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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를 꿈꾸는 시간
『검은 나비를 봉인하다』 이주언 시집
한보경
봉인 앞에서
입구가 봉인된 시집이 날아왔다. 봉인은 함부로 열 수 없는 강인한 입술이다. 근엄한 금기다. 굳게 닫힌 입술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금기를 거스르는 도발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다. 굳게 닫힌 입술 앞에서는 입술을 닫는다. 당분간 침묵해야 한다.
우화를 꿈꾸며
12월이 가도록 시집에 걸어둔 침묵의 금줄을 걷지 못했다. 침묵의 금줄을 걷고 다시 봉인된 시집을 마주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지나갔다. 딴청을 피우며 머뭇거리는 사이 새해가 오고 있었다. 침묵을 걷기 위해 봉인 앞에 다시 앉는다. 봉인은 여전히 빈틈이 없다. 다만 내가 걸어둔 금기의 금줄이 좀 더 느슨해졌으므로 조심스럽게 금줄을 먼저 걷어낸다. 금줄이 출렁, 봉인의 입구가 희미하게 열린다. 막막한 기대와 걱정이 수시로 교차한다.
시인이 봉인하려던 그것의 정체보다 그것을 봉인한 시인의 심사에 자꾸 마음이 간다. 그러그러한 심정이 보낸 시그널은 무엇일까. 시인이 봉인한, 봉인해야 했던, 봉인하고 싶었던,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시인이 봉인할 수밖에 없던 절실한 어떤 것이었으리라. 절실함의 높낮이와 강약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것. 서서히 얼굴을 드러낼지 모르는 그것. 아니면 대번에 훅 치고 들어와 맞닥뜨릴지도 모를 전혀 상상하지 못한 어떤 것. 함정일 수 있지만 일단 시인이 건넨 ‘검은 나비’를 주목한다.
한때 검은 나비는 죽음이었다. 유년의 내가 우연히 듣게 된 주술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한 그렇다. 근거 없이 떠도는 무수한 유언비어에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 따라붙는다. 검은 나비가 가까운 이의 죽음을 알리는 불길한 예언이라는 이야기. 죽음에 익숙하지 않던 어린 내게도 죽음은 외면해야 하는 것이었고 게다가 그 죽음의 주체가 엄마였다는 것은 공포였다. 검은 나비를 마주쳤을 때 미처 손톱을 숨기지 못하고 들켜버리면 엄마가 죽는다? 엄마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비방은 열 손가락을 최대한 오므려 열 개의 손톱을 보이지 않게 잽싸게 호주머니 속에 감추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스토리의 근원을 따지기에 나는 너무 어렸으므로 검은 나비는 꼼짝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의 실체였다. 반드시 열 개의 손톱 밑에 영구 봉인해야 하는 것. 삭제 할 수 없는 것을 영원히 삭제하기 위한 불가항력의 선택 같은 것. 잘 벼린 열 개의 손톱 아래 봉인하고 잊힌 그 나비가 시인의 ‘검은 나비’인지 아닌지 새삼 불안했다. 시인의 봉인 앞에 주저하면서도 나는 손톱 밑에 봉인했던 유년의 두려움이 해제되기를 은근히 바랐다. 아직도 손톱을 벼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니. 우스꽝스럽게도 주저하는 동안에 손톱은 자꾸 자랐다.
영원한 봉인은 영원한 해제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잊기 위해 봉인한, 잊히지 않는 기억은 힘이 세다. 기억의 봉인마저 뚫고 나온다. 봉인의 기억을 해제하는 순간 기억은 다시 ‘나’를 꼼짝 못하게 봉인한다. 잊히지 않는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날개’가 돋기를 꿈꾼다. 시인이 봉인한 ‘검은 나비’도 그런 우화를 꿈꾸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비의 날개는 봉인과 해제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영원한 우화를 꿈꿀 수 있는 최상의 복선이다. 그러므로 나는 ‘검은 나비’를 주목하고 봉인된 ‘검은 나비’의 ‘날개’에 다시 방점을 찍는다.
곁에 있던 이들이 떠나간다.
그들은 사라지는 것인가,
투명하게 몸을 바꾸는 것인가,
<시인의 말> 부분
시인은 조용한 독백처럼 시작을 연다. 어조는 지극히 담담하다. 더는 이별을 슬퍼하고 아파하지 않는 마음의 여백이 느껴진다.
곁에 있던 이들이 떠나가는 일을 아파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 이미 시인은 충분히 슬프고 슬펐을 것이다. 시인은 떠나간 그들이 투명하게 몸을 바꾼 것을 알아본다. 떠나간 그들은 ‘반짝이는 잎사귀’로, ‘뒹구는 바람’으로, 곳곳에 존재한다. 누구나 그럴 수 없는 어려운 경지이지만 부재의 슬픔 앞에서 ‘존재의 부재를 봉인함’으로써 ‘부재의 슬픔을 해제’한다.
봉인과 해제의 경계를 넘나들며 ‘투명하게 몸을 바꾼다’는 것을 ‘우화’에 빗대어 생각해보기로 한다. ‘날개 달기’는 봉인과 해제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훌륭한 문학적 장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곁에서 떠나간 그들이 ‘안팎에서 부재의 형상으로 나를 노크’하는 순간 봉인된 부재들은 ‘날개’를 달고 봉인을 해제한다. 그리고 몸을 바꾸어 부재의 형상으로 다시 존재한다. 존재하는 부재들의 슬픔에도 날개가 달리는 순간이다. 날개 달린 슬픔은 아름답고 빛난다. 우화를 꿈꾸는 일이 그렇다.
떠나는 이들에게 시인이 날개를 달아준 것인가. 떠나는 이들이 시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인가. 날개를 단 존재들은 슬픔의 경계를 넘나들다 곳곳에서 머문다. 변주된 부재가 부재의 봉인을 뚫고 존재하는 것처럼 슬픔도 거듭해서 봉인과 해제를 반복하고 변주하며 날개 달린 슬픔으로 몸을 바꾼다! 시집에 실린 여러 편의 시에서 시인은 (날개 달린) 슬픔은 아름답다! 조용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안녕
나의 세계와 유리된 이여
곳곳에 머무는 당신의 부재들이여
<시인의 말> 부분
그런데 시인은 날개를 달고 ‘몸 바꾼’ 부재들에게 ‘그러나 이제, 안녕!’이라고 (다시 봉인을 선언하듯)말한다. 우화된 부재를 다시 봉인하는 것은 봉인된 것은 반드시 다시 (봉인을 뚫고)우화를 꿈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화는 끝없이, 곳곳에서, 마지막이 되기 위해 또 다른 시작이 되고, 그 시작은 다시 마지막을 꿈꿀 것이다.
시인에게 우화의 끝이 있다면 그 끝은 궁극의 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궁극의 시는 또 다른 궁극을 향한 우화를 꿈꿀 것이다. 시작詩作은 끝없는 우화의 과정 같다. 속(世上)과 성(詩)의 경계에서 빛나는 우화를 기다리는 시인은 마지막 우화를 마친 후 어떠한 날개를 달고 시작을 할까.
편지 대신
검은 나비가 봉인되어 온 적 있다
어느 공중을 저어 온 날개인가, 궁금했다
휘어진 지팡이로 비와 꽃잎을 딛고 다녔는지
날개에 새겨진 상처가 무지개로 빛났다
그는 오래 봉인되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생生이라는 봉투 속에서 검은 비늘을 자꾸 떨어뜨린다고 했다
이제 그의 영혼은 유분과 수분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의사의 진단은 간명했다
속을 들여다볼수록 각질이 일었다
검은 나비가 묘지의 입구에서 날개를 접자
불시착했던 사랑의 메시지들이 전나무 숲을 가득 메웠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린 신들의 메모지 같았다
사람들은 황금의 전설을 읽기 시작한다
어둠을 깔고 앉아
저음의 노래로 흐린 거울을 들여다보던
검은 부족 전설이 옳았던 걸까
슬픔은 아름다웠다!
생生이라는 공간에 남겨진 나비
비늘이 묘지를 덮은 눈송이처럼 빛났다
「슬픔이라는 검은 나비」 전문
시집 속 첫 시다. 시인은 ‘슬픔’의 봉인과 해제를 위한 시적 장치로 ‘날개’ 달린 ‘검은 나비’를 데려왔다. ‘유분과 수분을 저장할 수 없는’ 영혼으로 ‘어느 공중’을 저어 온 ‘휘어진 지팡이’ 같은 ‘검은 나비’는 ‘생生이라는 봉투’에 각질 같은 검은 비늘을 떨어뜨리며 날개를 접는다. 그 곳은 ‘묘지의 입구’다. ‘묘지의 입구’는 생과 사의 경계다. ‘검은 나비’는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몸을 바꾼다. 편지 대신 봉인된 ‘검은 나비’는 생과 사의 경계에 선 존재와 부재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로 몸을 바꾼다. 불시착한 메시지는 무수한 이전의 생에서도 불시착이었고 그러한 불시착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것은 는 이미 전설이었고 신들의 메모였고 검은 부족의 전설이었다. 그러다가 전나무 숲을 가득 메운 ‘사랑의 메시지’로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린 신들의 메모지’로 ‘황금의 전설’로 거듭해서 변주를 계속한다.
어느 공중을 저어 온, 휘어진 지팡이로 비와 꽃잎을 딛고 온, ‘검은 나비’. 슬픔의 날개를 달고 경계에 걸린 이쪽과 저쪽을 무수히 넘나들었을 그것은 묘지에 이르러 ‘빛나는 눈송이’로 다시 우화한다. 순간 화자는 ‘슬픔은 아름다웠다!’라고 날개 달린 슬픔을 ‘!’ 속에 다시 봉인한다. ‘!’ 안에 봉인된 것이 무엇으로 몸 바꿀 것인지 이제 궁금하지 않다. 조용히 봉인의 다음을 기다리면 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또 다른 날개를 달고 봉인을 해제할 것이다. 끝없는 봉인과 해제는 끝없는 우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고 단절이고 상실’이었던 나의 검은 나비도 빛나는 날개를 달 수 있을까. 오랜 봉인에서 풀려난 ‘죽음과 단절과 상실’이 ‘봉인된 나’에게도 빛나는 날개를 달아줄까. 나의 검은 나비는 작은 우화를 꿈꾸기 시작한다.
끝없는 우화의 변주, 변주들
‘검은 나비’는 우화를 거듭하며 시집 곳곳에 몸을 바꾸어 존재한다. 이주언 읽기는 봉인과 해제를 거듭하여 다양한 표상으로 변주되는 ‘검은 나비’가 흘리고 간 날개의 흔적을 찾는 시간이었다. 시집에 수록된 52편의 시 여기저기에서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날아가는 ‘검은 나비’를 발견한다.
그것은 날개를 달고 갈등의 무한 반복처럼 닫혔다 열렸다 하는 ‘서랍’이 되기도 하고, 죽어서 다시 사는 ‘엄마의 다홍치마’로 몸을 바꾸기도 한다. 한때의 ‘사과나무’로 서 있기도 하다가 ‘얼룩을 위한 내용증명서’도 되었다가 ‘찰나의 희망을 탐색했을 굽은 등줄기’가 되기도 한다. ‘북어’와 ‘붉은등거미’와 ‘매미’로 돌아가 잠시 날개를 접을 때도 있다. ‘혼자 노는 이들’ 에게 활짝 날개를 펼쳐서 위로가 되어주고 ‘굽은 손가락’이 되어 지상의 비늘을 벗겨내기도 한다. 누군가 벗어둔 ‘상가의 구두’ 위에 내려앉아 슬픈 날개를 접고 아주 짧은 오수에 빠져들기도 한다. ‘1 밀리그램의 눈물’에 지나온 여정과 생을 압축하고 마지막인양 날갯짓을 하며 ‘줄어든 뇌’의 지형도를 그려나간다. 그것은 ‘소리 없는 웃음’으로 ‘발설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하며 먼 바다로의 출항을 꿈꾸는 ‘출렁이는 몸’이 된다. ‘환하고도 슬픈 인연들’끼리 ‘페이스 오프와 운명이라 믿었던 길’을 함께 날기도 한다. 그러다 지친 날개를 접고 ‘표정을 바꿔가며 돌아오는 후회’와 ‘햇빛가루 뿌린 듯 곱게 빻아진 적막’속으로 숨어들어 긴 잠을 청하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검은 나비’스러운 것들. ‘진실일지도 모를 진실’이 되어가는 변주와 변주들을 발견하는 순간들이 특별한 즐거움을 준다. 무엇보다 이 모든 변주의 근저에는 ‘슬픔’이라는 정제되고 아름다운 물질이 빈틈없이 깔려 있다. 그것이 나의 심장을 아프게 꾹 눌렀다가 스르르 풀어주기를 반복한다.
‘슬픔이 아름답다’고 시인은 여러 번 말한다. 그래서 그는 부재의 슬픔에 깊이 빠지지 않는다. ‘상실이 주는 슬픔’은 소중한 것의 ‘부재를 확인하는 감정’이 아니라 여전히 ‘존재하는 부재의 존재를 증명하는 감정’인 것을 받아들인다.
맥스 포터의 소설 <슬픔은 날개 달린 것>에는 말할 줄 아는 까마귀가 나온다. 아내를 잃은 남자와 엄마를 잃은 두 아이 앞에 나타나 이별의 슬픔을 딛고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까마귀. 짓궂고 다정하고 거대하고 다재다능하며 사려 깊은 소설 속 까마귀는 ‘검은 나비’를 닮았다. 날개 달린 까마귀와 ‘검은 나비’는 ‘부재의 슬픔을 봉인’하고 ‘날개 달린 슬픔’으로 ‘부재의 슬픔을 해제’한다. ‘검은 나비‘는 까마귀처럼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막다른 슬픔의 끝에 선 존재와 부재들의 슬픔을 해제 하는 위로의 아이콘이다.
우화의 별전, 1인칭 시점의 서사
‘검은 나비’와 ‘날개’를 주목하며 수록된 시들을 이야기를 엮듯이 주르르 읽어 보았다. 거기에는 반복되는 봉인과 해제, 거듭하는 우화가 중심에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시간의 바닥으로 1인칭 시점의 서사들이 흐른다. 그 서사를 따라가며 시를 읽는 맛은 각별하다.
바닥을 흐르는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툭, 어떤 매듭에 걸리는 시점이 있다. 먼 곳에서 잘라온 시간을 모자이크처럼 덧붙인 듯, 과거 속으로 회귀하는 3부의 시들을 읽는다. 연대기적으로 흘러가던 시간의 양 매듭 사이에 오래 전의 시간들이 끼어 있다. 시간의 양 방향을 잘 물고 있는 3부의 시들은 1인칭이 들려주는 스토리텔링을 듣는 것처럼 가깝게 와 닿는다. 드러나지 않았던 우여곡절들과 조우하는 시간이다. 화자가 시인이든 누구이든 1인칭은 자신의 지나간 시간을 현재로 소환함으로써 심장 깊숙이 담아둔 우여곡절을 나름의 서사로 조근조근 풀어낸다. 그것들은 대부분 비슷한 연대기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피붙이들을 향한 애잔한 서사들이다. 1인칭이 1인칭의 시점으로 써내려간 일련의 스토리텔링 같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것이어서 흔하게 보고 듣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함에도 지나간 것으로 회귀하는 시적 시간이 구태의연하지 않고 새롭게 다가온다.
3부의 시간은 먼 과거로 거슬러 회귀하는 시간이지만 1,2,4부의 시간들과 ‘슬픔’의 인과로 잘 엮여 있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원처럼 둥글게 흘러간다. 1인칭의 잠재의식의 흐름을 따라 시간은 오늘에서 내일로, 내일에서 어제로, 어제에서 오늘로 환상環狀의 형태로 이룬다. 환상형環狀形의 시간은 시간으로 직조한 서사에 풍성함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따로 또 같이 흐르는 3부는 우화의 별전 같다. 별전에 담긴 시간은 자연스러운 매듭으로 이어져 있어 전체의 흐름과 동떨어지지 않고 시적 서사에 무리 없이 스며든다. 시간이 문학적 효과들 더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는 걸 확인한다.
환상형環狀形의 시간을 따라 봉인과 해제를 통한 날개달기도 환상環狀을 그리며 반복된다. 3부에서 (시의 화자가 누구이든)1인칭은 잠시 1인칭의 옛날을 소환한다. 소환된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인과를 이룬다. 과거는 오늘이 되어 미래를 향하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오늘과 연결된다. 지나간 시간 속에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있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에 지나간 것들이 있다. 그리고 모든 시간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무료 급식소에 어린 눈사람이 들어왔다
손등이 얼어 발갛게 터져 있었다
고놈 참, 급식소 여자가
안쓰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밥을 담아 준다
너는 연어를 만났느냐, 빙하도 보았느냐,
옆자리 노인이 묻자
연어나 곤들매기를 낚싯바늘에서 빼내 알래스카 갯바위에 던져놓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기도 했단다
사람들은 그 말에 귀 기울이며 밥을 먹는다
어린 눈사람을 힐끔거리며
알래스카로 가는 희망을 품는다
눈사람이 왜 왔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노인은 자신의 빨간 장갑을
어린 눈사람의 손에 끼워 주었다
성탄절 아침
어린 눈사람이 빨간 모자에 장갑을 끼고
성당 앞마당 성모상 옆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성탄제」 전문
시인은 꿈꾸던 마지막 날개를 미래의 몫으로 남겨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날개를 달기 위해 봉인된 지난 시간들을 해제한다. 지나간 시간들은 내일의 날개를 달기까지 다시 봉인과 해제를 거듭하며 몸을 바꾸어 나간다.
‘어린 눈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그는 ‘무료 급식소’라는 경계에 서 있다. 오지 않은 것과 지난 것이 공존하는 경계다. 그리고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는 ‘어린 눈사람’은 미지다. ‘무료 급식소’의 ‘사람들’에게는 눈사람이 눈사람으로 오기 전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눈사람이 ‘어린’ 것에 귀를 기울인다. ‘안쓰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밥을 담아 주는 여자’와 ‘연어와 빙하를 보았느냐고 묻는 노인들’은 어제가 꿈꾼 오늘이다. 눈사람은 아직 ‘어린’ 오늘이지만 ‘어린’ 것은 미래를 향한 날개를 품고 있는 존재다. 그래서 ‘어린’은 눈사람과 ‘무료 급식소’의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는 순환의 고리다. ‘성탄절 아침’은 순환의 고리가 연결되는 순간들의 시간이다. ‘성탄절 아침’의 ‘무료 급식소’에서 ‘어린 눈사람’으로부터 꿈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어린 눈사람’에게 ‘빨간 장갑’을 끼워주며 내일의 날개가 돋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나는 ‘어린 눈사람’도 ‘검은 나비’가 봉인을 뚫고 바꾼 몸이라 생각해본다. 그러기에 ‘어린 눈사람’은 마지막 우화의 완성을 위해 다시 봉인될 것이다. ‘어린 눈사람’과 ‘사람들’은 우화를 꿈꾸며 끝없이 봉인과 해제를 반복할 것이다. ‘어린 눈사람’의 발갛게 터진 손등에 끼워 준 ‘빨간 장갑’은 ‘어린 눈사람’과 ‘사람들’이 순환되는 고리로 연결된 하나의 존재였음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어린 눈사람’이 날개를 달기까지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그들의 마지막을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줄 ‘어린 눈사람’의 다음을 기다릴 뿐이다. ‘사람들’에게 ‘마지막’은 ‘어린 눈사람’에게는 ‘시작’이므로 ‘마지막 우화’는 끝없이 시작하고 끝나고 다시 시작할 것이다. ‘분홍 발바닥’을 가진 ‘엄마에게 업혀 흔들리는 아기’처럼,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모른다 하지 않을 ‘운명적 만남’처럼, 그리고 ‘어린 눈사람’처럼, 마지막 우화는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것은 우화의 시작이다.
다시 봉인을 하며
시인은 ‘날개 달기’를 꿈꾸는 사람이다. <검은 나비를 봉인하다>에서 빛 너머의 빛들을 봉인하고 검은 날개의 우화를 꿈꾸고 있는 이주언을 만난다. 이주언 읽기는 우화를 따라가는 길 위에 있다. 그것은 봉인과 해제를 거슬러 다시 해제와 봉인을 반복하는 일이다. 그의 맑은 눈빛 뒤에 겹겹이 쟁여둔 여러 빛깔로 봉인된 날개를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겹겹의 색깔들은 오랫동안 서로에게 섞이고 스며들어 색 없음의 검정을 완성한다.
이제 그는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펼친 날개를 다시 봉인할 것이다. 그 날개가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 되지 않아도 그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봉인한 첫 날개를 열기까지 저녁햇살이 얼음처럼 박힌 시간을 건너 왔다. 그 시간은 내가 나를 다시 봉인한 시간이고 내가 나의 봉인을 해제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해가 바뀌었고 지난 것과 아직 남아있는 것, 덮어버릴 것과 펼쳐야 할 것, 잊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과 오래 지켜야 할 것들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시인이 보낸 봉인을 다시 봉인한다.
그러그러한 ‘봉인’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가 아니라고 생각될 때 오래된 봉인은 자연스럽게 해제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