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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소 울타리 역할을 말없이 해 내고 있는 남천 나무 위를 긴 키를 자랑하며 서 있는 동백나무 꽃봉오리가 느릅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는 햇볕을 받아 부풀기 시작한다. 마음이 넓고 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포옹하며 사랑할 줄 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내 마누라가 그런 사람이었다.
사유의 시간을 가지기 위하여 영혜와 추억이 베인
성지곡 수원지에 가보기로 했다.
성지곡수원지(聖知谷水源池)는 대한민국 국가등록
문화재 제376호로 2008년 7월 3일 지정되었다
1909년에 건립된 이 상수도 수원지는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거류민단이 공동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인데
이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본격화되기 전, 일본이 대한제국 내에서 경제적 및 기술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수원지는 처음으로 부산지역에 산업용수를 공급
하여 지역의 경제와 산업의 발전을 이끈 인프라 였다 이와 같은 점에서, 이 시설의 역사와 변화는 부산 지역 뿐만 아니라 한국의 근대사와 정치경제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를 제공하고 있다.
4.19혁명진원지 표지석
계단을 오르니 뻐꾹기 소리가 다대포해수욕장행 열차가 도착한다고 알린다.
여유있게 승차하여 자리에 앉았다
서면역 플랫폼은 꽃게를 먹고 게다리를 사방에 던져 놓은 것 같아 9번 출구를 찾기 어려웠다. 3번 출구로 나오니 오른쪽은 진주저축은행, 우리저축은행 , Caffe pascucci 반대편은 kb 국민은행 신한투자증권으로 서면로 였다.
엘리베이터 타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가니 지하상가 분수대에 노인들이 쉬고 있다, 11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여 겨우 빠져나왔다.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 옆에 부산은행, 건널목건너 김창숙 뷰티크, 신한은행이 있는 새싹로였다.
건널목 건너다
KB GOLDEN & WISE 건물 자리에 옛날에 星座 당구장이 있었다. 뒤에는 영광도서 건물이 보인다.
Quick. Motorcycle 이 서류를 싣고 부전시장 방향으로
'나도 처, 자식 먹여살려야겠다'라고 바쁘게 달린다
이 오토바이 오른쪽에 천막을 치고 구두, 가방 등을 수선하는 사람은 바싹 늙었지만 50여 년 전 그때 그 사람인 것 같다.
10여 m 직진하여 왼쪽에 보이는 가야교회는 옛날에 부전 교회인데 ~
지금 1호선 동래역 근처에 보이는 부전교회가 이 부전교회인 모양이다.
이런 듯 어떠하리 저런 듯 어떠하리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오른편에 보이는 포장센터 건물이다.
이곳에 산수 다방이 영업할 때 김추자가 1970 년에 발표한 "님은 먼 곳에 ~" 를 DJ가 자주 틀어 주었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가 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지금 불러 보니 가사의 의미가 묘하다.
이러나저러나 '사랑이란 망설이지 말고 있을 때 사랑해야 된다'
라고 말하고 있다.
부전 시장으로 사라진 오토바이
검은 가방을 둘러메고 고개를 숙이고 뒤 짐까지
진 저 사람은 세상을 너무 심각하게 사는 게 아닐까.
새싹로
동해선 굴다리 방향
부전동 서면 교차로에서 출발하여 초읍동 어린이
대공원에서 끝나는 도로.(연장 2.9km, 왕복 차로 수 2~7차로, 주요 경유 서면교차로 ↔ 부산시민공원 ↔ 부암교차로 ↔)
이 도로는 어린이대공원에서 끝나는데 어린이는 나라의 새싹이라는 뜻에서 명칭이 정해졌다.
70 년대에 건널목 오른쪽에 연지행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근처에 과일점이 있었다. 오늘도 노점에 파는 과일의 종류도 많았지만 내가 사러 다녀 봐서 아는데 가격도 매우 사더라.
왼쪽 옛 성좌 당구장 위쪽으로 막걸리 파는 가계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고 그 위쪽에 華僑가 만드는.공갈빵 가계도 있었다.
분수대 앞쪽이 영광도서가 있은 헌 책방 건물이 철거되고 복개된 도로
(주) 영광도서
주차장 운영/서적,교재 판매/부동산(주거용건물) 임대 등 주차장 운영업체
부전천 복원사업은 서면 롯데백화점~광무교 750m와 영광도서~동해선 굴다리 550m구간에 복개된 도로 일부를 걷어내고 이를 공원화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하천이 흐르는 구간에 콘크리트 박스로 물길을 만들고, 박스 위쪽으로는 10m 폭의 실개천이 흐르도록 해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부전천 복원사업은 2016년 생태하천 복원사업으로 추진되며 ‘부산판 청계천 사업’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국비 확보가 무산되면서 2018년 사업이 전면 백지화 됐다. 무산됐던 부전천 복원사업은 2022년 연말 환경부의 지역맞춤형 통합하천사업 대상지로 선정되면서 불씨가 되살아났다.
부산시는 재추진 의사를 밝히며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부전천을 대도심 명품 하천으로 탈바꿈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동해고래와 충무김밥 사이 먹자골목 앞 복개도로
서면 성당
영광도서 앞 복개도로를 쭉 걷다 왼쪽 원룸 샛길로 오니 이 차선 도로 앞에
진 경찰서와 건물 숲에 가린 서면성당이 아담한 모양으로 놓여있다.
내 기억에 맴돌고 있은 성당 모습은 아니다.
옛날에도 이렇게 좁은 길이었던가. 내가 아는 길은 아니다. 두 갈래 길 중 가지 않은 길은 없다는 게 진실이구나. 아침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내가 50여 년 마음속에 담고 있는 여인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씩씩하게 나오길 기대했다.
새싹로 방향으로 가 본다.
새싹로 부산진 구청자리에 '경동 파크 타워'가 세워져 있다.
'이공 커피 ' 가게 뒤쪽에 송월타월공장이 있었고 그 앞에 오염된 물이 부전천을 흐르고 있었다.
6.25전쟁 이후 타월산업은 순수한 국내자본과 기술로 재건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이나 발로 작동하는 구식 목직기가 생산설비의 대부분을 차지해 산업이라기보다는 영세 가내수공업 수준에 머물렀다.
또 당시에는 타월이라는 개념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아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물을 흡수하는 양이 타월에 비해 떨어지는 소창이나 광목을 주로 사용했다.
이후 폐기된 면직기를 타월직기로 개조, 동력화 직기로 영세한 기업들에게 점차 일반화되면서 타월산업은 하나의 산업분야로 발전한다.
국내 타월산업을 대표하는 송월타월의 역사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송월타월 창업주 박동수 회장은 경북 청송군 출신으로 동생 박찬수와 함께 부산에 정착, 1945년 적산가옥으로 불하받은 부산 동구 범천동 자택에서 양말 염색공장을 차린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양말을 표백해 되파는 일을 하며 사업가로서의 첫 발을 뗀 박동수 회장은 이때 미군부대를 통해 처음 타월을 접하게 된다.
루프(고리)가 있는 원단의 부드러운 촉감과 탁월한 흡수력에 놀란 박동수 회장은 곧바로 타월 제조에 관심을 갖는다.
마침 친척 중 타월 기술자가 있어 1949년 10월 목직기 5대와 송월타월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에서 본격적으로 타월 제조에 뛰어든다.
경제 성장과 더불어 국민생활의 안정과 향상으로 회사 설립, 공장 기공, 체육대회 등의 각종 행사가 활발해지면서 값이 저렴하고 실용적인 타월이 기념상품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시설의 노후와 낮은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수요의 팽창으로 타월산업이 안정적인 성장을 이뤄내면서 1964년 당시 33개에 불과했던 타월업체 수는 1965년에는 61개사로 늘어났다.
생산시설도 타월역직기 230대, 수족기 189대에서 타월역직기 2천대로 10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러면서 8시간 작업기준의 연간 생산능력도 562톤에서 4644톤으로 1년 사이 7배 이상의 신장세를 보였다.
당시 국내를 대표하는 타월업체로는 서울에 ‘한성타월공업사’ ‘동아타월공업사’ ‘성림직물공업사’ 부산에 ‘송월타월공업사’ ‘부산타월공업사’ 등이 일본, 싱가포르, 동남아시아 등에 수출할 정도의 생산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송월타월은 해외 유명제품과 견줄 정도의 다양한 디자인과 독보적인 기술력을 확보해 아름다운 색상과 부드러운 감촉이 뛰어난 송월타월의 제품은 유사품까지 범람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송월타월은 1961년 서면공장에 이어 1966년 부산 동래구 사직동에 대규모 공장을 설립한다. 1966년 수출품 생산지정업체로 지정됐으며, 1975년 주식회사로 법인을 설립한 후 1979년 ㈜극동타월(사상공장)을 인수, 흡수합병하며 생산시설을 확대해 나갔다.
이후 직원 수만 1천명이 넘는 국내 최대 타월업체로 성장한 송월타월은 1986년 전 공정에 걸쳐 자동화시스템을 구축하고 100% 자체시설로 생산, 품질관리에 있어서도 세계 어느 업체보다 더 우수한 면모를 갖춰나갔다.
또 해외에 기술진을 파견하여 신속하게 외국기술을 도입하는 등 신제품 개발에 주력했으며, 품질향상을 위해 최고급 면사만을 사용하고 우수한 연구실험실과 철저한 품질검사로 미국, 영국, 독일, 캐나다, 스웨덴, 일본 등 해외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타월업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송월(松月)’이라는 이름은 별다른 광고 없이도 기념품을 찾는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타월의 대명사가 되었다.
문화로 끝 지점에 (푸른 지점에서 물이 솟고 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경동파크타워'이다.
대국종합 주방건물이 부전독서실 자리에 새로 지어졌다.
앞 도로는 부전시장 가는 도로
독서실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햑생들은 가난했기에 공부방을 둘 여건이 안되었다. 학교도서관이 22: 00까지 문을 열고 있어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 도서관으로도 충분히 예, 복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9~1972년에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대입예비고사와 대학에서 주관하는 대학별 본고사를 병행했다.
예비고사에 합격한 학생만이 대학별 본고사에 응시할 수 있었다. 전 과목에서 출제되는 예비고사는 실업계 학생에게는 불리해 통과 못하는 학생도 나왔다.
대학에서 실시하는 본고사는 국어와 영어, 수학 위주의 매우 수준 높은 문제가 출제된 탓에 과열 과외 바람을 불러오면서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학생들은 밤을 새워가며 공부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독서실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숙식하는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나도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부전 독서실에서 한동네에서 살았고 고등학교를 재수하는 여학생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동해선 굴다리 밑 느티나무 그늘에는 뽑기 아줌마가
여러 모형의 틀에서 과자를. 찍어 내고 있었다.
새싹로와 동해선 굴다리(복원 끝 지점) 60 년대에 굴다리에는 찐빵, 삶은 감자, 옥수수 등을 파는 할매 및 달비 아줌마가 앉아 있었다.
굴다리 끝나는 지점, 동해선 철로 아래에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있는 한 칸짜리 철문을 달고 있는 집 앞에 초라한 할매가 앉아 있다.
"여보쇼! 작대기 하나 가지고 다니지요"라고 한다.
할매 얼굴을 보니 모습은 곱상하고 여리나 향기는 세파를 슬기롭게 겪은 향기라 집 앞 계단에 주저앉았다.
"할매 작대기를 들고 다니는 게 힘들고 귀찮아 그냥 이렇게 다녀요"
"어디에 갑니까"
이 할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어려움과 기쁨을 겪었는지,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 내가 어릴 때 이 근처에 살았고, 성지국민학교도 졸업해서 ' 인생 마감할 거리를 찾을까' 해서 이곳이 학교 다닐 때 정문가는 길이라 와 봤는데 ~나이는 70이 넘었습니다" 라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 했다.
" 나는 52 년 생이고 초등학교를 울산초등학교를 다녔고
40여 년 전 이곳으로 왔습니다"
" 40여 전이면 저 위에 부전천을 지나는 다리가 있었고 다리 옆에는 장미클럽이 있었던 것을 알겠네요"
"그건 잘 모르겠고 20 살 때쯤인가 그곳을 가 봤는데 골목길에는 화장을 짙게 한 아가씨가 줄지어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무어라 하며 웃고 있어 무서워서 죽을 뿐 했어요"
" 그곳이 삼각지인데요"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개인사를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할매도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이나 선택에 대해 부끄럽거나 후회하는 감정을 느껴서 그런지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 성지국민학교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가께요"
" 정문은 저어 쪽 모퉁이 돌아 새로 만들었어요"
" 택시 타고 갈래요"
할매는 일어서 나와 손으로 가리키며 ' 멀리 보이도 저기서 여기까지 온 만치
가면 되는데 택시 안 타도 되요'
옛날 성지국민학교 가는 길 입구
시민 공인중개사 자리는 만화방, 그 밑에 우리 문방구가 있었다.
만화방에서 오뎅도 사 먹고, 초등 5학년이 뒷방에서 화투치기도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다. 우리문방구 아저씨 딸이 성지국민학교 동기인데 공부도 잘 했고 얼굴도 예뻤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딸을 혹시나 비구니로 출가 시키지 않았는지 의심이 될 만큼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여름에는 아이스케키 통을 들쳐메고 아이스케키를 파는 내 또래의 아이들도 많았다 . .
부전독서실 뒤 동네와 동해선 철로 사이 부전시장 가는 길
(집들이 철거되고 편백나무가 심겨있다)
펜스 뒤쪽에서는 부산-마산선 철로 공사 중이다
부산진중학교 정문
이곳은 성지국민학교 후문이었는데
초등학교 시절 똘마니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초저녁이면 어두워졌다.
하늘빛폭포가 하야리야 부대 위병소 자리로 짐작된다.
중앙 화단이 하야리아 부대 담이고 그 앞이 옛도로이고
부대 안쪽으로 차도를 넓혀 시민로가 된 것같다.
성지초등학교 정문
부대 정문 옆 동네 3~4개 집이 남아 있음
참으로 3원색의 아름다움이다. 하야리아 담 주위의
수 많은 집들 중 유일하게 보존된 집터다.(내가 살았던 동네다)
커피집 옆 골목에는 톰이 살고 있었고, 뚜레쥬르 자리에는 연탄을 팔던 할배가 계셨다. 그 할배는 붙들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쳐주었지. 봄봄 돈가스 자리는 엄마가 옷을 수선하시던 판잣집이었고, 그곳에 아홉 식구가 함께 살았다.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합격 소식을 만화방에서 들었고, 고등학교는
'소 발에 쥐 잡기'로합격하게 되었다.
부전천에서 돼지가 떠내려가는 모습도 보며 나는 소중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위로는 만화방이 있었고 그 위로 새싹로 92번 길에는 첫 사랑의 집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철거 대상이 되었다. 앞에 있던 부전천은 이제 복개되어
버렸고, 복원될 가능성도 없다. 오히려 이렇게 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힘든
과거는 그곳에 묻혀, 꿈속에서도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근처 오른쪽에 있은 공동우물은 흔적도 못 찾았다.
우리 집에서 부대 담따라 은희 집 가는 골목길(새싹로 92번 길)
새싹로 92 번 길 끝지점 노거수
노거수 아래 향나무
성지다방 자리에 노래연습장
이 다방에서 대지다방에서 만났던 영혜의 초등학교 동기
방ㅇㅇ을 다시 만났다.
매표소가 사라져 시원 섭섭하다
상무저수지
하부저수지
이 저수지를 돌며 나와 영혜는 서로를 알아 가게 되었다.
박재혁(朴載赫) 의사의 항일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동상.
부산의 의열단(義烈團) 단원으로 1920년 부산경찰서 서장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사살한 뒤 체포되어 순국한 박재혁 의사의 항일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98년 5월 12일 부산광역시에서 건립하였다.
박재혁 동상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 안 수변 공원에 위치한다.
박재혁 의사가 횃불을 들고 조국 독립을 외치는 군상 위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다. 높이는 3.4m이다. 좌대 정면에 약력을 기록하였고, 뒷면에는 건립 취지문을 새겼다. 왼쪽 좌대에는 헌시를 바쳤는데, 다음과 같다.
‘하느님이 백두에 내려 삼천리를 일구셨네/ 흰옷 즐겨 입던 의사/ 이 땅을 지켜 왔다/ 이제사 우리도 알리/ 임을 닮아 살리라’
부산경찰서 폭탄 사건은 한국인에게는 자긍심을, 일본에는 충격을 가한 쾌거이다. 그 주역인 박재혁을 기리는 일은 부산 항일 운동의 역사를 지역 대중에게 알리는 데 기여한다 하겠다.
부산진 17번 버스로 초읍고개를 넘었다.
첫댓글 글도,
사진도,
생생하게 잘 그렸소. 그 길 따라 눈으로 걸어 본다오.
눈 감아도 훤한 그 길을~~~
情緖를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니 참으로 반갑다. 오늘은 금정 여고 갔다 왔다.
병환아! 하나 물어보자
그 좋아하던 낚시에서 취미를 등산으로 바꾸고 또 야생화 박사가 될 수 있는 지혜를 좀 빌리자.
나도 다리가 제 기능을 못 하게 되면 계곡 낚시나
하면서 지낼까 싶다.
내 작은 사위가 계곡 낚시가 취미 거던~
계곡낚시는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으니 가두리 민물낚시가 좋을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