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악한 왜장의 휘하 장졸들일수록 귀순·투항자가 많았다.
즉 1597년(선조 30년) 조선은 항복한 왜인 세이소(世伊所)와 마다사지(馬多時之)를 다시 적진에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휘하 군관을 5명이나 귀순시켰다.
왜장 가운데는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포악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선조실록》을 보면 그 평가가 맞는 듯하다.
『사역이 너무 과중하고 장수의 명령이 너무도 혹독하여 그 노고를 견디지 못하고 몸을 빼어 도망쳐 왔습니다.
우리(5명) 외에도 귀순하려는 자가 많습니다.
계속 유인하면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형세는 자연히 고단해질 것입니다.
요즘 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사졸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군졸이 하루에 100명에 이릅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1596년 7월 이순신 진영에 왜인이 5명 항복했는데, 투항이유가 ‘장수가 너무 포악했고, 그 역도 과중했기 때문(將倭性惡 役且煩重)”이라 했다.』
항복한 왜인들을 후대한 조선 조정의 ‘항왜 정책’도 왜인들의 항복을 가속화시켰다.
조선 조정은 투항하는 왜적에게 첨지(정3품 무관), 동지(삼군부의 종2품) 등의 고위관직을 내렸다.
처음엔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왜병들이란 교활하여 믿을 수 없는 자들이며, 그들을 먹일 식량 또한 여의치 않다”는 의견들도 많았다.
그러나 경상우병사 김응서 등은 매우 긍정적으로 항왜를 바라보았고, 무엇보다 선조 임금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선조는 1595년(선조 28년) 승정원에 “왜병의 항복을 적극 유치하라”면서 “그들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줘라”는 명을 내린다.
『항왜를 유인하는 일은 손해될 게 없다. 다방면으로 환대하고 상을 주어 투항을 유도하라.
그 중에 검술을 할 줄 알거나 병기를 잘 만들거나 하는 자를 꾀어내면 파격적인 상을 내려야 한다고 비변사에 일러라.』
심지어 선조는 항왜 유치를 반대한 신료들에게 『자네들은 투항한 왜병들을 의심하고 그들을 대접해준다고 불평해왔다.
원래 과인이 항왜들을 많이 유치하려 했지만 자네들 때문에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가. 지금 항왜들 만이 충성을 제대로 바치고 있다.
먼저 성 위로 올라가 죽을힘을 다해 적병을 죽이고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운다.
이들에게는 모두 당상관(정3품 이상)의 직책을 내리고, 은(銀)을 상급으로 하사하라.』
그렇다면 선조의 말처럼 ‘제 몸 돌보지 않고 싸운 항왜들’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인물은 실록(선조실록)에도 등장하는 바로 여여문(呂汝文)일 것이다.
사실 여여문이 어떤 경로로 항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1595년(선조 28년) 6월19일 《선조실록》을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인다.
『과인이 항왜(降倭:항복한 왜인) 여여문을 각별히 후대하라고 전날에 전교하였는데 실행하는지 모르겠다.
요사이 듣건대, 이 자가 병이 났다가 차도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보통 왜인이 아니다.
대우를 후하게 하지 않아선 안 된다.』
훈련도감은 선조의 특명에 따라 “여여문은 집중치료를 통해 회복됐지만 주상의 하교대로 특별히 더 후대하겠다”고 보고했다.
그저 왜적 가운데 항복한 자일뿐인데, 선조임금이 나서서 “후대하라”는 특명을 내린 것도 모자라 “그 자의 병에 차도가 있는지 알아보라”고까지 했을까.
훈련도감은 왜 고분고분 선조의 명을 받들어 여여문의 건강상태까지 다시 체크했을까.
여여문이 조선에 매우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슨 역할이었을까.
《선조실록》에 여여문의 임무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즉 훈련도감이 이른바 아동대(兒童隊)를 선발하여 검술을 익히게 하고 사수를 양성하게 하는데, 그 책임자를 여여문에게 맡겼다.
『(여여문이 훈련시킨) 아동대 인원들을 어제 모아놓고 시험을 치렀는데, 50여명 중 합격자가 19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음식을 상급으로 주었습니다. 여여문에게 아동대를 전적으로 맡겨….』
이뿐이 아니었다.
조선은 여여문으로부터 일본군의 진법과 전술을 전수받았다.
이것은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울 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여여문이 일러준 왜군의 전법은 매우 상세했다.
『왜군은 깃대를 진 군사는 양쪽으로 에워싸고 나아가 좌우의 복병과 함께 적의 후미를 포위합니다.
싸우면서 흩어질 때 많은 복병을 좌우에 배치하고, 조총과 창검으로 각각 하나의 부대를 삼아 숲속에 흩어져 매복하기를 마치 새와 짐승이 은복하듯 합니다.』 《선조실록》1596년 2월17일
첫댓글 좋은 글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