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노루
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 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청록집>(1946. 6.) -
해설
[개관정리]
◆ 성격 : 관조적, 묘사적, 서경적, 낭만적, 시각적, 정지적
◆ 표현
* 의미를 배제한 채 이미지들만 제시함.
* 대상과 화자 사이의 거리 유지(원경) → 감정과 관념의 개입에 대한 절제
* 간결성(체언 종지법, 짧은 시행 배열) → 동양화에 나타나는 여백의 미와 상통함.
* 율격(1·2연의 3음보, 3연의 변조된 3음보, 4 · 5연의 2음보)
* 자음(ㄴ)의 두드러진 사용 → 아늑하고 정밀한 시적 분위기를 자아냄.
* 시선의 이동(원→근)에 의한 시상 전개 방식
* 정중동의 심상(2, 3, 5연)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청운사(靑雲寺), 자하산(紫霞山)
→ 자의적(字義的)으로 보면, '푸른 구름의 절', '보랏빛 무지개의 산'이라는 뜻이다.
신비적 느낌을 자아내고, 구름과 무지개라는 대상 또한 환상적 느낌을 풍긴다.
따라서, 이 곳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속세와는 구별된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가공의 공간임을 알 수 있다. (=탈속의 세계)
* 낡은 기와집 → 고풍스러움과 신비감, 정밀감(고요하고 편안한 느낌)이 느껴지는 대상.
* 봄눈 녹으면, 속잎 피어나는 → 시간적 배경을 알려주는 시어들.
* 열두 굽이 → 깊은 산 속을 가리키는 말
* 청노루 → 평화롭고 이상적 공간에 잘 어울리는 순진무구의 대상
시적 화자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음(맑은 눈으로 꿈꾸는 주체들임)
* 도는 / 구름
→ 극도로 압축된 형식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감정을 추스르고 화자의 내면적 감동을
응결해줌으로써 감동의 지속적인 효과를 얻어냄.
◆ 제재 : 청노루
◆ 이 시에서의 '자연'
→ 실제의 자연이라기보다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공의 자연으로, 낭만적이고
환상적이고 동양적인 신비의 세계로 그려내고 있다. 절대의 순수, 절대의 고요,
절대의 평화, 절대의 화해로움이 있는 세계임.
◆ 주제 : 절대 순수의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 = 이상적인 정신적 고향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청운사(공간적 배경)
◆ 2연 : 자하산(공간적 배경)
◆ 3연 : 속잎 피어남(시간적 배경)
◆ 4연 : 청노루(대상 동물)
◆ 5연 : 눈매에 감도는 구름(대상 동물)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김흥규-
박목월의 초기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대표작으로서, 현실과 단절된 이상적 세계의 그윽한 평화와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박목월의 초기시는 간결한 언어와 민요적 리듬 속에 이상화된 전원 세계를 그린 것이 많다. 이 작품에서도 시인은 가능한 한 말을 절제하고 리듬을 단순화하여 마치 여백이 많은 동양화를 그리듯이 작품을 구성했다.
이 그림 속에 있는 '청운사, 자하산, 청노루'는 모두 상상적인 배경이요 사물들이다. 이들은 현실의 갈등으로부터 초탈한 이상향을 이룬다. 특히 '청노루 / 맑은 눈에 // 도는 / 구름'이라는 구절의 느릿한 호흡과 정서적 여백은 이 이상향이 현실의 갈등과 고통스러운 역사로부터 초탈한 평화의 공간임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자작시 해설] : 박목월, 『보랏빛 소묘』중에서
이 작품을 쓸 무렵에 내가 희구한 것은 '핏발 한 가락 서리지 않은 맑은 눈'이었다. 나이 50이 가까운 지금에는 나의 안정(眼睛)에도 안개가 서리고, 흐릿한 핏발이 물들어 있지만 젊을 때는 그래도 '핏발 한 가락 서리지 않은 눈으로 님을 그리워하고 자연을 사모했던 것이다.
또한 그런 심정으로 젊음을 깨끗이 불사른 것인지 모르겠다. 어떻든 그 심정이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을 그리게 하였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청노루'가 과연 존재하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는 분이 있었다. 물론 푸른빛 노루는 없다. 노루라면 누르스름하고 꺼뭇한 털빛을 가진 동물이지만, 나는 그 누르스름하고 꺼뭇한, 다시 말하자면 동물적인 빛깔에 푸른빛을 주어서 정신화된 노루를 상상했던 것이다. 참으로 오리목 속잎이 피는 계절이 되면 노루도 '서정적인 동물'이 될 것만 같았다.
또 청운사나 자하산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어느 해설서에 '경주 지방에 있는 산 이름'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한 것을 보았지만 이것은 해설자가 어림잡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기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내가 창작한 산명이다. 나는 그 무렵에 나대로의 지도를 가졌다. 그 어둡고 불안한 일제 말기에 나는 푸근히 은신할 수 있는 어수룩한 천지가 그리웠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은 어디나 일본 치하의 불안하고 바라진 땅뿐이었다. 강원도를 혹은 태백산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내가 은신할 수 있는 한 치의 땅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 혼자의 깊숙한 산과 냇물과 호수와 봉우리와 절이 있는 마음의 자연 지도를 그려보게 되었다. 마음의 지도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태모산(胎母山), 태웅산(太熊山), 그 줄기를 받아 구강산(九江山), 자하산(紫霞山)이 있고, 자하산 골짜기를 흘러 잔잔한 호수를 이룬 것이 낙산호(洛山湖), 영랑호(永郞湖), 영랑호 맑은 물에 그림자를 잠근 봉우리가 방초봉(芳草峰), 그 곳에서 아득히 바라보이는 자하산의 보랏빛 아지랑이 속에 아른거리는 낡은 기와집이 청운사(靑雲寺)이다.
[작가소개]
박목월 : 박영종시인, 전 대학교수
출생 : 1915. 경상북도 월성군
사망 : 1978. 3. 24.
가족 : 아들 박동규
데뷔 : 1939년 문예지 '문장’
작품 : 오디오북, 도서
<정의>
해방 이후 『난, 기타』, 『어머니』, 『사력질』 등을 저술한 시인.
<생애 및 활동사항>
본명은 박영종(朴泳鍾). 경상북도 월성(지금의 경주) 출신. 1935년 대구의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를 졸업하고, 도일(渡日)해서 영화인들과 어울리다가 귀국하였다. 1946년 무렵부터 교직에 종사하여 대구 계성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연세대학교·홍익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62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1947년 한국문필가협회 발족과 더불어 상임위원으로 문학운동에 가담, 문총(文總) 상임위원·청년문학가협회 중앙위원·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총무·공군종군문인단 창공구락부(蒼空俱樂部)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맡아 1973년 이후까지 계속하였다. 한때 출판사 산아방(山雅房)·창조사(創造社) 등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잡지 『아동』(1946)·『동화』(1947)·『여학생』(1949)·『시문학(詩文學)』(1950∼1951) 등을 편집, 간행하였으며, 1973년부터는 월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하였다.
처음은 동시를 썼는데 1933년『어린이』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었고, 같은 해 『신가정(新家庭)』지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시를 썼다.
본격 시인으로는 1939년 9월 『문장(文章)』지에서 정지용(鄭芝溶)에 의하여 「길처럼」·「그것은 연륜(年輪)이다」 등으로 추천을 받았고, 이어서 「산그늘」(1939.12.)·「가을 으스름」(1940.9.)·「연륜(年輪)」(1940. 9.) 등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 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 등과 3인시집 『청록집(靑鹿集)』을 발행하여 해방 시단에 큰 수확을 안겨주었다.
1930년대 말에 출발하는 그의 초기 시들은 향토적 서정에 민요적 율조가 가미된 짤막한 서정시들로 독특한 전통적 시풍을 이루고 있다. 그의 향토적 서정은 시인과 자연과의 교감에서 얻어진 특유의 것이면서도 보편적인 향수의 미감을 아울러 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청록집』·『산도화』 등에서 잘 나타난다.
6·25사변을 겪으면서 이러한 시적 경향도 변하기 시작하여 1959년에 간행된 『난(蘭)·기타』와 1964년의 『청담』에 이르면 현실에 대한 관심들이 시 속에서 표출되고 있다.
인간의 운명이나 사물의 본성에 관한 깊은 통찰을 보이고 있으며, 주로 시의 소재를 가족이나 생활 주변에서 택하여, 담담하고 소박하게 생활사상(生活事象)을 읊고 있다.
1967년에 간행된 장시집 『어머니』는 어머니에 대한 찬미를 노래한 것으로 시인의 기독교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68년의 『경상도의 가랑잎』부터는 현실인식이 더욱 심화되어 소재가 생활 주변에서 역사적·사회적 현실로 확대되었으며,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사념적 관념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1973년의 『사력질(砂礫質)』에서는 사물의 본질이 해명되면서도 냉철한 통찰에 의하여 사물의 본질의 해명에 내재하여 있는 근원적인 한계성과 비극성이 천명되고 있다. 그것은 지상적인 삶이나 존재의 일반적인 한계성과 통하는 의미다.
수필 분야에서도 일가의 경지를 이루어, 『구름의 서정』(1956), 『토요일의 밤하늘』(1958), 『행복의 얼굴』(1964) 등이 있으며, 『보랏빛 소묘(素描)』(1959)는 자작시 해설로서 그의 시작 방법과 시세계를 알 수 있는 좋은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사적(詩史的)인 면에서 김소월(金素月)과 김영랑(金永郎)을 잇는 향토적 서정성을 심화시켰으면서도, 애국적인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민요조를 개성 있게 수용하여 재창조한 대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55년 첫 시집 『산도화(山桃花)』(1954)로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68년 시집 『청담(晴曇)』으로 대한민국문예상 본상을, 1969년 『경상도(慶尙道)의 가랑잎』(1968)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우리시의 역사적 연구』(신동욱, 새문사, 1981)
『한국현대시론』(박두진, 일조각, 1977)
『현대시론』(정한모, 민중서관, 1973)
『한국의 현대시』(서정주, 일지사, 1969)
「향수의 미학」(김종길, 『문학과 지성』, 1971년 가을호)
[네이버 지식백과] 박목월 [朴木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