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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體同觀分 第十八 일체동관분 제십팔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如來有肉眼不아 如是 世尊하 如來有肉眼이니이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如來有天眼不아 如是 世尊하 如來有天眼이니이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如來有慧眼不아 如是 世尊하 如來有慧眼이니이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如來有法眼不아 如是 世尊하 如來有法眼이니이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如是 世尊하 如來有佛眼이니이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 是沙不아 如是 世尊하 如來說是沙니이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零爲多不아 甚多니이다 世尊하 佛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 所有衆生하야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何以故오 如來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 所以者何오 須菩提여 過去心 不可得이며 現在心 不可得이며 未來心 不可得이니라 수보리여, 네생각은 어떠하냐? 여래에게 육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는 혜안(慧眼)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저 항하(恒河)가운데 있는 모래를 모래라고 설한 적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모래라고 하신 적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저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또 그 많은 항하에 있는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 세계가 얼마나 많다고 하겠느냐? 매우 많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셧다. 그토록 많은 국토에서 살고 있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알고 있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요,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여,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울 수 없으며, 미래심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에서는 불자가 처음 발심을 하여 위없는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그때까지 ‘무아(無我)’ 로써 주춧돌을 삼아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에서는 법계(法界), 곧 대우주의 뿌리를 관(觀)함으로써 일체 중생의 모든 마음을 다 알 수 있음에 대해 설하고 계십니다. 먼저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육안(肉眼) . 천안(天眼) . 혜안(慧眼) . 법안(法眼) . 불안(佛眼), 이 다섯 가지 눈(五眼)에 대해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오안(五眼)은 과연 어떠한 눈인가? 첫 번째의 육안(肉眼)은 미한 마음을 없애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눈입니다. 욕망과 온갖 감정으로 둘러싸인 중생이 마음속 깊이 ‘내가 여태껏 살아온 방법이 잘못됐었다’ , ‘이렇게 사는 것이 잘못이었다’ 라는 반성이 일어나면서, 기도하는 마음 . 화두하는 마음 . 염불하는 마음이 정립되면 육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또 그 미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아, 육체와 더불어 나의 진리의 몸, 법신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아는 차원을 ‘육안’ 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의 천안(天眼)은 무엇인가? ‘일체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지만, 중생들은 그 불성을 잊어버리고 고통과 번뇌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는 것을 알아차릴 때의 그 마음을 ‘천안’이라고 합니다. 곧 일체 중생이 ‘나’ 와 한 뿌리라는 것을 깨달을 때천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혜안(慧眼)은 내 마음 속에서 다시는 어리석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열리는 눈입니다. 이 눈이 열리면 ‘반야바라밀이 삼세(三世)의 모든 법을 출생시킨다’ 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네 번째의 법안(法眼)은 무엇인가? 법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법안이라고 합니다. 곧, 이것은 좋은 것 . 이것은 나쁜 것, 남자 . 여자, 이것은 불교의 법이니까 바른 법 . 이것은 불교의 법이 아니니까 바쁜 법이라며 불별하고 집착하는 마음, 그일 그일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또 대우주 법계에 모든 것이 본래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차원을 ‘법안’ 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불안(佛眼)은 마음 속의 번뇌망상, 아주 세밀한 번뇌망상까지 완전히 끊어져서, ‘나’ 의 마음이 그대로 법계가 되는 차원입니다. 이 모든 법계를 내 마음이 감싸고, 내 마음과 법계가 한 덩어리가 되는 이 차원을 견성을 했다거나 부처가 되었다고 하며, 그때 불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은 육안 . 천안 . 혜안 . 법안 . 불안의 오안(五眼)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육조 혜능(六祖 慧能)스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오안(五眼)이다 갖추어져 있지만, 미혹에 덮여 있기 때문에 능히 보지 못할 뿐, 미한 마음만 제거하면 곧 오안(五眼)이 뚜렷이 밝아져서 생각 생각 반야바라밀을 행할 수 있게 된다’ 고 하셨습니다. 곧, 오안(五眼)은 석가모니 부처님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세생생 얽혀 있는 인과 관계와 잘못된 착각 때문에 이 눈을 뜨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제 과감히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자 해보십시오. 우리가 마음의 눈을 한번 뜰 때에 이 오안(五眼)도 한꺼번에 떠지는 것입니다. 이제 부처님께서는 다시 항하의 비유를 설하십니다. “수보리여, 내가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를 모래라고 설 한 적이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해 수보리 존자는 긍정의 답을 하였고, 부처님께서는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많은 항하에 있는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 세계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 존자는 당연히 ‘매우 많겠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본론을 밝혔습니다. “그토록 많은 국토에서 살고 있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알고 있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요,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다 안다’ 고 하신 다음, ‘그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다’ 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 갖가지 마음이라는 것은 망심(妄心), 곧 중생들이 착각으로 일으키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 망심(妄心)은 참마음이 아닙니다. 참마음은 불심(佛心)이며 금강반야바라밀심입니다. 참마음은 모든 중생에게 공통으로 구비되어 있고, 법계의 뿌리와 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계의 뿌리를 알면 그 법계 속에 생존하는 중생들의 ‘온갖 마음을 다 안다’ 는 것이 능히 이루어집니다. 비유를 하자면, 참마음의 바다에서 출렁이는 온갖 망심의 잔물결들이 왜, 어떻게, 어디서 일어나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마음의 눈을 뜰 때 짐승들, 벌레들, 대우주에 존재하는 수천 가지 종류의 생물들의 마음을 전부 다 알 수 있게 됩니다. 원리를 알게 되기 때문에, 파생되는 모든 것들을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를 깨치면 모든 것을 다 알게 된다’ 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약 30년 전만 하여도 ‘하는 천(天)’ 자도 모르는 사람이 도만 깨치면 천자문(千字文)은 물론이요 이 세상의 글을 다 알고, 하나 더하기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도만 깨치면 수학 . 과학 할 것 없이 전부 다 알게 된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불자들 중에는 이러한 착각에 빠져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착각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원리만 알아진다는 것일 뿐, 모든 것이 끝까지 다 알아진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나의 법사스님이싱 고봉(高峰 : 1901~1967) 스님은 열일곱 상에 출가하실 그때 이미 한학(漢學) 실력이 광장하셨으며, 절에 와서는 부지런히 선방으로 다니며 정진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만공스님 . 용성스님 . 혜월스님 등 훌륭한 도인들이 많이 계셨는데, 그 중 혜월스님은 문자를 모르는 어른이셨습니다. 한글도 띄엄띄엄 읽는 것이 요즈음 초등하교 1학년 수준이셨고, 한문도 전혀 모르셨습니다. 어느 날 고봉스님은 《선문염송》 이라고 하는 아주 어려운 책을 가지고 짚신을 삼으며 앉아계시는 혜월스님께 가서 말했습니다. “스님, 이 책의 내용에 대해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혜월스님은 계속 짚신을 삼으시며 답했습니다. “그래, 읽어봐라. 나는 글을 모르니까.” 고봉스님은 어려운 한문을 우리말로 풀이하여 읽어드렸습니다. 그러나 고봉스님은 혜월스님을 시험하러 갔으므로, 글의 뜻을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한 부분을 엉뚱하게 풀이했습니다. 그러자 묵묵히 듣고만 계시던 혜월스님께서 제동을 걸었습니다. “어? 가만 있어봐라. 그 부분을 다시 읽어보아라.” 하지만 고봉스님은 앞에서 고의적으로 잘못 읽었으므로 역시 틀리게 글자 풀이를 하였습니다, 이에 혜월스님이 말했습니다. “그거는 네가 잘못 풀이한 거다.” 그리고는 위의 말이 이렇게 이렇게 내려왔으니 그 말은 이렇게 풀어야 할 것이고, 뒤에 올 말은 어떻게 어떻게 나올 것이라며 정확하게 짚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고봉스님은 ‘혜월스님의 밝은 눈에 경탄했다’ 고 하셨습니다. 이 헤월노스님처럼, 도를 깨치면 몰랐던 하늘 천(天)자, 당 지(地)자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알게 되는 게 아니라, 대우주의 원리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우주의 원리를 주춧돌로 하여 파생된 문학 . 수학 . 과학 등의 학문에 대해 부분적인 이론 하나하나는 모르더라도, 그 원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잘된 것, 못된 것들을 모두 다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강의 모래 수와 같은 국토 속에 있는 중생들의 마음을 다 아신다는 것이 결코 거짓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원점을 알기 때문에 원점을 주춧돌로 하여 파생된 세계의 일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는 그 많은 중생이 그때그때 일으키는 욕심이나 불별심 등 갖가지 번뇌망상 하나하나는 딱딱 집어내지는 못하셔도, 그 마음이 일어나는 주춧돌은 언제나 모두 관(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생들의 마음은 참마음이 아닙니다. 바람따라 일어나고 환경따라 요동치는 망심에 불과합니다. 그 마음을 나의 참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참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마음 . 마음’ 하는 그 마음은 그냥 이름뿐인 마음입니다. 이제 금강경에서는 이 마음에 대해 매우 중요한 법구(法句)를 던져 줍니다.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여,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심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실로 그렇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이것은 과거의 마음, 이것은 현재의 마음, 이것은 미래의 마음이라고 토막을 내어 규정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 줄국 당나라의 덕산선감(德山宣鑑) 선사는 본래 금강경의 대강사였습니다. 얼마나 금강경에 달통하고 얼마나 금강경을 믿고 지니셨던지, 사람들이 속성(俗姓)인 ‘주(周)’씨를 앞에 붙여 ‘주금강(周金剛)’ 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덕산스님은 《금강경청룡소초》라고 주식서를 저술할 만큼 금강경에 일가견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스님은 길을 가다가 소나기를 만나자, 손가락으로 하늘에 금강경의 한 구절을 쓰고는 그 아래에 섰습니다. 그러자 그 부분만은 비가 내리지 않아 비를 한방울도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덕산스님은 그야말로 금강경에 도통하신 분으로, ‘금강경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의 골수’ 라는 확신을 갖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그 무렵, 중국 선종(禪宗) 쪽에서는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불법(佛法)의 핵심이라며 경학(經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덕산스님은 격분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야 바른 공부를 할 수 있고, 번뇌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고,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을 배척하고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한다고 주장하다니…. ” 틀림없이 그들은 마구니의 일종이리라. 내가 가서 그 마구니들을 항복받으리라.” 중국 대륙의 북쪽에 있던 덕산스님은 마침내 금강경을 짊어지고 선(禪)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남쪽으로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달의 여행 끝에 스님이 풍주라는 지방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그날따라 스님은 점심공양을 준비하지 않은 채 출발하였고, 점심때가 되자 유난히 배고픔을 느꼈습니다. 때마침 길가에서 떡을 팔고 있는 노파를 발견한 스님은 노파에게 다가가 ‘떡을 좀 팔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파가 뜬금없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떡을 사서 뭐하시려오?” “점심공양을 하려고 하오.” “그런데 스님, 등에 짊어진 게 뭡니까?” “이것들은 내가 평생 동안 연구한 금강경과 그 주석서들이라오.” “스님, 그러면 저와 내기 한번 하실래요? 스님이 지고 가시는 그 금강경 속에 있는 구절에 대해 질문을 할테니, 스님께서는 답을 하십시오. 스님이 대답을 잘해 주시면 떡을 그냥 드릴 것이고, 대답을 못 하시면 저희 집에서뿐만 아니라 이 마을에서는 떡을 한 개도 잡수실 수 없습니다.” “좋소이다. 무엇이든 물어보구려.” 스님이 흔쾌히 수락하자 노파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님, 금강경 가운데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며 미래심도 불가득이라’ 고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방금 전에 스님께서는 점심(點心)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시렵니까?” 순간 주금강(周金剛)이라고 불리우던 덕산스님이 말문이 꽉 막혀 대답을 못 하고 쩔쩔매었습니다. 그러자 노파가 말했습니다. “스님 이 앞길로 곧장 올라가면 용담원(龍潭院)이라는 선원이 있는데, 그곳에 숭신(崇信) 선사라는 거룩한 선지식이 계십니다. 그 스님을 한번 찾아가 보시지요.” 덕산스님은 노파와 작별하고 곧장 숭신스님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용담(龍潭)의 소문은 오래전부터 들었는데, 와서 보니 용도 안 보이고 못도 안 보이느구나[龍又 不見 潭又 不見].” “하하하, 참으로 그대가 용담에 왔네.” 이윽고 저녁이 되어, 두 스님은 함께 공양을 들고 한담을 나누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객실로 가기 위해 덕산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날이 어두워져 신발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덕산스님이 숭신스님게 촛불을 얻어 막 신발은 찾으려고 할 때, 숭신스님은 촛불을 확 불어 꺼버렸습니다. 사방은 다시 칠흙같이 어두워졌고, 그 순간 덕산스님은 대오(大悟)하셨습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현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무엇을 어떻게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과연 어느 마음을 잡아 ‘내 마음’ 이라고 할 것입니까? 머물게 할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과거심 . 현재심 . 미래심! 그런데 무엇에 집착하며 살 것입니까? 과거에 매달리지도 않고, 미래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이 순간의 성실한 삶을 살아가면, 법계의 행복과 영광은 저절로 ‘나’에게 찾아들기 마련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른 . 아이들 구분하면서도 어른과 아이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규정하지 못하고, 남자요 여자임을 강력히 주장하지만 남자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여자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모순이지 않습니까? 정확히 그 마음에 대해 규정을 내리지 못하면서 남녀노소의 자기 자리를 내세우는 것이…. 심지어는 함께 생활하는 남편 . 아내 . 아들 . 딸의 마음조차 알지 못하면서 ‘내 남편이다’ , ‘내 아내다’ , ‘내 아들이다’ , ‘내 딸이다’ 고 하는 집착만을 내세웁니다. 정녕 우리가 ‘내 아들’ 임을 내세우고 ‘내 아들’임을 자랑하려면 아들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좋습니다. 남의 마음은 다 그만두고라도 우리가 ‘내 마음, 내 마음’ 이라고 하는 그 ‘나’ 의 마음은 어떻게 규정을 내리렵니까? 결국 우리는 법계의 뿌리를 모른 채, 나름대로 분별하고 집착하는 그 마음을 ‘내 마음’ . ‘남의 마음’ 이라며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일체동관분」을 통하여 상에 집착하고 분별하는 그 마음을 비워버리고, 일체가 한 뿌리를 이루는 바로 그 진짜 마음을 볼 것을 피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생들이 터전으로 삼고 있는 시간과 공간 가운데 시간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울 수 없다” 고 하신 것입니다. 과연 얻을 수 없는[不可得] 그 마음에 얽매인다 한들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가 가거 . 현재 . 미래의 시간에 얽매여 살지 말아야 합니다. 얽매이지 않으면 오안(五眼)이 차츰 열리게 되고, 오안이 열림에 따라 온 법계가 그대로 한 몸이요 나와 남이 한 뿌리임을 체득할 수 있게 됩니다.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이 가르침을 거듭거듭 잘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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