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에 화분만 한 꽃밭 하나쯤 가꾸고 싶다
눈 오는 날 폐역에서 / 문보근
행운이란 거 있다면
정말 이 세상에 행운이란 거 있다면
그 행운 내게도 온다면
사랑하고 싶은 사람
눈 오는 날 폐역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생애 마지막 사랑을 불태우기엔
눈 오는 날 폐역만 한 곳 없다
눈 오는 날 만나면
처음 만났어도 어느새 손잡고 눈 속을
걷고 있을 것만 같고
헤어질 일 생겨도
떠날 기차 없는 폐역이
막아 줄 것 같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뭇잎처럼 함께 붉어지다가
낙엽으로 홀로 되는 것
문 닫은 폐역이
내리는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철로를 오래 바라보는 것은
떠난 기차가 그리워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
마지막 기차에 떠나보내고
못 견디게 그리워서
지금도 폐역을 서성이는 남자,
그 남자가 보고싶은 사람
그 사람 돌아와
눈 오는 날 폐역에서 만나
나목에 눈꽃처럼
서녘에 노을처럼
두 사람 황혼이 꽃 피었으면, 하고
폐역은 기다리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기차가 쉼없이 드나들다가
끝내 폐역 되는 것
그 폐역에 눈 오고 하얗게 쌓이는 것은
가도 가도 추운 이 세상
시린 사랑 하나쯤도 없이야
어이 살 수 있으랴
나 지금
마지막 잎새처럼
황혼에 매달려 간당거리지만
꽃 진 자리에 새봄 오듯
새 인생이 내게도 온다면
내 황혼에 화분 같은 꽃밭 하나 쯤이야
가꿀 수 없으랴
태어나면
꼭 가야 할 인생길
그 인생길에 꽃밭을 만든다면
황혼길, 그쯤이면 좋겠다
인생이 아름다워질래야
황혼을 꽃밭으로 만드는 수 밖에 없다
황혼에 꽃밭을 가꾸는 사람을 보면
확 달려가 안기고 싶고
화분이 없어도
꽃씨를 심고 싶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외치며
황혼길을 걷는 사람의 인생 끄트머리가
얼마나 산뜻한가
사랑해서 만난 사람,
아름다워서 꽃병 같은 사람,
나도 야 꽃밭 만들어
그 사람과 함께 꽃길 걸으면
그때 그 고백 생각나
내 두 볼 발그레해지고 그 사람
나팔꽃처럼 웃겠다
인생살이란
구름에 집 짓는 일
그래도
내 인생 끄트머리에서
화분만 한 꽃밭 하나 가꾼다는 것이
어찌 이런 행운인가
그 행운 내게도 와
눈 오는 날 폐역에서 만난 사람
그 사람과 함께
나, 길게 길게 춤추리
출처: 좋은 글과 좋은 음악이 있는 곳 원문보기 글쓴이: 허리케인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