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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묵상글 (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 하느님 사랑만으로 너무 충분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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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12 04:52
- 하느님 사랑만으로 너무 충분한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수원이지만
마음의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의 자은도입니다.
1980년대 한 보름 정도 지냈던 곳인데도 그곳이 제 마음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마음의 고향이란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고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곳이지요.
그때 저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을 소개받아서 찾아갔습니다.
천주교 주소록에서 목포 북교동 성당 주임 신부님 전화번호를 찾아
신부님이 자주 가시지 못하는 공소를 소개해달라고 해 간 것입니다.
그때는 저도 30대 초반으로서 바오로와 프란치스코처럼
복음을 선포하고 싶었던 순수한 열정 하나만 가지고 찾아갔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의 복음 선포를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도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하면서
일할 줄 아는 사람은 일하라고 하였고 일했는데도
먹을 것을 주지 않을 때 그때 애긍을 청하라고 했지요.
그래서 저는 자은도에 가서 해 뜨면 무작정 들로 나가 일하는 곳이 있으면
신자 비신자 가리지 않고 아무 밭에나 가서 일했는데
그때는 5월이라 마늘 캐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일하고 해지면 돌아와 씻고 간단히 저녁 먹은 뒤
그때야 미사를 드리고 교리하고 얘기를 나누곤 하였지요.
서울에서는 신자들이 매일 미사를 드릴 수 있고,
좋은 강의도 많아서 제가 강의해도 반응이 시큰둥하였지만
그곳은 미사조차도 귀했기에 반응이 뜨거웠고 강의를 하면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쏙쏙 빨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짧게 있었고,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요즘 제가 제 개인 얘기를 많이 했는데
오늘도 이 얘기를 길게 한 이유는 오늘 복음 얘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성전세를 내고 있었고 또 성전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스타테르 한 닢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주님은 당신이 성전의 주인이시니 오히려 성전세를 받아야 할 분이고,
제자들도 주님 성전에서 봉사하는 이들이니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도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성전세를 내라고 하신 겁니다.
요즘 사회적으로는 종교인들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고,
극히 일부 신자들 중에 교무금이나 헌금 안 내기 운동도 벌이는데
이는 교회가 너무 부유하고 돈 얘기를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요.
이렇듯 가난하지 않거나 돈이 개입되면
언제건 어디서건 복음 선포는 순수성을 잃게 됩니다.
저만 해도 돈이 오가지 않고 오직 복음만 오간 그때,
그 자은도가 그래서 그리운 것입니다.
복음과 사랑은 대가 없이 전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대로.
사랑해줬으니 돈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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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글을 쓰기 위해 산사에 머물던 시인이 어느 날 택배를 받았습니다. 기다렸던 물건이었고, 빨리 이 물건을 볼 생각으로 택배 상자의 끈을 가위로 자르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것이다.”
자르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푸는 것이 편할까요? 당연히 자르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런데 자르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스님을 보며, 별걸 다 나무라신다고 생각하면서 힘들게 매듭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라버렸으면 그 끈이 쓰레기가 될 뿐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풀면 나중에 다시 쓸 수 있지 않느냐? 자르는 것보다 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인간관계처럼 말이다.”
택배 끈을 풀면 다시 사용할 수 있지만 잘라버리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간관계도 정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인간관계를 아예 잘라버리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자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듯이 관계를 잘라버리고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택배 끈도 풀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관계 역시 풀어나갈 때 비로소 연결의 끈이 이어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관계를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명의 예외 없는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전 세’ 논란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논란은 예수님도 성전 세를 내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사제와 라삐는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또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어떤 신원으로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실 예수님의 몸은 성전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성전의 주인이 세금을 낸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제와 라삐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지 않은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논쟁과 충돌을 피하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계속 푸시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기에 자기를 낮춰서라도 관계를 푸시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을 보면서, 우리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너무 쉽게 관계를 잘라버리려고 하지 않았나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따른다면, 우리의 이런 모습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푸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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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자연은 신이 만든 건축이며 인간의 건축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안토니 가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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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승리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심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섭리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그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한 준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는 제자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는 장면입니다. ‘성전세’는 모세가 “누구나 자기 영혼의 속죄를 위하여 주님께 반 세겔을 내야 한다.”(탈출 30,13)고 말한 대로, 영혼과 육신의 속죄를 위해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은 자신이 다스림을 받는 왕에게 내는 것임을 일깨워주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니 ‘성전세’를 면제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곧 ‘어떻게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성전의 주인이심을,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성전세’로부터 자유로움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성전세’를 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자신이 옳긴 하지만, 무모한 분쟁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지혜로운 방법으로 세금을 내기로 하십니다. 곧 세금 낼 돈을 호수로 가서 낚시를 해서, 먼저 잡힌 물고기의 입을 벌려 거기에 들어있는 은전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당신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당신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그 기적을 이루십니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사랑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물고기입니다. 당신 그물에 걸려든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그리고 제 입에는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습니다. 당신 말씀이 물려있습니다.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명의 말씀이 저를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마태 17,27)
주님!
저는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이오니,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을 입에 물고
당신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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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하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성인 유다인 남자라면 누구나 해마다 영혼의 속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속죄받을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도 바치셨습니다(마태17,27). 성전의 참 주인이신 분께서 성전세를 내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내셨는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셨습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면서도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인 사람에게는 우선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습니다. 원리(原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 없습니다. 더더욱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비유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던 예수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을 닦아주시고, 귓구멍을 열어주시던 예수님, 일어서라고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예수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 하시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혜를 갈망하는 날 될 수 있길 희망하며 눈높이를 맞춰가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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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서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루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자캐오는 구원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았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는 행위로써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은 믿음과 그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로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 심판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 땅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가 늘어나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구원을 바라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구원의 선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원하는 게 채워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변하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구원은 명예, 재물,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양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던 아합왕이 그랬습니다.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다윗이 그랬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였던 카인이 그랬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쫓겨났던 아담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나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게 쉽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세상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왜일까요? 제자들은 죽음을 통한 구원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명예와 재물 그리고 권력을 줄 거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이 없는 구원은 허상입니다. 믿음을 사랑으로 드러내지 않는 구원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과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께 우리도 십자가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청하며 예전에 읽었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행복한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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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가지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며 남들에게서냐?’
베드로는 ‘남들에게서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맞습니다. 임금은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자기 자녀들이 아닌 남들에게서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 시대에 이런 모습은 아주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이유는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임금들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에게는 세금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자녀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누리는 것에 대한 세금을 하느님께서 거두어들이신다면 우리는 막대한 보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 몸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어떤 대금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에 대한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무상으로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오늘’이라는 시간입니다. 이 또한 우리가 무언가를 지불하고 산 것이 아닙니다.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누군가는 돈으로라도 사고 싶어 하는 이 하루를 우리는 거저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모든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자녀인 우리에게 어떤 것도 거두어들이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그저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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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는 것.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돈 때문에 시늉은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결국에는 진심이 아니었음이 들통날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죽었다 깨어나도 내 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중 내 편은 몇 명이나 될까요?
내 편 중 죽었다 깨어나도 내 편은 또 몇 명이나 될까요?
남 편 말고 내 편 말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지금 내 옆에 있다면 소중히 여겨주세요.
돈으로도 못하는 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그 한 사람으로 희망을 얻고, 기쁨을 얻고, 삶이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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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의 지혜와 사랑
“겸손한 삶”
“주님을 찬미하라 하늘로부터
높고 높은 곳에서 찬미들하라.”(시편148,1)
찬미의 종교요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인 우리들입니다. 어제 제 고향집이 구암리카페로 변했다는 사실에 흥분했지만 웬지 모를 참 미묘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고 아마도 평생 그러할 것입니다. 결코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기에 깊고 긴 침묵속에 담아둬야 할 것 같습니다.
분별의 지혜와 겸손한 사랑은 함께 갑니다. 참으로 이런 이들은 판단을 보류하며 침묵하며 하느님께 맡깁니다. 공동생활에서도 참 필요한 겸손한 사랑, 분별의 지혜입니다. 김훈의 소설에서도 겸손과 지혜를 발견합니다. 이런 내용을 자주 발견하는데 연륜에서 오는 겸손과 지혜일 것입니다.
“이승훈의 죽음과 형식에는 순교와 배교가 합쳐져 있다. 그는 고문과 순교의 과정을 배교로 마감하고 참수되었지만, 그의 최후의 내면이 배교인지 순교인지는 달레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정약용의 신문과정은 그가 천주교 지도자들과 동료 지식인을 고발한 대가로 사형을 모면했으리라는 정황을 보여주지만 증거는 없다. 형틀에 묶여서 고문당하고 있는 인간의 육성 진술을 놓고 신앙의 순수성을 따지는 언설은 무의미해 보인다.”(김훈, 허송세월 232쪽)
겸손한 지혜와 연민이 배어있는 통찰입니다. 특히 사람의 경우는 삶 전체를 깊이 들여다 보면서 일체의 판단을 보류해야 할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에서도 지혜로운 통찰이 빛납니다.
“마음이 자세에서 드러나듯 몸가짐 또한 마음에 스며든다. 마음의 안정을 원한다면 먼저 몸가짐부터 정돈하라.”<다산>
“얼굴이 단정하면 마음도 경건해 지니, 옷매무새와 띠를 항상 단정 해야 한다.”<관자>
이 또한 겸손한 삶의 지혜이자 예의입니다. 결코 마음따로 몸따로의 삶이 아닙니다. 어제 교황님의 삼종기도후 강론중 일부말씀과 평화를 호소하는 메시지 핵심 내용 또한 우리 마음의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우리의 편견에 기초해 있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참된 믿음과 기도는 정신과 마음에 열려있다. 너희가 정신과 기도가 닫혀 있는 사람을 발견할 때, 그의 믿음과 기도는 참되지 않다. 마리아여, 우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믿음으로 듣고, 그분의 뜻을 용감히 실천하도록 도우소서.”
“평화를 위한 우리의 강렬한 기도를 새롭게 합시다. 특별히 우크라이나, 중동, 팔레스틴, 이스라엘, 그리고 미안마를 위해!”
교황님의 시야는 세계 곳곳에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의 자제력과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이 또한 겸손한 사랑의 반영입니다.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의 삶이 바탕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며 자신은 물론 제자들의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합니다.
주님은 분명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면서 오늘 지금 여기에 집중했음을 봅니다. 제자들은 몹시 슬퍼했다는 반응입니다. 예수님 또한 제자들의 심중을 이해하면서 일체의 판단을 보류한 채 이런 현실을 겸손한 침묵중에 깊이 담아뒀을 것입니다. 이어 성전세를 바치는 문제로 국면을 전환합니다.
주님은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주님의 자녀들이자 제자들이 성전세에서 자유롭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겸손히 성전세를 내도록 말합니다. 흡사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마태22,21)는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스타테르 한 닢을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여기서 물고기 예화의 자연이적은 처음부터 대담에 깔려 있지 않았고 후대에 첨부됐을 것이라 해서 생략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이적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해석을 한다면 하느님을 닮은 예수님의 초인적 능력은 곳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는 것일 겁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계시되는 자유롭고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 모습이 친근감이 가고 감동적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안에 갇혀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난의 현장에서 함께 하시는 현장의 하느님, 역사의 하느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바빌론 유배중 크바르 강가에서 만나는 에제키엘의 하느님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바빌론 유배중인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에제키엘 메시지의 핵심 주제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전조(前兆)가 되고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은 성전이 됩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의 극치이자 절정입니다.
바로 내가, 우리가 있는 지금 여기가 주님이 현존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온갖 피조물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의 영광이니 온세상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비가 시인은 고백합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장엄함으로 가득차 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분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계시하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눈을 열어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에제키엘 같은 묵시적 비전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볼 수 있다면 황홀하게 하는 아름다움에 에워싸여 있음을 알것이다.”
그대로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라는 오늘 화답송 후렴과 일치합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주님이 함께 계신 거룩한 성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겸손한 사랑중에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살게 합니다.
“너희는 주님 이름 찬미들 하라.
당신의 이름만이 홀로 높으시도다.
하늘땅 아득 높이 찬란하신 그 영광!”(시편148,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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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7)
빛은
스스로
밝다하지 않으며
다만
어둠 속 깊이까지
스며들 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높다하지 않으며
다만
우러르는 이를
보듬을 뿐입니다
땅은
스스로
넓다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이 깃들게
내어놓을 뿐입니다
물은
스스로
자유롭다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이보다 낮추어
흐를 뿐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며
다만
모든 이를 비추고
모든 이를 보듬고
모든 이에게 내어놓고
모든 이보다 낮출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니
그러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니
그러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도록
그러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도록
그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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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마태 17,22-23)
그분은 되살아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미래에 닥칠 재앙에 대해 말씀하실 때면 놀 그것을 구원의 행복과 긴밀히 연관시켜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재앙이 갑자기 닥쳤을 때 사도들이 겁먹지 않고 전부터 생각해 오던 마음으로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죽임당하신다는 사실이 그들을 슬프게 했다면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에 그들은 기뻐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슬픔, 더 정확히 말해, 그들이 몹시 슬퍼한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하느님에 관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에 관한 것만 생각한다고 베드로가 꾸지람 들은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스승에 대한 사랑이 커서 스승께 관한 불길한 일이나 굴욕적인 일을 들어 넘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오놀날의 주석학자들은 앞서 언급된 “의인”이 야곱이라는 데 견해를 함께 한다. 엑카르트는 야곱이 하느님 나라를 보았으며,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가 된 성령의 참 자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지혜가 주겠다고 약속한 재산은 바로 하느님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신이자 그분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다. 이 말은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처럼 광활하다는 뜻이다. “하느님 나라”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창조한 온 세계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 세계가 하느님 나라인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주 자체보다 훨씬 크다.(219)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유다 1,17-25
권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에게, “마지막 때에 자기의 불경한 욕망에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타날 것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저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로서, 현세적 인간이며 성령을 지니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찬송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서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하느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위엄과 권능과 권세가 창조 이전부터, 그리고 이제와 앞으로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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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17,24)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종교인의 과세가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종교인의 과세는 정의와 형평성에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에도 세금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22,17.21)라고 응답했다는 일화입니다. 여기서 황제의 것, 일명 카이사르의 것이란 다름 아닌 당시 통용 화폐,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은전을 말합니다. 또 다른 일화는, 오늘 복음의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17,24)라고 묻자, 베드로가 “내십니다.”(17,25)라고 답했다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베드로의 답변을 통해 보면 두 경우 다 세금을 내셨던 것 같습니다.
수난 예고와 성전세 납부에 관한 일화는 분명히 별개의 사안처럼 보이는데 왜 마태오 사가는 두 번째 수난 예고와 성전세 납부 문제를 의도적으로 서로 연결했는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마태오복음은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성전은 이미 불타 없었으므로 성전세 또한 납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임금들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관세나 인두세를 거두지 않는다.”(17,2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과 성전과의 관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느님 신앙의 표징이자 정점인 장소이며, 모든 율법과 예언의 집합소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 제관들을 제외한 모든 유다인은 만 20세부터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규정은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전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과 예언 위에 군림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인 당신에게 성전세를 징수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들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기 때문이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2,19)하고 말씀하신 의도도 이런 맥락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당연히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셈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때로는 실정법에 권위를 양보하십니다. 이는 불필요한 갈등과 문제를 야기하고 싶지 않은 의도도 있겠지만 아직 당신의 때가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당대 성전세는 이스라엘 은전 반 세겔이었다고 합니다. 스승님도 성전세를 낸다고 베드로가 대답했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17,27)라는 말씀을 통해 성전세를 내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사실 불교계나 개신교의 일부 스님들과 목사들을 제외하고 사실 많은 종교인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놓여 산다, 고 합니다. 개인이 할 수 없으면 소속 종파에서 대신 납부하는 방안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금은 형평과 정의의 맥락에서 접근해야 하며, 종교세는 결코 성역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시147,12.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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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사소한 것보다는 큰 것에다가 /
박윤식 [big-llight] 2024-08-11 ㅣNo.174958
우리가 자주 하는 말 가운데 ‘사소한 것에 목숨까지는 걸지 마라.’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도 큰일을 하려면 사소한 일에 걸려 일을 그르치는 때가 종종 있기에 그럴게다. 우리가 살면서 여러 문제에 부딪힐 때에 무엇이 본질인지를 묻는 게 중요하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가치는 반드시 지켜야하겠지만, 사소한 것의 이해관계는 꼭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될게 있을 것이리라.
‘어느 날 성전 세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당신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십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몬아, 너는 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은 자기 자녀들께도 세금 거두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의 ‘남들에게만.’이라는 답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 자녀들은 면제다. 그들을 비위를 건드릴 건 없으니, 낚시를 던져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봐라. 그러면 스타테르 한 닢이 있을 게다. 그걸 우리 몫으로 주어라.”’
예수님은 성전 세 납부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다. 당시 스무 살 이상의 유다의 남자들은 성전 세를 낼 의무가 있었기에. 먼저 예수님께서 세상 임금들이 세금을 자녀들에게도 거두느냐고 질문하시자, 베드로는 남들에게서만 받는단다. 물론 예수님도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나. 이는 예수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분께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리라.
사실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시기에 내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성전 세를 내라신다. 불필요한 오해로 큰 뜻인 구원 계획이 감히 어긋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게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신중하심에 감탄이 절로 인다. 당시 임금들은 이방인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성전 세를 내라는 재촉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 집을 위한 세금을 내실 필요가 없음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당신의 특권을 내세우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매우 신중하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시면서, 필요한 세금을 마련하시려고 권능을 이용하셨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 그리하여 십자가 죽음과 삼일 만의 부활을 위해 덜 중요한 가치를 희생하신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소한 일로 비위를 건드려 마찰을 빚고 싶지 않으셨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호수에 가서 고기를 잡아 그 속에서 은전을 꺼내 세금을 내라신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이렇게 기적 같은 이야기뿐이시다. 어째서 낚시로 잡은 고기에 성전 세 한 닢이 들어 있을까?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 세 몇 푼을 내려고 기적을 베푸셨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성전 세를 내려고 나름대로는 일들을 하라는 뜻일 게다.
고기를 잡아 팔면 세금 낼 돈이 생기다나. 이를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잡아 팔아서 그 돈을 세금으로 충당하라고 이르셨을 게다. 따라서 우리 역시 각자의 직업에 먼저 충실하자. 신성한 노동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다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다. 예수님의 이러한 지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무언가 일러 주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우리는 얼마나 기만하는지.
실로 많은 이가 사소한 일로 다툰다. 그 다툼의 대부분은 서로 이기려 인격을 무시하면서까지 고성도 지른다. 정녕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고 상대방이 이를 승복한다고 해서 결코 행복해지지는 않을 게다. 나의 이 작은 승리가 정녕 행복을 안기지 아니리라. 예수님은 끝내 우리를 사랑하셨다. 작은 것 같지만 너무나도 크신 그 사랑을 진하게 느끼면서 그분께 늘 감사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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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부터 두 주간 동안 평일에는 에제키엘서를 읽습니다.
에제키엘은 대략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기 오 년 전쯤부터 예언 활동을 시작하여, 멸망하고 십오 년쯤 지난 때까지 활동합니다.
그는 멸망 전에 사람들이 설마 예루살렘이 파괴되지는 않으리라고 믿던 때에 멸망을 선포하고, 멸망한 뒤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구원을 선포하여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거스르는 예언자였습니다.
처음 그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때는, 이미 바빌론이 한 번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여호야킨 임금을 비롯하여 꽤 많은 사람을 바빌론으로 끌고 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이 다만 일시적인 어려움일 뿐이라고, 유배 간 이들이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제였던 에제키엘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하고, 그래서 그도 유배를 가서 “칼데아인들의 땅”(에제 1,3)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칼데아인들의 땅’에서 주님의 말씀이 에제키엘에게 내리고, 그는 거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 독서의 네 생물들에게는 날개가 있고, 또 바퀴가 있습니다(1,15.21절 참조).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만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날개와 바퀴가 달린 어좌를 타시고, 어디라도 계시며 어디에서도 당신 말씀을 내리십니다.
‘칼데아인들의 땅’에 가서 살고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거기에서도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머지 않았습니다. 왜 성전이 무너져야 할까요?
성전 파괴는, 하느님을 성전 안에만 가두어 두는 사람들의 생각을 허물어뜨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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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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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도 성전 세를 낸다고
대답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 받는다는 것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예수님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생각을 넘어서서
예수님께서는 성전 주인의 자녀,
아니 더 나아가 성전의 주인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을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분,
당신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돌로 된 굳어진 건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사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것도 1년에 단 한 번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은 성전 세를 면제 받는다고 말씀하시면
당신이 성전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면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러게 되기에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성전임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결국 오늘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수난이 이루어집니다.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주장하시기 보다는
그들의 뜻을 존중해 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당장은 그들의 뜻이 맞는 것 같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이루어지기에
점점 더 의기 양양해지고
목소리를 더 높입니다.
심지어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항상 부활 예고와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뜻이 지금은 맞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예수님의 생각이 옳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내가 지금 주장하는 것
그래서 내가 얻은 그것
그것으로 나는 지금 기뻐할 수 있는지
돌아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내가 이긴 것 같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내 뜻대로 일이 진행된다고
마냥 기뻐하다가
나중에 불행한 결과,
이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상황을 맞이할 때
그 당황스러움은 어떠할지 생각해 봅니다.
물론 그때 가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더 불행한 결과는
내 주장을 하면서
결국 하느님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만족을 위해
지금 당장 내 뜻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느님과 멀어지는 결과를 선택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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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전 세를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성전 세를 바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와 관련해서 베드로 사도에게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오늘 보여주시는 기적은 대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독특한 이적 사화는 아마도 후대에 가필(加筆)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제정해놓은 편협하고 제한된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운 분이심을 강조하는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목숨을 걸고 성전 세를 징수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 세가 어떤 사람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구린 관례나 시궁창 냄새 나는 악습을 완전 개무시하는 한 표현이 지니고 있는 돈주머니에서 성전 제를 내지 말고 물고기 속의 돈으로 성전 세를 바치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세금 징수에 목숨거는 유다인들에게 큰 엿을 하나 먹이신 것입니다.
카파르나움 세금 징수원은 예수님께 성전세를 요구했는데, 사실 이것처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바치는 성전세를 수령하실 분은 사제나 랍비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세 징수원은 기가 막히게도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셨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명하신 것이 갈릴래아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바치셔야 할 분이 아니라 성전세를 받으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굳이 까칠한 유다인들의 비유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베드로 사도에게 꽤 웃기는 방법으로 돈을 마련해 성전세를 바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 중에도 한참 아래쪽의 왕인 세상의 왕에게 겸손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큰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한 고을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해주신 권한을 단 한 번도 남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바로 그것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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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전 세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24절) 유대인들은 모두가 똑같이 이 성전 세를 반 세켈을 바쳤다(탈출 30,13 참조). 여기서 반 세켈을 내는 것은 자신을 바치는 것을 상징하며 세켈은 구원받은 사람을 상징한다. 주님께서도 성전 세를 내라는 요구를 받으신다. 성전 세를 바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약한 우리가 하느님의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복음에서 한 세금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께서 성전 세를 냈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내겠다고 대답하고 예수께 그 상황을 보고하였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므로 다른 사람은 세금을 내어도 우리는 세금을 면제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셨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인 것으로서 신앙인은 타인에게 표양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금 낼 돈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복음에서 보면 낚시를 해서 첫 번째 잡히는 물고기의 입을 벌리면 은전이 들어있을 테니 그것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 물고기는 한때, 불신앙과 미신의 물속 깊은 곳에 사로잡혀 세속적 쾌락이라는 폭풍과 불행에 싸여 있었다. 이제 물고기는 말씀의 가르침이라는 사도들의 낚싯바늘과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1베드 2,9) 주시는 말씀의 낚시 그물에 의해 하느님께로 높이 올려진다.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취하여 세금으로 내도록 하셨다.
예수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기적을 이루신다. 우리는 모두 삶의 씁쓸한 혼돈으로부터 건져진 물고기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낚시 그물에 잡혀 온 물고기와 같다. 이 물고기들의 입에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다. 이 동전은 우리 영혼의 빛과 육신의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유대인들과 다른 민족들의 빚,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의 빚을 갚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이 세금을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탈출 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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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려면: 무분별의 지혜
몇 년 전에 아이들과 물놀이를 가서 한참 물을 뿌리며 노는데 구석에 앉아있던 고등학교
남학생들로 보이는 아이 중 한 무리에 물이 조금 튀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는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 듯 저를 째려봤습니다.
물놀이 시설에서 물속에 앉아서 얼굴에 물이 조금 튀었다고 해서 그렇게 기분 나빠 할 것이면 물 밖에 앉아있던가 물놀이를 오지 말아야 할 텐데 굳이 거기 앉아서 당연히 튀는 물에 기분 나빠하는 아이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어른에게 무례하기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저의 분별심을 잠시 접고 아이들의 자존심을 상해주지 않기 위해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학교 선생님처럼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심각한 자세로 돌아앉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을 남 탓을 하려고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심이 극도로 치솟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분별심을 없애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또 성전세를 내는 것도 어쩌면 자존심 상해 하십니다.
예수님은 임금의 아들이 궁궐에서 세금 내며 살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도 성전에서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라고 명하십니다.
당신이 가진 돈을 주시지 않고 물고기를 잡아 주라고 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주님께서 어떻게든 채워주신다는 뜻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한화로 2만 원 정도 하는 한 스타테르 동전을 문 물고기가 베드로가 던진 낚시에 잡힐 확률은 실제로 없다고 보아도 무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모르는데 뭐를 판단하니? 너의 판단을 멈추어라!”
사람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분별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분별심이 없습니다.
부모가 다 알아서 분별해주기 때문입니다. 분별심은 ‘나’가 자신을 지키려고 선을 긋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고 맹수와 함께 뛰노는 곳입니다.
나를 지켜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적을 때 분별심이 커지고 그 자아 때문에 사람은 고통 속에서 삽니다.
그러다 회개하지 못하면 천국 무분별의 세계에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는 장 발장과 자베르 경감의 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장 발장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혐의로 19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듯이 주교님의 무분별한 자비심으로 회개하여 신분 세탁하고 존경받는 시장이자 공장 소유주가 됩니다.
자베르 경감은 법과 사람은 변할 수 없다는 생각을 깊이 믿는 완고하고 냉혹한 경찰관입니다.
그는 가석방을 위반한 장발장을 자신의 도덕적 의무로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1832년 파리 봉기 동안 장발장은 혁명가들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자베르를 죽일 기회를 얻습니다.
이미 옳고 그름의 세상에서 발을 뗀 장발장은 복수하는 대신 이렇게 말하며 그를 풀어줍니다.
“당신은 자유롭고 조건이 없습니다. 거래나 청원도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비난할 것은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더는 없습니다.”
이 자비로운 행동은 자베르의 세계관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그는 장발장의 친절함과 그가 받은 자비와 법과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베르의 입장에서는 죄수가 그러한 연민을 보일 수 있고 자비가 법을 초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법에 대한 의무와 그가 받은 자비 사이의 내부 갈등에 대처할 수 없었던 자베르 경감은 궁극적으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센 강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합니다.
나를 품고 계신 분이 정의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분의 정의는 언제나 옳습니다.
그러니 나의 분별심을 그분께 봉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린이처럼 판단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 자비심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나를 지옥으로 만드는 자아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는 할 일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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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2-2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계시하셨다는 증언입니다.
<성전 세를 내신 일은 부수적인 일이고, 성전 세를 내는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성전 세 규정’은 탈출기 30장에 있습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이는 누구나 성소 세켈로 반 세켈을 내야 한다.
한 세켈은 스무 게라이다.
그 반 세켈은 주님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에게 예물을 올려야 한다.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로 주님에게 이 예물을
바칠 때, 부자라고 반 세켈보다 더 많이 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이보다 덜 내도 안 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속전을 받아, 만남의 천막 예식 비용으로 쓰도록 내주어라.
이것이 주님 앞에서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의 기념이 될 것이다(탈출 30,13-16).”
성전 세는 로마제국과는 상관없이 유대교에서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세금이었습니다.
당시에 성전 세는 일 년에 한 번씩 거두었고,
그 돈은 성전 유지와 관리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전 세를 내지 않느냐는 질문에 베드로 사도가
‘내십니다.’ 라고 대답한 것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성전 세를 내셨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계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이미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본 사도들은,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마태 14,33).
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의 말을 했습니다(마태 16,15-16).
그래서 ‘성전 세를 내신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계시하셨음을 기록한 것은,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을(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믿는 믿음은,
사실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0,30).
이 말씀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3)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니까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내셨을까?
27절에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러나 그들이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입니다.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다.’ 라는 번역은 좀 이상합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은 ‘죄 짓게 하지 않도록’입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정당한 직무 수행을 하는 중이고, 그리고 그 규정은 원래 하느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문제나 정결 예식 문제로 바리사이들과 충돌한 일이 많은데, 그 충돌은 바리사이들이 만든 규정들 때문이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모범적으로’ 준수하셨습니다.
또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것은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직무 수행을 존중하고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작은 기적’을 행하시는데, 그 기적은 “봉헌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의 것’은 없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잠시 내가 맡고 있는 것뿐입니다.
4)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내셨을까?” 라는 질문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왜 사람들 손에 넘겨져 죽으셨을까?” 라는 질문에 연결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인류를), 그리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일은 우리에 대한(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이(1요한 4,9-10)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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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세’에 대한 소소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예수님 일행이 카파르나움을 방문했을 때, 성전세를 걷는 이들이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던 것이지요. 세속의 권력자들이 말로는 국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 정작 본인은 자기 권력과 여러 꼼수를 동원해가며 그 기본적인 의무조차 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았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와 영향력을 지닌 예수님도 혹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닌지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겁니다. 성전세는 로마 총독이 걷는 제국의 공적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체적으로 걷는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은 나라 안에 살든지 밖에 살든지 간에, 성전세로 은 반 세켈을 내도록 되어 있었지요. 그 돈은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유형의 공간인 성전을 유지 보수하고, 성전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삶을 보전하며, 예식에 필요한 것들을 사는데에 쓰였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교무금’에 해당하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논쟁이 생기는 것은 예수님의 ‘신원’ 때문입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국민들에게서 세금을 걷지 자기 가족에게까지 그 세금을 부과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당신 아버지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에 관련된 세금을 굳이 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 성전의 참된 주인이 예수님이기기에, 오히려 그 돈을 받으셔야 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그렇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세를 기꺼이 바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비위를 건드리다’라고 번역된 부분을 원문 뜻 그대로 직역하면 ‘우리가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면 안되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사실 성전세를 걷는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에게 맡겨진 직무를 정당한 절차에 따라 수행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니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며’며 납세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자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결과로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라는 자도 결국 세속의 권력자들과 똑같다는 ‘오해’를 하게 될 것이고, 자기들을 곤란하게 만든 예수님을 원망하며 죄를 짓게 되겠지요.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기꺼이 성전세를 내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 우리 구원을 위한 모범이 되시려고 세례를 받으셨던 것처럼, 성전세를 내실 필요가 없는 분이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 배려와 사랑의 모범을 보이시려고 성전세를 내신 겁니다.
다만,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성전세를 내십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 그 입 안에 있던 돈으로 성전세를 내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직접 노동을 통해 벌어서 마련하신 돈을 낸 게 아니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그분의 신원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또한 당신을 위해 바칠 제물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야훼이레의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가 ‘봉헌’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봉헌은 ‘나의 것’을 떼어 하느님께 바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것’임을 되새김으로써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예수님의 배려와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다른 이가 나 때문에 죄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사랑과 선행을 실천해야겠습니다. 그 사랑과 선행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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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
에제키엘, 다니엘 서등은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묵시문학적인 환시를 전해 줍니다.
하느님의 존엄하신 어좌는 요한 묵시록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엄위하신 대전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에제키엘은 유다왕국 말기부터 바빌론 포로기 전반(前半)(약 기원전 593년 - 571년)에 걸쳐
활동한 예언자라 할 수 있습니다.
48장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메시지의 글은 이사야(66장)와 예레미야(52장)와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예언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유다인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 하느님을 외면하더니 결국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에제키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함락되도 맙니다. 유배 중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제였던 에제키엘은 미래의 예루살렘 성전과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악인들과 인접 제국들에 대해 하느님의 징벌과 예루살렘 파괴와 왕국의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유배 중에서 암울한 시대를 보내고 있는 동포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하느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빌론에게 수치스러운 나라 멸망을 자초한 정치가들에게서 회의를 갖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던져줍니다.
특히 위정자들이나 기존의 사제들과는 다르게 참다운 목자에 대해서(34장)
그리고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새 성전의 재건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장차 사람들 손에 넘겨서 죽을 것과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부활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은 스승께서 죽으실 것이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합니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성전세에 관련한 하신 행동과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사람이 베드로와 주님께서 성전세를 내는지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이 당신이신데 사실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성전세를 내야 한다는
설명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7)
주님께서는 당시 사회의 법 규정에 대해서 충실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안식일 법 자체를 부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의 적용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닌 율법 자체에 얽매이게 하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법 정신대로 하면 좋은 것인데, 자기를 중심으로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준법정신은 공동선과 질서를 위해서 지켜져야 하는데 그것의 바탕은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하는데 당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그 법을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바로 남에게 적용하고 가르치려는
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는 것에 대해서 하느님 아들로서의 특권의식이 아닌
사람들의 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지키셨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둘러보면 사람들에게 특별한 대접을 받는 공직자의 자세가 준법정신에
바탕을 둔다면 얼마나 그 사회는 신의가 있겠어요?
또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에서 삶을 산다면 그는 분명히 의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것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이 사람이 자칫 잘못하면
우쭐거리거나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세상의 풍조에 휩싸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서 기도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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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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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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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삶
<2024.8.12> 아침을 여는 묵상 (렘 49:7~22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삶❞
❚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지혜나 힘, 기타 어떠한 것도 막을 수 없기에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합니다.
✔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은 어떤 삶입니까?
➲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7~13절).
에돔에 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는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형제 민족이었으나,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대적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에돔을 향한 심판에 대해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에돔의 지혜로운 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7절). 에돔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에돔은 조상 때부터 품고 있었던 적대적인 행동으로 이스라엘의 환난의 때에 기뻐했고 주저하지 않고 침략과 파괴에 동참했습니다. 이러한 뿌리 깊은 적대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에서의 재난’(8절)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또한 적들의 군대가 에돔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할 것이고(9절), 적들을 피해 숨은 에돔인들은 발각되어 그 앞에 끌려 나오고 결국 그들이 숨겨놓은 제물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될 것(10절)입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으로 힘없는 자들만 남게 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 처할 것입니다(11절). ‘드단’(8절)은 에돔의 풍요의 상징이고, ‘보스라’(13절)는 에돔의 수도이며, 깊은 골짜기가 성의 삼면을 에워싸고 있어서 침공하기 힘든 요새입니다. 그러나 에돔에게는 유리한 점들이 많았지만, 그것이 결국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교만한 자는 넘어지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보배롭게 사용하느냐 아니면 내 자신을 파멸시키는 도구로 만드느냐 하는 것은 나의 마음 속에 교만과 겸손 중 어느 것이 자리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겸손하게 그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참 복된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14~18절).
하나님은 에돔을 공격할 자들을 이미 움직이게 하셨습니다(14절). 그래서 에돔을 열방 중에서 작아지게 만드시고, 사람들 중에 멸시를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15절). 에돔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새와 같은 지형 조건과 주변 나라를 두렵게 만드는 자신들의 용맹에 의지해서 자신들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교만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끌어 내리실 것입니다(16절). 그리하여 에돔이 끌려 내려온 것을 보는 자마다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고 호언하며 교만했던 에돔의 모습을 기억하고 비웃음 거리가 될 것입니다(17절).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본으로 완전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에돔이 완전한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은 예언하고 있습니다(18절).
에돔은 바위와 산꼭대기에 살면서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우리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우리는 높다, 모두 우리 발 아래에 있다’라는 교만이 그들을 속인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높은 바위 위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낮추시면 결코 높아질 수 없습니다. 철옹성을 이루고 있어도 하나님이 ‘끌어 내리시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해 주신 자리가 아니라면 내려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끌어내리시면 수치와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자신의 이익과 탐욕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기본 질서마저 깨뜨려 버리는 현실을 직면하면서 참담한 마음만 듭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면 하나님은 다시 올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19~22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나와 더불어 다툴 자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냐...’(19절). 어느 짐승도 잔인하고 용감한 맹수인 사자를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처럼 에돔의 견고한 성읍조차 바벨론 군대의 파상적인 공격을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에돔은 대적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포로로 사로잡혀 가고 모든 성읍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20절). 에돔의 넘어짐은 땅이 진동할 정도의 큰 파괴여서 멀리까지 넘리 알려질 것이고(21절), 하나님은 에돔을 파괴할 대적을 독수리에 비유하시면서 에돔의 멸망을 확언하십니다(22절).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가치에 전적으로 메달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들을 파멸시키는 도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대의 큰 학자요 촉망받는 지도자였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생각하였던 바울의 영적 지도력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람을 폐하시고 하시고 세우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섭리 앞에 바울과 같이 그리고 모세와 다윗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혜는 오히려 우리 자신을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정결함과 영적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므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폐하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섭리 앞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49:7~2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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