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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문협 경북 성주 심산 김창숙 생가 탐방
일시:2018년 9월 18일 화요일~19일 수요일
장소:경상북도 성주
2018년 9월 18일 화요일 서울 출발, 성주 도착
* 서울 심산 기념관 앞 출발
심산 김창숙은 성균관대학고 창시자다. 나의 두 아들은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했다. 나 역시 성균관대학교에서 시창작과정을 수료하고 시인 등단했다. 남편 역시 은행 재직시 성균관대학교에 파견되어 대학생들의 등록금을 관리했다. 작은 며느리 또한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성균관대학교와 매우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오늘 그의 생가를 탐방하는 기행에 참여하였다. 서울 반포 사평로 부근의 그의 기념관 앞에서 출발한다. 심산의 손자분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서 우리 일행을 반가 맞이하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한다. 후손의 예의 바른 모습이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었다.
* 대전 형무소 터
경북 성주로 가는 길에 대전에 잠시 내려 형무소 터를 견학했다. 마당에 망루가 높이 세워져 있다. 2001년 6월 27일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대전형무소가 있던 자리로, 독립투사들을 수감하기 위해 일본이 소규모로 설치하였던 옛 대전감옥을3.1운동 안창호, 여운형, 박헌영 등 많은 독립투사들이 수감되었고, 6.25 때는 연합군에 쫓기던 북한군이 수천 명의 양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곳이기도 하다. 준공 당시 망루는 동서남북에 각 하나씩 있었으나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형무소가 이전하면서 형무소 자리는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현재 높이 7.85m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망루 하나만 남아 있다. 이곳은 대전 교도소로 건설 당시에는 대전 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1984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기 위해 일제가 소규모로 설치하였던 것을 1939년 한국 전쟁 당시 연합군에 쫓기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300명의 양민을 포함한 6.000여 명을 무참하게 학살하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는 화가 이응로가수감되기도 한 곳이다. 민족의 비극을 되돌아보기 위해 보존되고 있는 망루는 역사의 한 자취로써 의미를 가진다. 애처로운 모습이다. 주변은 아파트로 둘러싸여 옛 모습을 지운다. 기념비도 보고 서러운 걸음으로 나왔다.
* 성주 한개 민속마을
매우 큰 자락의 민속마을이다. 경상북도 성주군에 위치한 조선 초기에 형성된 문화재 한옥마을이다. 해설사가 나와서 우리를 안내하며 설명해준다. 이곳은 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가 1450년경에 입향한 이래 560여 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 모여 살고 있는 전통 씨족마을이다. 다수의 전통한옥이 보전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9개 동에 이른다. 한개마을은 월봉 이정현(1587∼1612)에 와서 성산이씨의 씨족마을로 온전히 자리 잡는다. 월봉에게는 외아들 이수성(1610∼1672)이 있었는데, 수성은 달천·달우·달한·달운 등 네 아들을 두었다. 그들은 모두 마을에 정착하여 각각 백파·중파·숙파·계파의 파시조가 되고 각 파의 자손들이 마을공간을 본격적으로 일궜다. 따라서 이 마을이 성산이씨의 씨족마을로 번성한 것은 이수성 때인 17세기 중엽부터라고 할 수 있다.이 마을이 번창했을 때는 100호가 넘었다고 하나, 현재는 69호의 집이 있다. 마을을 구성하는 집들 가운데 하회댁은 1750년경에 지어졌으며, 교리댁·북비고택·한주종택은 1700년대 후반에, 그리고 다른 큰 한옥들은 대개 1800년대에 건축되었다. 6·25전쟁 때에는 큰 피해를 입어 여러 채의 한옥이 파손되거나 완전히 소실되었다.
다섯 개의 작은 마을들이 하나의 큰 마을을 이루는 한개마을에서, 마을이란 성장하고 또 쇠퇴하기도 하는 유기체임을 알 수 있다. 마을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와 밀접히 관련되었으며, 마을공간을 구성하는 논리와 원칙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데 그 논리는 주자가례와 같은 교과서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얻어진 현실적인 원칙이었다. 성주 한개마을은 우리 전통마을과 한옥이 원칙과 규범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어졌음을 잘 보여준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전통민가도 보고 배우며,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멋진 탐방이었다.
* 성주 향교
나는 경북 성주에는 처음 탐방왔다. 그래서 한 곳, 한 곳에 모두 소중한 탐방지다. 향교는 매우 아름다운 조형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1398년 태조 7년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입덕문·수복청·고사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조6현,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원래 있던 만화루와 양사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동재와 서재는 6·25 때 전소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의 명륜당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5호로, 대성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전교 1명과 장의 두어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성주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의 향교 건물은 조선의 역사가 딤긴 유적지로 숙연한 분위기였다. 사드배치의 서글픈 시사가 서린 성주다. 그 산줄기러 둘러싸인 성주를 눈앞에서 덤으로 보았다. 이번 기행에서 성주의 역사, 자연 등 많이 배우고 간다.
* 경북 성주 군청
이곳 성주 군군청은 심산 기념관을 관람하기 위해서 온 곳이다. 해가 기우는 저녁 무렵이다. 군청 건물이 매우 웅장하다. 도시, 시골 구분 없이 발전된 우리 나라를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군청에 버스를 주차하고 바로 곁에 있는 심삼 기념관으로 이동했다.
* 심산 기념관
경북 성주 군청 부근의 도로변에 심산 기념관이 있다. 우리 가족은 이 분과 인연이 깊어서 관심 많다. 나의 두 아들이 성군관대학교를 졸업했고, 나 역시 성균관대학교에서 시창작과정을 수료하고 시인 등단했고, 남편 역시 금융계 재직 당시 성균관대학교 학생들 등록금 관리를 해 주었던 사람이다. 작은 며느리 역시 성균관대학교 출신이다. 그래서 더욱 이 분께 고맙기도 하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공간에 그의 족적을 사진, 신문 자료와 함께 전시해 놓았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잘 관람한 후 떠나왔다.
* 경북 성주 거대한 참외 농가
성주 참외를 사 먹어본 적은 있지만 성주에 온 것은 처음이다. 비스로 이동 중 농가가 나오면 어김없이 참외 재배지가 보인다. 비닐 히우스 동들이 줄지어 들녘에 들어서 있다. 아직 거두지 않은 마지막 끝물 참외들도 하우스 안에서 뒹군다. 이곳이 기후적으로 참외만 아주 잘 맞는가보다. 성주 시민들은 참외 농사로 그리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풍요로운 성주다. 저 참외의 덕이라니 고마운 작물이다.
* 경북 성주 심산 김창숙 생가
드디어 저녁 해질녘 김창숙 생가에 왔다. 시골 마을 가운데 그의 나고 자란 집이 있다. 기와집 마루에는 우리를 위해 준비하는 요원들이 분주하다. 작은 규모의 연극을 보여준단다. 생가는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주택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83호다. 현재의 건물은 심산의 22세, 고종 38년 1901년에 일어난 화재로 불에 탄 것을 중수개축한 것이다. 1901년 화재 이전 건물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대로부터 세거하여 왔고 고종16년 1878년 7월10일에 심산이 태어났다. 생가는 안채만 현존하는데 정면4칸 측면1칸의 -자형집이다. 안채는 청천서당 북쪽 100m정도 상거한 위치에 있다. 김창숙은 아버지 호림과 어머니 인동장씨 사이의 장남으로 자는 문좌, 호는 동강공의 13대 위손이다. 심산은 1910년에 성명학교를 세워 후진양성 하였고 일진회를 성토하다 옥고를 치루었고 일제가 강점하자 중국에 망명하여 파리장서를 보내는 한편, 유림단을 통해 구국항쟁 하여 마침내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다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이 되었고 전국 유림을 정비하여 성균관대학을 일으켜 국학의 정통성을 되살린 민족문화 창달의 주축이 되었다. 그의 생가는 홑처마 우진각기와지붕의 구조이며 향좌측부터 부엌, 안방, 마루, 건너방 순서로 평면이 구성되었는데 건너방 뒤로는 반침이 있고 대청 앞쪽엔 유리창문을 달았다. 건물 내에 13대조인 동강김우응의 저서인 속자치통감목의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안채를 본 후 뒷마당으로 갔다. 깔판을 깔아놓고 연극을 한다. 심산 김창숙의 강점기 때의 애국운동이다. 다시금 그 분의 위대한 애국정신과 업적을 보는 순간이었다. 고문으로 무릎이 꺾여 일생 후반기에 앉은뱅이로 살았다는 사실을 매우 애달픈 일이었다. 성균관대학교 자연공학 캠퍼스인 수원 교정에는 김창숙 선생의 우람하게 선 동상만을 보아왔기에 저토록 힘들게 사신 줄은 몰랐었다. 후손인 우리들이 나라를 잘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소박한 마을길을 걸어 나왔다.
* 청천 서원
김창숙 생가에서 나와 마을길을 걸어 청천 서당으로 왔다. 청천 서당은 동강 김우옹 선생을 제사 지내던 집으로 조선 영조 5년 1729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청천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회연 서원과 함께 성주지역의 중심서원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 되었다. 그 후 동강의 12대 후손인 김호림에 의해 청천 서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지었다. 1910년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이 청천 서당을 성명 학교라고 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위한 학교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김창숙 선생이 한때 머물던 장소이기도 하다. 청천 서당 체험활동은 우리 나라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민족 지도자의 정신을 되새겨 보는데 목적이 있다. 김창숙의 족적 한 도막을 밟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 청천 서원
청천서당에서 나와 청천 서원으로 갔다. 그러니까 옛날의 서당은 오늘날의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기관이고 서원은 오늘날의 사립대학교 수준이다. 조금 전 본 청천 서당과 지금 보는 청천 사원은 그렇게 구분지으면 된단다. 이곳 청천 서원은 1729년 영조 5년 사림에 의해 김우옹을 봉향하기 위해 청천 서원을 창건하였다. 고종 때 대원권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된 후, 김우옹의 후손인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 서당으로 중건하였다. 서원이 창건된 이후에는 회연서원과 함께 성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사림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서당으로 중건된 이후 1910년 봄에 주손인 심산(心山)김창숙(金昌淑)이 교육구국운동으로서 서당을 수리하여 성명학교(星明學校)라 부르고 후진의 양성을 위한 교사(校舍)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1992년에는 대가면 칠봉리 산중턱에 유림과 후손들의 힘으로 위치를 옮겨 현재의 건물로 복원되었다. 서원은 널찍한 마당에 산뜻한 나무 건물로 들어서 있으며 현판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이다. 서원정면에는 연못과 구름다리, 갖가지 모양의 바위와 꽃나무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청천서원에서 나와 고가들이 즐비한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청천서당이 나온다. 청천 서당은 일제강점기에 성명학교 교사로 사용되면서 애국계몽운동의거점이 되기도 한다. 청천 서당은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제2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천 서원은 청천 서당보다는 훨씬 건물이 크고 웅장하다. 긴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성주가 훤히 내다보인다. 그 옛날의 숨결이 서린 교육기관을 잘 보았다. 김창숙의 손녀 분과 사진도 찍었다.
* 사우당 의성김씨 종택 다과와 시낭송
오늘 밤은 이곳 의성김씨 종택에서 유숙한다. 여장을 풀고 한 방에 모여 종가의 후손 며느리로부터 다과를 대접 받으며 종부의 고통과 오늘이 있기까지 종택의 역사를 들으며 문인들의 방문을 크게 환영한다고 했다. 우리 문인들도 답으로 시낭송을 했다. 나도 졸시 '찔레꽃'을 지하철시이며 전철 2호선 당산역과 7호선 태릉입구역에 설치 됐음을 말하고 이 시는 원래는 찔레꽃을 나의 어머니로 은유하여 노래한 시인데 오늘 밤은 이 시를 종부님들께 바친다고 말한 후 낭송했다. 매우 흐뭇해 하며 큰 박수를 쳐주었다. 보람된 시간이었다.
2018년 9월 19일 수요일 성주 의성김씨 종택, 세종대왕 태실 등
* 사우당 의성김씨 종택
지난 밤 아늑한 한옥에서 잠을 잤다. 마당과 방 구조가 옛날 유년의 고향집 분위기라서 애정 깊은 마음으로 편안한 쉼을 누렸다. 이곳 사우당은 450여년 된 고택으로 선조의 호를 따서 사우당이라 칭하였으며 후학을 양성했던곳으로 지방 유형 문화재 제282호다. 경상북도 지방문화제로는 제561호 이다. 사우당 선생은 덕천서원에 주벽으로 모시고 있으며 의성김씨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성년에 이른 남녀를 대상으로 어른이 되었음을 사회적으로 인정한 의식과 성년례 행사를 매년하고 있다.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 성년례 의복과 다과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어 고택을 체험하는데 더없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더불어 예절을 비롯해 옷감염색과 다도를 배울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대청마루에는 옷감을 짜던 베틀이 진열되어 있다. 또한, 꽝과리, 장고, 북등의 풍물도 배울수 기회를 제공한다. 마당 한켠에는 우물이 있어 운치가 있고 장독대와 푸른소나무가 고택의 아름다움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그네가 설치된 뒤뜰에는 다양한 농사도구와 고가구,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고택을 돌아보았다. 층층으로 높이 들어선 고택을 서서히 오르며 보았다. 규모도 상당히 크고 잘 보존된 기와가옥이다. 마을도 한 바퀴 산책했다. 가을 정취가 물씬 배어 아름다운 풍경이다. 우리 조상의 유적을 보며 하룻밤을 지낸 이번 탐방은 오래도록 기억되며 흐뭇할 것이다.
* 성주 중식식당 정원
농장 식당이란다. 입구에서부터 여러 종류의 과수나무가 반긴다. 감나무 등 열매도 맞었다. 중식을 마치고 곳곳을 탐방했다. 목화꽃도 피었다. 목화열매를 따 먹었다. 유년시절 우리 집에도 목화를 심었고 지금처럼 따 먹곤 했다. 모두를 보기드문 체험이라며 훈훈하고 흥겨운 시간이었다. 주인에게 고마웠다.
* 백세각
성주의 백세각을 탐방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3호다. 조선 전기의 문신 야계송희규가 사헌부 집의로 있으면서 명종의 외삼촌인 영의정 윤원형과 이기를 탄핵하다가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와 1561년 명종 16년에 지은 제택이다.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얽었으며, 대패질을 하지 않고 자귀만으로 깎아 다듬어 만든 건물로 알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정침과 별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에 일각 대문을 두고, 주위에 토석 담장을 돌려 영역을 한정하고 그 안의 다소 높은 기단 위에 백세각이 남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좌측 별곽에는 사당이 있으며 백세각 앞쪽 우측에는 관리사가 각각 위치한다. 정침의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구(口)’자형이다. 정면 7칸 중 동쪽에서부터 헛방, 마구칸이 1칸씩 놓이고, 그 다음이 중문칸이다. 중문칸 서쪽으로는 사랑방 2칸과 사랑대청 2칸을 두었고, 사랑방과 마루 앞쪽에는 툇마루가 놓여 있는데 사랑방 앞 쌍여닫이 세살창문에는 각각 고졸한 구조의 가운데 설주가 서 있다. 앞마당 뒤의 안채 부분에는 3칸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서측에는 건넌방과 마루방, 안사랑방과 부엌이 앞채에 이어졌고, 동측에는 안방과 부엌, 뒤주 등이 앞채의 마구간으로 이어진다. 안방과 안사랑방, 안대청 뒷벽의 창문에도 가운데 설주가 서 있다. 기단은 네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4겹으로 쌓아 놓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아 각주를 세운 집이다. 사랑마루와 안대청 상부가구는 3량가에 제형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얹은 간소한 구조이며, 홑처마에 맞배집이다. 이 건물에는 이율곡, 한석봉, 채번암의 친필이 각각 한 점씩 소장되어 있었으나, 한석봉의 친필은 1970년에 도난당하였다. 별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대청과 전(田)자형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공산 송준필을 위시한 그 문인들이 성주시장일에 배포한 독립청원장서 3,000장을 복사했다고 전하며, 또한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의 모의 장소로 사용되어 3ㆍ1독립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마지막 탐방지인데 독특하면서도 성주의 깊은 역사유적을 본 체험이었다.
* 백세각 항일 의적비
백세각을 탐방하고 나오는데 항일 의적비가 있다. 우리 조상들의 눈부신 활약이며 애국정신을 눈앞에서 본다. 이렇게 깊은 고을에 이런 훌륭한 유적이 있다니 숙연해진다.
* 성주 참외 하우스 체험
이제 성주를 떠나야 하는 시간인데 비닐 히우스에서 남은 노란 참외가 보고 가란다. 하우스 문이 열려 있고, 마을 사람들은 들어가도 된다고 허락한다. 가을인지라 다 팔려나고 남은 참외 몇 개가 뒹굴고 있다. 성주 사람들의 참외농사 현장을 제대로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 세종대왕자 태실
성주에서 마지막으로 탐방한 곳은 세종대왕자 태실이다. 서울에서 이리 먼 곳에 이런 유적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산을 걸어서 올라가서 보았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민간에서는 땅에 묻는 경우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출산 후 마당을 깨끗이 한 뒤 왕겨에 태를 묻어 몽긋몽긋하에 태운 뒤에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왕족의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시키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이때 이를 주관하는 관상감에서 길지로 선정된 명산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는데,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설을 태실이라 불렀다. 또한 태봉은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할 경우에 격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가봉비를 세운 것으로 임금의 태실을 말한다. 조선조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로서 전열은 11기, 후열은 8기로 되어있다. 태실 앞에는 각각 왕자의 태실비가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 세종 20년 1438년에서부터 세종 24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는 비석이 닳아 판독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으며, 판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은 평원대군, 영응대군, 의창군 등의 태실비이다. 그러나 1977년 12월보수정비하면서 금성대군, 화의군, 단종 등의 태실로 추정되는 자리에서 토기, 태호, 분청인화문 대접, 분청상감 연화문 뚜껑 1식과, 명기가 있는 지석2점 등이 출토되어 현재 국립대구박물관, 경주박물관, 경북대학교 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가까이엔 이곳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이었던 선석사가 있다. 19기의 태실은 화강암으로 깎은 조선태실 의궤 형식으로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태호를 넣는 형태이다. 태호 속에는 태항과 태주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을 두었다. 지상에는 기단, 간석, 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각왕자의 태실을 가리키는 표석을 세웠다. 넓은 자락의 공간에 가득 채우운 태실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왔다.
* 태실 문화관
버스가 잠시 주차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시간에 몇 몇 사람만 잠시 들렀다. 세종태실에 이어 태실문화관까집 보는 행운을 얻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