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列國演義)-학경(郝经)
1223년에 태어나서 1275년에 죽은 원나라 초기 때의 명유(名儒) 자는 백상(伯常)이고 조상의 원주지는 지금이 산서성 릉천(陵川)인 택주(泽州) 릉천이고 태어난 곳은 지금의 하남성 허창(許昌)인 허주(许州) 임영(临颖) 성고진(城皋镇)이다. 원나라의 관리로 유학자 신분으로 1256년 원세종 홀필렬로부터 조명을 받았다. 1260년 강화를 의논하기 위해 남송으로 들어갔다가 남송의 권신 가사도(贾似道)에 의해 비밀리에 감금되어 16년 동안 갇혀 학경남수(郝经南囚)라는 전고를 만들어 사람들은 그를 남국의 소무(蘇武)라고 불렀다. 1274년 남송 정권이 무너지고 학경은 구조되어 북경으로 귀환했다가 구금생활 중에 얻은 병으로 2년 후에 죽었다.
금나라 말의 난세에 태어난 학경은 부친을 따라 전란을 피해 하남성 노산(鲁山)으로 몸을 피했다가 다시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保定市)인 순천부(顺天府)로 옮겼다. 집이 가난했음으로 낮에는 나무를 해서 양식을 구하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순천부 좌부수(左副守) 수기고(帅机贾)에 의해 가정교사로 초빙받고 다시 채국(蔡国) 만호(万户) 장유(张柔)의 부중의 관사(馆师)가 되어 두 집안이 소장하고 있던 만권의 서적을 섭렵한 학경은 통하지 않은 분야가 없이 박식하게 되었다. 원호문(元好問)이 그에 대해 평하기를 “ 그가 한 번 몸을 심호흡을 하고 몸을 일으키니 천지간의 모든 사물들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했다.
학경의 조상은 8대에 걸쳐 모두 유학의 수업을 받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다. 금나라 말 대학자 원호문은 학경의 조부 학천정(郝天挺)의 문하다. 학경이 유년일 때 몽고군사들이 남하하여 중원에 난리가 났음으로 그의 부친 학사온(郝思温)은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하남의 노산 일대로 피난 갔으나 전란의 피해는 노산에도 닥쳐와 그의 가족들은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학경이 9살이 되었을 때 그 모친이 전란을 피해 땅굴 밑에 몸을 숨겼으나 란군이 불을 질러 정신을 잃고 사망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학경이 황망 중에 꿀과 생강으로 즙을 만들어 모친의 입에 흘려 넣어 목숨을 구했다.
원헌종(元宪宗) 6년(1256年) 정월,학경은 당시 번왕(藩王)의 신분이었던 홀필열(忽必烈)을 상면하여 그의 포부를 드러내자 홀필열은 학경이 큰 인물임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학경은 홀필열을 보좌하여 원나라 건국을 위한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중통(中统) 원년 3월 (1260年) 개평(开平)에서 그의 경쟁자인 동생 아리부가(阿里不哥)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 홀필열은 함경을 한림시독학사(翰林侍读学士)와 황봉문관대학사(皇封文馆大学士)에 임명했다. 홀필열은 원세조 쿠빌라이다.
그해에 학경은 원세조의 명을 받들어 원나라 사자의 신분으로 예전에 송나라가 악주성(鄂州城)에서 행했던 약속에 대한 이행을 요구하기 위해 송나라로 내려갔다. 그러나 남송에 당도한 학경은 남송의 재상 가사도에 의해 구류되어 진주(真州)에서 16년 간이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진주는 지금의 강송소 의정((仪征)이다. 학경은 16년 동안 옥중에서도 학문을 강론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지원(至元) 12년(1275) 원군이 지금의 남경인 건강(建康)을 함락시키자 송나라 재상 가사도는 두려움에 떨며 황급히 사람을 시켜 학경을 원나라로 송환시켰다. 학경은 그때는 이미 억류생활을 한지 16년이나 지난 후라 신체는 허약하고 머리는 백발이 되어 있었다.
학경이 귀환하는 연도에는 백성들은 그의 변함없는 지조를 칭송해 마지 않았다. 학경이 북상하여 대도 부근에 이르렀을 때 불행하게도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세조가 곧바로 근시와 어의를 보내 학경의 병세를 살펴보라고 했다. 이윽고 학경이 대도에 들어오자 세조는 후한 상금을 내리고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했다. 그러나 학경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원지 12년7월(1275年)에 타계했다. 향년 53세였다. 기국공(冀国公)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정치가로써 학경은 중화인과 이족을 구분하는 것을 반대하고 사해일가(四海一家) 사상에 입각해서 천하는 통일되어야 한다고 했다. 학경은 몽고인들이 한화되는 과정 중에 유가사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원제국으로 하여금 선정을 베풀도록 이끌었다. 정치가, 학자, 문인, 서예, 그림에도 능했다. 유집에 《능천집(陵川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