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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정기산행에는 귀인들이 나타나 벤츠 차량으로 모시고 닭갈비를 쏜다는 예고가 있었음에도 정예 멤버 8명만 모였습니다. 한 명이라도 넘쳤다면 12인승을 8인승으로 개조한 벤츠 승합 차량의 승차 정원을 초과할 뻔했습니다. 동행하지 못한 멤버들께는 죄송하고도 미안하지만 그 덕분에 이번 산행 멤버들은 다시 누리기 어려운 호사스러운 초특급 호화 럭셔리 프리미엄 정킷 산행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날씨까지 도와줘 모든 게 만족스러웠습니다.
공덕역에서 오전 5시 52분 출발하는 5호선 열차를 타기 위해 7분 전 집을 나섭니다. 6호선 플랫폼을 지나 걷다 보니 우르르 청춘 남녀들이 내립니다. 아마도 이태원 클럽에서 밤새 놀다가 첫 열차를 타고 집에 가는 모양입니다. 속으로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라고 생각하며 추억에 잠기다가도, 제 자녀를 떠올리니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열차에 올라타 신문을 보다가 을지로4가에서 2호선으로 갈아탔습니다. 강변역에서 내리니 약속시간이 10분 남짓 남았습니다. 동서울버스터미널 편의점에 들러 수입맥주 500ml짜리 4캔을 1만 원에 샀습니다. 차가운 기운이 덜 가시게 하려고 읽고 난 신문지로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싸서 배낭에 넣었습니다.
뜨겁던 물건이 상온으로 변하는 것은 '식는다'고 표현하는데, 차갑던 물건이 상온으로 변하는 것은 왜 적당한 단어가 없을까요. '미지근해진다'는 말이 있지만 정확한 단어는 아니지요.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대부분 단어가 생성됐다고 해도 지금쯤은 '식는다'의 어의를 확장해 쓰거나 신조어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시간 맞춰 도착했다 싶은데 제가 탈 차가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연예인이 탈 법한 높은 지붕의 검은 벤츠가 한 대 보이기는 한데 설마 우리 차일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문 옆에서 알자지라 대장이 절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짓습니다. 나머지 멤버는 이미 탑승한 상태입니다. 뜬구름이 운전대를 잡았고 조수석에는 알 대장이 앉습니다. 그 뒤로는 피플러버 회장님, 컴불 형님, 그린란드 형님, 산바람이 차례로 앉았습니다. 저는 맨 뒷자리 노들강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리에 앉아서도 다들 믿기지 않는 표정입니다. 탑승객들이 비밀 대화를 나누시라고 뜬구름이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의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엽니다. 모든 게 신기합니다. 뜬구름이 다니는 회사에서 중국 바이어 태우려고 구입한 차량이랍니다. 뜬구름은 이번에 대표이사가 됐답니다. 차고지는 인천 송도라고 합니다. 매달 산행 때마다 이용하면 좋겠다고 너도나도 입을 모읍니다.
아무도 늦은 이가 없었는데 날씨가 좋은 탓인지 일찍부터 올림픽대로가 막힙니다. 제가 도로의 차량 행렬을 보고 "창피하지도 않나? 어떻게 허접한 차를 타고 나들이 나설 생각을 했지?"라며 혀를 끌끌 찹니다. 다들 우쭐한 기분으로 웃음을 터뜨립니다.
중부고속도로 갈림길을 지나니 도로가 시원하게 뚫립니다. 모두 아침식사 전이어서 시장했지만 휴게소에 들르면 어느 연예인이 탔는지 구경하려고 사람이 모여들까봐 내처 가기로 합니다. 8시가 넘으니 배가 고프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그러나 알 대장은 묵묵부답이고 뜬구름은 차를 몰아 목적지인 등선폭포 주차장까지 갑니다.
제가 내리자마자 "식당 문을 안 열었으면 어떡하려고 무작정 오냐? 중간에 식당이 몇 개 보이던데 들렀다가 오지"라며 핀잔을 줍니다. 알 대장도 주변에 식당이 안 보이니 걱정스러운 표정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게 탁월한 '신의 한 수'였습니다. 주차장에 등선집이라고 글씨가 새겨진 식당 승합차량이 보이기에 제가 차량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행히 아침식사를 준비해줄 수 있다고 합니다. 메뉴는 산채비빔밥에 김치찌개 하나랍니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입구에 들어서서 얼마 가지 않아 식당이 나타납니다. 몇 해 전 겨울에 제가 고교 동창들과 들렀던 집입니다. 젊은 주인 내외가 "방에는 아이가 잠을 자고 있다"며 야외에 마련된 자리로 안내합니다. 아침 시간이어서 쌀쌀합니다. 휴대용 가스버너를 식탁에 올려놓자 찌개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불을 쬐려고 스위치를 켭니다. 탁주조합 비공식 홍보대사인 그린란드 형의 제안으로 막걸리를 주문합니다. 등산을 앞두고 술판을 벌이기는 처음인 듯합니다. 비빔밥과 김치찌개가 나왔습니다. 아침 메뉴로 어울리지는 않지만 맛이 괜찮습니다. 막걸리를 더 주문해 4통이나 비웁니다.
저는 1978년 고3 때 친구들과 야외전축과 기타를 들고 이곳에 놀러왔다가 부천 소명여고 학생들을 만나 춤판을 벌였던 추억을 얘기합니다. 그때 함께 온 친구들이 모두 대입시험에 낙방했습니다. 그린란드 형도 비슷한 시기 대학생 때 놀러온 뒤 40년 만이라고 합니다. 삼악산이 초행길인 회원도 여럿 있습니다.
우리는 등선폭포 입구를 들머리로 삼고 삼악산장을 날머리로 삼기로 했습니다. 알 대장에게 차량은 어떻게 할 건지 물으니 "뜬구름이 가다가 다시 돌아와야죠. 아마 본인도 좋아할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아니면 택시를 불러서 타고 오는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제가 식당 주인에게 태워 달라고 얘기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남자 주인게게 부탁하니 흔쾌히 수락합니다. 컴불 형은 "그럼 나중에 점심을 여기서 또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한 표정으로 제게 나지막히 묻습니다. "아침 먹었으니 괜찮을 거예요"라고 제가 대답합니다.
등산로가 시작되지마자 협곡과 폭포가 나타납니다. 제1 등선폭포와 제2 등선폭포를 비롯해 주렴폭포, 백련폭포, 비룡폭포, 옥녀담 등이 줄이어 나타납니다. 전날과 전전날 비가 많이 내려 수량도 풍부합니다. 규모가 작을 뿐이지 금강산 만폭동이나 설악산 천불동을 방불케 합니다. 만폭동을 가봤냐구요? 기자들은 가보지 않고도 본 것처럼 기사를 쓸 수 있답니다.
계곡을 따라 한참 걸으니 흥국사와 산막이 나타나고 비탈길로 바뀝니다. 원숭이띠 60대 선배들이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으니 산바람이 "뭐 급한 일이 있다고 그렇게 빨리 가나? 1.3km밖에 안 남았는데"라며 투덜댑니다. 그린란드형과 컴불형에게 "남 선배 자꾸 부추기지 마요"라고 하니 피플러버 회장께서 발끈하며 "내 나이가 누가 부추긴다고 부추겨질 나이냐?"라고 호통을 칩니다. 산바람도 지지 않고 "딱 부추기기 좋은 나이지"라고 답합니다.
얼마 가지 않아 이정표가 다시 나타나자 이번에는 제가 "이정표 있는 데서는 잠시 쉬어주는 게 산꾼들의 예의"라고 한마디 합니다. 컴불 형이 못 이긴 채 "안 쉬면 애들한테 혼나겠다"고 말하자 모두 반가운 표정으로 짐을 내려놓고 다리쉼을 합니다. 숨을 돌린 뒤 다시 걷다가 이정표와 나무의자가 또 나타나자 컴불 형이 "이번엔 이정표에다 벤치까지 있는데 안 쉬면 큰일나겠다"고 말합니다. 쉬어가는 김에 60대와 50대가 각각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정하게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중간에 평원이 나타났다가 본격적인 된비알이 나옵니다. 숨이 차는지 피플러버 회장께서 걸음을 멈추고 "먼저들 앞에 가"라고 말합니다. 노들강이 회장을 지나치자 컴불 형이 "먼저 가란다고 진짜 가는 건가?"라며 눈치를 줍니다. 노들강이 흠칫 놀라 "그게 아니라 요 위에서 쉬려고요"라고 발명합니다. 회장께서 다시 발걸음을 내디디니 컴불 형이 "이제 이정표가 움직이시니 우리도 가자"라고 말합니다.
가파른 비탈이 계속되니 숨이 가쁘고 구슬땀이 흐릅니다. 그래도 입구에서 정상까지의 거리가 3.1km에 불과해 처지는 사람 없이 모두 비슷한 시간에 정상에 올랐습니다. 눈앞에 북한강 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춘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입니다. 북한강을 배경 삼아 모두 단독 사진을 찍고 '해발 654m 용화봉' 정상석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습니다.
제가 회원들 앞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아는 척하며 의암댐이며, 붕어섬이며, 중도와 위도 등을 설명합니다. 상중도에 레고랜드가 들어서려다가 선사 유적이 발견돼 중단된 이야기, 춘천시내 한가운데 솟은 봉의산이 삼태기를 닮아 큰 부자가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삼태기는 쓸어담고 나면 곧바로 비우는 도구여서 돈을 모으면 떠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지금은 한림대가 들어선 자리에 이제는 역곡으로 옮겨간 성심여대가 있었는데 서울 유학생이 많아 이들과 미팅하려고 서울 남학생이 금요일마다 경춘선을 타고 몰려왔다는 이야기 등을 들려줍니다.
아는 것 많은 회장께서 "춘천 옥광산으로 돈 많이 번 사람 있는데"라며 제 말을 반박합니다. "그 양반은 위장전입으로 주민등록을 옮겼대요"라고 짐짓 둘러댑니다. 붕어섬에는 태양광발전단지가 붕어 모양으로 조성돼 있습니다. 의암호에는 비가 내려 물이 그득하고 댐 수문 일부를 열어 방류하고 있는데도 녹조 현상이 심해 보입니다.
정상은 자리가 비좁아 하산하는 방향의 능선길 따라 조금 가다가 전망 데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용화봉보다 전망이 더 시원합니다. 제가 깔판을 깔고 맥주와 과자를 꺼냈고 노들강이 과일을 내놓습니다. 삽상한 바람 속에 멋진 경치를 보며 냉기가 덜 가신 맥주를 들이켜니 기분이 날아갈 듯합니다. 제가 태릉 아이스링크가 생기기 전에는 공지천에서 동계 전국체전 스피드스케이팅 경기가 열렸고, 춘천 유봉여고가 스피드스케이팅의 명문이었다는 등의 이야기 보따리를 더 풀어놓으니 모두 반신반의하면서도 재미나게 들어줍니다.
정상에서 의암댐까지는 1.8km. 하산길은 짧은 대신 올라오는 길보다 훨씬 가파릅니다. 대부분 칼바위 능선이어서 밧줄을 군데군데 설치했는데도 위험한 구간이 적지 않습니다. 바들바들 떨며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회장의 비명 소리가 고막을 찢습니다. 미끄러지며 바위에 팔과 다리가 심하게 부딪힌 모양입니다. 파스를 찾아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위험 구간을 모두 지난 뒤 고개마루에 쉬며 너도나도 회장 용태를 묻습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듯합니다. 다들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회장께서 "알아! 너는 왜 계속 비실비실 웃냐?"라고 핀잔을 줍니다. 제가 깐족거리는 말투로 "회장님에게 부딪친 바위는 괜찮을까요?"라고 걱정하자 회장께서는 "이게 정말!"하며 저를 때릴 듯한 기세입니다. 얼굴에 노기가 서려 있지 않으니 통증은 꽤 가신 모양입니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노들강에게도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라며 눈을 흘깁니다.
여기서부터는 바위 구간이 아니어서 편안하게 내려옵니다. 상원사에 들러 샘물을 마신 뒤 하산길을 재촉합니다. 저는 아침 먹었던 식당에 전화를 걸어 삼악산장 입구에서 등선폭포 입구 주차장까지 태워 달라고 부탁합니다. 삼악산장을 지나 의암호변으로 내려오니 식당 차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쁜 시간일 텐데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차에 올라탔습니다. 조금 더 내려와서 전화를 걸 걸 그랬습니다. 등선폭포 주차장 입구에 내려 식당 주인에게 고맙다고 하며 다음에 또 이용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벤츠 스프린터를 타고 상호네 닭갈비로 향합니다. 춘천 시내를 거쳐 한참을 갑니다. 도착해 보니 경치가 좋습니다. 알 대장이 가자고 한 이유가 있겠죠. 이 자리에선 노들강이 한턱 냅니다. 번철에 양배추 등 채소와 함께 닭고기를 볶는 방식이 아니라 뼈를 발라내고 양념을 바른 닭고기를 숯불에 굽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비싸죠. 제가 "암수의 조화와 음양의 이치를 따져 숯불에는 암탉이 제격"이라며 실없는 농담을 던집니다. 귀인1 뜬구름과 귀인2 노들강의 호의에 감사하며 기분좋게 술잔을 비웁니다.
이번에는 평양냉면 먹으러 갈 차례입니다. 컴불 형이 "막국수는 이 식당에서 먹으면 되지, 굳이 다른 데 찾아갈 거 있냐?라고 말했다가도 평양냉면이고 하니 흔쾌히 동의합니다. 알 대장이 "서울에서 일부러 먹으러 오는 집"이라고 자랑합니다. 도착해 보니 오후 3시였는데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이름값 하는 식당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수육과 빈대떡은 재료가 떨어져 안 된답니다.
이미 차 안에서도 한 차례 냉면에 관한 저마다의 지식과 경험을 앞다퉈 늘어놓았지만 냉면을 기다리며 2차 배틀을 펼칩니다. 우래옥, 을지면옥, 평래옥, 필동면옥, 을밀대, 봉피양, 유진식당 등 서울의 유명 냉면집에 관한 품평이 쏟아집니다. 그린란드형과 제가 평양 옥류관에서 먹었던 얘기를 해주니 다들 한 수 접어주며 부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조만간 또 먹을 날이 있겠죠.
선주후면의 예법에 따라 소주를 미리 한 잔씩 걸칩니다. 냉면이 나온 뒤 제가 옥류관 종업원에게 들었던 대로 "식초는 면 사리를 젓가락으로 들어서 면에 뿌리고 겨자는 육수에 풀라"고 가르쳐줍니다. 모두 귀담아 듣는 표정이 아닙니다. 어차피 섞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제 말에 신빙성이 없다고 느낀 탓일까요? 8천 원짜리 냉면치고는 훌륭하다는 게 중론이었습니다만 서울이 아니라 춘천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싼 가격이 아니란 의견도 있습니다.
이제 서울로 향할 시간입니다. 벤츠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제가 "남의 차 앞에서 찍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고 했더니 뜬구름이 자동차 열쇠를 손에 들고 포즈를 취합니다. 몸도 노곤하고, 배는 부르고, 취기는 적당히 오르고, 좌석은 편안하고, 딱 잠자기 좋습니다. 술도 못 마시고 오가는 길 모두 운전하는 뜬구름에게 미안합니다. 뜬구름은 송도까지 차를 갖다놓고 은평구 집으로 가야 합니다. 미안해서 자주 이용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오후 6시 조금 못 미쳐 강변역에 도착해 헤어졌습니다. 23~24일 공룡능선 가는 멤버들이 있어 서울에서의 뒤풀이는 생략하기로 했습니다. 땅거미가 지기도 전에 집으로 향하려니 어색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럴 때도 있어야죠.
벤츠 스프린터가 있어 몸이 호강하고, 날씨 좋고 산 경치 좋아 눈이 호강하고, 닭갈비와 냉면이 맛있어 입이 호강한 하루였습니다. 다른 멤버들은 저의 구수한 해설과 실없는 농담에 귀까지 호강했을 것으로 믿습니다(잘난 척하기는).
첫댓글 혁신하느라 바쁠텐데도 긴~산행기 쓰느라 고생하셨어.즐겁게 읽었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희용형, 재밌게 읽었습니다.혁신은 항상 필요하지요! 건필 건승하셔요
구수한 해설과 실있는 농담...산행의 재미를 더합니다. 바쁜 업무 중 짬짬이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솨. 그렇다고 자주 쓸 생각은 없습니다. 진짜로 제가 산행기 잘 쓰는 줄 착각할 정도로 분별력 없진 않거든요.
사진까지 곁들이니 보기도 좋고 읽는 재미도 한결 낫네. 수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