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통신 15보> - 한국유학생회 회장 선거 날
몇 주 전부터 우리 건물 곳곳에 한국유학생회 회장 선거에 관한 공지문이 붙었다.
조금은 이상한 일이지만 이들 벽에는 가끔 한국 공지문만이 내다 붙는다.
물론 각 교실 정면 오른쪽에는 학기 초부터 학교에서 알리는 여러 종류의 공지문이 더덕더덕 붙어 있기는 하다.
이를 테면 휴일공고, 장학금 신청 공고, 탁구대회 공고, 중국어 낭송대회 공고, 엑스포 사진 경연대회 공고, 학생 출석 현황, 그리고 다음 학기 수강신청 안내 등 말이다.
그런데 그 많은 공지문이 대부분 중국어 혹은 영어로 공지되는데 반해, 유독 낯익은 공지문이 종종 내다 붙으니, 그게 바로 이 학교 한국유학생회에서 붙인 공지문이다.
수업에 들어갔을 때 어쩌다 이런 것이 교실 앞에 떡하니 붙어 있으면, 무슨 일인가 싶어 여러 나라 학생들 모두가 왁자지껄하며 모여든다.
그러면 다른 나라 학생들은 ‘에이, 또 한국말로 된 것이잖아. 역시 한국은 대단한 나라야. 그런데 또 무슨 내용입니까?’ 뭐 이런 반응을 보이며 돌아서곤 한다.
그럴 때면 은근히 내가 한국인이란 것이 자랑스러워지기도 한다.
내용을 알고 보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하기야 우리 말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런 하찮은 공지문조차 자기 나라 말로 된 것이 벽에 내다붙는 것을 볼 수조차 없으니 부럽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공지문이 건물 곳곳에 떡하니 붙어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그 내용은 물론 서두에서 밝힌 한국유학생회장 선거에 관한 공지문임은 말 할 것도 없고......

(교실 앞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공지문, 유일하게 한글로 된 것이 가끔 붙어 있음. 신기함.)
6월 4일 금요일, 선거가 있는 그 날, 나와 벗씨는 일찌감치 수업을 마치고는 우리 건물 109호실 앞에서 오가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날이 엄청 기다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곳 상하이외대에 도착한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한국유학생에 대회 관심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기숙사에서 자는 것, 삼시세끼 해 먹는 것, 필수품 사는 것, 학교 행정에 관한 것, 기타 상하이 생활 등등 뭐 하나 궁금한 것 치고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업을 마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와 유학생회장 선거가 어떻게 치열하게 진행되는지를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질 않았다.
청소하는 미화원 아주머니만이 부지런히 교실 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혹시나 내가 공지문을 잘못 보았나 하고 공지문이 붙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는 다시 점검해 보기까지 했다.
그러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몇몇이서 쭈빗쭈빗거리며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놓칠 세라 바로 뒤따라 들어갔다.
그 때 3,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우리를 뒤돌아보더니 한 마디 했다.
“여기 오면 안 되는데요?”
“아, 그래요? 오늘 한국유학생회 회장 선거하는 날이라고 해서 왔는데요.”
“그런데, 자격이 안 될 텐데요?”
“아, 그냥 온 거예요, 어떻게 진행하나 보려고......”
어린 학생들이 우리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으므로 우리는 조용히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첫인상에서 우리를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란 걸 알고는 뒷자리에 앉아 있어도 뭔가 서먹서먹하기만 했다.
잠시 후 한두 명 더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를 빼고는 남자가 다섯에 여자가 셋, 합해서 모두가 여덟 명.
키가 크고 날씬한 남학생이 교실 앞으로 나가더니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원래 현 회장이 참석해야 하지만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못 오게 되었습니다. 대신 진행하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럼, 제15대 상하이외국어대학 한국인유학생회 회장 선거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비록 본과생이 아닌 어학연수생으로서 투표 자격은 있지만 이 날 분위기상 할 수 없었음.)
이렇게 개회를 선언하고는 선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 사회를 보는 학생이 누구인지, 무슨 직책을 맡고 있는지 궁금했다.
뿐만 아니라, 학생회에 관한 규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선거에 관한 규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매우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괜히 아까 들어올 때처럼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면 안 되니깐 말이다.
그리고 나서 사회자가 학생회장 후보자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몇 안 되는 학생들 사이로 썰렁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서로 눈치를 보더니, 잠시 후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는 자진해서 나섰다.
단독 후보가 나선 것이다.
사회자가 그 여학생을 앞으로 불러내어 소견발표를 시켰다.
“제가 남들이 보기에는 공부 안 하고 노는 것처럼 생겼지만, 저는 그래도 할 것은 다 하면서 실속은 차리는 학생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많겠지만 저를 뽑아 주시면 우리 한국인 학생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고는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학생회장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비록 어리지만 다음 학기에 3학년이 되므로 자격은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회장이 되고 나면 무엇을 어떻게 해서 유학생회를 발전시키겠다는 겁니까?”
“몇 가지 생각해 둔 것이 있습니다만 방학 동안에 구체적인 방안을 더 보태서 힘껏 해 보겠습니다.”
“새로운 집행부는 꾸려진 것입니까?”
“미리 얘기해 둔 학생은 있습니다. 무난히 구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뒷자리에 우리가 앉아 있어서 그런지 주고받는 질의응답이 약간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찬반투표를 진행했다.
물론 사회자가 만일 찬반투표에서 과반수를 못 얻었을 경우에는 회장이 될 수 없다고 공지했음은 당연지사이고.
결과는 반대가 한두 표밖에 없어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는 신임회장이 인사말을 간단하게 하고는 그걸로 끝났다.
좀 썰렁했다.
아니, 여느 학생회장 선거와 비교해서는 많이 썰렁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이 날 제15대 상하이외대 한국유학생회 회장으로 선출된 여학생. 이름은 모름.)
몇 주 전에 현 학생회 회장인 고진주 학생한테 저녁을 낸 적이 있다.
매번 반마다 찾아다니면서 우리 한국인 학생들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인사 차원에서 밥 한 끼를 샀던 것이다.
그 때 한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학생 400여 명을 위한 활동과 기타 대외활동 때문에 매일 같이 남아서 일하기가 일쑤라고 했다.
그렇다고 학생회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란다.
그 많은 나라들 중에서 학생회가 한국밖에 없으므로 한국에만 특별한 지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비록 오늘 선거가 썰렁한 분위기에서 진행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가 참 대단하기는 하다.
벌써 15대째를 이어오고 있으니 말이다.
내 설사 이들보다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들과 똑같은 유학생 신분으로서 뭔가를 도와주지 못 하고,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선거가 끝나고 그 학생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들어 보이는 남학생과 인사를 나누었다.
알고 보니 재상하이 한국유학생 총연합회 박성광 회장이었다.
나중에 따로 날을 잡아 이 유학생연합회 회장에게 점심을 내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유학생회 회장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저는 유학생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여러 곳에 초청되어 이곳저곳 많이 참석해 봤습니다. 얼마 전 상하이엑스포 개막식에 이명박 대통령 오셨을 때도 같이 대화도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고, 기타 장관이나 기관장 등 많은 분들을 만나 뵙게 되는 기회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회 회장이란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만큼 아무나 회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상하이외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얼굴이니까요.”
이렇듯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아니 앞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유학생회에 한 학기 학생회비 50원(한국돈 8,500원 가량)밖에 내주지 못 하는 내가 부끄러울 따름이다.
아니,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다음 학기엔 그들에게 술이라도 낫게 사야겠지.
상하이외대 한국유학생회, 지아여우!(加油, 파이팅!)
2010년 6월 14일
상하이에서 멋진욱 서.
첫댓글 그렇게 중요한 자리이고 학생 수도 400 여명 이라는데 선거에 참석하는 숫자가 왜 그렇게 적대여???? 욱대장이 체질개선을 화---악 해 보더라고.....열심히 참석하고 관심을 가지는 모습이 보기에 좋으요
어느 곳이나 회원 확보가 제일 어려운 문제인 모양입니다. 여기 학생회도 행사 하나 하려면 학생들이 안 모여서 힙드답니다. 히히.
능력은 냅두면 섞어부러.교주다운 기질을 어디에.....
젊은 학생들 눈치 많이 보고 있습니다. 히히.
한국유학생회장은 대단히 중요한 자리이군요. 그 중요한 자리가 일시적 학업을 위한 무형의 모임속에서도 15대째 내려오고 있다니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