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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스John Ross출생사망성별국적경력직업소속종교
| 1842년 스코틀랜드 | |
| 1915년 | |
| 남성 | |
| 스코틀랜드 | |
| 중국 선교사, 동관교회 설립 | |
| 선교사 | |
| 장로교 | |
| 장로교 | |
존 로스(John Ross, 동아시아 이름: 나요한(羅約翰), 1842년 ~ 1915년)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로서 중국에서 선교활동 중에 최초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이자[1]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으로 알려져있다.[2][3] 그는 한국인 이응찬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운 후 한국어 학습서(1877)과 한글 역사책을 펴내기도 했다.[4]
존 로스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역을 하며 심양의 동관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생애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 서북쪽의 작은 항구인 라리키(Rarichie)에서 1842년 8월 9일 당시 인정받던 전문직 양복업자인 휴·로스와 캐더린 서더런스의 8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5] 장남인 로스는 스스로 가문에 믿음의 뿌리를 전승해야 한다면서 많은 직종의 직업이 있었지만 목사의 길을 가기고 마음먹고는 그 길로 에딘버러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글래스고 대학교와 에든버러의 신학교에서 수학을 한 뒤, 누가 동아시아의 그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을 가진다. 이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의 총무인 맥길 박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4년째 되는 해인 1872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해외선교부의 중국 선교사로 당시 만주라고 불리던 중국의 동북부로 파송되었다.[6] 1872년 2월 27일 스코틀랜드 장로회 인버네스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스튜어트(Strapp McFadyen, ~1930)와 결혼을 한 후였다. 로스 신혼부부는 잉커우시에 처음 발을 딛은 후,[7] 그해 8월 23일에 상해에 도착한다.[8] 처음에는 영구에서 사역을 하다가 선양으로 사역지를 옮겨 1889년 동관문 교회를 설립하였다. 의화단의 난 이후에 새로 지어진 교회는 문화혁명 때에도 파괴되지 않고 지금도 개신교 교회당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로스는 한국에서 온 무역상인들을 만나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로 결정하였다. 로스 목사는 한국인 이응찬, 김진기, 서상륜, 백홍준 등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였는데, 1882년에 완성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중국에 있던 영국 성서공회를 통해 각 3,000부를 출판하여 만주 및 한국에 배포하였다.[9] 신약성서 전권은 1887년 완역된 후 인쇄되어 한국으로 들여보내졌다.[10] 1892년 그는 한국에서 온 제임스 게일을 만났다. 1910년 스코틀랜드로 귀향한 후에도 스코틀랜드-중국 협회를 돕는 일을 계속 하였다.
한글 성경 번역
존 로스는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신약성서를 번역하여 1887년 《예수성교전서》를 간행하였다.[11] 일반적으로 로스역 성경이라 함은 1882년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 1883년 《예수셩교셩셔 누가복음 데자행젹》과 《예수셩교셩셔 요한복음》, 1884년 《예수셩교셩셔 마태복음》과 《예수셩교셩셔 말코복음》, 1885년 《예수셩교셩셔 요한복음 어비쇼셔신》, 1887년 《예수셩교젼셔》 총 8권의 한글성경을 일컫는다.[12]
번역 동기
존 로스는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선교사들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해야 하며, 한글로 쓰인 성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13] 존 로스가 태어나고 자란 스코틀랜드의 시골 마을에서는 영어가 아닌 게일어를 썼기 때문에 로스는 학교에 입학해서야 정식으로 영어를 배웠다. 따라서 그에게는 영어를 배우는 일이 외국어를 배우는 일과 같게 느껴졌다. 이처럼 어린 시절에 외국어를 습득하는 경험을 한 로스에게 한국어나 중국어와 같은 생소한 언어를 공부하는 일은 남들보다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14]
로스는 한글이 어떤 가치와 잠재력을 갖고 있는지 잘 알았다. 그는 한국의 알파벳은 30분만에 충분히 습득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단순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15] 또한 로스는 그와 함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 속해 있던 윌리엄슨 목사가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는 소식과, 토마스 목사가 선교를 하는 중에 대동강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한국 선교 열의에 감동하여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다.[16]
번역 과정
로스는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선 산둥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다. 그 후 1874년 10월에 한국과의 접촉을 위해 처음으로 고려문에 가게 된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시기로, 조선과 청나라가 교류할 수 있는 통로는 고려문이 유일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고려문 여행을 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이 첫 번째 고려문 여행에서 로스는 조선 상인들과 접촉할 수는 있었지만 상인들은 돈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로스의 설교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로스가 크게 실망하여 있던중에 그에게 흥미가 생긴 상인 한 명이 찾아왔다. 로스는 그 상인에게 한문 성경과 소책자 한 권을 주고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갔다. 로스가 두 번째 고려문 여행을 떠난 것은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한국의 문호개방이 실행된 후인 1876년 4월 초에서 5월 초이다.
1875년, 로스는 고려문에 가서 의주 청년들을 만나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본격적으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17] 로스가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은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한국어 습득과 한국어 문법책을 만드는 시기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로서 로스는 성경을 한글로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먼저 한글을 공부한후 한국어 문법책을 만들었다. 2기는 본격적으로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로스는 1879년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 전까지 약 2년의 기간 동안, 1852년에 번역된 한문문리성경을 대본으로 하여 마태복음에서 로마서까지 번역했다. 3기는 로스가 안식년 휴가를 떠난 동안 우장의 매킨타이어의 주도 하에 번역이 이루어진 시기로, 약 2년의 기간이다. 4기에는 신약성서가 완역되어 《예수셩교젼셔》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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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에서 중국 만주 선교사로 파송(1872. 2. 27.) 받았으며, 목사안수 받고(1872. 3. 20.) 스테워드(M.A. Steward) 양과 결혼하고(3.25) 선교지로 출발하여 만주 영구에 도착하였다. 아내 스테워드는 1873년 첫 아들 "드럼몬드("Drummond)를 해산(1873. 2.)하고 긴 여행과 혹한에 별세(3. 31.)하였다. 존 로스는 넷째 여동생 캐더린(Catherine)을 만주로 불러 아들을 돌보게 하고 중국어 습득과 순회 선교에 몰두하였다. 여동생은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8-1904) 선교사와 결혼(1876년)하여, 존 로스와는 매형 관계로 한글 성서번역과 한국인 세례, 매서인(권서인, 전도인)을 한국 내로 파송하여, 복음전파 활동에 긴밀한 협력자가 되었다. 두 존(John) 선교사는 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 기독교 신앙 공동체 형성과 교회 설립, 부흥의 토대를 놓았고, 이미 공식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전국 곳곳에 복음의 씨앗이 자라 신앙공동체와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들은 로스의 전도인들의 안내로 서북지역을 여행하며 세례요청에 놀라고 문답 심사하여 세례를 베풀고 다녔다. 특히 첫 성서번역에서 순 한글로 엘로힘/데오스를 "하느님/하나님"으로 번역하여, 한국 사회와 문화, 역사에 길이 빛나는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만주의 한인촌교회와 국내전도(1876)
(출처- 한국 기독교사 이야기 : 존 로스, 첫 한글 성서 번역:"하느님/하나님"으로, 노종해 목사)
선교사 죤 로스목사와 가족(1880년대)/고려문 방문로-출처:김정현(J.H. Grayson),"한국의 첫 선교사", 계명대,1982. pp324)
로스 선교사-만주 한인촌 교회 형성과 한인 전도인 국내활동
한국 국내에서 기독교선교 활동이 시작된 때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내한으로(1885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미 10년 전인 1874년부터 한국과 중국의 접경지대인 압록강 변에서 한인전도가 이루어졌고 백 명이 넘는 한국인이 세례교인도 있었다. 만주(滿洲)의 한인촌(韓人村)에는 한인교회(韓人敎會)와 전도인(傳道人)도 있었다. 또한 서북지역인 의주(義州), 강계(江界), 선천(宣川), 평양(平壤)과 송천(松川)지역 상인들이 만주를 드나들면서 기독교인이 된 후 국내 전도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만주에 최초 한인교회와 전도인을 형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한 분은 로스목사(羅約翰, John Ross)로 스코트랜드 장로교회로 부터 중국선교사로 1872년2월27일에 파송 받고, 3월20일에 목사안수 받았다. 3월25일에는 스터와드(M.A. Steward) 양과 결혼하고, 8월23일 중국 지푸에 도착하였다. 로스목사는 지푸에서 한국인을 만났고, 토마스목사의 순교와 천주교인들의 박해 받는 소식을 듣고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였다. 로스목사는 그의 선교지를 만주지역으로 삼고, 영구(營口)를 중심으로 우장(牛庄), 봉황성(鳳凰城), 요양(遼陽), 봉천(奉天) 지역을 순회전도 하였다.
존 로스 목사 선교정책-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한국인 전도자들에 의해
존 로스목사의 선교정책(宣敎政策)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 나라의 가치관이나 신앙을 버릴 필요가 없고, 그 보다는 그 문화를 바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설립하도록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는 비 기독교 지역에 있는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활동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自國) 기독교인들의 생활(生活)과 전도(傳道活動)를 통해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스목사는 우선 한국인 한국어 선생을 만나길 원했고,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기를 원하였다. 또한 한국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한국의 문화(文化), 종교(宗敎), 풍습(風習)과 역사(歷史) 등을 알아야 한다고 믿고 한국인에 대한 접촉뿐 아니라 한국연구에도 힘썼다.
고려문(Corea Gate, 柵門)
로스목사는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 있고 많이 드나드는 고려문(高麗門)이 있음을 알고 선교여행 하였다. “고려문(高麗門, 柵門)은 한국과 중국을 잇는 관문으로 압록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의주(義州)에서 약 48km으로 이 문을 통해서만 중국에 드나들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세관(稅關)이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고려촌(高麗村)이 형성되어 있었다. 만주 봉황성(鳳凰城)에 있는 고려문(Corea Gate, 柵門)에는 1년에 4차례 장이 서고 있었다. 이 장이 서는 때는 한국 본토에서 많은 한인들이 몰려오므로 로스목사는 이때를 기회로 삼아 고려문을 방문한 것이다. 로스목사는 1873년 말부터 우장(牛莊)을 출발하여 봉천(奉天)을 거쳐 첫 고려문을 방문하고 “한인촌”(韓人村)을 발견하였으며, 고려문 방문기”(Visit to the Corean Gate)를 썼다. 1876년 4월 말부터 5월 초, 한 달 동안 제2차 고려문을 방문하여 애하(靉河)와 압록강 합류점(合流點) 접경지대까지 이르렀으며, 조선인들이 농사짓는 것을 보았고, 한 권으로 된 전도지와 성경을 출판토록 계획하였다. 즉 로스목사는 조선어 선생과 신약성서를 조선어로 번역하도록 도울 사람을 찾고 있었고 한국 땅인 의주(義州) 지역을 바라보며 복음이 전도되길 기도하였다.
이응찬을 한국어 선생으로 만나, “한인촌교회”설립 전도인 활동
바로 이때 한약장수인 이응찬(李應贊)을 만났다. 이응찬은 압록강을 건널 때 모든 물건을 잃어버렸다. 이로 인하여 이응찬은 로스목사의 한국어 선생이 되었다. 이응찬은 1876년 한국개신교로써는 첫 세례를 받았고 곧 이어서 의주 사람 백홍준, 이성하, 최성균, 김진기 등이 세례를 받았다. 이들도 곧 한국국내 전도인이 되었으며, 로스목사는 선교기지인 봉천(奉天)에서 한글성서 번역에 착수하였고, “최초의 한인교회“(最初 韓人敎會)를 세웠다.(현, 심양의 동관교회)
심양의 동관교회(1876, 로스목사 시무)
현, 심양의 동관교회(증축 1988년)
로스목사는 이응찬을 만난 경위를 감동에 차서 기록하였다. “중인계급(中人階級)에 속하는 사람 하나가 고려문(高麗門으)로 가기 위하여 배에 물건을 실고 거센 압록강을 건너다가 그만 갑자기 강한 서남풍(西南風)을 만나 서 배는 전복되었고, 물건은 물속으로 잠겨버렸다..., 물건 임자는 알거지가 되었다..., 비참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 한국어 선생을 구하는 나의 서기(書記)를 만나게 되었고, 곧 나의 선생(先生)이 될 것을 약속(約束)하였다....인구가 불과 1천5백만 명 밖에 되지 않고 비록 여자라 할지라도 며칠이면 해독할 수 있는 훌륭한 문자(文字)를 가지고 있는 한국(韓國)과 같은 나라는 성서(聖書)와 전도문서(傳道文書)의 보급(普及)이 가장 쉬운 나라이므로 한글성서의 역간(譯刊)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는 표음문자(表音文字)인 데다가 매우 단순하고 아름다워서 누구나 쉽게 또는 빨리 배울 수 있다.“(J. Ross:"The Christian Dawn in Korea",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N.S. Vol3, Nov.4, 1890. pp241-248. 김정현 p213-219) 한국인들이 외국인들과 성서번역에 참여한다는 소식은 퍼져나갔고, 구경꾼과 방문객들이 빈번하게 되었다. 아예 선교사집에서 매월 1주간씩 성경공부반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1880년에는 30여 명이 성경공부 반에 참여하여 교육받았고, 국내 문서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죤 로스역;누가복음(문광서원,1882)/예수셩교젼서(문광서원 1887)
로스 목사는 1881년 7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의 지원으로 “문광서원”을 설립하였고, 그해 10월 한국 최초의 기독교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을 출간했으며, 이듬해 첫 한글성경 “예수셩교 누가복음전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를 발간했다. 이를 시작으로 사도행전(1883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1884년), 에베소서(1885년)에 이어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 “예수셩교젼서”(1887년)도 발행했다. 1882년 11월에는 75명에게 서례를 주었으며, 1884년에는 한국인이 백여 명이나 세례 받았고, 세례 대기자도 6백여 명일 정도로 활기찬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로스목사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한 전도보다는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할 수 있도록 양육하였다. 또한 한국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소개하여 한국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끌게 하였으며, 한국 문화전통의 바탕 위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고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한국 기독교의 첫 선교사로 기록되어야 하며. 그 공로를 기억하여야 한다. 몇 가지를 지적하며 글을 마친다. 첫째는 존 로스의 선교 정책은 토착문화를 토대로 토착인에 의한 전도였다. 자립, 자전, 자치의 삼자 정책이며, 네비우스 보다 더 깊고 포괄적인 로스의 토착 선교정책이었다. 존 로스의 선교 정책은 사도 바울의 선교를 따랐다. 즉 사람이 많이 다니는 도시에 전도소를 개설하고, 순회전도하는 바울의 전도 방식을 실천하였다. 만주 선교 방법론(Mission Methods in Manchuria) 등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만주선교 방법론"으로 번역 출판 되었다.(순교자의 소리, 2019년)
John Ross: Mission Methods in Manchuria(1903)
로스 저서, "만주선교 방법론" 번역 출판(2019)과 "누가복음"(1882년 판)-(출판: 순교자의 소리, 2019, 2022)
당시 한국 내 정치, 사회 상황에서 외국 선교사 입국이 금지되던 상황에서 만주의 한인들을 만나고 성서를 한글로 번역 출발하여 전도인을 세워 국내로 보급하며, 곳곳에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둘째 성서번역을 위해 한글을 먼저 배우고, 한국역사와 문화, 한국인들의 습관과 풍습을 조사 연구하여 저서를 출판했다. "한국어 기초"(Corea Primer, 1877년), "한국역사, 한국인의 습관과 언어, 지형"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 with Description of Manners, Customs, Language, and Geography(1879){ 등 이러한 저서들과 "예수셩교문답", "예수셩교요령"(1881년) 등 문서를 발행하여 세계선교사들과 한국 선교사들에 교본이 되어, 한국 기독교의 기초를 놓았다.
한국어 교사 백홍준, 성서 번역인!
셋째 토착 한인 전도인 양성과 파송이다. 만주에서 성서번역 조력자들을 세례를 주었고, 이들이 자발적으로 전도인으로 한인촌 교회를 이루었다. 또한 국내에서 활동하여 서북지역과 서울지역 등에 자생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백홍준 전도인이 개척 설립한 "의주교회"(설립 1866년, 사진:1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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