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사랑 운명아~ (3)
죽는 게 나을 것 같이 어렵고 힘든 때가 숫하다. 심지어는 하나 해결하고 나면 바로 뒤에
문제가 기다리고 옆에서 또 인상 쓰며 기다리고 있을 때, 참 난감하다.
"뭐, 이 딴 삶이 다 있노? 팍 죽어 버리는 게 좋겠다"
그럴 때,
"얼러 죽어라. 죽어봐라"
하면 아무도 못 죽는다. 아까 말했제?
"사는게 호락 호락하지 않더라" 고.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운명의 신이 니 좋으라고 힘들 때 죽게 놔 두겠냐? 택도없다.
어쩧거나 살게 해 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먹거나 말 거나는 그때 니가 결정하게 되는
거다.
사람의 삶은 어려워도 다 살게 되어 있더라. 못 참거나 그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나는 많은 어려운 고비나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혀 봤다. 그때마다 어떻게 해서 든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나왔다. 지금 생각하니 빠르고 늦고 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결국은 내가 아는
방법으로 헤쳐 나왔더라. 책 몇 권을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결론은, 준비되어 있다면,
어떠한 난관도 결국은 헤쳐 나가게 된다는 말이다. 삶이라는 것의 종류는 너무 다양하다.
그러나 어느 삶 하나 얏 잡아 보거나 우습게 보거나 가치없이 볼 수 없다. 나이가 들어 많은
삶들을 기억해 봐도 정말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이란 것을 남기고 가더라. 그러면 나는?
이제부터 내가 내 생각을 제대로 쓰야 할 시간이다.
안녕 내사랑아~
사는 동안, 이런 난공불락 같은 난감한 코비드-19 사태가 올 줄은 나 역시 예상 못했다.
그러나 소설을 쓰다 보니 여러 곳으로 부터 알려지는 뉴스들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짜하라 제국의 침공-가제목" 이라는 제목의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인류에 대한 공격적 뉴스나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대부분 찌라시같은
가짜 뉴스들이 많았다.
그러나 세계적인 몇 몇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결코 흘러 버릴 수 없는 뉴스들도 있었다.
나는 한개의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온 몸으로 땀 흘리며 일하는 늙은 노동자이다. 그러나
소설을 위하여 자료는 모아 놓았다.
일이 터지고, 3월 중순부터 셧다운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아니다. 그들의 계획대로
작년에는 한국의 415같이 미국에서도 113이 터졌다. 주변이 모두 절망적이었다. 물론
이런 글을 싫어하는 "대깨좌"들이 곳 곳에 산재함도 느꼈다. 내가 그들과 싸울 군번은 지났다.
그냥 보고만 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났다.
나는 한달에 최저 약 CD4,000- 불 이상이 있어야 한다. 이 사태가 나기 전 큰 아들 집 사는데
CD30,000-을 주었고 2년 후 작은 아들 집 사는데 40,000-을 주었다. 모두 다 캐시로. 나는
벌어서 아내에게 모두 주고 2~3달에 한번 인디언 촌에 가서 일반 컨비니언스에서의 가격에서
1/3 인 CD150-정도 주고 3 카튼(30 갑) 을 사노라 아내하고 같이 가서 지가 카드로 결제한다.
나는 크레딧 카드를 만들지 않아 없다. 나는 술도 안 마신다. 가끔 아이들 모두 하는 외식도
아내가 다 감당한다. 돈에 대해서도 숨기는 것이 없는데, 하여튼 잘 모으고 잘 쓴다.
나도 나이 든 아내가 폼 나게 돈 쓰라고 더 번다. 나이든 여자는 돈이 있어야 어디에서 든 폼이
살아난다.
전에는 내가 세계로 많이 돌아 다녔다. 아내도 서울에서는 공장도 경영했고 도매 가게도 운영했다.
그리고 투자 이민 프로그램으로 5 나라를 두고 찾다 결국 캐나다에서 토론토로 정하고 왔다.
어떻게 하다 보니 IMF 와중에 아파트 3채를 헐 값에 팔고 땅만 두고 왔다. 와서 얼마 안되어
온타리오를 기반으로 21개의 소매점을 캐나다 전역에 열었다.
가장 빠른 시간에 이민 성공자 인가 했는데, 경쟁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국인들, 유럽인들
그리고 인도인들. 그때부터 가격 경쟁에 시달렸다. 중국에 새로운 견본을 보내고 얼마있지 않아
나는 물건을 받기도 전에 내 물건이 백화점 주변 매장에 널렸다. 지금은 더 하겠지만, 그때 중국
이민자들은 그랬다. 중국 현지 공장과 이민 온 지인들과의 관계가 바이어 보다 끈끈했을 것이다.
하나 하나 접기 시작하던 차 사나이라는 말 때문에 많은 돈을 이민와서 만난 지인에게 줬다.
그너마는 지워버렸다.
죽은 자식 부랄 만지기 그만 뚝, 했다. 그리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삶의 전쟁이
시작된거다.
대학 다니는 큰 애도 아르바이트, 작은 애도 아르바이트, 아내도 아르바이트. 그래서 캐나다에서의
본격적인 생존의 전쟁을 시작했다. 나는 자동차 부품 생산회사에서 프레스 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 전에 전화카드 장사도 했고 성냥 공급 장사도 했다. 그 사이 프라이빗 탐정 칼리지도 1년
다녔고 생약 (natural hubs & health food) 칼리지도 1년 공부했다. 신문사 사회부 기자도 했다.
그러나 가족 모두가 그 돈으로는 제대로 살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일한 프레스공 때는
시간당 CD12.50- 받았다. 한주 5일에 세금 공제 후 100불이었다. 토요일은 야간 경비로 100불 받았고 남들 쉬는 휴일 날 경비로 일해 150불 받았다. 한달에 CD2,000 불을 벌었지만, 택도 없었다.
건강식품회사 부장 때도 2,800불, 신문사 기자 때도 2,800불. 이걸로는 살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내 수입이 한달에 4,000불은 넘어야 이 콘도에서 애들 교육 제대로 받게 하며 살 수
있었다. 그때 이국 땅에서 눈물을 많이도 흘렸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니 알리가 없었다.
나는 이곳 캐나다에 한국서 부터 아는 사람이나 지인이 없었다. 우리 가족만 덩그러니 살았다.
퇴근 후 썬셋비치는 내 죽음의 장소 같았다. 공장과 바로 10분 거리에 있었거든. 하여튼 그때
처절한 심정을 잘 견디어 내였다. 내가 죽어서 해결된다면, 그때 지금 당장 열번도 더 죽었겠다.
그러나 내 운명의 신은 그렇게 쉽게 나를 죽게 두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전혀 보지 않던 토론토 스타 신문의 구직란을 보고 인터뷰를 하여 합격하고
다운타운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로. 수입은 가장 좋았다. 나도 놀란 것은 하루에
경비를 제하고 CD500- 이상을 번 날들이 꽤 되었다는 것이다. 월 평균 CD5,000- 이상이
되었다. 살았다. 큰 넘, 오타와 대학 마치고 TD bank, 작은 넘 쎄네카 칼리지 마치고 한국
정부관계 부서에 취업하고, 큰 넘 결혼하고, 손녀 생기고 지금 모게지를 바탕으로 3층 하우스
사고, 작은 넘 돌아와 이곳 신문사 취직하여 콘도 사고(역시 모게지 바탕으로. 아직 결혼
안했다) 하였다. 그 때도 아내는 위에 말했지만, 어떻게 모았는지 큰 넘에게도 몇 만 불,
작은 넘에게도 몇 만 불 현금으로 주었다. 침대 밑에서 그리고 팬티 넣어두는 서랍안에서
곳 곳에서 모두 CD100불 짜리의 현금을 꺼내 모아 주더라. 요술쟁이여~ 아내는.
안녕 내 사랑아~ 어느 듯 2년이 되었다. 니가 나를 가지고 놀고 제 자리에 갖다 놓고 한 세월이
이렇게 흐르고 있다.
3월 16일, 2020년 화요일 부터 코비드-19 펜데믹으로 1년 째 집에 있었다. 그 사이 일 하러
나가기도 했지만, 수입이 충분치 못했다. 그래도 어떻게 모았는지 아내 주머니에서 무엇 하나
밀리지 않고 잘 지불되었다. 힘은 좀 빠졌지만, 요술 팔은 작동을 계속하더라. 요즘와서
내가 알기 시작한 것이다. 굳이 묻지는 안고 있지만,
때 되면 아이들 (두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 에게 현금으로 빠짐없이 준다. 물론 미리
나에게 의논하여도 그 점에 대하여는 한번도 거부한 적이 없다.
지가 더 잘 알아서 할 것 이기에. 그래도 나는 속으로 걱정이다.
"저 할무이, 어쩔려고 저러냐?"
그러나 이내 곧 동조한다.
"잘 했오. 남도 아닌 새끼들인데, 할무이가 집안 주춧돌이니까. You are doing good job. So good 👍"
내가 기 살려줘야지. 누가 기 살려 주겠냐? 그렇게 살아 가고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안녕 내 사랑아~
이게 니가 아는 내 삶이다. 나는 감춘 것 아무 것도 없다. 니는 어떠노?
첫댓글 참 치열하게 살아오셨네요
강한 생활 력,대단한 열정과 의지, 노력,도전 의식이 놀랍습니다!
낯선 땅에서 어찌 그리
삶을 잘 개척하며 사셨나요
그 능력도 대단하세요
저는 낯선 동네만 가도 막막한데. .
님의 멋진 삶에 박수를 드리며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