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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67% “군주제 유지”… 英연방 캐나다인 53% “굿바이”
‘세기의 장례식’ 이후 미래 엇갈리는 ‘英연방 군주제’
“입헌군주가 현실 권력자 견제”… 英여왕, 위기 때마다 국민 위로
“英왕실은 믿을 만한 경제브랜드”… 왕가 관련 산업 수입 7700억원
찰스3세, 사생활-자산증식 잡음… 투명성 못 보여주면 위상 흔들
70년간 재위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타게한 지 사흘이 지난 지난달 11일(현지 시간) 한 시민이 런던 버킹엄궁 인근 공원에서 영국 국기에 여왕 얼굴이 그려진 타월을 등에 두르고 여왕을 추모하고 있다. 공원 곳곳에 여왕을 기리는 꽃다발이 놓여 있다. 런던=AP뉴시스
2022년 10월 현재 지구상에서 헌법상 군주를 국가원수로 두고 있는 나라는 영국 스페인 스웨덴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태국 등 42개국이다. 이 중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삼는 곳만 호주 캐나다 등 영연방 소속 15개국에 달한다. 현대식 민주주의가 오래전 정착됐다고 평가받는 선진국에서조차 얼핏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군주제가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1952년부터 70년간 재위했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타계는 군주제를 둘러싼 논의에 다시 불을 붙였다. ‘실권이 없는 입헌군주라 해도 21세기에 군주제가 웬 말이냐’는 비판부터 ‘군주제 또한 민주주의의 또 다른 형태이며 경제적 효과 및 국민 통합이란 순기능이 상당하다’는 반론이 맞선다.
○ “입헌군주가 현실 권력자 견제”
엘리자베스 2세의 국장이 영국과 영연방을 넘어 전 세계적 관심을 모은 이유는 격변하는 세계에서 7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여왕의 조용한 리더십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권력의 상호 견제를 중시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속성이 입헌군주제라는 제도 자체에 상당 부분 투영됐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군주의 존재가 현실 권력자의 일방통행과 횡포를 어느 정도 제어해 준다는 것이다.
재위 당시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은 푸미폰 아둔야뎃 전 태국 국왕(1946∼2016년 재위) 또한 몇 차례의 군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는 방식으로 현실 정치에 개입해 헌정 질서의 수호자로 평가받았다. 재위 중 16명의 총리를 맞은 엘리자베스 2세 역시 매주 총리와의 접견에서 각종 사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당시 언론에는 ‘여왕이 브렉시트를 지지한다’는 보도와 ‘만류했다’는 보도가 동시에 등장할 정도로 이 사안에 대한 여왕의 견해가 큰 관심을 모았다. 여왕이 총리와 의회, 여당과 야당의 상호견제로 운영되는 입헌군주제의 당당한 한 축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의미다.
여왕이 제2차 세계대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의 위기 때마다 국민을 위로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랭크 프로차스카 영국 옥스퍼드대 선임연구원은 저서 ‘로열 바운티’에서 현대 영국 왕실의 성격을 ‘복지군주제’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군주는 언제든 해산될 수 있는 내각과 달리 지속성을 지녀 여론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고, 정부의 사각지대에 있는 소외계층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이다.
영국 유명 칼럼니스트 에이드리언 올드리지는 미 블룸버그통신에 거짓말로 여러 번 해고된 사람도 총리가 되는 세태와 여왕의 존엄성이 대조를 이뤘다고 칭송했다. 언론인 출신의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과거 가짜 인용문을 사용한 기사 작성으로 해고됐다. 집권 후에도 방역, 측근 비호 등에서 잇따른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나 취임 3년 만에 사퇴했다. 이와 달리 오랜 시간 재위했음에도 거짓말 논란에 휩싸인 적이 없는 엘리자베스 2세의 모습이 영국민에게 신뢰와 안정감을 줬다는 것이다.
영국이 영연방 56개국의 수장으로서 국제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도 상당 부분 엘리자베스 2세 개인의 인기와 후광에 기댔다는 분석도 있다. 필립 머피 영국 런던대 역사연구소 교수는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여왕이 영연방 내 소수민족들을 적극 만나면서 영국을 ‘다양성을 존중하는 국가’로 인식시키는 데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했다.
군주제에 대한 영국민의 지지도 견고하다. 여론조사회사 유고브가 지난달 13, 14일 영국 성인 1710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7%는 “영국이 군주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렇지 않다”(20%)를 3배 이상 웃돈다. “군주제가 영국에 좋은 제도”라는 답도 62%로 “나쁜 제도”(12%)를 압도했다. 특히 장·노년층일수록 군주제 유지 및 선호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50∼64세 응답자는 70%대의 비율로, 65세 이상은 80%대 비율로 “군주제를 유지해야 하며 영국에도 좋은 제도”라고 답했다.
○ 본드·비틀스보다 유명한 英 왕실 브랜드
영국 왕실의 경제적 가치가 유명 인사와 브랜드를 상회한다는 평도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왕실의 브랜드 가치가 영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 전설적인 4인조 밴드 ‘비틀스’보다 클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전 세계 41억 명이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식을 시청했다. 어떤 유명인과 브랜드도 이 정도의 명성과 인지도를 누리지 못한다.
버버리, 조니워커, 포트넘&메이슨 등 영국 왕실의 인정을 받은 영국 유명 브랜드는 자사 제품에 왕실 문양을 표시할 수 있다. 이는 소비자들에게 ‘전통을 수호하는 믿을 만한 브랜드’라는 인상을 주는 효과를 낳는다. 컨설팅사 브랜드파이낸스의 데이비드 헤이 최고경영자(CEO)는 미 경제매체 포브스에 “왕실 문양은 특정 브랜드의 수익을 10%까지 늘리는 효과가 있다”며 영국 재계가 왕실의 가치를 통해 얻은 경제적 이익을 최소 5억5000만 달러(약 7700억 원)로 추산했다.
왕실 인사 개개인은 1840년부터 시작된 품질보증제도 ‘로열 워런트’를 관리하는 일종의 ‘재계 유명인사(비즈니스 인플루언서)’로도 여겨진다. 미디어업계 또한 왕실 인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유명 연예인의 동정처럼 보도하며 유무형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왕실에 따르면 세금으로 지급되는 왕실의 연간 유지 비용은 2017년 4190만 파운드(약 642억 원)에서 올해 1억240만 파운드(약 1567억 원)로 훌쩍 뛰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군주 집무실이 있는 런던 버킹엄궁 등 기존 자산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쓰인다.
하지만 왕가 관련 산업으로 영국이 벌어들이는 돈이 이보다 많다는 점이 군주제 유지 의견의 주요 논거로 꼽힌다. 버킹엄궁, 런던 근교 윈저성,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한 스코틀랜드 밸모럴궁 등에는 매년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린다. 데이터분석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왕가 관련 명소의 입장권 수익만 4990만 파운드(약 772억 원)에 달한다. 브랜드파이낸스 역시 군주제를 통해 영국 전체가 벌어들인 관광 수입을 2017년 기준으로 6억4000만 달러(약 8960억 원)로 추산했다.
○ 찰스 3세의 과제, 투명성 강화
찰스 3세 영국 국왕과 커밀라 왕비가 영국 웨일스 카디프를 방문한 지난달 16일(현지 시간) 이들의 방문 및 군주제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카디프성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 왼편에 “왕? 고맙지만 됐어요.” 라는 문구가 보인다. 카디프=AP뉴시스
다만 엘리자베스 2세의 뒤를 이은 찰스 3세 국왕이 어머니만큼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행사할지는 알 수 없다. 불륜과 이혼 등 사생활 외에도 그가 왕세자 시절부터 이런저런 논란에 휘말렸다는 점, 특히 왕실 영향력을 사유재산 축재에 이용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이 위험 요소로 꼽힌다.
그는 모친의 즉위 당시 모친으로부터 잉글랜드 남서부의 ‘콘월 공국’을 물려받았다. 1337년 에드워드 3세 시절 만들어진 14만 에이커(약 567㎢)의 넓은 땅으로 대대로 왕위 계승자가 물려받았다. 과거 왕위 계승자들은 이 땅을 이용한 돈벌이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찰스 3세는 적극적인 자산 증식에 나섰다.
그는 이 땅에서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식품과 포도주 등을 판매하는 기업 ‘더치오리지널스’를 세워 상당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3월 기준 콘월 공국이 보유한 자산은 최소 10억 파운드(약 1조5500억 원)다. 찰스 3세 또한 이 땅에서만 연 2100만 파운드(약 325억 원)의 수입을 올린다.
찰스 3세의 ‘블랙스파이더 메모’ 스캔들도 콘월 공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 2015년 당시 왕세자였던 그가 수년간 고위 관료와 유력 정치인에게 쓴 메모가 대거 폭로된 사건을 가리킨다. 찰스 3세의 독특한 필체가 검은 거미처럼 보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이 메모를 통해 찰스 3세가 더치오리지널스에 전문가를 파견해 달라거나 기부를 해 달라고 내각에 요청했음이 드러났다. 자신이 선호하는 일종의 대체의학을 영국 건강보험 격인 ‘국민건강서비스(NHS)’의 지원 목록에 올려 달라고 로비한 의혹도 불거졌다. 당시에도 그가 왕세자 지위를 이용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즉위하면 이런 행태가 더 심각해질 것이란 비판이 잇따랐다.
이 때문에 찰스 3세가 재산 공개와 세금 납부 등을 통한 대대적인 투명성 강화 노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어머니가 누렸던 고른 지지와 신뢰를 얻기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 외교매체 포린폴리시는 즉위 당시 26세로 매력적이고 활기찬 ‘동화 속 공주’ 같았던 어머니와 달리 이미 74세 고령인 찰스 3세가 국민에게 활기와 에너지를 제공할지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왕실과 결별하고 부인 메건 마클 왕자빈의 고향 미국으로 이주한 찰스 3세의 차남 해리 왕자는 내년 출간 예정인 회고록에 왕실에 관한 다양한 폭로를 담을 것으로 알려졌다. 해리 왕자는 지난해 “흑백 혼혈인 마클 왕자빈에 대한 왕실 내 인종차별이 있었다”고 주장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아버지에 관해 안 좋은 언급을 하고 왕실이 반박하는 식의 여론전이 벌어지면 왕실에 대한 지지율이 하락할 수 있다.
○ 영연방 미래 불투명
영연방 56개국을 묶어주던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를 계기로 영연방 주요국이 영국 왕실과의 관계를 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캐나다에서 최초로 열린 올림픽인 1976년 몬트리올 여름올림픽 당시 개회사를 한 사람은 피에르 트뤼도 당시 총리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2세였다. 당시만 해도 여왕이 개회사를 할 정도로 캐나다 국민에게 영국 군주가 국가수반이란 인식이 강했던 것이다. 피에르 트뤼도는 쥐스탱 트뤼도 현 총리의 아버지다.
하지만 지난달 13, 14일 입소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캐나다 성인 중 53%는 ‘군주제를 유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46%)를 웃돌았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엘리자베스 2세의 국장 직전 BBC 인터뷰에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 뉴질랜드가 공화국이 될 것”이라며 공화제 전환이 불가피한 시대의 흐름이라는 뜻을 밝혔다.
카리브해 섬나라 사이에서는 영연방 탈퇴 정도가 아니라 ‘현재의 영국에 과거 제국주의 시절 벌어졌던 식민 수탈 등의 책임을 묻고 배상을 요구하자’는 여론이 높다. 바베이도스는 지난해 11월 영연방을 떠나겠다고 밝혔다. 인근 앤티가 바부다의 개스턴 브라운 총리는 지난달 여왕 서거 직후 “향후 3년 안에 공화국 전환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싶다”고 했다.
다만 영연방 해체 논의가 본격화할 시점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에너지 및 식료품 가격 급등, 미국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으로 인한 전 세계 통화 약세, 경기침체 조짐 등으로 각국이 모두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입헌군주제 폐지 주장이 매우 시급한 사안으로 여겨지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홍정수 기자, 이채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