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33:16]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그 물은 끊이지 아니하리라 -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경건한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로부터 풍족한 사랑을 호흡하며 복된 삶을 영위해 나간다. 선지자는 그것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1)하나님께서 그를 지켜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몸소 그의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다.
'높은 곳'은 적의 위협이나 어떠한 자연의 재해도 접근 불가능한 난공 불락의 요새 곧 가장 안전한 장소를 가리킨다. (2)하나님께서 일상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양식'과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으로 구비해야 할 필수품들을 총칭하는 말이다.이러한 축복은 오직 하나님으로 주인을 삼고 그 보시기에 의롭고 경건하게 살기를 힘쓰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그럴진대, 성도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사 33:17]
너의 눈은 그 영광 중의 왕을 보며 광활한 땅을 목도하겠고...."
너의 눈은...목도하겠고 - 선지잔는 계속해서 앞에서 말한 경건한 신자들을 향해 그들이 누릴 풍요한 미래의 모습을 말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여기 언급된 '왕'이 히스기야 왕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히스기야 왕은 유다의 위기 상황에서 찢긴 의복과 삼베옷을 입은 수치스런 모습을 보였으나 위기가 끝나고 적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다시 존귀의 위엄을 회복한 영광스런 모습으로 백성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배타적으로 히스기야 왕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1)동일한 문맥 속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분명히 묘사하고 있으며, (2) '왕'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는 사살은 선지자가 역사상의 특정한 왕뿐 아니라 이상적인 왕을 염두해 두고 있음을 시사하며, (3)히스기야 왕이 다스렸던 협소한 영토와 본문에 언급된 '광활한 땅'과는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잘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히스기야 왕은 메시야의 모형으로서 거론되었다는 견해를 취한다.
[사 33:18]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칭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 구원 받은 백성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그들이 겪었던 두려웠던 순간들을 회고하게 될 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희열과 감격 속에서 승리의 환호성을 터트리게 될 것이다 :'지난날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자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어디있느냐?'. 한때 공물과 전리품들을 계산하고 장부에 기입하던 서기들(소페르)과 그 공물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던 관리들과 탑 을 세워 도성을 습격하려던 계획을 세우던 앗수르 관리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더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을 지껄이며 길길이 날뛰던 '강포한 백성' 곧 앗수르인들 또한 꿈과 같이 사라질 것이다.
[사 33:19]
네가 강포한 백성을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서 네가 알아 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