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17
4월4일[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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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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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3_52SGRKsbE
[서울대교구 윤호진 토마스데아퀴노(묵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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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무것도 아닌 우리 인간들과 끝까지 접촉하시고 소통하시는 주님!>
초세기 교회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여부는 참으로 큰 관건이고, 그에 대한 합당한 교리적 설명은 너무나도 큰 과제였습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했던 특별하고 기이한 예수님 부활 사건이었기에 일반 대중은 물론
예수님을 추종했던 사도들조차도 믿음을 지니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부활예수님의 태도는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합니다. 배신과 불신, 완고한 제자들의 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 앞에 발현하실 때마다 먼저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 뿐만 아닙니다. 치욕과 수모, 혹독한 고통의 흔적인 당신의 오상, 저 같았으면 절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손과 발의 깊은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만져보라고 손과 발을 내어주십니다.
“내손과 내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어디 그뿐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은 우선 급한 대로 자신들이 먹고 남은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또 다른 존재 방식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 어디에나 등장하시는 분입니다. 그까짓 물고기 한 토막 드셔도 되고 안 드셔도 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된 것임을 제자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보잘것없는 물고기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야무지게 잡수신 것입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 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에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 동반하시기 위해 또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의 혹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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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u_-UeR-b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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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기쁨을 위해 반드시 준비할 것: 진리(하늘의 뜻)는 은총(부활의 기쁨)을 담는 그릇>
영화 ‘나이야드’(2023)는 다이애나 나이야드(Nyad)의 2015년 회고록 『길을 찾아라』를 원작으로 합니다. 이 영화는 2013년 상어 우리의 보호 없이 쿠바에서 플로리다까지 수영한 최초의 사람이 된 미국인 장거리 수영 선수 다이애나 냐드(Diana Nyad)의 전기 드라마입니다.
나이야드는 책에서 본 한 문장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말해봐. 단 한 번밖에 없는 이 삶을 걸어서 네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약속을 취소하고 침대에 드러눕는 게 일상이 된 다이애나는 어느새 60세에 이르렀습니다. 그녀가 이루고 싶은 것은 이제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어렸을 때의 꿈을 보게 되자 생각이 바뀝니다. 30년 전에 쿠바와 플로리다 해협까지 110마일을 수영으로 완주하겠다는 평생의 꿈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이애나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코치의 지원을 받아 30년 전에 실패한 쿠바에서 플로리다 해협까지 110마일 바다 수영을 완주하겠다는 평생의 꿈을 다시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여기에서 그녀의 이름 ‘나이야드’가 중요합니다.
그녀의 이름 나이야드는 ‘그리스의 물의 요정’을 뜻합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지어준 그 이름을 굳게 믿고 도전에 도전을 이어가다 5번째에 성공하여 미국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나이야드가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동료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못할 도전을 꿈꿨고 그것을 위해 많은 전문가가 함께했습니다. 코치와 배와 바다 전문가가 필요했고 상어 퇴치 전문가와 독 해파리 전문가, 그리고 의료팀 등도 필요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꿈을 돕는 자에게 하늘도 돕는 자들을 보내주십니다.
도움은 은총입니다. 그 은총을 위해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방향입니다. 꿈이고 하늘의 뜻입니다. 하늘의 뜻을 들어주는 자라야 하늘이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운전도 못 하는 아이에게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주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은총을 주시는 분의 뜻을 따를 결심을 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사명을 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제가 ‘돈쭐’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던 때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 월세도 못 내고 있던 차에, 돈이 5천 원밖에 없는 형제에게 무료로 치킨은 내어줬던 치킨집 사장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형이 프랜차이즈 본사에 보낸 편지가 알려지면서 이른바 돈쭐의 주인공이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선행이 알려진 뒤 따뜻한 마음을 악용해 협박하거나 손찌검하는 사람들로 마음고생했습니다. 사장은 그 와중에도 조용한 선행을 계속 이어왔다고 합니다. 돈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사장이 가지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하면서 오히려 내어주는 기쁨에 중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돈을 주는 이유는 단지 그 형제에게 선행을 베푼 것만 보고서는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돈을 주어도 앞으로 계속 그런 선행을 할 뜻을 보고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이에게 나타나시고 은총을 주십니다. 내가 살아갈 방향, 곧 이웃 사랑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은총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자녀 앞에 그릇을 먼저 준비시키지 않고 음식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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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일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증인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이런 증인은 법정에서 볼 수 있고, 증인의 증언은 법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이런 증인의 증언을 공적인 장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5공 청문회’였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군사정권’의 무도함과 부당함을 증언하였습니다. 송곳 같은 질문으로 국민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밝혀낸 ‘청문회 스타’ 국회의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거짓 증언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수산나’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혔던 노인들은 수산나가 부정한 행위를 했다는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수산나는 억울하게 죽을 위험에 직면했지만 다니엘은 두 노인의 거짓 증언을 밝혀냈습니다. 수산나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악의 그물에서 벗어났습니다. 거짓 증언을 했던 노인들은 벌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에서 여덟 번째 계명은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념과 신앙’을 지키기 위한 증인입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투쟁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세대를 ‘386 운동권’이라고 했습니다. 3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한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대부분 586 세대가 되었습니다. 5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에 출생한 사람을 지칭합니다. 이들의 저항과 이들의 투쟁은 많은 희생을 초래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가 있습니다. 그밖에도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던 많은 분이 있습니다. 지금의 민주화는 그런 증인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많은 증인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증인은 스테파노입니다. 부제였던 스테파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300년 박해의 시간 동안에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런 순교자들을 특별히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의 복음 전파 없이 자생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던 한국 교회도 복음 때문에, 신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로서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러 가는 것은 우리 또한 순교자들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이 되는 데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이제 세상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회개 했던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교황이 되었습니다. 회개한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두 번째는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부당한 폭력 때문에 생길 수도 있지만 교회의 위기는 회개한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 주소서.’라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 부활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이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일의 증인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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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4,35-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고 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도 스승을 잃은 실의와 좌절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나누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 주신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서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9절) 하셨다. 제자들은 즉시 그분을 만져보았고, 잡아 보고 그분 숨결을 느끼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잡수시고 마시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말해 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b) 하였다. 부활은 상상조차 못 하고 실의와 의문에 차 있던, 부활하셨다는 소식도 믿지 않고 두려움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실제의 모습으로 다가오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안에서 죽음을 이기셨고 육체의 부패를 떨쳐 버렸음을 증명하셨다. 부활하신 몸은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몸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수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44절)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6절) 말씀하셨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47절) 하는 사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8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바로 사도로 선택된 이들이 하여야 하며,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를 알고 체험하는 우리가 증인으로서 전해야 한다고 하신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같이 체험하고 전하여 왔는가? 매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그 체험을 이웃에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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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엠마오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십니다. 제자들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놀라고, 의혹을 가집니다. 당연합니다. 예고를 하고 들어오셨어도 놀랐을 터인데, 대화 가운데 조용히 나타나시니 누구라도 놀랐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 당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다양한 감각(시각, 청각, 촉각, 미각)을 동원하시어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 만져 보아라. …… 말씀하시고 …… 보여 주셨다. …… 잡수셨다.” 무엇보다 손과 발을 보고 만져 보게 하심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분이 바로 이렇게 살아 계심을 확인시켜 주시는데, 이러한 확인을 통하여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연장선에 있는 사건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부활하신 모습이야말로 이 연계성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연계성은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케리그마(복음 선포)가 되어, 사도들이 선포하여야 할 내용의 핵심으로 정립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일의 증인이 된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제1독서)에서 준엄하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부활은 정신이나 영혼의 영역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이 보여 주듯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의 육신성을 우리에게 물리적으로 확인시켜 주십니다. 부활하셨어도 상처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계신 것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상처는 가리거나 없애 버릴 필요가 없는 소중한 생명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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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유령>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36-43)
1) 이 이야기는, “우리가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령이 되어 나타나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실제 몸으로 살아계시는 분이셨다.” 라는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하지만, 혹시 예수님의 유령을 만났던 것은 아닐까?” 라고 의심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심에 대해서 사도들은 “우리도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았는데, 그분은 유령이 아니라
분명히 살아계시는 분이셨다.”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은 유령이 아니라 살아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신 것도,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일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상처를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토마스 사도’ 이야기에서는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같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는데(요한 20,24-27), 여기서는 그게 아니라, 유령이 아니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2) 사도들은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을 곧바로 알아보긴 했는데, 유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서워했습니다. 사도들이 무서워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유령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라는 말은, “그들은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해서 몹시 무서워했고 두려워했다.”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사도들은 왜 유령을 무서워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본능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유령은 인간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 속해 있고, 살아 있는 인간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그 ‘다르다.’는 점 때문에 누구든지 유령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고 해도, 유령이 되어서 나타나신 것이라면 누구든지 무서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생전에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유령이 되어서 나타나면 누구나 다 무서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유령이라는 존재는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3)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4-27) 이 이야기에서는, 사도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자기들을 향해서 다가오는 ‘무엇’을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겁에 질렸습니다.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 때문에 놀라기는 했겠지만, 겁에 질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니, 무서워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무서워한 유령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존재, 그런데 사람의 힘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강한 존재입니다. <귀신보다는 사탄 쪽에 더 가까운 존재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을 향해서 다가오는 그 ‘무엇’이 주님이시며 스승님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4) 유령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죽어 있는 존재’이고, ‘생명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고, 생명력의 근원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미신을 믿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생명력 없는 ‘죽은 존재’를 섬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면서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령이 아니면서도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을 반복하셨을까? 사람들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부활 후에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방식으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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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말하여라, 마리아. 무엇을 보았는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더군다나 그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확신이 클수록 부활에 대한 확신은 줄어들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빈 무덤을 통해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또 제자들에게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셨고, 스승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이 살아 계심을 직접 보여주시고 그 사건의 의미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부활이라는 믿을 수 없는 초유의 사건을 접하면서 이제 사람들은 서서히 예수 그리스도 부활을 믿기 시작합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렇고 베드로가 그렇고 요한이 그렇고 엠마오의 두 제자가 그렇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감격해서 모여듭니다. 그리고 정말 부활하신 것 같다고 자신들의 체험을 나누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증언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이렇게 의심하는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제자 공동체에 모여서 그 때의 생생했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더더군다나 죽었던 사람이 여기저기 나타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하고 설왕설래할 뿐 확신에 차지 못하지요.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놀란 제자들은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시지요.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살아난 그 당사자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손과 발의 상처는 분명한 죽음의 표지이지만 동시에 부활의 표지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겁에 질려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음식을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24,41)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시며 그들의 불신을 확신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당신의 부활이 어떤 상상에 의한 부활이 아니라 실제 부활임을 드러내 주시지요.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교육하십니다.
구약성경 모세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며 당신의 생애와 활동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부활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를 하고 믿음의 삶을 살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눈과 마음이 열려 영원한 세상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사명을 내려주시지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확신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방으로 나가서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한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증언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온 몸으로 전하는 제자들의 활동과 그 활동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드러낸 기록서입니다.
열심히 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했던 기록이고, 그들이 죽고 난 이후에는 그것을 믿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전했던 역사가 바로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이지요.
믿을 수 없고 또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예수의 부활을 확신한 제자들이 지금의 그리스도교 역사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 천주교 신자는 11억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믿지 못하고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은 한 사건의 시작이 이천 년 역사를 이끌어 왔음을 알 수 있지요. 그 세계사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천 년 인류의 역사는 부활을 믿는 사람의 첫 번째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깨우쳐 줍니다. 바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라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이끌어내는 미사, 즉 말씀 전례와 성찬전례를 통해서 예수님을 모시고 체험한 우리에게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고 파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사명을 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첫 번째 사명이 바로 복음 선포임은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의 역사가 이천 년 그리스도교의 역사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나흘이 지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강론 때마다 힘주어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이웃에게 전하고 계시는지요? 많은 사람이 입을 봉한 채 닫힌 무덤처럼 지내고 있지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이, 또 다른 여러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인 양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면 과연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퍼져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것을 전하는 그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사도행전은 아주 명확하게 이를 전하고 있지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여실히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은총을 입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은총은 서서히 사그러들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놀라고 감동한 나머지 인생 자체가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유다교 신자였던 그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를 변절자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박해자로 그를 냉대하자 33년경부터 44년경까지 큰 업적 없이 지내게 됩니다.
물론 성경학자들도 그 10여 년 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뚜렷이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오로 사도는 고향 다르소에 은둔하며 지내게 됩니다.
불타오르던 바오로의 신앙은 성숙하기보다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바오로 사도를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바르나바가 불러들여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삶으로 바뀌고 예수님을 전하는 그의 행보에 성령께서 함께하고 계셨음을 우리는 사도행전과 여러 서간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계속 성장시켜 가려면 한 자리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성숙될 수 있고 그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체험하게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드러내시고 우리의 사명이 바로 당신의 부활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교 이천 년 역사의 교훈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첫 번째 사명이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전하며 더욱 깊은 신앙을 키워갔듯이 복음을 전하며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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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의 첫째 부분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한 저녁 식사 장면을 상기합니다. 그다음 루카는 각각의 주제를 통일시키는 두 단계 위에 이야기의 메시지를 배열합니다. 첫째 단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증거를 바탕으로 하여 제자들이 알고 있던 나자렛 예수님과 당신의 신원을 일치시키는 ‘변론’ 부분입니다. 둘째 단계는 주님께서 성경을 깨닫도록 제자들을 가르쳐 주신 부분입니다. 놀라운 것은, 다른 제자들이 엠마오의 두 제자의 말을 듣고 또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고 이야기하는 반면(루카 24,34-35 참조), 그들 가운데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그들이 본 대로 믿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점까지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셨으며, 불과 몇 시간 내에 묻히신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자명한 좌절 앞에서 이 몇 시간은 온갖 메시아 환상과 희망을 깨트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님을 유령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안에서 의심이 생기고 이런 의심에서 그들이 믿는 것을 가로막는 두려움의 망령이 생깁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살과 뼈를 가진 인간임을 분명히 해 주는 육체적 증거를 모두 제시하십니다. “나를 만져보아라.”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그분의 몸은 영광을 입으셨고, 이는 제자들이 처음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체험과 개인적인 만남을 통하여 그들을 찾아오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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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복음 선포>
오늘 우리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땅에 내려 오셔서 사랑과 진리와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사신 예수님을 만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합리적 사고로는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의 신앙 고백이다, 예수님 정신의 부활이다, 민중의 부활이다 등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셨는가, 아니면 단지 신앙 고백인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따져도 해결이 나지 않는 문제입니다.
다만 믿는 사람에게는 부활하셨고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부활하지 않았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이 자신의 삶에서 목격되고 현실이 되기 전까지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 사실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뛰어나가 전한 것도 바로 이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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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24,36)
언젠가 영원한 딴따라가 되고 싶은 박진영은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에게, “가수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고 노래를 들려주는 사람이다.”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설교자 역시 동일한 마음과 태도로 사람들에게 설교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체험한 사람의 말이 비록 어설플지 몰라도 체험한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고 진정성이 솟아 나오기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 듣게 되고 감명을 받습니다. 어쩌면 부활을 선포했던 사도들의 말씀도, 단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바를 들려주었기에 듣는 청중들이 감명받고, 사람들이 하느님께 회개하였다고 봅니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체험보다 더 좋은 설교는 없습니다.
자기 인식을 깨트린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24,35)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 있을 때입니다. 사실 동료들의 말을 전해 듣고도 다른 제자들은 쉽게 생각을 바꾸기가 어려웠고,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24,36) 하며, 부활한 당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신 것은,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24,37) 는 표현에 암시하고 있듯이,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부족한 믿음을 탓하기보다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24,38) 하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부활하신 당신을 체험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어쩌면 이런 일련의 과정은 보지 않고도 믿을 우리를 위한 체험학습이자 영적 교육의 기회로 삼으셨는지 모릅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이전의 예수님의 몸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정녕 같은 몸인가?’라는 의문이 일어나겠지요.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체험과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코15,42.44)라고 명백히 우리의 의문을 불식시켜 줍니다. 부활하신 몸은 분명 어제와 같지만, 어제와 전혀 다른 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으며”(24,40) 이를 보다 더 명백하게 하시려고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24,41) 하고 물으신 다음, 제자들이 건네준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24, 42.43) 이렇게 하신 다음,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 관한 성경 말씀을 들려주심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던”(24,45)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몸의 현현顯現과 성경의 확증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방점은 바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24,47.48) 하고 선포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결국 사도들이 선포할 내용이란 다름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이며, 이는 예수님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사람을 살리시는 분으로, 하느님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고 보살피며 충만하길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한 베드로는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이후 베드로 사도는 놀라운 변화와 함께 전인격적으로 성숙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체험은 베드로 사도의 존재와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선포 내용의 진정성의 보증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이 예수님을 3번이나 배신했다가 다시 용서받고, 자기중심적인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하느님의 어부로 다시 호출받고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예수님의 사명을 받들어 선포하는 베드로 사도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3,15) 그렇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존재와 활동은 바로 참된 증거이며 증언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 사도는 참된 부활의 선포자입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화답송 후렴/시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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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름답고 멋진 장소에 가시면 무엇부터 하십니까? 아마 감탄사가 먼저 나올 것이고, 그리고 이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기 위해서 사진도 찍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장소라도 자기 몸 상태에 따라 하지 않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10년 전, 남미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비행기 탄 시간만 하루가 될 정도로 먼 곳에 있는 곳이고, 이제 다시 이곳에 오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많은 체험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일정을 마치고 관광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페루 쿠스코에 도착했을 때, 울고 싶었습니다. 안데스산맥 사이의 해발 3,399m에 위치한 15세기에 세워진 고도시입니다. 볼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지만 사진 한 장 찍기도 힘들었습니다. 두통과 어지러움, 계속해서 붕 뜬 느낌과 소화 불량이 계속 제 몸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산병 때문입니다.
고산 증세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과연 아름답고 멋진 경치가 눈에 들어왔을까요? 사람들이 감탄사를 외치는 곳에서 저는 한숨만 내쉬면서 빨리 낮은 곳에 가고만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산 증세는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하룻밤을 묵고 나서는 다시 생생해졌고, 그제야 아름답고 멋진 장소가 눈에 보였습니다. 이제는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의 이해에 따라 달라지는 주변 환경에 대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 환경에 적응하고 바라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보인 것처럼, 주님께도 완전히 적응해야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방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자기들 역시 죽지 않겠냐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예수님께서 직접 3번이나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몰랐던 사건이 아닙니다. 3번이나 예고하셨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잊어버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이해가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는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을 환호하는 많은 군중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 역시 세상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한 군중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소리,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는 모욕적인 군중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하셨던 모든 말씀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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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증인>
루카 24,35-48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주님의 증인>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알려주시니
알고
아니
알려줍니다
아는 만큼
알려주고
알려주는 만큼
압니다
알려주심
앎
알려줌
갈림 없이
하나입니다
보여주시니
보고
보니
보여줍니다
보는 만큼
보여주고
보여주는 만큼
봅니다
보여주심
봄
보여줌
갈림 없이
하나입니다
들려주시니
듣고
들으니
들려줍니다
듣는 만큼
들려주고
들려주는 만큼
듣습니다
들려주심
들음
들려줌
갈림 없이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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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는 것이 힘이 되어야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사람이 있고, 드러난 사실 안에서 진실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안에서 그 의도, 본뜻을 헤아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존경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실은 물론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실뿐 아니라 진실을 모르면서 갖은 추측과 추정을 통하여 사실인 것처럼, 진실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말이 많습니다. 그야말로 떠도는 말, 입에 발린 말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 안에서 진실을 보는 지혜로운 처신과 절제된 침묵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황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부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 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책임을 감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미사를 도와주는 어린 복사가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어떤 색깔을 좋아하세요? 빨강이예요? 파랑이예요? 얼떨결에 하얀색! 하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는 여당도, 야당도 아니고 천주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몸을 알아보려면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보아라,” “만져 보아라.” 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 없었고, 주님께서 먼저 눈을 열어 주실 때까지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한결같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저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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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주님의 참사람이 되어-
어떻게 살 것인가?
주님의 참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섬기는 자세로, 배우는 자세로 깨어 겸손히 사는 것입니다. 눈만 열리면 주변 모두가 스승이요 배울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가르침과 깨우침이 되는 여러 예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이런 가르침에 유의하여 사는 이들이 주님의 참사람들이겠습니다.
1.역시 오늘 소개되는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사람과의 신의(信義)를 지키는 일은 먼 이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해야할 덕목이다.”-다산
“이익을 보면 의로운가를 생각하고(견리사의;見利思義), 위기를 보면 목숨을 바치며, 희미해진 약속이라도 잊지 않는다면, 완성된 인간이라 할 수 있다.”-논어
2.계속 되는 파스카의 축제와 더불어 만개하기 시작한 봄꽃들에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순간 떠오른 가르침이 정직입니다. 일 년 꼬박 기다렸다가 때 되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자연은 참 정직하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옥에서 수인 중 가장 무시받는, 사람 취급 못 받는 죄인들이 사기꾼이라 합니다.
정직, 효도, 우애를 조카들에게 가훈(家訓)으로 남기고 떠난 셋째 형님 생각도 납니다. 가훈 그대로 참 정직하게 살아가는 세 형제 조카들입니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 “정직이 가장 오래간다”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역시 ‘신의’와 더불어 마음에 새겨야 할 ‘정직’이란 덕목입니다.
3.낮은 자리 곳곳에 피어나는 제비꽃을 보니 23년전 써놨던 “절망은 없다”란 자작 고백시가 떠오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제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고 사랑스럽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하느님 사전에 없는 낱말이 절망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탄력좋은 삶, 희망의 삶이 바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4.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전임 베네딕도 교황님과 세상 떠나기 전 10년간 얼마나 깊은 우정을 나눈 삶인지, 또 얼마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겸손하고 지혜로운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베네딕도 교황님을 존경하고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깨닫게 되는 최근 인터뷰 내용도 감동적입니다.
“그분은 나에게 아버지와 같았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옹호했고 결코 간섭하지 않았다, 베네딕도 그분은 참으로 점잖은 분이였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제한된 그분의 움직임에서도 유익을 얻었다. 그분은 참 섬세한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은 약하지 않았고 강인했다. 그분은 참으로 겸허했고, 어떤 부담을 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분은 참 많이도 고통을 겪었다.”
두분 교황들에서 위대한 성인의 면모를 봅니다.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한결같은 상호존경과 신뢰, 겸손의 모습들이 우리 마음에 깊은 안정(安靜)과 평화를 줍니다.
5.한밤중 기상하여 휴게실에 가는 도중 게시판에 붙은 부고에 순간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독일 오틸리엔 베네딕도 연합회의 전설이 된 노트켈 아빠스의 부고 내용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께, 2024년 4월3일 로마에서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선종하신 사랑하는 노트커 볼프 아빠스님의 갑작스러운 선종 소식을 매우 슬프게 접했습니다. 노트커 아빠스는 1940년 6월 21일 그뢰넨바흐에서 태어나 1962년 9월17일 서품을 받았습니다. 1977년부터 2000년까지 성 오틸리엔 총아빠스, 2000년부터 2016년까지 세계 베네딕도회 수석아빠스를 역임했습니다. 기도 중에 노트커 아빠스를 기억해 주세요. 아빠스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전무후무의 약력을 지닌 불가사의의 탁월한 지도자 아빠스였습니다. 저보다 9세 연상이니 우리나이로 85세입니다.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경구가 떠오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Mortem cotidie ante oculos suspectam habere)
누구에게나 언젠가 맞이할 공평한 죽음이요,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참 귀한 선물같은 오늘 하루, 본질적 깊이의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무엇보다 주님 평화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은 유령이 아니라 영과 육을 지닌 참된 분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평화와 더불어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용서를 위한 회개의 사도로 중책을 위임받은 제자들의 활약상이 바로 오늘 사도행전에서 펼쳐집니다. 앞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이은 솔로몬 주랑에서 설교로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중 핵심 부분을 나눴습니다. 무지의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회개뿐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회개입니다. 온전히 자나깨나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린 회개의 삶이요, 회개와 더불어 선사되는 성령의 은총이, 믿음과 평화가 주님의 참사람이 되어, 주님의 증인이 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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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음의 과정>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복음의 끝부분에서 사도들은 이런 사명을 주님께 받습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증인의 사명을 주님께 받은 사도들이 불구자를 고쳐주며 주님의 명령대로 주님을 증거 하는 얘기가 오늘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는 매우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나타나셨을 때만 해도 이렇게 증거 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신에 차 있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확신과는 반대되는 모습이랄까 상태를 보입니다.
두려움, 무서움, 의혹, 놀람, 기쁨 등의 복잡한 감정 상태를 보이는데 특히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였다.”라는 표현이, 그들의 긴가민가하고 곧 반신반의하는 믿음 상태를 잘 표현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기쁘기는 한데 아직도 믿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믿음은 과정 곧 두려움과 무서움과 의혹과 놀람과 기쁨의 과정을 통과하며 성장하고 확고해진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두려움과 의혹이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합니다. 달리 말하면 두려움과 의혹이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는 겁니다.
우리 삶에서 아무 두려움이 없을 때 믿음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줄 존재 곧 구원자를 찾게 하는데 처음에는 그 구원자가 인간이었다가 차츰 하느님으로 바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역설이지요.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찾지 않을 것이고, 두려움이 두려움으로부터 구해 줄 하느님을 찾게 한다는 것이.
이것을 보면 우리가 당신을 찾고 믿도록 하느님께서 두려움을 씨앗처럼 우리 안에 심어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구원자로 믿으려고 하지만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과연 구원자신지, 그에 대한 의혹과 의심이 수없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의심 때문에 주님을 믿지 못하다가 두려움 때문에 다시 구원자를 찾고 믿으려 하고, 믿으려 하다가 다시 의심이 생겨 믿지 못하다가 두려움 때문에 다시 구원자를 찾고 믿는 과정이 반복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믿음이 확고해지는 과정이고, 그리고 이 과정의 정점에 성령강림이 있습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두려움과 의혹을 보인 사도들에게서 우리는 큰 위안도 받고 도전도 받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에게 아직도 두려움과 의혹이 있는데 사도들도 그랬다는 것이 현재의 나를 위해서는 위안이지만, 그러나 사도들은 이것들을 통과해 확신에 이르렀다는 것이앞으로 나아가야 할 나에게는 도전입니다.
아무튼, 사도들로부터 위안과 도전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두려움과 의혹이 아직도 있더라도 너무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사도들처럼 믿음의 과정을 가라고 도전과 격려를 받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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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48)
<제자들의 사명!>
오늘 복음(루카 24,35-48)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너무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그들 앞에서 식사도 하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이 온전한 육체의 부활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신 다음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
'제자들의 사명!'
'제자들의 사명'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곧 '나자렛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죄인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기에, '내가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아 회개하는 사람이 되고,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복음 선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복음 선포'는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죽고 부활해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는 진리를 먼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너를 부활로 이끄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사도 3,19)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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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MTCrTlVN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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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24, 39)
우리가
사는 곳에
십자가가 있고
부활이 있습니다.
생생한 아침에
생생한 부활의
말씀을 듣습니다.
함부로
말 할 수 없는
생명입니다.
살아있다는
사실에서
부활은
믿음이 됩니다.
기쁨도 슬픔도
살아있기에
생생한
소식이 됩니다.
생명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박힌
못 자국을
다시 만나는
시간입니다.
돌아보면
너무나 소중한
생명의
시간이었습니다.
정체불명의
유령이
산 시간이
아닙니다.
부활은 살아있는
평범한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생명의 시간인지를
일깨워줍니다.
부활은 이와같이
생명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밥을 짖고
빨래를 하는
손과 발의
정성이 바로
부활입니다.
생명을
흔들어 깨우는
부활입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의 생명을
만납니다.
우리에게
맡기셨던
십자가의 생명이
실은 가장 아름다운
부활의 생명입니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한
순간입니다.
뜨겁게
사랑하고
감사해야 할
부활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손과
발 또한
살리고
살아있음에 대한
응답이길
기도드립니다.
오늘을 기쁘게
어루만지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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