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힐강 1893~1980 진무항론 《우공(贡出版)》 출판 취지에 관한 중요한 장편지
顾颉刚(1893~1980) 致陈懋恒论《禹贡》出版旨趣的重要长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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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
고힐강(颉刚(, 1893~1980) 진무항론(陳》论論) 《우공(贡出版)》 출판 취지에 관한 중요한 장편지
편지 한 통 네 쪽 (봉투 한 장 포함)
1934년 9월 21일 작
식문:배상여사:올여름에 서북쪽을 유람하다가 백령묘에서 화성(化城)으로 돌아왔는데, 뜻밖에도 가전제품을 받았다.가모가 병이 급하다. 북평으로 급히 돌아가면비보가 이미 왔다. 급히 달려가 상중하니 넋이 나가 버렸다.항주에 도착한 후, 아버지의 노쇠한 모습을 목격한 후, 형제자매가 없이 분임하여 섬길 수 있었다.수고스럽지만 휴가를 얻어 여기에 남기는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나 북평 방면에는 취급하는 일이 너무 많아 손을 놓을 수도 없다.이 때문에 한 달 동안 계획하였으니, 학교에 사교하는 수밖에 없다.전임 연구를 맡기는 것은 자유롭다.미지의 학교 중 당국이 나를 허락할 수 있습니까?성의를 베풀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리며 삼가 사의를 표합니다.대작 《명대 왜구고략》은 원고료 500위안을 받아야 하는데, 이미 백위안을 받은 것 외에 또 사백위안을 바쳐야 한다.방금 희백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서 (이후 《학보》 편집사무는 그쪽에서 후임으로 부탁 드립니다.) 그대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편지를 받기를 빌면 수령일을 묻거나 학교로 돌아가는 김에 연동원 용택에 가서 물어본다.만약 그쪽에서 수표를 끊었다면, 돈은 하연사 비서 용원 여사에게 대신 받으십시오.연대의 여러 여학생들 중에서, 구학의 근저는 여사를 제일로 삼는데, 이것은 여러 교사의 공언이다.그러므로 나는 한때 봉사 기관을 얻기 어려웠듯이, 문을 닫고 공부만 할 수 있다.이미 왜구를 연구하였으니, 바로 명사를 읽고 연구할 수 있는 문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전문 저서 한두 권을 더 내기를 바라지만, 그가 날로 진언하기 때문에 자연히 쉽다.인쇄 지불 문제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해결하였다.《우공》반월호에 아직 대저(大,)가 실려 있지 않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1월 안에 한 문장의 글을 줄 수 있습니까?이 수기는 원래 담계룡이 편집하였으나, 2권 5기부터는 당연히 막 처리하였다.만약 원고를 보내 주신다면 항저우 마파항 13번지에 있는 저의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이 간행물은 중국인에게 자국의 지리에 대한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사심은 연혁지리로 그 끝을 이끌어내려고 하였으나, 경제지리로 그 끝을 맺으려 하였으니, 변방, 생산, 수리의 모든 일을 다 논하고 있으니, 반드시 스스로 그 구국의 책무를 다할 것이다.존의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총망히 안부를 묻겠습니다.힐강경계. 23, 9, 21.
저술: 1. 《고힐강전집·고힐강일기(권3)》P238, 중화서국, 2011년.
2. 《고힐강전집·고힐강서신집(권2)》 P417, 418, 중화서국,2011년.
설명: 역사학자 진무항 상항.진은 진보진의 딸로, 진보침의 조카딸이며, 고힐강의 제자 조이다.샘이 맑은 아내.
이것은 구힐강 항일 전쟁 기간에 긴 편지를 쓴 것으로, 《우공 반월간》의 취지와 자신의 행지 및 진을 둘러싸고 있다.후한 원고료와 미래 계획을 세워서 작성하다.용경(희백), 용원(용경 남매), 담기샴에 대해 이야기하다(계룡), 1934년 9월 21일, 재재고힐강 일기와 문집.
편지에서 구힐강은 《우공》 반월호에 대해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본국의 지리에 대한 인식은 이미 구하였다.예, 또한 실제로 쓰이기도 합니다"라며 "사심(私心)은 연혁지리(革地理地理)로 그 끝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경제 지리로 그 실마리가 끝나자, 모든 국경 수비·생산·수리의 모든 일이 다 되었다.마땅히 논해야 할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위해서이다.구국(",國)의 책무를 다한다"고 말해 이 간행물에 대한 비전과 중시, 그리고 고씨 선비의 보국(報國)의 뜻을 알 수 있다.1934년 초, 구힐강과 담기샴이 준비하였다.우공 학회, 《우공반》을 창간하였다.월간. 이 편지에서 그는 천무항에게 원고를 약속하고, 이 간행물을 꾸준히 출판할 뜻을 세워 자신이 휴가를 내고 돌아오면 다시 사무를 인수할 것이다.
편지에는 구힐강의 계모가 세상을 떠나자, 연경대학의 교직을 사직하고 노부를 섬기려고 한다고 복설되어 있으며, 《연경학》을 서술하고 있다.보'의 사무는 용경께서 승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차구조가 《고힐강연보》를 편찬한 1934년 8월 8일 조목, 구평수철도국장 심창욕(沈昌之)의 초청으로 빙심(氷心) 부부, 정진탁(鄭铎氏)이 있다용경 등은 서북토에 이르렀다.목보와 대동 곳곳을 여행하다.16일 백령묘에 들러 계모의 병독가전을 받았다.즉시 항저우로 돌아가 분상하고, 노부께서 몹시 의기소침해지신 것을 보고, 마침내 휴가를 신청하였다.월, 연경교 수업과 《우공》 편집무는 모두 담기샴이 대리하고, 《연경학보》 및 통속 도서 편간사의 사무는 용경이 담당하였는데, 모두 본문과 합치되었다.따라서 후고힐강(後颉继续)이 연대(大大)에서 계속 교편을 잡았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학교 고위층은 그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구씨는 진무항(陳恒《)의 『명대 왜구 고략』 원고료, 업무, 원고 약정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이 글은 1933년 하버드 연경학에서 발표되었다사보에는 상반된 내용이 꽤 있다.원고의 나머지 400위안의 원고료를 고려하다.힐이 방금 그녀를 청하여 용경에게 돈을 찾아갔다.진무항은 1928년에 연경에 입학하였다대학 사학과에 사사하다.구힐강과 전목은, "일대의 재녀"라고 불리며, 구힐강은 "연대의 여러 여학생들 중에서, 구학"이라고 부른다.근저는 여사가 제일인데, 이것은 여러 교사의 공언이다.당시 진씨는 졸업이 얼마 되지 않았다.아직 적당한 직업을 찾지 못했는데, 구힐강수는 그녀에게 먼저 문을 닫고 학문을 연구할 것을 건의했고, 또한 명사에 전념할 수 있으며, 전문 저서를 많이 낸 후 구씨가 "진언하면 자연히 쉽다"고 말했다.이후 1935년 고씨가 북평연구원에 부임하자 진씨를 편집인으로 초빙했다.
GU JIEGANG AUTOGRAPH LETTER SIGNED TO CHEN MAOHENG ABOUT THE PUBLICATION OF YU GONG
Four pages
Dated September 21, 1934
Literature: 1. Complete Works of Gu Jiegang: Diaries of Gu Jiegang, , vol. 3, p. 238, Zhonghua Book Company, 2011
2. Complete Works of Gu Jiegang: Correspondences of Gu Jiegang, vol. 2, pp. 417-418, Zhonghua Book Company, 2011
Note: Dedicated to Chen Maoheng.
RMB: 50,000-80,000
顾颉刚(1893~1980) 致陈懋恒论《禹贡》出版旨趣的重要长信
图录号: 1138
估价RMB: 50,00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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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
顾颉刚(1893~1980) 致陈懋恒论《禹贡》出版旨趣的重要长信
信笺 一通四页(带信封一枚)
1934年9月21日作
识文:穉常女士:刚今夏游览西北,方从百灵庙回归化城,不意接到家电,家母病亟;赶回北平,则噩音已至。匆趋奔丧,神魂俱失。到杭州之后,目见家父衰老之状,而又无弟兄姊妹可以分任侍奉之劳,只得乞假留此。然北平方面,经手事务太多,又不容撇去。为此筹谋匝月,只有向学校辞教授职而专任研究,则去来比较自由,未知校中当局能允我否?承赐隆仪,不胜感激,谨申谢。大作《明代倭寇考略》,该得稿费五百元,除已取百元外,尚当奉上四百元。刚已函告容希白先生(此后《学报》编辑事务请彼继任),请照发。敬乞于接函之后,即去函询问领取日期,或乘回校之便,到燕东园容宅一询。如彼已开支票,则款可请哈燕社秘书容媛女士代领。在燕大诸女同学中,旧学根柢以女士为最,此为诸教师之公言。故鄙意如一时不易得到服务机关,尽可闭门读书。既已研究倭寇,即可徧读明史,寻求可以研究之问题。但望更出专著一二册,他日刚为进言,自然容易。至于付印问题,刚自当代为解决。《禹贡》半月刊中,尚未载有大着,甚为憾事。不审能于一月内赐一文否?此数期固由谭季龙编辑,但自二卷五期起当仍由刚办。如蒙赐稿,请寄杭州马坡巷十三号敝寓。此刊,刚必当维持下去,以唤起国人对于本国地理之认识,既以求是,亦以致用。私衷拟以沿革地理引其端,而以经济地理终其绪,凡边防、生产、水利诸事皆当论之,庶有以自尽其救国之职责。尊意以为然否?匆上,即请着安。颉刚敬启。廿三、九、廿一。
著录:1.《顾颉刚全集·顾颉刚日记(卷三)》P238,中华书局,2011年。
2.《顾颉刚全集·顾颉刚书信集(卷二)》P417、418,中华书局,2011年。
说明:历史学家陈懋恒上款。陈为陈宝晋之女,陈宝琛侄女,顾颉刚弟子赵泉澄之妻。
此为顾颉刚抗战期间作长信,围绕《禹贡半月刊》的旨趣、自身行止以及陈懋恒稿酬和未来规划而作,谈到容庚(希白)、容媛(容庚胞妹)、谭其骧(季龙),时在1934年9月21日,见载于顾颉刚日记和文集。
信中谈到顾颉刚对于《禹贡》半月刊认为“必当维持下去,以唤起国人对于本国地理之认识,既以求是,亦以致用”,且“私衷拟以沿革地理引其端,而以经济地理终其绪,凡边防、生产、水利诸事皆当论之,庶有以自尽其救国之职责”,可见其对该刊的规划和重视,以及顾氏书生报国之志。1934年年初,顾颉刚和谭其骧筹备禹贡学会,并创办《禹贡半月刊》。此信中,他向陈懋恒约稿,立志将坚持出版此刊,自己告假归来便将重新接手事务。
信中复谈到顾颉刚继母去世,拟辞燕京大学教职以侍奉老父,并将《燕京学报》事务请容庚继任。查顾潮编《顾颉刚年谱》1934年8月8日条,顾氏应平绥铁路局长沈昌欲之邀和冰心夫妇、郑振铎、容庚等至西北土木堡、大同各处旅行。十六日顾在百灵庙接到继母病笃之家电。即刻南归杭州奔丧,见到老父颓唐无比,遂请假数月,燕京校课和《禹贡》编辑事务均由谭其骧代理,《燕京学报》及通俗读物编刊社事务则由容庚负责,均与本信相合。由此后顾颉刚继续在燕大任教可知,当时学校高层并未接受其请辞。
另,顾氏又谈到陈懋恒《明代倭寇考略》稿费、工作和约稿等事。该文发表于1933年哈佛燕京学社社刊上,反向颇佳。稿件剩余的四百元稿费,顾颉刚请她向容庚支取。陈懋恒1928年考入燕京大学历史系,师从顾颉刚和钱穆,被其称为“一代才女”,顾颉刚谓“在燕大诸女同学中,旧学根柢以女士为最,此为诸教师之公言”。当时,陈氏毕业未久,尚未找到合适工作,顾颉刚遂建议她先闭门研究学术,且可专注明史,多出专著后顾氏“为进言,自然容易”。后,1935年顾氏至北平研究院任职,便聘请陈氏任编辑。
GU JIEGANG AUTOGRAPH LETTER SIGNED TO CHEN MAOHENG ABOUT THE PUBLICATION OF YU GONG
Four pages
Dated September 21, 1934
Literature: 1. Complete Works of Gu Jiegang: Diaries of Gu Jiegang, vol. 3, p. 238, Zhonghua Book Company, 2011
2. Complete Works of Gu Jiegang: Correspondences of Gu Jiegang, vol. 2, pp. 417-418, Zhonghua Book Company, 2011
Note: Dedicated to Chen Maoheng.
RMB: 50,000-8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