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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가 사무실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관에게서 과장님이 보고를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 받은 후에, 전날 새벽에 작성해 놓은 또 다른 보고서를 들고 박현호 과장실로 향했다.
슬하는 경례를 하고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박현호 과장에게 자신의 보고서를 건네었다. 슬하가 작성한 보고서는 이전의 보고서보다 내용면에서 상당부분의 양이 첨부되어 있었고, 박현호 과장은 그것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박현호 과장은 그 보고서를 꼼꼼히 읽고 난 후에 흡족한 모습으로 슬하를 바라보았다.
“이정도면 충분하네. 수고했네.”
슬하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박 과장은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하는 박현호 과장의 반응이 없어질 때쯤 질문을 꺼내었다.
“제게 주신 각 파일들에 삭제된 데이터는 복구 되었습니까?”
박현호 과장은 슬하의 물음에 순식간에 표정은 굳어졌고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잊지 못하였다.
“책 철입니다. 책 철에 굴곡이 있었습니다.”
박현호 과장은 순간적 당황함을 감추려하고 있었지만 아직 슬하의 말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나?”
“어디서도 듣지 않았습니다.”
아직 다소의 충격이 남아 있는 박현호 과장과 달리 슬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제게 주신 파일 5개 모두 비슷한 간격으로 책 철이 세 번 구부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파일의 내용은 이번 사건과 관련성을 찾아 볼 수 없는 것과는 달리, 그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 오랜 기간에 걸쳐 정리 되어졌다고 의심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 파일이 받기 전, 다른 자료가 첨부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장님께서는 제게 이유를 알려 주시지 않은 채 그 자료에 첨부되어있었을 법한 최근 자료를 요구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제가 받은 파일의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서 수집, 관리되었고, 기초자료와 근거자료가 제거된 상태에서 제게 넘겨져, 삭제 또는 유실로 인한 최근 정보를 대신해 써야 하는 상황으로, 그것을 작성해야 할 사람은 파일 뒤의 자료가 사라졌다는 것을 모르는 편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고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박현호 과장은 그러한 가정을 자신의 표정과 행동으로 슬하에게 확인시켜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것과 관련해 조사를 한 것인가? 자네가 말하는 그러한 가정만으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지는 안은데?”
박현호 과장의 시선에는 슬하에 대한 의심이 담겨 있었다.
“조사라기보다 생각을 조금 했습니다. 김동욱 경감님의 죽음. 그 이후에 이례적인 본청과 서울 경찰청의 조사와 자료 회수. 그리고 옆방의 본청 관계자들과 연관 지어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았습니다.”
박현호 과장의 생각은 슬하의 말의 흐름을 하나씩 따라 가고 있는 듯했다.
“김동욱 경감의 자살 직 후 언론에 발표도 하기 전에 본청과 서울청의 자료회수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입니다. 그것도 이번 사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컴퓨터는 물론 그동안의 서류와 메모 등 모든 데이터를 가져가기 위해 관할 부서 사람들 앞에서의 언쟁까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 자료의 중요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그 만큼 중요한 자료는 위험한 내용을 내포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요하기는 하나 그것은 자신들이 가져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자료.”
슬하는 회의실이 있는 방향의 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옆방 회의실의 여러 명의 사람과 그 보다 더 많은 수의 컴퓨터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번 사건의 분석과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전에 쌓여있던 자료는 분류를 통해 정리되어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데이터 분석 중에 나오는 파기 문서나, 자료들이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회의실 밖으로 단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옆방, 회의실의 본청 직원들은 사건에 관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서와 자료들을 복원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이렇게 작성해 둔 보고서 대신 다른 보고서를 내게 준 것인가?”
박현호 과장의 머릿속은 아직 많은 생각이 오고가고 있는 것 같았다.
“꼭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보고서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박현호 과장은 안도와 불안감이 공존하는 것 같았지만 안도의 마음이 더 커 보였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가지고 당황스러움과 의심을 내비치던 말투를 가다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일단 이 보고서로 자네가 피해 볼 일은 없을 것이네. 자네가 지금 내게 말한 것들과 일련의 행동들이 자네의 안위에 대한 걱정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호기심 또는 수사관으로서의 본능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가정은 이정도까지만 해 주었으면 하네. 나 역시 자네가 이해할 수 없는 업무지시는 더 이상 명령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박현호 과장은 슬하가 더 이상 말이 없는 것을 확인 하고 나가보라 지시했고 경례와 함께 뒤로 돌아 선 슬하에게 자신이 못 다한 말을 꺼내었다.
“자네는 훌륭한 수사관이네. 그리고 자네가 말한 대로 보고 누락은 단지 시간이 필요 했고, 그 필요한 시간이 지난 후에 지금처럼 내게 보고를 해 주었을 것이라 믿겠네. 그것이 자네의 판단에 의해 미보고 되거나 누락되는 일이 없이 말일세. 그리고 이러한 일은 다시는 없길 바라네.”
슬하는 대답 없이 짧은 목례를 하고 박현호 과장의 방을 나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슬하는 또 다시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슬하는 인터넷으로 뉴스들을 검색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최근에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정부의 대국민 담화와 함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시국상황으로 세상은 떠들썩거리고 있었고, 슬하는 그 외의 사건 사고 기사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새벽의 조용한 복도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슬하의 사무실 앞에 멈추어선 소리는 노크와 문이 열리는 소리로 그 전의 소리들을 변환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반쯤 열린 문틈으로 창완이 얼굴을 내미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선배도 한가한가 봐요.”
창완은 슬하가 사무실에 상주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거침없이 들어와 슬하가 침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낡은 소파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대기명령이 떨어져 여기에는 무슨 소식이 있나 와 봤더니 여기도 마찬가지인가 보내요.”
슬하는 창완이 문을 열고 자리에 앉는 동안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때지 않고 입 주위의 근육만 잠시 움직였다.
“수사 진행은?”
“아직 아무것도 없어요. 미제 사건으로 남을 판이에요. 목격자, 지문은커녕 족적 비슷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창완은 소파에 한 팔을 걸고 편안하게 기대었다.
“언론이나 사람들 말대로 사이코패스인지 뭔지 몰라도 지능범인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슬하는 창완의 말에 잠시 검색을 멈추었고 다른 생각에 잠기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뭐가요?”
창완은 모니터에 가려진 슬하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내밀고 있었다.
“범인이 사이코패스라는 거.”
창완은 뜬금없는 슬하의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이야기했다.
“사이코패스요? 선배도 그 소리에요? 이번 연쇄살인 사건이 사이코패스나 미치광이 소행일 거라는 이야기요? 아직 이렇다 할 용의자도 없는 상황에서 그런 범인에 대한 추측성 기사에, 괴담까지 이제 사이코패스라는 말만 들어도 지겨워요.”
“창완이 넌 사건 때문이건, 일상생활에서 이건 사이코패스라 판명된 사람을 직접 만나 본 경험이 있었나?”
창완은 한 숨을 내쉬며 말을 했다.
“요즘 사람들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살인 사건, 특히 연쇄 살인은 다 사이코패스라고 하는데 정작 프로파일러인 나도 만나보지 못한 사이코패스가 무슨 동네 시장에서 파는 반찬 가지 수 만큼이나 많은 줄 안다니까요. 저야 3년차 밖에 안 돼 그만한 시간도 없었고, 선배처럼 운 좋게 검거한 살인범이 사이코패스로 판정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정확히 말은 못하겠지만 이번 사건의 범인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고 배제 시킬만한 단서도 없지만, 그렇다고 사이코패스라고 단정 지을 만한 단선 또한 없는 것도 엄연한 사실인데 사람들이 너무 앞서가고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용의자가 아니더라도 하루에 사이코패스를 4명 만났다면?”
슬하는 다시 창완에게 질문을 했고 창완은 슬하의 말이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슬하 쪽을 바라보았다.
“용의자도 아닌데 사이코패스를 왜 만나요? 그리고 그 사람이 사이코패스인지 어떻게 알아요?”
창완은 슬하의 표정으로 질문의 의도를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슬하의 얼굴은 아직 모니터 뒤에 있었다.
“질문은 내가한 것 같은데.”
슬하는 창완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선배가 말하는 하루라는 시간이 명확하지 않지만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는 만남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사람이 하루 중 활동 하는 16시간 동안 매시간 한명을 만난다고 가정하면, 흔히 100명 중 한 명꼴이라고는 사이코패스를 4명 만난다는 것은 단순계산만으로도 1/100000000×16 그러니까 확율로 0.000016%이고,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더라도 모두 살인이나 잔인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흔히 우리가 말하는 폭력적 사이코패스를 만날 확률은 기하급수 적으로 낮아지겠죠.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확률적인 것이고, 좀 전에 제가 말한 대로 설사 그러한 낮은 확률로 만난다고 한들 PCL-R 검사나, 기초 소양검사, 심리 검사, 뇌파 검사까지 하지 않고서는 4명을 만났냐는 문제는 별도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고, 그것마저 확률로 따진다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정도?”
*6)사이코패스를 판별하는 기준 테스트 중 하나.
창완은 슬하의 강압에 의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을 하다가 이내 장난스러운 말투로 바뀌고 있었다.
“만약 선배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그 만나 4명의 사이코패스 중 저도 한명만 소개해 주세요. 책에서만 나오던 그런 인물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연구 좀 해보게요. 하하하.”
창완은 한동안 자신이 한말에 혼자 웃다가 슬하의 질문이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단서라도 잡은 거예요?”
“아니.”
슬하는 짧게 대답하고 자신의 책상에서 일어나 창완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고, 아직 소파에 늘어져있는 창완을 향해 말을 했다.
“내일 이번 사건에 대한 자료를 모두 복사해 가져다줘.”
창완은 슬하의 말에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다는 것처럼 기대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가 경력은 미천해도 이상한 사건을 많이 다루어 봤잖아요. 그런데 이곳에서처럼 똑같은 사건을 두군 대서 나누어서 하는 것도 그렇고, 분명 여기도 수사본부가 있는데 선배 방에는 아무런 자료가 놓여있지 않고, 그렇다고 옆 회의실 팀하고 공조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제가 있는 수사본부에서도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여기서도 제가 있는 쪽에서 무엇을 하는지 관심 없는 것 같고, 이번 사건은 사건 자체도 수사 진행도 둘 다 너무나 이상한 것 같아요.”
“넌 그런 것을 참 빨리도 알아차리는 것 같다. 그게 너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슬하는 탁자위에 발을 올리고 있었고 창완은 슬하의 놀림 섞인 말투에 반응 하고 있었다.
“뭐에요? 아는 거 있으면 선배 혼자 알고 있지 말고 저한테도 말 좀 해줘요. 이번 사건은 단서를 찾는 것도 쉽지 않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고 이래저래 답답해 죽겠어요.”
“나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
슬하는 의자에 더 깊숙이 기대었고 창완은 슬하에게 정보가 있으면 알려달라며 실랑이를 벌였지만 창완에게 돌아오는 것은 같은 말뿐이었다.
“내일 자료나 빠짐없이 챙겨와.”
슬하는 창완과의 실랑이를 끝마치려 했고 창완은 슬하의 그런 강압적 어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대기 중이라 해도 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수사본부가 돌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도 할 일이 많다고요.”
“아마 내일까지는 수사본부가 돌아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건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꺼야.”
슬하는 달래듯 이야기했고 창완은 사무실을 나서는 슬하에게 채차 들은 정보라도 있냐며 뒤를 쫓아 나서고 있었다.
사회적 다른 뉴스거리들로 기자들의 수는 많이 줄었지만 바쁘게 오가는 경찰들과 민원인으로 경찰서는 여전히 분주했다. 슬하는 이제 조용하다 못해 적막해 보이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제흥동 연쇄살인 사건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컴퓨터와 책상 그리고 소파와 테이블만 놓여있던 사무실은 어느새 화이트보드와 책상위에 사건 파일들로 덮여 있었고, 슬하는 현장사진과 정황자료들을 이곳저곳에 붙였다, 띠었다를 반복 하면서 바쁜 손놀림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문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와 함께 우반장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잠시 하던 일을 멈추었다.
우반장은 슬하의 방을 둘러보면서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파일을 슬하에게 건네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직접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슬하는 정중히 파일을 건네받고 겉장을 펴보며 우반장에게 잠시 앉을 것을 권했다.
“아닙니다. 지금 대기 중이라 애들 혼내는 것 밖에 할 게 없고, 어떻게 수사하시나 궁금하기도 해서 들렸습니다.”
우반장은 다시 한 번 슬하의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사건 자료도 전부 복사해주시고 이렇게 부탁드렸던 자료도 받아 볼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슬하는 건네받은 파일을 덮고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을 했다.
“다 범인 잡자고 하는 일인데요.”
우반장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했고 슬하는 마실 것이라도 찾으려 두리번거렸지만 우반장의 사양하는 손짓에 빈손으로 자리에 앉았다.
“김동욱 과장님 데이터는 경찰청에서 가져가 지금 서에 남아 있는 것이 없고, 그 자료는 제가 작성한 보고서와 개인적으로 모아두었던 자료들입니다.”
우반장은 별 내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슬하는 우반장에게 재차 감사하다는 표시를 했다.
“슬하 형사님은 이번 사건과 마포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신 겁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예전에 김동욱 경감님이 어떻게 수사를 했는지 참고하고 싶어서 요청 드린 것입니다.”
우반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이트보드 쪽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같은 서에서 근무했다고는 하나 그 사건 이후, 이번 사건을 맡기 전까지 같이 수사를 하게 된 적은 없어 자세히 안다고까지는 말 할 수는 없지만, 수사 능력에 있어서는 대단한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그 사건은 저희 관할 소속도 아니었는데 김동욱 경감님 때문에 저희에게 이첩될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사건을 경과를 보니 이첩 된지 보름 만에 범인을 잡으셨습니다.”
슬하는 약간 놀랍다는 표현으로 문장의 끝을 올려 말을 했다.
“네. 그때 형사들은 사건파악하고, 증거자료를 수집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김동욱 경감님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사건을 혼자 정리하고 사건현장에 며칠씩 왔다 갔다 하고는 용의선상의 사람들을 간추려 냈습니다. 결국 당시 저희 팀은 그 몇 명으로 추려낸 사람들을 탐문수사 하고 행적을 조사하고 나서 범인으로 보이는 용의자를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건 현장은 보전이 잘 되어 있었습니까?”
“대부분 가정집이라 초동 수사가 엉망이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워낙 시간이 많이 흘러 훼손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이번엔 슬하가 머리를 끄덕였고 우반장은 다시 피해자 사진이 붙어있는 화이트보드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슬하는 무언가가 우반장의 눈길을 끌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반장님은 저 피해자 사진이 신경 쓰이시는 것 같습니다.”
슬하는 고개를 돌려 화이트보드를 보며 말을 했고 슬하의 말에 우반장은 급하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었다.
“아닙니다. 조금 특이해서 바라보았습니다.”
우반장은 슬하의 의문스러운 얼굴에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연쇄살인 사건일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사건의 정리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는데, 저기 보드 판에 피해자 사진은 사건의 시간 순서대로 배열이 되어 있지도 않을뿐더러, 몇 장은 다른 피해자 것과 섞여있어 계속 눈이 간 것입니다.”
슬하는 그제야 우반장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있었다.
“보통은 저도 시간 순서대로 배열 하지만 때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고자 저렇게 배열 할 때도 있습니다. 시간의 변화가 아니라 욕망의 변화를 가정해 배열해 보고 있었습니다.”
“욕망의 변화에 의한 가정이요?”
우반장은 생소한 단어라는 것처럼 슬하에게 되물었고 슬하는 자신의 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통 반장님께서는 범인을 잡고 나서 직접 조서를 꾸밀 때 가장 어렵거나 중요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글쎄요.”
우반장은 슬하의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을 했고 신중히 대답을 하고자 했다.
“동기. 동기가 사건에 가장 힘든 부분이니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우반장의 고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슬하도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 나온 듯했다.
“반장님께서 범인의 조서를 꾸밀 때 동기가 가장 어려운 것은 그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애매하거나, 모호한 경우도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동기라는 것이 때론 너무 단순해서, 때론 너무 복잡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에는 동기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동기에 대해 자각하고 행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무의식중에 동기가 부여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범죄와 연관 지어 그 범죄의 죄목과 함께 주된 동기를 찾아내고 명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동기들이 다수가 있다면 그것을 굳이 하나의 범죄에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죄를 그 범인의 삶 중에 한 일부분이라고 생각 할 수 있고, 그 동기라는 것은 범죄의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행동으로 성립될 수도 있다고도 생각되어 집니다.”
우반장은 슬하의 말을 경청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슬하는 사건 사진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연쇄살인 범은 살인이라는 범죄를 반복해서 저지릅니다. 하지만 그 동기가 하나로 살인이라는 범죄로 귀결 될 수 도 있지만, 각기 다른 동기와 다른 욕망의 결과물로 살인이라는 하나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 이번 사건 범인이 한가지의 목적이 아니라, 각각 그 상황에 따라 다수의 자신의 욕망에 의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라면 시간의 구성보다 각자의 살인을 한 동기, 또는 자신이 이러한 살인으로 얻고자하는 궁극적인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반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식 전환에 잠시 생각에 잠기었고 슬하가 말하는 이야기의 귀결이 이해 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까 슬하 형사님 이야기는 쉽게 말해 사람이 때로는 물을 먹기 위해서,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잠을 자기 위해서처럼 각기 다른 이유로 살인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의 가정일 뿐입니다. 반장님께서 물을 먹기 위해, 화장실을 가기위해서라 말씀하신 것은 굉장히 단순한 예로 드셨을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누군가를 가두어놓고 물을 안주고, 용변을 인위적으로 막는 사람이 각각 있다면, 인간의 한계치에 도달 했을 시에 최후의 방법으로 자신 욕구를 막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슬하는 우반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황당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아닙니다.”
우반장은 변명하듯 대답 했지만 이후 말에서 진지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생각지 않던 부분이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슬하 경위님의 말이 어렴풋이 공감되기도 합니다. 강력계에 있다 보니 여러 범죄를 다루지만 모든 상황이 전부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요즘 같이 사소한 분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마 살인까지 종종 일어나는 현실을 마주할 때면 각각의 사람들의 살인에 대한 임계치가 다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람마다 각각의 동기나 과정으로 생각해 본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뚜렷한 단서도 없고 여러 관점에서 다양하게 접근해보고 그곳에서 공통점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내고 있었다가 요즘 들어 다시 생각나는 계기가 있어 이렇게도 고민해 보고 있었습니다.”
슬하는 아직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답답한 마음에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을 했 고, 우반장은 그런 슬하를 이해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아직 슬하의 말을 곱씹으며 나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듯했다.
사무실은 잠시 조용해졌고 침묵이 흐르는 사무실을 인지한 우반장은 빠져있던 자신의 생각의 정리를 뒤로 미루고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슬하는 자리에서 이러나는 우반장을 붙잡는 듯 말을 꺼내었다.
“반장님께서는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김동욱 경감님과 같이 일하지 않으셨다고 했는데 김동욱 경감님은 강력계 소속 아니었습니까?”
“네. 맞습니다. 하지만 주로 외부 파견이나 강연이 많으셨고 그렇지 않을 때는 지금 저희가 수사본부로 사용하는 곳에서 혼자 범죄자 연구를 하고 계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소속은 강력계였지만 주로 수사과장님하고만 업무보고가 이루어졌습니다.”
“네. 그랬군요.”
우반장은 슬하와 다시 한 번 인사를 나누고 방 밖을 나섰고 슬하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려지고 있었다.
슬하는 우반장이 나간 후에 잠시 생각을 하다가 책상에 앉아 건네받은 파일을 들쳐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반장이 눈을 때지 못하던 화이트보드의 피해자 사진을 바라보며 혼자 말로 중얼거리며 다른 생각에 잠기었다.
‘감정과 이성은 서로 상보적 관계이다.’
슬하는 과거 김동욱 경감의 강의를 떠올리고 있었다.
“여러분들은 프로파일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냉철한 이성적 판단력과 분석력?”
김동욱 형사는 강단 위 무대에서 100여명 되는 강연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강연에 참석하는 학생들은 김동욱 형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기 위해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학생들 중에는 슬하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로파일러에게 냉철한 이성적 판단력은 필수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중요한 만큼 프로파일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입니다.”
학생들은 저마다 김동욱 형사가 말하는 감정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그리고 있었고, 김동욱 형사는 그러한 학생들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학생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로팔일러에게는 이성과 감정은 대척의 관계라기보다는 상보적관계입니다.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이성보다는 감정적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설사 화이트칼라 범죄와 같이 이성적 범죄라고 해도, 그 속의 내면에는 인간의 욕심, 욕망이라는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존속살인, 연쇄살인과 같은 흉악한 범죄 역시 표면적으로는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정상적 인간의 행동의 범주에 넣기에는 끔찍하다는 이유로 감정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반대로 이성적인 범죄와는 더욱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성적 범죄와 비이성적 범죄에서 그 사건만의 감정을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냉철한 분석과, 판단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프로파일러의 역할이라 할 것입니다.”
김동욱 형사의 말에 집중하는 학생들과 달리 슬하는 보다 차가운 시선으로 김동욱 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와 여러분과 같이 우리 인간은 이성적 생각과 행동을 강요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이나 본능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감정과 본능의 영역이 축소 또는 잠재의식 속에 가라앉힐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감정과 본능은 우리에게 상당부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성과 감정의 크기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적 요소를 얼마나 이성적 판단으로 인식하고 있고, 자신의 이성적 요소를 얼마나 감정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만약 어떤 범죄에 대해 일련의 과정을 범행동기와 범죄 사실내용에 관해서만 기술 한다면 그것은 범죄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만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범죄자의 동기에 숨어있는 이성과 본능 그리고 범죄에 이르게 한 환경과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반응을 일으켰는지 공감하고 판단하지 못한다면, 그 범죄의 실체에 대해서도 파악하지 못할뿐더러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 대응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동욱 형사는 강대상 위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계속하려 했으나 강당 중앙에 앉아있던 남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만약 이성과 감정 둘 중 하나만 갖춘다면 프로파일러는 될 수 없는 건가요?”
김동욱 형사는 학생의 질문에 기분이 좋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만약 제가 안 된다고 하면 프로파일러를 포기 할 건가요?”
강연장은 웃음이 흘러 나왔고 한 사람만 진지하게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프로파일러에 이성과 감정의 균형은 이상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원하는 이상향의 정점에 있을지 모를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대해 이성과 감정을 구분 지을 수 있을까요? 부모님에 대한 사랑, 친구들과의 갈등 그리고 범죄자의 심리 등에서 이성과 감정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성과 감정이란 이름으로 하나의 결과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그것을 구분 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범죄라는 하나의 사실을 두고 그 속에 있는 본질을 구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그 둘의 역할에 대해서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이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김동욱 형사는 강연장 무대 중앙으로 나오며 질문한 학생 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제가 프로파일러에게 이 두 가지를 강조한 것은 분석과 판단에 치우친 나머지 그 외의 것을 놓치지 말라는 일종의 주의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 두 가지의 균형을 맞추고, 그 관계 속에서 사건의 본질을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은 최고의 프로파일러가 된다고 확실히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김동욱 형사는 다시 무대 뒤쪽으로 돌아갔고 학생들 몇몇은 박수를 쳤다. 그 이후로도 김동욱 형사는 30분 남짓 강연을 계속이어 갔고 슬하는 김동욱 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강연을 마치고 슬하가 돌아가려하려고 할 때쯤 학생들과 담소를 나누며 웃음을 짓고 있는 김동욱 형사의 모습에 슬하의 발걸음은 멈추어 서 있었다.
슬하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우반장이 건네준 사건 일지와 보고서를 읽으며 잠시 회상에 잠기었고, 우반장이 말한 당시 사건 용의자들의 신상이 적혀 있는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용의 선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이미 예상하고 있던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하윤.
슬하는 읽고 있던 자료를 가방에 넣고 사무실을 나섰다.
(2장 관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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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사람의 이름이 뭐지요
예리한 걸까요, 무던한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