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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항산 김승석
▣ 원효의 일심(一心, One Mind)
신라의 고승 원효는 논서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에서 일심이 만물의 주추主樞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일심이란 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본각本覺의 진여심과 불각不覺의 생멸심이 다함께 갖춰져 있습니다.
윤회의 근본 종자식인 아뢰야식은 업으로부터 발생한 모든 잡염법雜染法을 종자로 보존하고 있다가 마음이 진여의 상태에 머물지 못하고 근본무명(眞妄 화합식인 아뢰야식의 妄을 뜻함)을 연緣으로 하여 순차로 무명업상無明業相을, 자기 자신을 보고자하는 능견상能見相을, 인식과 존재의 주主·객客으로 2원화 하여 경계상境界相을 형성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의 미세한 상[細相]은 여섯 가지의 거친 상[六麤]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 경계상이 자아의식인 제7 말나식을 형성하여 나와 대상을 완전히 구분하는 지상智相을 일으키고 이 상에 의지하여 모든 대상을 관찰, 비교, 분석, 판단, 추리하는 제6 의식이 형성되고, 의식이 상속, 간택과 취착, 사량 분별의 과정을 거치면서 선 또는 불선의 업을 쌓고 전前 오식의 감관을 통해 일체의 고苦를 받아 윤회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과정을 염법훈습染法熏習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각 속에 원래 내재되어 있는 오묘한 힘에 의해 윤회를 싫어하고 진여심을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 이장의(二障義, 번뇌장·소지장)를 멸진하고 점차 본원의 청정심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면 멸상滅相, 이상異相, 주상住相, 생상生相이 차례로 없어지고 마침내 원래의 본각 진여에 이르러 진리를 깨닫고 부처로 된다고 합니다. 아뢰야식 속의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여 원래의 청정 본심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정법훈습正法熏習이라고 합니다.
일심에는 당체인 법法과 짝을 이루는 외연으로서의 본각과 불각의 두 가지 뜻[義]이 내포되어 있는데, 서로 훈습熏習하여 때로는 오염된 법을 만들어 내고 때로는 청정한 법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 맺음말
‘일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다.’라는 뜻을 지닌 ‘一切唯心造’ 다섯 글자는 우리 불자들이 종성鐘聲을 할 때나 천도재를 지낼 때 꼭 합송하는 『화엄경』의 사구게四句偈(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의 네 번째 절구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들고, 유정중생들이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화엄경』에서는 마음의 공능을 화가에 비유하여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라고 표현했습니다.
경전 중의 고전古典인 『법구경』(게송 33∼37)에 실려 있는 마음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흔들리고 변덕스러운 마음이므로 지키기 어렵고 다스리기 어렵다거나, 물에서 잡혀 땅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마음은 펄떡거린다거나, 마음은 매우 보기 어렵고 아주 미묘하다거나, 좋아하는 곳에는 어디에든 내려앉는다거나, 멀리 가고 홀로 다니고 육신도 없고 동굴(심장)에 사는 마음’이라는 여러 가지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하나의 모음」(A1:5:9∼10)에는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청정하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객으로 온 오염원에 의해 오염되었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그 마음은 바왕가의 마음(존재지속심)을 뜻합니다. 그리고 오염원(upakkilesa)이란 의문인식과정의 하나인 속행의 순간에 탐하고 성내고 미혹한 고유성질을 가진 탐욕 등과 함께한 마음을 뜻하며, 본디 천성이 깨끗한 바왕가의 마음이 객으로 온 오염원에 의해 더러워졌다는 말입니다. 이 가르침은 대승경전 또는 그 주석서에서 객진번뇌客塵煩惱로 번역되어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어서 객진번뇌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속행의 순간에 욕망이 없고 성내지 않고 미혹하지 않은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의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지혜와 함께한 유익한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하나의 모음」(A1:5:9∼10)에서 말하는 바왕가의 마음(bhavaňga-citta)과 아뢰야식은 염법染法 훈습과정의 측면 또는 잠재의식이란 측면에서 유사한 점이 있기는 하나 크게 다르다고 보아야 합니다.
유식불교에서는 중생의 마음을 여덟 종류로 분석합니다.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을 아울러 전 오식前五識이라 부르고, 의식을 제6식, 말나식을 제7식, 아뢰야식을 제8식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전 오식과 의식은 초기불교에서 여섯 감관 중에서 생기는 알음알이[識]으로 정착되어 있으나, 무지와 번뇌를 일으키는 말나식, 중생의 모든 업을 빠짐없이 저장하는 아뢰야식은 상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조건을 떠나서는 어떤 식識도 생겨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하면 식은 조건에 의지하여 생기는 연이생緣已生이며 식은 모든 정신적 활동의 배후에 있는 행위의 주체가 아님을 천명하셨습니다.
연기법에서 보면 식은 강물의 흐름에 비유할 수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순환을 줄곧 같은 상태로 부서지지 않고 지속시키는 상주불변의 동일체가 아니라 생겨났다가 새로운 식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없어집니다. 이와 같이 식의 상속, 흐름은 존재가 멸할 때까지, 아라한의 해탈이 있기까지 계속됩니다. 따라서 존재 그 자체도 어떻게 보면 식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식이 없다면 어떤 ‘유(有, 五蘊)’도 이 감각의 세계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해탈·열반은 존재의 심재인 식의 소멸이라는 점에서 진여심을 ‘불생불멸[空]’이라고 보는 <대승기신론소>의 입장은 경청할만한 합니다. 무명이 아뢰야식을 있게 하는 조건이라고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입춘 절기가 다가오면 서북풍을 타고 고농도 미세먼지가 한반도를 덮치기 시작하면 호흡기 질환으로 인해 병원에서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 미세먼지를 때라고 말하지만, 불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를 정신적 오염원(때)이라고 합니다. 미세먼지는 이제 지구 전체를 오염시키고 인간의 몸에 병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즉 지구를 입원시킬 만큼 큰 병원이 있습니까? 공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인식과 함께한 마음[識]은 무량하여 우리 인간의 심통心痛을 담을 수 있습니다. 재가자의 삶에서 마음이 오염되면 정신적 고통이 뒤따릅니다. 예를 들면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득불고求得不苦의 괴로움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심통이 생기면 어떤 이들은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중독 또는 도박 등으로 해소하거나 정신과 병의원을 찾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들은 종교에 의지하거나 명상을 통해 마음 치유의 길을 찾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병을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욕계의 존재입니다. 마음은 끝없이 방황하고 시공時空의 제약 없이 홀로 움직이며 물질이 아니면서도 물질을 토대로 가집니다. 그 토대라 함은 다섯 감성의 물질인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 그리고 알음알이(意, mano)의 토대인 심장의 물질을 말합니다.
욕망의 물결[識]은 여섯 감각기관을 향해 흐르고 욕망의 넝쿨은 육근六根을 통해 나타나 육경六境에 의해 자라납니다. 욕망의 넝쿨이 이같이 자라나는 것을 본 현자는 넝쿨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리기 위해 수행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12처(육근·육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세상, 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나아가 지각의 대상들이 ‘내 것’, ‘나’ 그리고 ‘자아’라는 틀에서 인식하거나, 갈애나 자만, 유신견을 만드는 방식으로 인식하면 그 대상은 마음에 머물며 ‘자기 동일시(Identification)’가 일어나고, 그 반면 탐·진·치로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지 않게 되면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안 것에 묶이거나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화두에서 그 하나는 바로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불법은 심법이며,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하는 것은 마치 토끼 뿔을 찾음과 같습니다. 마음은 유위법으로 찰나적 존재입니다. 찰나적으로 생멸하며 흘러가는 그 마음, 의식의 세계로부터 해탈하기 위한 다이아몬드마저 절단할 수 있을 정도의 지혜(반야)바라밀은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요?
그 해답이 경전에 있습니다. 「여섯 겹의 청정의 경」(M112)에서 부처님은 “본 것을 본 대로 말하고, 들은 것을 들은 대로 말하고, 감각된 것을 감각되어진 대로 말하고, 인지한 것을 인지된 대로 말하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머무는 바 없는 무주에 의해서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 以生其心).”는 『금강경』의 가르침도 문자만 다를 뿐, 같은 뜻일 것입니다.
병들지 않는(오염되지 않는) 청정한 마음이야말로 진정 자신의 의지 처이고 안식처입니다. 팔정도는 계행이라는 여울을 가진 호수와 같습니다. 지혜의 달인들은 거기서 목욕하여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피안으로 건너갑니다.
이 마음이 피안으로 가는 반야용선을 승선하려면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할까요? 대승불교에서는 아공我空·법공法空의 깨달음을 통해 일체의 번뇌와 그로 인한 족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필자는 그 근거를 『디가 니까야(장부)』 「대반열반경」(D16)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제4선에 입정하셨다가 출정하신 뒤 선禪의 구성요소를 반조하신 뒤에 무기(無記, abyāata)요, 괴로움의 진리[고성제]인 바왕가의 마음으로 반열반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거칠게 볼 때는 부처님을 위시한 모든 깨달은 분들은 삼매에 드셔서 반열반하시거나 거기서 출정하셔서 반열반 하신 것 같으나 『아비담마』의 안목에서 자세히 관찰하면 이처럼 반드시 바왕가(존재지속심)의 마음상태에서, 그것도 괴로움의 진리를 통해서 반열반 하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