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용서
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현재의 죄 문제(15-20절)와 결부된 죄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도들의 의무는 죄인을 권면하는 일과 더불어 죄인을 용서하는 이 양자를 조화 시켜야 한다. 평행 본문인 눅 17:3,4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너는 용서하라"로, 회개가 용서의 전제이며 일곱 번이 최종 숫자로서 거론되어 있다.
마태의 본문은 용서의 전제가 결코 회개는 아니며 베드로가 언급한 일곱이라는 숫자도 예수에 의해 단번에 부정되었다. 마태는 용서의 법은 누가의 그것에 비해 관대하고 너그러운데 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마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서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동사 '아페소'(*)는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는 의미로 악행자가 회개하여 죄 자백을 우리에게 하든 아니하든 즉시 모든 악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의 적극적인 제안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 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數値)화하는 습성이 있었다.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다(외경 집회서 19:13-17).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Jome 86b).
* 암 1:3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 암 2:1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모압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회를 만들었음이라.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완전수 내지는 거룩한 수에 해당하는 '7'번의 용서를 제안했다. 그러나 3번이든 7번이든 제한적인 용서는 무한수로서의 일흔 번씩 일곱 번에 의해 거부되었다.
2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습이나 랍비들의 가르침, 심지어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새 지평을 여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에 대해
1) 70*7(490)로 보는 학자도 있고(Erasmus, Jerome, Alford, Grotius등)
2) 70인 역(LXX)에 의한 창 4:24에 나오는 라멕에 관련된 77배의 형벌과 연관지어 70+7(77)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Augistine, Ewald, Origen, Bengel 등).
* 창 4:24 -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90번이든, 77번이든 본문의 숫자는 강한 상징성을 내포한 말로서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인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Wycliffe)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친 말이다.
형제들 사이의 용서는 결코 횟수나 일정한 정도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23-35절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용서의 갈등을 겪고 있는 형제들은 그들이 용서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용서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가 가르친 용서의 횟수는 철저한 복수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창 4:24의 복수의 횟수(일흔 일곱번)보다 또는 구약적 복수의 한계 규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넓고 큰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보복과 형벌이 끝없는 용서의 모범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비와 용서도 더 한층 끝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A. W. Argyle).
* 엡 4:32 -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골 3:13 -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진정 예수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대치(代置)시켜 놓으셨다(McNeile).
용서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슨 잘못을 범한 후에 그것을 사과하고 회개할 때 하는 것이다. 즉 용서는 사과와 회개를 전제(前提)한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내게 잘못을 범하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말도 무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앞부분에서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권면이나 권징의 절차를 따라 행하고 만일 그가 교회적 권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교제를 끊고 그를 이방인, 즉 불신자로 여기라고 교훈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회개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일곱 번이나 반복해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용서해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이라기보다 회개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상대가 진심으로 뉘우치기만 한다면 그를 언제든지 용서하라는 것이다.
23. 회계하려
1] 이러므로 천국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끝없는 용서에 대한 교훈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화로서 제시되고 있다. 비유의 형식은 13장의 천국 비유와 같으나 비유의 내용은 25:31 이하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과 유사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용서의 기준을 이 지상의 현존하는 사회법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천국' 법에 따른 그 나라 백성들의 준수 사항을 역설하고 계신 것이다.
2]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종들'(*, 둘로이)은 문자적으로 노예들은 가리킨다. 임금에게 빚진 액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아 임금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나 노예들이 아닐 것이다.
왕의 영토중의 일부를 다스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왕에게 상납해야 하는 지방 장관(Satraps)이거나 혹은 영주라고 보아야 한다(Herodotus). 예수는 그러한 신분에 대한 관심보다 천국 상속자들이 얼마나 많이 죄의 용서함을 받았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러한 과장된 신분과 빚을 예시 하셨다.
여기 제시된 '종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고 지배할 것을 위임받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회계하려 한다고 하는 말의 헬라어 '쉬나라이 로곤'(*)은 '계산(*, 로고스)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 쉬나이로)'의 의미이다. 수지와 그에 따른 균형을 살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말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에게 맡기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결산하여야 한다.
* 고후 5:10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3] 어떤 임금과 같으니
'임금'은 자신의 통치권 아래 있는 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킨다. 특히 35절과 연관되어 '천부' 곧 만유의 주관자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 비유에서
1)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키고,
2)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3) 또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 즉 신약교회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는 천국의 시작 혹은 현재적 측면이다. 임금이 종들과 회계 즉 재무 결산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된 신약교회 교인들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신다.
24. 빚진 자
1]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일만 달란트 - 달란트는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무게 단위로는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함).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는 것 이었다.
일만 달란트에 대한 평가는 천이백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물가 상승 요소를 감안한다면 오늘날의 통화로는 10억 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D. A. Carson).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며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액수는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8절의 일백 데나리온이 '소액'(少額)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한정수인 것처럼 이 일만 달란트도 많은 액수의 돈을 나타내기 위한 최소한의 한정수에 해당한다.
빚진 자(*, 오페이레테스) - '빚'은 공금을 횡령한 것이라기보다는 금액이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상납하지 못한 세금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아켈라오가 해마다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600달란트를,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200달란트를 징수하였다'(Lenski)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엄청난 양의 부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를 상징한다. 본문의 '오페이레테스'라는 헬라어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언급되었다. 그곳에서는 '죄'(*, 오페이레마)로 번역되었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이 죄와 부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차이점 :
1) 죄는 한 번 지은 이상 항상 죄이지만 부채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니다.
2)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으나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
3) 죄는 쌍방간의 쌍무 계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채는 쌍방간의 동의를 일방적으로 어긴 것에서 발생된다.
유사점 :
1) 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부채는 채권자에게.
2)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된다.
3) 죄나 부채는 모두 면제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취소,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법으로 금지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특권에 속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죄도 하나님에 의해 취소, 용서받을 수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 하리라"(사 43:25).
본문에서는 부채를 담당할 제 삼자의 개입이 없이도 탕감이 가능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려 사람의 죄악을 말소시키는 일을 담당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의인(議認)은 예수의 피 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충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하나를 데려오매 - 이는 빚진 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빚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마침내 타인에 의해 발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종말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참회치 않고 묻어 둔 죄악에 대해서는 철두철미 찾아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면을 예시한 것이 아닐까.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1] 갚을 것이 없는지라.
그 종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른다. 그 빚은 한 개인으로서 갚기에 불가능한 액수였다.
2]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주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의 빚은 가족 모두를 노예로 판단해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노예의 값은 약 1달란트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10분의 1달란트나 그 이하가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빚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파는 일이 구약에도 명기되어 있는 일반적인 법이었다.
* 레 25:39 -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 왕하 4:1 -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 느 5:5 -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 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으나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니 속량할 힘이 없도다.
* 사 50:1 -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
* 암 2:6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 암 8:6 -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 도다.
노예들은 50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에 해방되었다. 이 비유에서 노예와 그의 가족을 파는 것은 빚이 갚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의 절망적 상황과 탄원을 강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비유에서 임금이 채무 불이행자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요구 조건을 내세운 것은 그 채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얼마만한 빚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끝내 임금에게 호소하여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 임금에게는 빚을 탕감해 줄 마음의 여력이 충만해 있었다(Chrysostom).
이처럼 막대한 빚을 지불할 수 없는 전적 무능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파산(破産)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첫댓글 귀한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