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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
막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막 6:1-6 / [고향에서 받는 냉대;마13:53-58,눅4:16-30]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다.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본래 자기 고향 사람인 예수가 지혜로운 말씀과 이적을 행하시는 데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3) `저 사람이 어디서 이런 놀라운 지혜와 권능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우리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는 목수가 아닌가?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와 요셉, 유다,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도 여기서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4) 예수께서는 그러한 고향사람들이 안타까운 듯이 `예언자는 어디서나 존경받지만 자기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5) 그리고 거기서는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다만 몇 사람의 병자에게만 손을 얹어 고쳐 주셨을 뿐, 아무 이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6)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시고 이상하게 생각하셨다. [열두 제자를 보내시다;마10:1-5,15,눅9:1-6] 예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가르치심(1-2)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무엇보다 먼저 가르치셨습니다. 그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장 분명한 자기 계시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안식일에 가르치셨습니다. 안식일은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공간적으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당시에 회당은 성경교육의 장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다른 오해를 살 필요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놀라운 말씀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지혜를 부인하려고 두 가지 질문을 하지만 아무래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3-4)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분에 관해 질문을 했습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직업에 관해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라고 묻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요셉의 아들’로 부르지 않고, 어머니 이름을 따서 ‘마리아의 아들’로 부른 것을 보면 요셉은 이미 일찍 죽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가정은 부친에 의하여 성경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만일 예수님의 부친인 요셉이 일찍 죽었다면 예수님의 성경지식의 기원은 막연해지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의심을 심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가장 먼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권능을 행치 않으신 예수님(5-6)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단지 약간의 권능 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권능을 베풀지 않으신 것 입니다. 하지만 은혜 받을 남은 자는 있습니다. 대부분이 예수님을 거절할 때도 소수의 사람이 예수님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는 소수의 병자들에게 예 수님께서는 병 고침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수의 불신 앞에서 소수의 신뢰에 대하여 사랑과 은혜의 구원을 나타내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에게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 향의 배척 후에도 계속해서 가르치시기 위해 발을 넓히셨습니다.
적용: 예수님이 고향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주시는 권능을 행하시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약 16년간 세계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은 프로 바둑기사 이창호 9단, 천재라고 칭송 받던 그의 인생은 노력의 연속이었습니다. “몰라서 둬버린 실수는 별 느낌이 없지만 경솔하게 불쑥 손이 나간 실수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창호 기사는 그 어떤 칭송을 받아도 자신을 조심하고 단속하는데 힘써왔습니다. 조심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마음을 잡는다’는 뜻입니다. 두려움이 위기에 대한 인식이라면 조심성은 그 인식 이후에 경계하는 마음가짐입니다.
< 설 교 >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
성흥모 목사
사람들은 누구나 다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한 두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요, 노후에는 고향에 가서 살고 싶어합니다.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노래하고 고향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관이나 한 인간으로서의 정서가 형성되는 것은 어린 청소년 시절인데, 어린 청소년 시절을 보낸 고향은 언제나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W.H 화이트]라는 학자는 {조직 속의 인간}이란 책에서 "현대 문명은 고향을 떠나는데서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화이트는 "고향을 등진 이러한 현대인을 조직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서 학문의 세계에 들어왔고, 고향을 떠나서 사회인이 되었으며, 도시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시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고향을 찾고 고향의 발전을 위하여 성금을 내어놓고, 성공한 사람으로 고향에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에게도 고향이 있었습니다. 눅3:23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삼십세면 삼십 세였다고 하지 못하고, 삼십 세쯤 되었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표준새번역에서도 "서른 살쯤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말에 "쯤"이라는 말로 번역한 호세이( )라는 말은 "거의", "대략", "...만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31세, 32세, 33세의 3년 간이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성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나심으로 알려진 동리요, 그렇지 않았으면 전혀 알려질 일이 없는 시골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단 한번도 나오지 않고, 외경에조차 나오지 않고, 심지어 탈무드나 요세푸스의 역사책에조차 나오지 않는 동리였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는데,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무시하였고, 더욱 산골짜기 동리 나사렛 같은 곳은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도시에 가면 성벽이 둘려 있는데, 이곳은 아주 시골이어서 성벽으로 둘려지지 않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요, 평화스러운 동리였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리는 성지 순례의 아주 중요한 장소로 여기고 있는데, 여기에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들을 낳을 것이란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 우물가에 희랍 정교회가 세운 수태고지(受胎告知) 교회가 있으며, 마리아가 살던 굴이 있는 자리에 로마 천주교회가 지은 수태고지 교회가 있는데,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예배당의 하나로 알아주는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30-50호 정도의 가옥과 400명이 안 되는 주민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아주 적은 마을에 불과하였습니다. 주로 농사짓는 사람들과 목축하는 사람들, 그리고 장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동리의 한복판 중심부에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회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회당을 출석하시면서 사적인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낭떠러지가 있는 언덕 위에 세워진 동리 나사렛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주로 활동하신 곳은 가버나움이었고, 오늘은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시는데, 여러 제자들이 함께 나선 것이었습니다. 고향에 가면 언제나 찾아가던 회당이 있고, 회당에는 여러 정다운 친구들이 모여있고, 동리에는 집에 가서 어머니를 볼 수 있고 동생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님이신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었으며, 예수님이 자라나신 고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젊은 날을 이곳에서 보내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고, 그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을 나사렛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크리스천을 '노쯔림'이라고 부르는데, 나사렛당원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과 나사렛 사람들간에 물리적인 충돌이 없이 배척을 받으셨지만, 일차 방문하신 눅4장에 보면 그때는 쫓겨나셨는데, 사람들이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나사렛의 주민들 가운데로 돌파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설교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은혜의 해 즉 희년에 대하여 설교하시면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엘리야 시대에 믿음이 있어 구원받은 사렙다 과부의 예를 들고, 선지자 엘리사 시대의 순종하여 고침을 받은 나아만 장군에 대하여 예를 들면서 동리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어내고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예수님이 나사렛을 방문하는데 두 번째 방문하신 사건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왜 고향을 찾아가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나사렛을 방문한 것은 아주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하기에 가장 힘든 곳은 그가 소년시절에 있었던 교회라고 합니다. 역시 의사가 개업하기 가장 힘든 동리는 자기가 자라난 동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을 포기하실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고향을 찾아가신 것은 과시하고 알아달라는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배척할 것이 뻔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고향 사람들,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으로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불신에 빠질 때에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끼신 것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불같은 영성으로 찾아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진리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이냐?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누가 말하고 있느냐? 진리를 보고 말씀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청년은 자기들과 함께 살던 사람으로 평범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셨고, 지금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데도 예수란 사람이 몇 달 동안 보이지 않더니 어디 가서 무엇을 얻어 가지고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씀을 해도 지혜롭게 말씀하는데, 그런 지혜를 어디서 얻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도 어찌됨이냐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놀라고 있으며,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잘 파악하고 정확하게 해석하시고 권위 있게 말씀하시는 그런 지혜를 어디 가서 얻어 가진 것으로 놀랐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말씀하시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으로 행하시는 권능도 목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지혜롭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하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선지자의 고향 같은 마음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너무 친하고 가까이에 있으면 은혜가 되지 않는 법입니다. 너나 나나 다 같은 한 동리 사람인데, 이것은 고의적으로 얕잡아보는 것입니다. 한 동리에서 자랐다는 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오히려 거침돌이 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고 한 것은 나사렛에서 이런 인물이 나서 반갑고 축하할 일이라고 하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경멸하면서 얕잡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도 그렇게 존경할 만한 가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그리고 누이들이 있었습니다. 다 그만그만하고 더 나을 것도 없었고,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한 동리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말씀이라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어떤 능력을 행하여도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습니다.
목수란 직업은 테크톤( )이라고 하여 나무로 공작하는 직업으로 "세우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관사가 붙어 있어 그 목수, 또는 큰 목수, 너무나 잘 알려진 목수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실성이란 말하지 않아도 잘 알려졌습니다. 회당을 짓고 수리하고, 동리의 집을 건축하고, 다리를 놓고, 때로는 집의 가구를 손질해주고 두루 알려진 목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회당장이라도 되었다거나, 율법 학교를 나와서 정식 율법교사가 되신 것도 아니요, 어느 유명한 율법의 대가에게 사사한 것도 아니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의 그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말씀을 증거하시는데,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정형편을 너무나 잘 알기에 배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문이 자기들 보다 특별히 더 나아서 존경할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집에 자식이 7남매 이상 되었는데, 요셉이라는 분이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보아 힘들게 살아가는 집안이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생 목수로 지내면서 이렇다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는데, 어디서 그렇게 달라졌느냐고 신뢰를 보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와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고, 지금까지 인간으로서 사적인 생애를 보내시느라고 그런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은 것뿐이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의 위대한 성인 정도로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도 선지자의 고향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것이 큰 걱정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다 익숙하고 친숙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예수님도 남자였으니 베다니의 마리아나, 막달라 마리아를 보고 이성으로 대하셨을 것이라는 등, 별의별 인간적인 계산으로 예수님을 평가절하하고 폄하하려고 합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나도 침묵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섬기시므로 위대하다는 진리를 실천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이 땅에 목수로 봉사하셨습니다. 부요하신 주님이 가난해졌는데,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땀흘려 수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수고와 아픔도 겪으시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고난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목수로 지내신 것도 자신을 낮추시는 것이었으며, 섬기러 오신 종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여 먹고 살아야 함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6절 말씀에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에 놀라셨다는 말입니다. 나사렛은 불신의 동리가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자라나시고 거니신 동리인데도 가장 먼저 배척하는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고 아끼시던 고향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권능을 행하셔서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싶으셨지만, 그렇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5절 말씀에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고 제일 먼저 보시는 죄는 불신이라는 죄입니다. 요한복음16:9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죄는 무엇일 것입니까? 롬3:10 말씀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무슨 죄를 볼 것이며, 누구의 죄만 물을 것입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죄는 불신의 죄만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있으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실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걱정하실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불신에 차 있다고 하면 하나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습니다. 죄 가운데 가장 나쁜 죄가 불신의 죄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불신이라는 죄는 아주 질이 나쁜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신 사회는 지옥을 경험할 것이요, 신뢰하는 사회나 가정과 교회는 천국을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믿음이라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사랑으로 나타나고 소망으로 이어지지만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씨를 뿌리는데 있어 왜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이 있고, 돌짝밭과 같은 마음밭이 있는 것입니까? 어떤 밭에서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는 것입니까? 이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나타내는 수치라고 봅니다. 길가와 같은 밭도 돌짝밭 같은 마음도,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도 기경하고 걷어내고 갈아엎어서 옥토가 되게 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하와이를 여행하면서 하와이 생강이 너무너무 크고 좋아서 그것을 한국에 가져와서 심으면 부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와이 생강은 사람의 머리통만 한데, 한국에 와서 심었더니 한국산이나 똑같은 생강이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같은 생강인데, 화산재가 풍부한 하와이 토양에서는 잘 자라지만 한국 땅에서는 잘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분의 마음밭이 어떠해야 더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강단에 비록 보잘것없는 사람이 섰다고 하여도 그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고 하면 그 앞에 우리는 겸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라는 백부장이 베드로 사도를 청하고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고 그는 이방 사람이요, 권력을 쥔 사람인데, 베드로 앞에 머리 숙여 절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까? "일어나세요. 나도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일으켜주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종과 성도들간에 서로 존경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선포될 때에는 어떠한 편견도 버리고, 우리의 가진 자존심과 교만도 버리고, 말씀을 경청하면서 우리 주님이 내 안에서 마음놓고 활동하실 수 있고,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선지자의 고향과 같은 불신과 교만과 편견이 있습니까? 나는 이래서 예수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생각들이 있습니까? 이것은 다 걸림돌이요, 그것 때문에 실족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동리, 우리 교회에서 먼저 말씀하실 수 있도록 환영하고 모셔들여야 합니다. 설교는 듣는 사람이 절반 일하고 설교하는 사람이 절반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곳에 회중이 반 설교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위기와 마음가짐은 설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벽이 되기도 하고, 기대 이하의 정말 빈약하고 모자라는 설교도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옥토를 준비하여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선지자의 고향 같은 불신과 편견과 교만한 마음을 다 내어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영접하여 능력이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들었지만 복음이 주는 생명과 능력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라고 하셨습니다.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매일 같이 성경 말씀을 대하면서도 혹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선지자의 고향 사람들 같은 마음이 있다면 살아 숨쉬는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을 단순하게 만나고 인사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우리 중심에 모시고 능력있는 새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편견에 사로잡힐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편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탐구하듯이 찾아야 합니다. 호기심 정도에 머물지 말고,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고, 반드시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겠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여 신앙생활에서만은 내가 1등 신앙을 가지고 알곡 같은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직업 / 이중표 목사
사람이 일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해야 하지만 특별히 일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과 함께 살다가 일과 함께 죽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요 일이 끝나면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일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일하는 것을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과 직업은 차이가 있습니다. 일은 직업을 포함하지만 일은 직업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직업은 삶의 필요를 채우고 욕망을 이루기 위한 준비 수단입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생산 수단입니다. 일은 생계 수단이요, 경제적인 유익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높은 욕구가 있습니다. 일은 자기 인격을 실현하는 기회요, 욕망의 세계를 창조하는 수단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일은 사람의 자취를 남기고 사람은 일 속에서 자신의 거할 고향을 만들어간다고 칼 막스는 말했습니다.
일은 삶에 만족감을 줍니다. 일로 삶의 의미를 얻습니다. 일은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는 숭고한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자기 일에 대하여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뱅쿠버에 가면 한국 사람들이 돈 벌어가지고 골프친다고 골프채를 들고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습니다. 뉴질랜드에 가도 이민자들의 얼굴에 생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면 생기가 있습니다. 거기는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홍성사에서 발행한 토니 캄폴러가 쓴 “일터의 사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세가지 질문에 진실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고 그럽니다. 첫째는 더불어 살만한 가치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두 번째로 나의 삶이 의미있기 위하여 나는 어떠한 종류의 일을 해야 하는가, 세 번째는 내가 종국에 다다랐을 때 무엇을 유산으로 남기고 싶은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가지고 살아야 그 인생은 성공적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성공한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의 성공의 표본입니다. 삶의 가치의 표본입니다. 삶의 모든 보람과 의미의 표본이십니다. 예수님은 목수라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30세까지 목수로 일관되게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은 아버지 요셉에게서 배운 것이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는 그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목수 일을 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목수는 헬라어로 ‘tevktwn’이라는 말인데 돌, 금속, 나무 등을 짜서 맞추는 건축가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목수 일을 어떻게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목수일을 배웠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목수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0세까지 목수 일을 직업으로 했고 30세에 조기 은퇴를 했습니다. 그리고 은퇴한 후에는 그의 사역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30세까지 목수일을 직업으로 하였고 목수 직업을 은퇴하고서 3년동안은 목수로서 배운 모든 기술을 가지고 전 인류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분들이 직업인으로 열심히 삽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노년의 여가생활을 꿈꿉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일생을 일해온 직업이 생계수단으로 끝난다면 이것은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목수이신 예수
예수님은 그 직업이 목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지만 양치는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농부는 아니었습니다. 고기잡는 법을 가르쳤으나 어부는 아니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쳤으나 의사는 아니었습니다. 많은 무리들을 가르쳤으나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목수라는 직업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한 인간을 세상에 내보낼 때 이미 계획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2-3절) 하면서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집에 태어났고 목수 일을 했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 4: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학교 교육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당시에 받는 교육은 특수층에 해당된 것이었습니다. 귀족들과 고위층의 자녀들만 랍비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하위 계급과 서민들은 교육은 받지 못하고 자기 아버지의 직업을 배워서 그것으로 대를 이어갔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를 배워서 농부가 되고, 고기잡는 사람은 고기잡는 기술을 배워 어부가 되고, 목수는 목수 일을 배워서 목대장장이는 아버지로부터 대장장이 기술을 배워 장인으로서 그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예수님은 랍비 학교를 다닌 일이 없었고 기껏해야 아버지 요셉에게서 목수 일을 배워서 목수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직업으로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목수 일을 하다가 목수로 죽었습니다. 30년동안 집 짓고, 가구 만들고, 물건 고치고, 그리고 수리하고 만드는 직업은 결국 30년의 생애였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공생애 기간으로 연장되어 더 높은 차원으로 목수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사람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물건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고장나고 부서진 인간 폐품을 모아 수리하여 재생시키는 일을 시작했고, 마치 산에서 쓸모있는 나무를 골라 물건을 만들 듯 가능성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제자로 삼아 2천년 교회사를 움직이는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갖고 있는 직업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낼 때 ‘너는 이런 일을 해라 너는 이런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또 직업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내 기질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요, 재능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부모로부터 태어난 모든 삶의 과정까지도 하나님이 간섭하신 것이기에 나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사는 것입니다.
목수로 죽은 예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 창조의 건축가로서 전능하신 목수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이 세상을 설계해서 창조한 목수요, 에덴 동산을 창설한 목수요, 천국을 건설한 목수입니다. 예수님은 고장난 우리들 하나 하나를 부르시고 깎고, 다듬고, 맞추어서 새롭게 만들어준 조각가였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일을 은퇴하실 때 생계를 위한 목수 일은 은퇴하셨지만 공익을 위한 인류의 선한 사업을 위한 목수 일은 계속 이어가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30에 은퇴했을까요? 그동안은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에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서 목수 일을 했지만 이제는 동생들이 성장을 해서 예수님이 돌보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이제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라 이제 나는 내 30년의 직업을 마감하고 남은 생애는 하나님의 일을 하리라”
예수님을 처형한 십자가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목수가 만든 것입니다. 결국 그 형틀은 예수님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만든 형틀에 매달려 인류 구원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목수 일을 하다가 그 목수의 직업으로 인류 구원의 재물이 되어 그 인생을 끝냈습니다. 이것이 직업이 지닌 신비입니다.
일생동안 직장생활해서 자식 공부시키고 자식에게 유산도 미리 주고 노년에 부부가 편안히 여행이나 하면서 여생을 보내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로서 그 생각을 고칩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치관과 비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목수로 시작해서 목수로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병들어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고로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무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가 만지고 일했던 연장으로 만든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리고 그가 사용하던 망치로 손과 발에 못이 박혔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늘 사용하시던 연장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있을 때는 목수라 무시를 당하시고 죽을 때에는 우리를 위하여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무시당한 목수가 만든 그 나무에 달려서 우리의 모든 저주를 다 담당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일생의 알파와 오메가가 목수였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목수 집에서 목수 기술을 배우고 마지막 그는 하나님의 목수로서의 일을 다 이루시고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살아계신 천국 목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이제는 천국을 건축하는 건축가로서 새로운 변신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건축할 집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만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수로 일하시고 자기 몸을 희생시켜 거룩한 교회를 세워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시 118:22)라고 말했습니다.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라는 말은 집 모퉁이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건물을 지을 때 마지막 끝에 돌 하나를 박으므로 서로 연결을 해서 버텨가는 것이 모퉁이 돌입니다. 모든 건물의 힘을 바쳐주는, 그래서 무너지지 않게 해주는 돌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건축의 모퉁이 돌이 되어간 그러한 위대한 건축가였습니다.
주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천국에 목수로 가셔서 우리의 집을 지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생애를 일관되게 그 직업으로 이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사이십니까 음식점을 하십니까 양복 재단을 하십니까 농사를 짓습니까 양계를 합니까 설계를 합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잠시 끝나지 아니하고 천국까지 이어가도록 그 일을 상상하십시오. 천국까지 내 직업이 올라갈 것을 상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소명 속에서 내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초대교회 많은 성도들이 순교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베드로도 로마에 들어가 순교했습니다. 수많은 사도들이 순교했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던 당시의 황제들이 수없이 기독교인들을 비난했습니다. “너희들이 저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를 믿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 로마의 막강한 힘과 권력을 너희들이 무시하고 촌사람 예수를 믿다니 너희들이 끝까지 예수를 믿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할 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나는 주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하고 죽기를 각오했습니다.
황제는 성도들을 향해 “그대가 믿는 나사렛 예수가 목수였다지 예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너희는 지금 내 손에 죽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너희를 도와주더냐” 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때 성도들은 또렷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여, 우리주 예수님은 목수이십니다. 땅에서도 목수의 아들이었고 목수로 사시다가 결국 하늘나라 목수로 가 계십니다. 지금 내가 황제 폐하에 의해서 죽으면 내가 들어갈 집을 짓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 머리에 씌워줄 면류관을 짜고 있습니다. 폐하여, 끝까지 하나님을 반역한 자에게 심판의 관도 짠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목수의 손에 의해서 어느 정도로 다듬어졌습니까 아직도 주님의 손에서 대패질이 안된 것이 있습니까 아직도 끌질이 안되어 있습니까 톱질이 안되어 있습니까 못된 가지를 자르십시오. 못된 인간성을 다듬으십시오. 전능하신 주님을 의지하고 “주여, 그 전능하신 손으로 나를 고쳐주시옵소서. 이 폐품같은 인간을 새롭게 만들어주소서.” 하고 우리 주님에게 부르짖으십시오. 우리가 안맡기니까 주님이 손대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은 나이가 60살이 되어도 청년 같습니다. 지금 60살은 옛날 30살 하고 같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30세 때 50세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살이 30살처럼 보이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은퇴한 후에 그 직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어제는 집사님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에게 도서비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도서비를 가지고 왔다기에 앉으라고 하고는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도서비를 줄 정도면 그래도 사업이 잘되는 분 같아서 물었습니다. “집사님, 사업 잘 됩니까?” “예, 그런대로 잘 됩니다.” “제가 좀 쓸 것이 있습니까?” 제가 이 말을 할 때 집사님이 좀 머뭇거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쓸 것이 있느냐구요.” 그래도 조금 머뭇거리셔요. “사업이 잘 되면 같이 쓰고 잘 안되면 혼자 쓰세요.” 혼자 쓰라는 말이 좀 마음에 걸렸던지 “조금 쓸 것은 있습니다.” 그래요. “지금 연세가 얼마입니까?” “55세입니다.” “그러면 후반기군요. 이제 전반기는 끝났으니 후반 게임에서 승리하셔야 됩니다. 그동안 살아온 직업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 합니다.” “목사님, 제가 30년동안 무역업을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용인에 있는 3만평의 땅 위에 노인복지센터를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6월말쯤 미국 사람들과 협의해서 건축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노인들 가운데 버림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이 사람들을 돌볼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장모님이 임종할 때도 아들이나 며느리들이 돌보지 않아서 제가 모시고 병원에 갔습니다. 그때 엠블런스를 타고 성모병원으로 올 때 운전 기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수십년 엠블런스 운전을 했지만 사위가 장모님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아! 노인복지센터를 세워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분은 30년동안 무역업을 하였기에 마지막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승화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업가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이제 은퇴했다’ 하고 주저앉지 말고 ‘내가 늙었다’ 좌절하지 말고 그동안 쌓아온 경륜과 그 노하우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십시오. 농사 짓는 사람은 한알의 씨앗을 뿌리듯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으로, 음식점을 하는 사람은 그 음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양을 줄 뿐만 아니라 배고픈 자에게 생명의 떡을 주는 사람으로, 의사는 일생동안 돈 벌고 살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아니라 의사로서 일하다가 가난하고, 헐벗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의사로 마지막을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스데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직업이 천국으로 이어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