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고려사 : 세가 예종 원년(1106) 병술년• 원년 봄 정월
초하루 갑오일. 왕이 상중이어서 신년 하례를 받지 않았다. 재상들이 왕에게 고기반찬을 먹으라고 권유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가 네 번이나 표문을 올려 간청하자 그제야 허락하였다. 정유일. 혜성(彗星)이 서남쪽에 나타났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없어졌다. 무술일. 예부(禮部)에서, 양계(兩界)·3경(三京)·3도호부(三都護府)·8목(牧)으로 하여금 정월 초하루, 동짓날 및 지원절(至元節) 때마다 곤성전(坤成殿)에 하례하는 표문을 올리게 하고 이것을 관례로 삼으라고 건의하자, 이를 허락했다. ○ 왕의 생일을 함녕절(咸寧節)로 정했다. 갑진일. 문덕전(文德殿)에서 백일재(百日齋)를 열었다. ○ 요나라에서 제전사(祭奠使)로 야율연(耶律演)과 좌기궁(左企弓)을 보내왔다. 병오일. 요나라에서 조위사(弔慰使)로 야율충(耶律忠)과 유기상(劉企常)을 보내왔고, 또 유정신(劉鼎臣)을 보내 왕의 기복(起復)을 명했다. 신해일. 동번(東蕃)의 공아(公牙) 등 10명이 입조해 오자 국왕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이들을 접견한 후 술과 음식 및 전례에 따른 물품을 하사하였다. 애초 임간(林幹)이 정벌에 나서자 동번의 추장 연개(延盖)가 지훈(之訓) 등을 시켜 역습하게 해서 우리 군사를 패전시켰는데 지금 와서 지훈이 공아(公牙)를 보내 입조해 온 것이다. 왕이 정전(正殿)에서 예를 갖추어 이들을 대접하고자 했으나, 잡단(雜端) 최위(崔緯) 등이, “예로부터 오랑캐가 찾아왔을 때 한 번도 정전(正殿)에서 접견한 일이 없습니다. 내려온 제도에 따라 편전(便殿)에서 맞이하소서.” 라고 건의하자 그 말을 따랐다. 계축일. 요나라에서 보낸 제전사(祭奠使)와 조위사(弔慰使)가 숙종(肅宗)의 우궁(虞宮)에서 제사를 지내자, 왕이 심의(深衣)를 입고 제례를 도왔다. 무오일. 건덕전(乾德殿)에서 요나라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2월
초하루 갑자일. 요나라에서 횡선사(橫宣使)를 보내왔다. 을축일. 왕의 동생 왕보(王俌)를 검교태위(檢校太尉)·수사도(守司徒) 겸 상서령(尙書令)으로, 왕효(王侾)를 검교태보(檢校太保)·수사도(守司徒) 겸 상서령(尙書令)으로, 왕서(王偦)와 왕교(王僑)로 모두 검교상서령(檢校尙書令)·수사공(守司空)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재상들이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권하는 표문을 올렸으나, 왕은 아직 상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신미일. 공부상서(工部尙書) 최공익(崔公翊)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임명했다. 을해일. 서여진(西女眞)사람 망간(亡間) 등이 왔다. ○ 일관(日官)이, “송악(松嶽)은 도읍의 진산(鎭山)이온데, 여러 해 동안 빗물에 모래와 흙이 흘러내려 암석이 드러나 초목이 무성하지 않으니 나무를 심어 땅의 기운을 돋우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그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병자일. 북쪽 오랑캐 사팔(沙八) 등이 입조해 왔다. ○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과거 우리가 토벌했던 오랑캐 두목 고수(高守)는 바로 사팔(沙八)의 애비됩니다. 그 자가 필시 묵은 원한을 품고 있을 터이니 그를 신흥관(新興館)에 묵게 하고 군교(軍校) 가운데 용력이 빼어난 자를 시켜 감시하게 해야 합니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기묘일. 북번의 추장 고란(高亂)과 아어대(阿於大) 등 42명이 입조해 왔다. 무자일. 왕이 친히 대궐의 뜰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신묘일. 예빈성(禮賓省)에서, 고란(高亂) 등이 요나라로부터 받은 관직 임명장을 바치면서 우리 조정의 작위를 받으려 한다고 보고하자 왕이 허락하고 그에게 중윤(中尹) 벼슬을 주었다. 임진일. 재상들이 재차 표문을 올려 왕비를 맞아들이라고 권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3월
병진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 동경(東京)의 황룡사(黃龍寺)를 수리하게 한 후, 상서(尙書) 김한충(金漢忠)을 보내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 요나라에서 우리 군사 종지(宗志) 등 12명을 돌려보냈다. 이들은 갑신년 전투에서 동번(東蕃) 군사에게 패배하자 요나라로 도주했던 자들이었다. 정유일. 왕이 유신(儒臣)과 태사관(太史官)들로 하여금 회령전(會寧殿)에 모여 음양지리(陰陽地理)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서적을 가려 뽑아, 1책으로 편찬해 올리게 한 다음 『해동비록(海東秘錄)』이라고 책이름을 지어 주었다. 정본은 어부(御府)에 소장하고, 부본은 중서성(中書省)·사천대(司天臺)·태사국(太史局)에 내려 주었다. ○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동여진의 지훈(之訓)이 기병 2천 명을 거느리고 관성(關城) 밖에 와서 진을 친 다음 화친을 청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해의 전투는 새 왕께서는 모르시는 일로서, 제가 공아(公牙)를 입조시키자 이 뜻으로 타이르신 후 후한 상까지 주어 돌려보내셨으니 그 큰 은혜를 어찌 잊고 배신하겠습니까?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근실히 조공을 바치기를 원합니다.” 정미일. 동번에서 화친을 청해 왔기 때문에 동계가발병마사(東界加發兵馬使) 김덕진(金德珍)과 부사(副使) 임신행(任申幸)을 도로 불러들였다. 무신일.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요나라 해가(奚家)의 군사인 내가(乃哥)가 여진인 상구(霜丘)의 아들 아주(阿主)를 데리고 철갑(鐵甲) 1벌을 갖고 와서 화친을 청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을묘일. 왕이 숙종(肅宗)의 빈소를 참배했다. 무오일. 김한충(金漢忠)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 김덕진(金德珍)을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삼사사(三司使)로, 유자유(柳子維)를 호부상서(戶部尙書)로, 고령신(高令臣)과 문관(文冠)을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로, 김상우(金商祐)를 섭어사대부(攝御史大夫)로, 이자겸(李資謙)을 시어사중승(試御史中丞)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임간(林幹)을 수사공(守司空)으로 임명한 후 은퇴하게 했다. 기미일. 김경용(金景庸)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임명하였다.
• 여름 4월
무진일. 북번(北蕃)의 추장(酋長) 아어대(阿於大) 등 38명이 입조해 왔다. ○ 대유창(大有倉)을 지었다. 기묘일. 황보허(皇甫許) 등을 급제시켰다. 병술일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했다. 경인일.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얼마 전 서해도 유주(儒州 : 지금의 황해남도 신천군 문화면)·안악(安岳 : 지금의 황해남도 안악군)·장연(長淵 : 지금의 황해남도 장연군) 현(縣) 등지에 유민이 발생했다는 해당 관청의 보고를 받고는 즉시 감무관(監務官)을 파견해 그들을 안무(安撫)하게 했더니 귀향하는 유민들이 차츰 늘어나 백성의 살림살이도 한결 나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우봉(牛峯 : 지금의 황해북도 금천군)·토산(兎山 : 지금의 황해북도 토산군 토산)·적성(積城 :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적성면)·파평(坡平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사천(沙川 :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삭녕(朔寧 :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안협(安峽 : 지금의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승령(僧嶺 :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동음(洞陰 : 지금의 강원도 신철원)·안주(安州 : 지금의 황해남도 재령군)·영강(永康 : 지금의 황해남도 강령군)·가화(嘉禾 : 지금의 황해남도 송화군)·청송(靑松 : 지금의 황해남도 송화군)·인의(仁義 :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금성(金城 : 지금의 강원도 금화군)·제주(堤州 :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보령(保寧 :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군)·여미(餘尾)·당진(唐津 :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군)·정안(定安 :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만경(萬頃 :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부윤(富閏)·양구(楊口 : 지금의 강원도 양구군)·낭천(狼川 :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등 군현에도 유민이 생길 조짐이 있다하니 유주(儒州 : 지금의 황해남도 은율군)의 예에 따라 감무(監務)를 배치해 백성들을 안무하게 하라.”
• 5월
병신일. 왕이 「단오시(端午詩)」를 지어 측근 신하들에게 보이고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무술일. 왕이 산호정(山呼亭)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경자일. 왕이 가창루(嘉昌樓)에서 시를 짓고는, 시신(侍臣) 허경(許慶)·유인저(柳仁著) 등 10여 명으로 하여금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한 후, 차등을 두어 비단을 하사하였다. 또 누각 앞에다 은 주발로 과녁을 삼게 하고는, 시종한 장군과 재상들로 하여금 활쏘기 시합을 벌이게 해 명중시킨 자에게 그 주발을 선물로 주었다. 신축일. 왕이 법운사(法雲寺)에 행차하였다. 병진일. 큰 비가 십여 일 넘게 퍼붓자, 종묘와 사직 및 여덟 능(陵)에 비를 멈추게 해달라고 빌었다. 무오일. 연친전(宴親殿)에 도량(道場)을 열고 태후의 장수와 복록을 빌었다.
• 6월
초하루 신유일.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임술일. 연화궁주(延和宮主)를 왕비로 맞이했다. 을해일.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신사일. 건덕전(乾德殿)에서 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을 열고 왕이 매일 강경(講經)하는 것을 들었다. 계미일. 산호정(山呼亭)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병술일. 왕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이 달 들어 큰 가뭄이 더욱 심하니 이는 내가 부덕한 탓이다. 밤낮으로 노심초사(焦心勞思)하며 스스로 반성하고 허물을 뉘우쳤으며, 정성을 다해 부처와 신령께 기도를 올렸으나 아직도 응답을 받지 못했다. 짐이 왕위에 오른 이후 정치와 교화를 베푸는데 잘못된 점이 많아, 하늘이 짐을 꾸짖어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된다. 양부(兩府)의 근신(近臣) 및 대성(臺省)의 간관(諫官), 제사(諸司)의 지제고(知制誥)들은 각자 봉사(封事)를 올려 현 정치의 폐단을 직언하라.”
정해일. 왕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유배형 이하의 형벌을 받았다가 작년 11월 사면령에 의해 형이 풀린 자로서 다시 법관의 논죄를 받은 자는 모두 형벌을 면제시키라. 하물며 지금 가뭄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현재 수감되어 있는 자도 형을 경감시켜 주어야 할 것이니, 전국의 죄수 가운데 유배형이하의 죄수는 다 용서하여 사면하라.”
무자일. 왕이 법운사(法雲寺)에서 비를 빌었다. 기축일. 왕이 장령전(長寧殿)에서 승려 담진(曇眞)을 시켜 선(禪)을 설법하고 비를 빌게 했다. 당시 나라에 거리를 돌며 경행(經行)하는 일이 크게 유행했다. 개경 5부(部)의 백성들이 이를 본받아 각각 자기들이 사는 리(里)에서 걸어가면서 독경을 했는데 이 행렬이 대궐의 서쪽 리(里)에 이르자 때맞추어 비가 내렸다. 이에 왕이 쌀과 비단을 내려주고 다시 거리에서 독경하게 했다.
• 가을 7월
초하루 경인일. 회경전(會慶殿)에서 반야도량(般若道場)을 열고, 왕사(王師)인 덕창(德昌)을 불러 경을 강하고 비를 빌게 했다. 신묘일. 기우제(祈雨祭)를 크게 지냈다. 계사일. 비가 내렸다. 을미일. 왕이 장령전(長齡殿)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했다. 정유일. 각종 사당의 신령들에게 비를 빌었다. 기해일. 왕이 양부(兩府)·대성(臺省)·양제(兩制) 및 3품(品)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친히 회경전(會慶殿)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태조의 위패를 그 곁에 모셔두고 비를 빌었다. 신축일. 왕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짐이 양부(兩府)·대간(臺諫)·양제(兩制) 및 장령전(長齡殿)의 수교원(讎校員) 등이 올린 봉사를 두루 읽어 보았다. 그 건의 가운데 ‘선행을 실천하고 스스로 반성할 것과 선왕의 유훈을 충실히 지킬 것’이라는 조항은 가슴에 새겨둔 바로서 짐이 늘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하늘의 이치에 따라 명령을 내릴 것, 퇴락된 교사(郊社)와 원묘(原廟)를 수리하고 헐어빠진 제기와 제복을 교체할 것’이라는 조항은 해당 관청으로부터 상세한 현황을 들은 다음 그대로 시행토록 할 것이다. 천수사(天壽寺) 공사에 관한 왈가왈부는 짐도 잘 알고 있는 사항이다. 그러나 선왕께서 처음 건축 공사를 시작했을 때는 아무도 말리는 자가 없었는데, 승하하신 이후에는 공사를 중지하라는 여론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다. 짐이 공정한 처지에서 생각건대, 지세의 길흉 따위에 구애받는 것은 하찮은 일이니, 선왕께서 천수사를 세우면서 지니셨던 원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다만 올 봄에 공사를 강행한 것은 분명 짐의 잘못이니 사면하는 글의 조항에 의거해 3년 후에 시행할 것이다. ‘복식의 제도에 신분의 구별이 없다.’는 사항은 선대로부터 복식을 규정한 법률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그에 관한 규정을 만들어 신분을 구분하려 했지만 임금과 신하가 검소한 차림으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처럼 아래 위의 구분이 완전히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위에서 명령하는 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따라 간다.’라는 말이 있고 또 ‘윗사람이 어떤 일을 행하면 아랫사람들은 반드시 더 심하게 행동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만약 임금과 신하가 절약과 검소를 몸소 실천하고 백성의 이익을 빼앗지 아니하면 서민들은 이를 보고 감동한 나머지 존비를 자연히 구분할 것이다. 다음 ‘문무 관료들이 아무 하는 일 없이 봉록만 받아먹기 때문에 가뭄과 누리[蝗]의 재앙이 자주 발생한다.’는 지적을 보았다. 어진 이를 등용하고 사악한 자를 물리치는 것은 분명 정치의 요체이긴 하되, 관직의 종류와 인원이 매우 번다한 관계로 짐도 미처 다 파악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만약 현명하고 어진 이가 낮은 직위에 있으면 재상이 천거하고, 간악하고 탐욕한 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면 대간이 그를 쫓아내도록 하라.”
○ 이날에 비가 조금 내렸다. 계묘일. 장령전(長齡殿)에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열고 숙종의 명복을 빌었다. 갑진일. 다시 명망있는 승려를 불러 『목련경(目蓮經)』을 강하게 하였다. 병오일. 건덕전(乾德殿)에서 태일(太一)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계축일. 왕이 중광전(重光殿)의 서루(西樓)에서 귀부해온 송나라 사람인 낭장(郞將) ▶진양(陳養)과 역관 ▶진고(陳高)·유탄(兪坦)을 불러 무예를 시험해 본 후 각각 물품을 내려주었다.
• 8월
정묘일. 왕이 숙종의 빈소를 참배했다. 경오일. 전국의 중죄수에 대한 형량을 결정했다. 병자일.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무인일.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위(李緯)와 병부상서(兵部尙書) 최유정(崔惟正)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위위경(衛尉卿) 장익(張翼)과 예부시랑(禮部侍郞) 김연(金緣)을 중군병마부사(中軍兵馬副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신사일.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가 태조(太祖)의 진전(眞殿)을 참배했다.
• 9월
임진일.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갑오일. 왕이 불은사(佛恩寺)에 행차하였다. 정유일. 왕이 숙종(肅宗)의 빈소를 참배했다. 무술일. 건덕전(乾德殿)에 소재도량(消灾道場)을 열었다. 이날 밤에 회경전(會慶殿)에서 왕이 삼계(三界) 산천의 신령[神祗]들에게 몸소 초제(醮祭)를 지냈다. 경자일. 왕이 여든 살이 넘은 남녀와 의부(義夫)·열녀·효자·효손 및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없는 노인, 중환자와 장애인들을 위해 대궐(大闕)의 뜰에서 친히 음식을 대접하고 차등을 두어 물품을 내려주었다. 병오일.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무신일.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계축일. 회경전(會慶殿)에서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을 열고, 『인왕경(仁王經)』을 강하게 한 후, 대궐의 뜰에서 승려 1만 명, 주(州)와 부(府)에서 승려 2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을묘일. 평장사(平章事) 윤관(尹瓘)이 천수사(天壽寺)의 건축 공사를 감독했다 하여 물소 뿔로 만든 띠 1개를 하사하고, 그를 도운 관리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비단필을 하사했다. ○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 겨울 10월
초하루 기미일. 왕이 친히 문덕전(文德殿)에서 자비참도량(慈悲懺道場)을 열었다. 경신일. 숙종의 신주는 우궁(虞宮)으로, 초상은 개국사(開國寺)로 옮겨 봉안하였다. 임술일. 숙종의 소상(小祥)을 맞아 왕이 개국사(開國寺)에 갔다. 이어 천수사(天壽寺)로 가서 공사 상황을 살펴보았으며, 돌아오는 길에 자꾸 뒤를 돌아보며 한참동안 추모의 눈물을 흘렸다. 경오일. 건덕전(乾德殿)에서 반야도량(般若道場)을 열었다. 갑술일. 시랑(侍郞) 김보위(金寶威)와 낭장(郞將) 이숙(李璹)을 요나라에 보내어 숙종의 제사를 베풀어 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게 했다. 정축일. 예빈소경(禮賓少卿) 최수(崔洙)를 요나라에 보내어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했다. 기묘일. 왕이 숙종의 우궁에 갔다. 계미일. 왕이 꿈에 죽은 부친을 보고 깨어나 자신의 감회를 읊은 시 세 편을 지어 재추들에게 보였다. 재추들이 화답하는 시를 지어 바치자 각각 말 한 필씩을 하사하였다.
• 11월
무자일. 이위(李瑋)를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임명했다. 신묘일. 서여진(西女眞)의 어후대(於厚大) 등이 입조해 왔다. 계사일.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이 숭인문(崇仁門) 밖에서 신기군(神騎軍)·신보군(神步軍)을 열병했다. 정유일. 김의방(金義方)을 요나라에 보내 횡선사(橫宣使)를 보낸 데 대해 사의를 표하게했다. 무술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은퇴한 곽상(郭尙)이 죽었다. 신축일. 팔관회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와 신중원(神衆院)에 행차했다가 돌아와 대궐 뜰에서 각종 신령에 대해 배례의식을 행했다. 을묘일. 서여진(西女眞)의 망간(亡間) 등 30인이 입조해 왔다.
• 12월
초하루 무오일. 일식이 있었다. 경신일. 왕이 문덕전(文德殿)에서 평장사(平章事) 윤관(尹瓘)을 시켜 『상서(尙書)』 무일편(無逸篇)을 강론하게 하고, 추밀원사(樞密院使) 오연총(吳延寵)을 시켜 『예기(禮記)』를 강론하게 했다.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 등 유신(儒臣) 21인을 불러 강론을 듣게 한 후, 이어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다. 계해일. 중광전(重光殿)에서 대장군(大將軍) 이하 군사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고는 과녁에 명중시킨 자에게는 차등을 두어 말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무진일. 경전을 강론했던 윤관과 오연총에게 의복을 내려주어 포상했다. 기사일.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을해일. 위계정(魏繼廷)을 수태보(守太保)로, 최홍사(崔弘嗣)를 문덕전학사(文德殿學士)·상주국(上柱國)으로, 이오(李)를 상주국(上柱國)으로, 윤관(尹瓘)을 연영전태학사(延英殿太學士)로, 임의(任懿)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주국(柱國)으로, 김경용(金景庸)을 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로, 왕하(王蝦)를 수사공(守司空)으로, 오연총(吳延寵)을 검교사도(檢校司徒)로, 이위(李瑋)를 검교사공(檢校司空)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이예(李預)를 검교태위(檢校太尉)·형부상서(刑部尙書)·정당문학(政堂文學)·판어서원사(判御書院事)로 임명한 후 은퇴하게 했다. 정해일. 대령궁(大寧宮)에 화재가 났다. ○ 왕이 법운사(法雲寺)에 행차하였다. 元年 春正月 甲午朔 王以亮陰, 不受賀. 宰相請御肉膳, 不許, 四上表請之, 乃許. 丁酉 彗見于西南, 月餘乃滅. 戊戌 禮部奏, “兩界三京三都護八牧, 每當元正·冬至及至元節, 表賀坤成殿, 以爲恒式.” 制可. 以王生辰爲咸寧節. 甲辰 設百日齋于文德殿. 遼遣祭奠使耶律演左企弓來. 丙午 遼遣弔慰使耶律忠劉企常來. 又遣劉鼎臣, 命王起復. 辛亥 東蕃公牙等十人來朝. 王引見于宣政殿, 賜酒食例物. 初, 林幹之出師也, 酋長延盖使之訓等逆擊之, 我師敗績, 至是, 之訓遣公牙來朝. 王欲於正殿, 備禮待之, 雜端崔緯等奏, “自古虜人之來, 未嘗於正殿引見. 請依舊制, 待於便殿.” 從之. 癸丑 遼祭奠·弔慰使祭肅宗虞宮, 王服深衣, 助奠. 戊午 宴遼使于乾德殿.
二月 甲子朔 遼橫宣使來. 乙丑 以弟俌檢校太尉守司徒兼尙書令, 侾檢校太保守司徒兼尙書令, 偦·僑並檢校尙書令守司空. 宰相上表, 請納妃, 王以未終制不允. 辛未 以工部尙書崔公詡爲西北面兵馬使. 乙亥 西女眞亡閒等來. 日官奏, “松嶽乃京都鎭山, 積年雨水, 沙土漂流, 巖石暴露, 草木不茂, 宜栽植裨補.” 詔可. 丙子 北虜沙八等來朝, 都兵馬使奏曰, “昔我所討賊魁高守者, 卽沙八之父也. 必懷宿怨, 請處之新興館, 令軍校驍勇者守之.” 從之. 己卯 北蕃酋長高亂阿於大等四十二人來朝. 戊子 親醮于闕庭. 辛卯 禮賓省奏, “高亂等請納遼所授官誥, 受國爵命.” 王從之, 授中尹. 壬辰 宰相再上表, 請納妃, 不允.
三月 丙申 白虹貫日. 修東京黃龍寺, 遣尙書金漢忠落成. 遼歸我軍宗志等十二人. 甲申之戰, 沒於東蕃, 逃入遼者也. 丁酉 命儒臣與太史官, 會長寧殿, 刪定陰陽地理諸家書, 編爲一冊以進, 賜名海東秘錄. 正本藏於御府, 副本賜中書省·司天臺·太史局. 東北面兵馬使奏, “東女眞之訓率騎二千, 來屯關外, 納款曰, ‘往年之戰, 非新王所知, 公牙之朝, 諭以此意, 厚賞遣歸, 上恩至渥, 豈敢忘背? 願至子孫, 恭勤朝貢.” 丁未 以東蕃納款, 召還東界加發兵馬使金德珍, 副使任申幸. 戊申 都兵馬使奏, “北朝奚家軍乃哥, 以蕃賊霜丘之子阿主及鐵甲一副, 來納款. 乙卯 王詣肅宗虞宮. 戊午 以金漢忠爲尙書左僕射判秘書省事, 金德珍爲兵部尙書兼三司使, 柳子維爲戶部尙書, 高令臣·文冠爲左右散騎常侍, 金商祐攝御史大夫, 李資謙試御史中丞. 林幹守司空 致仕. 己未 以金景庸知門下省事.
夏四月 戊辰 北蕃酋長阿於大等三十八人來朝. 作大有倉. 己卯 賜皇甫許等及第. 丙戌 幸妙通寺. 庚寅 詔曰, “頃因所司奏以西海道儒州·安岳·長淵等縣, 人物流亡, 始差監務官, 使之安撫, 遂致流民漸還, 産業日盛. 今牛峯·兎山·積城·坡平·沙川·朔寧·安峽·僧嶺·洞陰·安州·永康·嘉禾·靑松·仁義·金城·堤州·保寧·餘尾·唐津·定安·萬頃·富閏·楊口·狼川等郡縣, 人物亦有流亡之勢, 宜准儒州例, 置監務招撫.
五月 丙申 王賦端午詩, 宣示左右, 令和進. 戊戌 幸山呼亭, 作佛事. 庚子 御嘉昌樓賦詩, 令侍臣許慶柳仁著等十餘人和進, 賜帛有差. 又於樓前, 以銀椀爲的, 命侍從將相角射, 中者賜之. 辛丑 幸法雲寺. 丙辰 以大雨踰旬, 祈晴于廟社八陵. 戊午 設道場于宴親殿, 以祈太后福壽.
六月 辛酉朔 王如奉恩寺. 壬戌 納延和宮主爲妃. 乙亥 王受菩薩戒于乾德殿. 辛巳 設金剛經道場于乾德殿, 王逐日聽講. 癸未 幸山呼亭, 作佛事. 丙戌 詔曰, “是月以來, 亢旱尤甚, 盖由否德所致. 日夜焦勞, 省躬謝過, 禱佛祈神, 無不盡心, 然未蒙報應. 朕嗣位以後, 施爲政敎, 多所乖戾, 天其或者譴告朕躬? 宜令兩府近臣, 及臺省諫官諸司知製誥, 各上封事, 直言時弊.” 丁亥 詔曰, “去年十一月, 赦前所犯, 流以下罪, 法官有所追論者, 皆當除之. 况今旱氣滋甚, 亦宜寬刑, 其內外獄囚, 流以下罪, 並原免.” 戊子 禱雨于法雲寺. 己丑 御長寧殿, 命僧曇眞, 說禪祈雨. 時, 國家盛行街衢經行. 五部人民効此, 各於所在里, 行讀, 行至闕西里, 適有雨. 王賜米帛, 更令行讀.
秋七月 庚寅朔 設般若道場于會慶殿, 召王師德昌, 講經祈雨. 辛卯 大雩. 癸巳 雨. 乙未 御長齡殿, 講華嚴經. 丁酉 祈雨于諸神廟. 己亥 王率兩府·臺省·兩制及三品官, 親祀昊天上帝於會慶殿, 配以太祖, 禱雨. 辛丑 詔曰, “朕覽兩府·臺諫·兩制及長齡殿讎校員等封事. 其所論‘躬行自省, 奉承祖訓’者, 旣已存心, 庶幾踐行矣. 其‘四時迎氣, 順天行令, 及郊社原廟頹而可脩者, 祭器祭服 弊而可改’者, 令有司具聞施行. 其‘天壽之役’, 朕亦知可否. 然當聖考經始, 無一士敢言, 升遐以後, 衆論蜂起, 爭欲諫止. 朕以義思之, 地勢吉凶, 是拘忌小道, 曷若遹追先志乎? 惟今春之役, 是朕過也, 宜據赦文, 三年而後爲之. 其‘服飾之制, 上下混淆’者, 自先代未有定法. 近雖立制, 以別尊卑, 第緣君臣不能行儉以率衆, 上下無等, 至於此極. 故曰, ‘百姓不從其所令, 從其所好’, 又曰, ‘上之所行, 下必有甚者’, 若君臣躬行節儉, 不奪民利, 則庶民觀感, 尊卑有別矣. 其‘文武官僚, 無功尸祿, 故屢致旱蝗.’ 盖進賢退不肖, 爲政之要也, 然百職至煩, 非朕所能盡知. 如有賢良在下, 宰相薦之, 姦貪竊位, 臺諫黜之.” 是日, 小雨. 癸卯 設盂蘭盆齋于長齡殿, 以薦肅宗冥祐. 甲辰 又召名僧, 講目蓮經. 丙午 醮太一于乾德殿. 癸丑 御重光殿西樓, 召投化宋人郞將▶陳養, 譯語▶陳高·兪坦, 試閱兵手, 各賜物.
八月 丁卯 王詣肅宗虞宮. 庚午 斷中外重罪. 丙子 幸普濟寺. 戊寅 以禮部尙書李緯, 兵部尙書崔惟正爲中軍兵馬使, 衛尉卿張翼, 禮部侍郞金緣爲中軍兵馬副使. 辛巳 王如奉恩寺, 謁太祖眞殿.
九月 壬辰 幸外帝釋院. 甲午 幸佛恩寺. 丁酉 詣肅宗虞宮. 戊戌 設消灾道場於乾德殿. 是夜, 親醮三界神祇于會慶殿. 庚子 親饗年八十以上男女, 義夫·節婦·孝子·順孫·鰥寡孤獨篤·癈疾者于闕庭, 賜物有差. 丙午 幸妙通寺. 戊申 幸外帝釋院. 癸丑 設百高坐道場於會慶殿, 講仁王經, 飯僧一萬於闕庭, 二萬於州府. 乙卯 以平章事尹瓘監督天壽寺役, 賜犀帶一腰, 諸僚佐, 束帛有差. 幸妙通寺.
冬十月 己未朔 親設慈悲懺道場於文德殿. 庚申 移安肅宗神主于虞宮, 睟容于開國寺. 壬戌 王以肅宗小祥, 如開國寺. 仍幸天壽寺, 董其工役, 還次路上回望, 追慕涕泣, 久之. 庚午 設般若道場于乾德殿. 甲戌 遣侍郞金寶威, 郞將李璹如遼, 謝賜祭. 丁丑 遣禮賓少卿崔洙如遼, 賀天興節. 己卯 王詣肅宗虞宮. 癸未 王夢見先考, 覺而有憾, 賦詩三篇宣示. 宰樞和進, 賜馬各一匹.
十一月 戊子 以李瑋同知樞密院事. 辛卯 西女眞於厚大等來朝. 癸巳 尹瓘·吳延寵閱神騎神步軍於崇仁門外. 丁酉 遣金義方如遼, 謝橫宣. 戊戌 叅知政事致仕郭尙卒. 辛丑 設八關會, 幸法王寺神衆院, 還拜百神于闕庭. 乙卯 西女眞亡閒等三十人來朝.
十二月 戊午朔 日食. 庚申 御文德殿, 命平章事尹瓘講無逸, 知樞密院事吳延寵講禮記. 召平章事崔弘嗣等, 儒臣二十一人聽講, 仍賜酒饌. 癸亥 御重光殿, 命上大將軍以下軍士射侯, 中者, 賜馬及絹有差. 戊辰 賜尹瓘吳延寵衣帶, 以褒講經. 己巳 彗星見. 乙亥 以魏繼廷守太保, 崔弘嗣爲文德殿大學士上柱國, 李爲上柱國, 尹瓘爲延英殿大學士, 任懿爲開府儀同三司柱國, 金景庸爲左僕射叅知政事, 王嘏守司空, 吳延寵檢校司徒, 李瑋檢校司空, 李預檢校太尉刑部尙書政堂文學判御書院事, 仍令致仕. 丁亥 大寧宮灾, 幸法雲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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