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여문의 말대로 『쳐들어올 때는 반드시 소수의 군사로 유인하여 적이 매복한 곳에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잇따라 일어나 공격한다.』는 왜군의 전법은 칠천량 해전에서 입증되었다.
이때 조선군은 일본군의 전법에 말려 단 12척의 전선만 남긴 채 사실상 전멸했던 것이다.
여여문은 전쟁터로 달려가 한목숨 바칠 각오가 있음을 피력하기도 했다.
『제가 현장으로 내려가서 산성을 다시 쌓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아니면 저를 요해처로 보내 주십시요.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선조실록》1597년 1월4일
여여문은 “후한 이익을 좋아하는 일본인을 유인하기는 쉽다”면서 “일본군을 꾀어 적장을 모살하도록 계획을 세우면 아마도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책을 올렸다.
과감하게도 ‘적을 이용한 적장 모살 작전’을 아뢴 것이다. 여여문은 이때 조선을 ‘우리(我) 조선’이라고 표현했다.
여여문은 뼛속까지 조선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항왜’ 여여문이 ‘우리 조선’ 운운하면서 계책을 논하고, 조선군의 약점을 설파했을 때, 선조 임금의 반응은 어땠을까.
“부끄럽다”는 반성이었다. 선조는 “그가 말한 대로 시행하라. 여여문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 일이 부끄럽기도 하다.”라고 했다.
이 뿐이 아니었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년) 5월17일 여여문은 적진에 정탐꾼으로 밀파되어 왜군의 정세를 상세히 보고하는 임무를 맡는다.
여여문은 머리를 깎고 왜인의 옷을 갈아입고 적진에 잠입했다.
여여문은 울산, 즉 성황당·도산·태화강 등 3곳의 적병숫자를 파악해서 손수 형세도를 그린 뒤 빠져나왔다.
여여문의 형세도를 본 명나라군 양호 총사령관은 크게 기뻐하면서 은 10냥을 내려주었다.
물론 여여문의 형세도대로 작전을 짰다. 명나라군의 마귀 제독이 군사를 일으키자 여여문을 다시 적진에 침투시켰다.
여여문은 전투가 벌어지자 왜군 4명의 수급을 베어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명나라 마귀 제독은 여여문을 죽이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왜적의 수급마저 다 빼앗아 그의 공을 가로채 버렸다.
《선조실록》에는 1598년(선조 31년) 3월 27일 여여문의 죽음을 알리면서 『여여문이 베어낸 왜적의 4수급을 마귀가 빼앗는 것을 똑똑히 본 사람들이 많다.
여여문 말고도 소운대(小云大)라는 항왜 역시 아군을 위해 공을 세웠고, 왜적을 여러 명 유인했다.』고 기록했다.
여여문이 죽은 지 두 달이 지난 1598년(선조 31년) 5월 17일 우의정 이덕형은 항왜 여여문의 공적을 일거한 뒤 반드시 상급을 내려야 한다고는 주청을 올린다.
“여여문은 임진란 이후로 종군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처자식도 모두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가상한 일입니다. 여여문을 논상함으로써 격려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여여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선조실록》 1597년(선조 30년) 9월8일 기록을 보면 ‘사백구’라는 항복한 왜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공적이 대단했다. 항왜에 지극히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선조 임금에게 사백구의 포상을 건의하면서 올린 상소문이다.
『금년(1597년) 3월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서 사백구라는 왜인이 투항했는데, 지성으로 왜병을 토벌하는 것을 보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상급을 내려야 합니다.』
김응서는 항복한 왜인 사백구에게 줄 상급이 없어 일단 김해부사 백사림에게 보냈다.
마침 일본군이 경상도 함양의 황석산성을 공격했다.
이때 김해부사 백사림도 출전했는데, 사백구 또한 전장에 나섰다.
사백구의 활약은 남달랐다. 조총으로 왜병을 4명이나 쏘아 죽였다.
하지만 황석산성은 함락되었고, 살이 쪄서 거동이 불편했던 백사림은 꼼짝없이 포로가 될 운명이었다.
이때 사백구가 왜병 흉내를 내어 백사림 가족을 성 밖으로 탈출시켰다.
사백구는 백사림을 산속에 숨겨놓고는 왜병이 점령한 산성으로 숨어들어갔다.
백사림은 사백구가 자신의 위치를 왜적에게 알려 공을 세우려는 줄 알고 두려움에 떨며, 사백구가 배신할 까 두려워 몸을 잠시 피해있었다.
그러나 사백구는 성안으로 들어가 왜병들에게 “먹을 것 좀 달라”고 해서 쌀 한말과 간장, 무우, 옷가지 등을 구해왔다.
사백구는 백사림이 보이지 않자 발을 구르고 ‘어디 갔느냐’고 불러댔다.
백사림이 겨우 몸을 드러내자 사백구는 백사림의 허리를 끌어안고 “대체 어디 갔다가 왔느냐”고 반가워했다.
백사림 가족은 사백구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사백구는 부사 백사림에게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
백사림이 밥을 다 먹은 뒤에야 사백구는 수저를 들었다.
사백구와 백사림의 일화를 전하던 김응서의 한탄이 심금을 울린다.
『조선의 유식한 무리도 처자식을 구제하지 못하는데, 무식한 오랑캐 무리의 지성이 사백구와 같으니 사람으로써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백구에게 상급을 내려 위로하소서. 그리고 사백구에게 성씨를 하사하여 조선 사람으로 영원히 살도록 하소서.』《선조실록》
여여문과 사백구 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서 한몫 단단히 한 준사(俊沙)라는 항왜도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이 배로 일본 수군을 격파할 때 장군의 배에는 안골포에서 투항한 항왜 준사가 타고 있었다.
준사는 바다에 빠진 왜군들을 내려다보면서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지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마다시의 목을 내다걸어 왜적의 사기를 꺾었고,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