라면, 마치 커다란 꽃다발이 연상됩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벚꽃에 별명을 붙여 보았습니다. ‘거인들의 꽃다발’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토록 아름다운 꽃들도 불과 몇 주 지나지 않아 떨어져 버립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일 지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들어 버립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라졌다고 잊혀지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벚꽃 아래를 거닐며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나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를 기억하노라면, 내 마음에는 어느덧 벚꽃이 만발해 있음을 느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잠시 피었다 지는 꽃처럼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속에 잊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오늘따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질줄 아는 꽃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질 줄 알아야 겠습니다. 항상 활짝 펴 있으라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조화의 모습이 아니라, 때가되면 질 줄 아는 살아있는 꽃이 되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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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두 제자의 대화는 그들의 삶과 미래 전체가 달려 있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시어, 당신에 대한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시며 믿음과 희망을 되찾아 주십니다. 특히 제자들과 함께한 식탁의 자리에서는 부활하신 당신을 알아보게까지 하십니다.
제자들의 대화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제자들이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오늘 독서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은 평생을 실의와 절망 속에서 이웃의 물질적 도움에 기대어 살아왔던 불구자에게 새 삶의 희망을 제시합니다. 성령을 받은 두 사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바로 그에게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나그네 인생길이며 주님을 따르는 순례의 여정에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과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할 생명의 빵으로 함께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연 무엇에 우리 삶의 희망을 두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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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무덤에 있던 그분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이에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집니다. ‘죽은 지 사흘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에 혹시나 하고 기다렸는데 그분의 시신이 사라져버렸으니 이젠 부활이고 뭐고 다 틀렸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또한 예수님을 죽인 반대세력들이 그 추종자들을 잡기 위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찾아다니고 있으니 두렵고 불안하기도 했겠지요.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갈 땐 ‘금의환향’의 기대와 희망을 가득 안은 채였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실의와 좌절에 빠진 ‘낙향’길이었으니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터덜터덜 걷고 있었겠지요.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그들과 함께 걸으십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이 뭔가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렸을까요? ‘주님은 이러셔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그들의 눈을 가려 실망을 만들고, ‘메시아는 이래야 한다’는 편견이 그들의 눈을 가려 절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실망과 절망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게 만들었지요. 그분이 돌아가시는걸 자기들 두 눈으로 직접 봤는데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들이 직접 만나본게 아니니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과 의혹에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길을 걸으십니다. 가시는 도중에 그들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시기도 하고, 성경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메시아의 신원과 사명에 대해 가르쳐주시기도 하면서 몇 시간을 함께 보내신 것이지요. 그 두 제자만을 위한 특별한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신 셈입니다. 그들의 무지와 불신에 호통을 치시기도 하고, 그들의 마음 속에 생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죽음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부활을 위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기 위한 과정임을 알려주시면서 그들의 마음에 참된 희망을 심어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만을 위한 말씀의 전례가 끝나갈 무렵, 날이 저물고 어두워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두 제자와 함께 숙소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들만을 위한 특별한 ‘성찬의 전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지요. 사실 그 식사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으로 나누셨던 ‘파스카 식사’와는 다른, 그냥 평범한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빵을 떼어 주시는 그 모습을 보고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렸고, 그렇게 자기들 앞에 계신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임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주님은 그들의 눈 앞에서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모습으로 앞에 계시지 않아도, 주님께서 언제나 자기들과 함께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두 제자처럼 말씀의 전례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서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십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마음 속에서 주님의 사랑에 대한 뜨거운 감동이, 그분께서 베풀어주신 은총과 사랑에 대한 감사가, 그런 그분의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우러나오고 있는지요? 우리는 미사라는 기적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는 기쁨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주님을, 그분의 뜻과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붙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으로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하고 그분을 붙들었던 두 제자들처럼 마음을 열어 그분을 꼭 붙들고 있는지,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온전히 머무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며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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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돌이킬 수 없는 주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며 절망하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는 부활의 소식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 봅니다. 죽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상황이었음에도 죽음이 더 이상 마지막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때, 제자들은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힘차게 달려갔음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주님은 아주 특별한 모습이나 요란스럽게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엠마오로 향해 낙담한 채 걸어가는 제자들에게 살며시 다가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슬픔과 낙담으로 눈이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힘들게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며시 다가오셨겠지만, 우리 역시도 세상일로 마음이 분산되어 있어 알아보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로 두 제자와 함께 길을 걸어가시면서 예수님은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24,17) 하고 묻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를 나눌 수 있도록 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듣는 게 아니고, 자신이 한 이야기를 자신도 듣도록 응답하고 공감해서 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가운데 멈추어 서서, 클레오파스가 “아니,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24,18)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왜 침통해하신 가를 말할 수 있도록 “무슨 일이냐?”(24,19) 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문제를 말하도록 질문을 다시금 던지십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제자들은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했으며, 베드로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서 알려준 사실과 주님께서 살아나셨다, 는 소식을 들었지만, 반신반의 상태에서 믿지 못하는 자신들의 답답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어떻게 그런 소문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이란 돌이킬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 관한 성경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서 길을 떠나려고 할 때, 두 제자는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24,29) 하고 초대합니다. 초대받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자”(24,30) 그때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내 사라지셨습니다. 낙담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는 잘 듣지 못하며, 슬픔과 실망으로 넋이 나간 상태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매일 말씀으로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 주시고, 성체로 매일 우리의 닫힌 눈과 마음을 뜨게 해주시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희망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고 증거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부활을 확신한 베드로 사도는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3,6) 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3,8) 이 모습이 바로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습하고 암울하며 싸한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성당의 종소리처럼 기쁨과 환희로 넘쳐 ‘알렐루야!’를 힘차게 노래하며 그 기쁨을 누군가와 나눠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주님을 초대하는 마음은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알렐루야.” (영성체송)
많은 공동체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부활 축제 기간에 엠마오를 다녀옵니다. 사순시기 동안 주님의 남은 고난에 열심히 참여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사순시기 동안 겪었던 것을 서로 나눕니다. 이 엠마오 여행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 여정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의 고마움과 또한 자신의 걱정과 어려움을 기꺼이 들어주는 동반자가 있다는 고마움을 느끼면서 함께 걷는 형제자매가 바로 지금 우리가 만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을 살아오면서 들어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의 기준이며, 지금 누군가가 여러분의 십자가와 고난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기에 여러분 또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그 형제자매에게 행복을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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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 부활 판공 때는 다른 때와 달리 평일이 아닌 주일에 판공성사를 했습니다. 9시와 11시 미사 전 1시간, 총 2시간을 교구청 신부와 학교 신부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두 시간 동안 고해성사 보신 분이 자그마치 600명이 넘었습니다. 평일에 했던 판공성사보다 2배 이상 많은 사람이 고해성사를 본 것입니다.
얼마 뒤, 우리 성당에서 판공성사를 주었던 신부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아. 요즘에 부활에는 거의 성사를 보지 않던데, 그렇게 많이 성사보실 줄 몰랐어.”
맞는 말입니다. 신자들에게 너무 감사했고, 이런 본당의 본당신부라는 사실에 특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열심한 모습에 더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도 하게 됩니다. 만약 성탄 판공성사 본 지 얼마 안 되었다면서 성사 보는 사람이 적었다면, ‘우리 신자들은 부활을 기쁘게 맞이할 마음이 부족하다’라며 저 역시도 열심히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이의 영향을 받는 우리입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누군가가 그 모습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타본당 신자가 미사 후에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냉담하다가 이곳 성당에 우연히 오게 되었는데, 성당이 깨끗해서 기도하고 싶어졌어요. 이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우리 성당 교우들은 지저분한 것이 있으면 알아서 치웁니다. ‘누가 치우겠지’라면서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해서 치우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성당이 늘 깨끗합니다.
자기 모습이 바로 전교 활동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전교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자기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서 주님을 가장 잘 알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교 활동을 잘하고 있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지요. 이미 몇 차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 하지 않고 다시 옛 생활로 되돌아가려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전하기보다는 과거로만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 비로소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믿음을 통해 주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믿음을 통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삶으로 주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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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루살렘에서 엠마오 다시 예루살렘으로>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안식일 다음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 다시 예루살렘으로>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5)
그분께서
늘 그렇게
함께하시건만
그분을 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분마저 없는
그분의 제자들이
슬픔과 절망으로
그분처럼 죽지 않으러
엠마오로 갑니다
그분께서
늘 그렇게
함께하시기에
그분을 찾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분과 함께하는
그분의 제자들이
기쁨과 희망으로
그분처럼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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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기력한 죽음에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허망함은 사랑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무덤의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려면 영의 눈이 열려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고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더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 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엠마오(따뜻한 샘물)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는데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였듯이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오시든지 가시든지 그냥 놓아두지 말고 못 가시도록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시려고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길을 걸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으며, 낯선 길손을 애써 대접하면서 마음의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곧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고, 그들이 육안으로 부활한 영의 몸을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실망을 환희로 바꾸는 당신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남아계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즉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가르침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오늘도 말씀을 대할 때에는 지식이 아니고 마음이 뜨거워야 합니다. “저는 아프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고통을 받지만 낙담하지 않습니다. 혼란되지만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시련을 받지만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내쫓기지만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시련은 잠시뿐이지만 다가올 삶의 영광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성녀 엘리사벳시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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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여정>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평생 날마다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삽시다!”
“하느님, 해마다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기뻐하오니, 저희가 이 세상에서 지내는 축제로, 영원한 파스카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본기도)
요즘 부활 축제시기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과 함께 새롭게 부활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오늘 4월3일, 옛 어른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겸손과 지혜의 사람들은 이 진리를 깨달아 살 것입니다.
"작은 상자에 큰 것을 억지로 담으면 부서지고 만다. 사람의 탐욕도 그렇다"-다산
"먹을 것을 밝히는 사람을 낮춰 보는 까닭은 작은 것을 채우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맹자
계속되는 파스카의 축제, 파스카의 기쁨의 계절 4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덕분에 실현된 축제인생입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파스카의 기쁨과 더불어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으로 변모됩니다.
예수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강림대축일까지는 “레지나 챌리(Regina caeli;하늘의 모후님)” 삼종기도를 바치며 끝기도 역시 이 레지나 챌리를 노래합니다.
아드님의 부활에 성모님과 함께 기쁨을 함께하는 우리입니다. 엊그제 부활축제 월요일 바티칸 광장에서 레지나 챌리 삼종기도후 교황님은 “부활하신 분과의 살아있는 만남으로부터 태어난 엄청난 기쁨이, 파스카의 기쁨이 우리 인생을 변모시킨다” 강조하셨습니다.
봄의 부활축제에 맞춰 동시다발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들이 온통 주님 부활을 경축하는 기쁨 가득한 요즘 분위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생명과 기쁨으로 찬란히 빛나는 대지를 보며 써놨던 글을 나눕니다. 왜관수도원 계간지 “분도 창간호 봄호(2008년)”에 실린 “봄햇살 붓으로”라는 시입니다.
“오 하느님,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네.
생명의 화판(畫板) 대지위에
부드러운 봄햇살 붓으로,
연한 초록색(草綠色) 물감 슬며시 칠하니,
조용히 솟아나는 무수한 생명의 싹들,
무수히 피어나는 파스카의 꽃들,
오 하느님,
당신의 화판 봄의 대지(大地)위에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네”-2007.4.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날 때 참으로 생명과 기쁨으로 살아 나는 사람들이요 온누리 세상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세요. 주님 부활의 사도 베드로가 그 모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모태에서 불구자였던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말 그대로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치유, 구원받는 태생 불구자입니다. “우리를 보시오.” 눈 맞춤을 시도한 후, 즉시 베드로는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선물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해마다 반복되는 말씀이지만 늘 새롭게 느껴지는 신바람 나는 말씀이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는 즉시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온 백성은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합니다. 태생 불구자가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온전히 치유되어 살아나는 모습을 실감 나게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루살렘을 떠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졌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살아나는 장면을 감동깊게 전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던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첫 대화 부분은 미사로 하면 그대로 말씀 전례에 속합니다. 주님은 두 제자의 무지를 일깨우며 말씀을 깨닫도록 이끄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주님은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줍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말씀전례중 주님을 체험하지 못했지만, 후반부 식탁에서 빵을 나누는 성찬전례 부분에 속하는 장면에서 눈이 열려 주님을 만납니다. 이 장면 역시 신선한 감동에 충격입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니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졌다.’
전광석화, 그제야 제자들은 말씀전례중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감격에 벅차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새삼 파스카 미사전례가 얼마나 은혜로운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미사중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부활시기뿐 아니라 일년 열두달 매일 이 거룩한 파스카 미사전례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파스카의 꽃이 되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여정을 살아가게 합니다. 다시 나누는 “파스카의 꽃”이란 자작시입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사랑의 꽃이다
그만의 색깔, 향기, 크기, 모양으로
평생 세상 떠날 그날까지
부단히 날마다 폈다 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사랑의 꽃이다
꽃처럼 살자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떠나자
파스카의 꽃처럼!”
언젠가 부활 축제시기, 이제 고인이 된, 꽃을 선물한 자매에게 준 화답시도 생각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주님 파스카의 꽃처럼 사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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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재현>
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는 여러모로 의미를 새기고,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얘기입니다.
먼저 지나가되 지나치지 않는 점입니다. 이는 지나가면서 많이 지나치는 저와 다르지요.
저의 지나침에는 더 예쁘고 더 아름다운 것들을 보다가 보니 눈에 끌리지 않는 것들은 못 보는 비의도적 지나침도 있지만 보기 싫은 것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의도적인 지나침도 있지요.
가끔 아픈 사람을 보면 같이 마음이 아픈 것이 싫어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도와줘야 하는데 도와주기 싫어서, 눈을 질끈 감고 서둘러 지나칩니다.
이런 저와 달리 오늘 베드로 사도는 불구자를 지나치지 않고 유심히 봅니다. 그렇습니다. 유심히 보는 점, 이것이 제가 두 번째로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그런데 ‘유심히’라는 말이 어떤 뜻입니까? 한자어의 유심(有心)에서 비롯된 말이지요. 어디에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말로 ‘무심하게’라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마음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에게는 또 어떤 것에는 관심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자기가 좋아하고 그래서 갖고 싶은 것에는 관심이 있지요.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지요. 사람도 좋아하고 소유하고픈 사람에게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유적인 관심도 있지만 사랑의 관심도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런데 챨리 채플린은 정반대의 얘기를 합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역시 사랑으로 보지 않고 소유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가까운 것일수록 좋은 것이고 선이기를 바라지요.
똥도 멀리 있으면 상관이 없습니다. 가시도 멀리 있으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똥이 가까이 있으면 냄새가 고약하고, 가시가 가까이 있으면 서로 찌르게 되겠지요.
그래서 사랑이 없을 땐 좋은 것이 가까이 있고 좋은 것들만 가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을 땐 어떻겠습니까?
사랑하는 엄마는 아기 똥도 싫지 않고 아기 똥을 보고 건강을 살핍니다. 사랑하는 의사는 병자의 병을 살피고 멀리 있는 병자까지 찾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가까이 있는 것을 지나치지 않음은 물론 멀리까지 관심을 가지고 찾아갑니다.
불구자나 병자를 보고 저는 제가 고쳐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며 사랑을 포기합니다.
고쳐줄 수 없어도 손을 얹어줄 순 있고 기도해줄 순 있는데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주님 사랑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돈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주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가진 것은 주님이고 주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을 오늘 재현합니다.
그런데 나는 주님 사랑 없다고 버틸 것인가? 그래서 나는 사랑할 수 없다고 버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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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
<엠마우스!>
오늘 복음(루카 24,13-35)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30리 거리)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을 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믿지 못하는 두 제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그랬던 그들이 식탁에 앉아 예수님과 함께 저녁만찬을 할 때, 곧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을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십니다.
'엠마우스!'
오늘 엠마우스를 하는 성당도 있습니다. 합천본당은 돌아오는 주일인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주일) 미사를 마치고 엠마우스를 합니다.
'엠마우스'는 주님부활대축일 후, 파스카 성삼일 전례에 수고한 봉사자들과 함께 '엠마오라는 곳'(?)으로 가서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엠마오라는 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처럼, 우리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우리의 엠마오는?'
그곳은 예수님께서 매일 생명의 빵을 나누어 주시는 '성당'이고, '내가 머무는 삶의 자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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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6wI0Tbc4r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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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 35)
이토록
마음이 아프고
쓸쓸한 것은
우리가 믿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밀려오는
이 실망과 아픔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보냈기에
예수님의 삶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셨던
사랑의 자취가
바로
뜨겁게 타오르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빵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믿음이고
빵의 나눔이
바로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우리 삶에
말씀과 빵으로
들어오시길
간절히
바라시는
우리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찾아오십니다.
우리 삶에
들어오실 수
있도록
마음을
뜨겁게
여는 것이
믿음입니다.
참다운 빵이란
말씀대로 사는
삶이며
서로를 북돋아
살아가게 하는
삶이 바로
빵의 삶입니다.
매번 만났던
말씀과 빵이지만
다시 뜨거워지는
부활의 특별한
체험이 됩니다.
멀리
떠나서
만나는 체험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다시 시작되는
뜨거운
체험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우리들의 마음에
머무시려
하십니다.
십자가로
떠나시고
말씀과 빵으로
다시 오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말씀과 빵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에게는
말씀과 빵이
있습니다.
말씀과 빵에
머무르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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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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