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 가락초등학교는 부산시 강서구 죽림동에 위치하고있다.
1923년 10월11일 일제강점기때 가락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여 올해가100주년이라 오늘 개교10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다.
개교100주년을 맞이하여 동문 모두가 보람찬 미래를 향하여 긴역사와 전통에 걸맞는 장대한 발전을 구상했다면 좋았을 행사가
출산율 급감, 이농현상 등으로 학생수가 급감하여 몇년후에 폐교위기에 놓여있다하니 침통하기만 하다.
모교의 졸업생 누적수가 7000여명이며 우리가 재학할때만 해도 학년별 1개반은 약60명이 넘었다. 학년별 보통3개반으로 편성
되었으며 조회때 운동장은 학생들로 찼었고 등하교때는 오봉관 신작로길에 아이들로 넘쳤다.
우리42회만 해도 1967년 2월17일, 145명이 졸업하였는데, 지금 모교의 재학생은 모두 합쳐봐야 47명이며 올해는 입학생이 한명도 없다고한다.
모교는 제도쪽 신도시 엘코델타시티가 들어서면 새학교가 개설되면서 학적이 그리로 옮겨지고 학교名도 그대로 가져가서 학맥
은 이어진다고는 하나, 어릴적 나의 꿈이 묻어있는 낡은 교실과 운동장, 키가 훌쩍 커버린 은행나무와 오봉관 등교길은 추억속에 돌아서게되었다.
선후배가 어울려 진행하는 동창회 행사가 모교 교정에서 계속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칠순인 우리42회는 앞으로 단체로는 행사에 참석을 안하는 방향으로 묵시적인 여론이 돌아, 무심한 세월은 그렇게 흘러 버렸나 착찹한 심정에 모교의 교정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추억을 소환하다가 잡초로 뒤덮힌 오봉산에 올라 모교를 내려다 보면서 지난 시절을 상기시키며 행사사진을 남겨보았다.
오늘100주년행사진행과정을 보면서 느낀점은 준비를 많이 했네, 고생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 참여동문들중 후배 편국자
사무국장의 활약은 눈부셨고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이제 한발짝물러서서 모교동창회행사가 계속이어지기를 기대하며, 모교가 폐교되더라도 신설되는 학교에서 학맥을 이어 더욱 발전하고 전통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와 우리42회는 개교100주년행사가 뜻깊은 하루가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거금의 찬부금을 기탁한 42회친구 강복희사장, 신정식사장, 자랑스런 후배 배우송광호 등 여러동문에게 감사드린다.
입장식
휘호갈기고
40회 선배 프로 가수 배명희..
젊었을때 가수로 활동하던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개교초기 선생들 옷차림을 보니 선생은 일본인들이 틀림없고 학생들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인것같다.
개교시기가 1923년이면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무고한 조선사람들이 학살을 당하였던 그해였고,
1910년 일제는 조선을병탄한뒤 헌병정치로 조선사람들을 강압통치를 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문화정치를 명목으로 1920년 경부터 우리땅에 1면面1학교 제도를 구상하여 인구밀도에 따라 보통학교(소학교)를
개교시켰다. 일제의 의도는 우리 조선인들의 문맹 탈피가아니라, 소학교 교육을 통해서 식민지주민의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식민지와 본국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기위해 황국의식 주입시키는 전초기지로 활용하였으며
조선말이 아니라 일본말을 가르쳤다.
※ (인용 글)
조선총독부는 1912년 8월 13일 토지조사령을 공포합니다. 근대적 소유권과 토지제도의 확립이라는 미명 아래 한국의 경제적 기반을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8년 간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총독부는 많은 논밭과 임야를 차지하고, 국책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민간의 일본토지회사, 일본인 이주민들에게 무상이나 싼값으로 불하하였습니다. 동양척식회사의 김해농장이 회현리에 설치되었고, 무라이농장(村井農場 후에 하자마농장)이 진영과 창원일대에 만들어졌습니다. 김해의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높은 세율의 소작료에 시달리는 영세소작민으로 착취당하게 됩니다. 일본인들은 김해(1912년)·대저(1916년)·하동(대동, 1920년)·낙동강(1936년)의 수리조합을 조직해 제방을 쌓고 수문을 만드는 수리공사로 농토를 경영하였습니다. 김해인 노동력은 무상에 가깝게 착취되었습니다. 1914년에 김해금융조합을 시작으로 진영과 장유에 금융조합을 설립하여 김해의 금융권을 장악하고 합법적인 고리대금업도 하였고, 1915년 6월에 일본인 우지모토(氏本太市)는 녹산광산을 파기 시작하였고, 1926년 9월에 기하라(木原竹一)는 생림의 아연광산을 채굴하였습니다. 현재 김해지역에서 바위들이 흘러내린 산비탈은 일제가 광물자원을 수탈하던 흔적이라는 증언이 많습니다.
학생들 보소 ! 저때가 좋았다. 우리42회 졸업할시기 교사(校舍)는 저 건물이였고 입학해서 4학년까지는 일제가 지은 교사였다.
우리들 학교다닐때 운동회시즌
개교100주년 기념품들이고, 경품당첨으로 받은 금반지가 빛난다.
42회 많이들 늙어간다
전겸이 삼철이 병열이 상국이 재임이...
원제
모교가 폐교가 된다하니 침통해진다..
42회는 이렇게 단체로 모교 운동장을 다시 찾을 일이 없어졌다
석숙이 매희 ..참 좋은 친구들 건강하시요
봄철 모교 행사에 갈일이 없으니 사진 올릴 일도 없어졌다.
모교뒤 오봉산에 올라가 보았다
굵은 대나무 숲
이일구가 매실밭을 정리하고있다.
허물어지고 잡초에 묻힌 죽도왜성
낙동강
문수암
구태절(寺)
신기마을 앞들
봄이면 화려하고 눈부시게 꽃망울이 맺히던 벚꽃나무...
임진왜란때 일본병사들이 심었던 사쿠라나무 종자가 번져서 자란나무로 주위 고목이 된 벚꽃나무 몇그루는 흔적이 없다.
꽃이 피면 너무 화려했는데. 한그루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