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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묵상글 (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 어린이스러운 회개와 어른스러운 회개 . 등 )
*** 07:10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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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13 05:38
- 어린이스러운 회개와 어른스러운 회개
오늘 주님께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라고,
그래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저는 오늘 ‘어린이스러운 회개’와 ‘어른스러운 회개’를 묵상해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어린이는 철부지 어린이가 아닐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보통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늘 자기중심적이고 배려할 줄 모르며 처신이 미성숙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스러운 회개는 이런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어울리는 어린이요 회개일 터인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첫째로 단순함입니다.
복잡하지 않은 것이고,
복잡하지 않다는 것은 여러 가지가 얽히고설키지 않은 것이고,
여러 가지 또는 상반된 가치와 욕심이 얽히고설키거나 충돌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복잡한 이유가 그 반대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복잡하고,
하고 싶은 것이 이것저것 많아서 복잡하고,
이 말도 솔깃하고 저 말도 솔깃하여 복잡하고,
이것이 좋아 보이고 저것도 좋아 보여 복잡하고,
육적인 욕망과 영적인 갈망이 같이 있어 복잡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어린이에게는 선입관이나 편견이 없습니다.
그래서 백지처럼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고,
한 마디로 때가 묻지 않아 영혼이 깨끗하며,
그래서 얘기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세 번째로 어린이는 약하고 겸손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의 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 힘에 의지하지 않고 부모나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며,
도움의 손길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도움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이유로 어린이는 단순하게 믿고 잘 믿으며
그 결과로 여러 가능성에 다 열려 있으며
신앙 면에서도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 있으며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렸을 때는 어른이 하라는 대로,
교회가 가르쳐주는 대로 아무 의심 없이 하느님을 믿었다가
나이를 먹어가며 점차 때가 묻어서 하느님을 믿지 않다가
더 나이 먹으면 다시 단순해지고 겸손해져 하느님을 다시 믿는 회개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른스러운 회개도 또한 해야 합니다.
앞서 봤듯이 철부지 어린이는 자기밖에 모르고 매우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남의 사정이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남을 고려하거나 배려할 줄을 모릅니다.
한 마디로 미 성숙하여 남을 위한 여백이 없고,
사랑의 기초가 아직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스러운 회개가 믿음의 회개라면
어른스러운 회개는 사랑의 회개입니다.
성숙하면 할수록 마음이 넓어져 이웃을 위한 공간이 있으며,
늘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너그러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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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난 7월부터 계속 바쁜 일정이었습니다. 7월 15일부터 27일까지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지난 8월 2일부터 4일까지는 제가 소속되어 있는 연수지구 유소년 연합 캠프가 있었습니다(제가 연수지구 유소년 지도신부라서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8월 5일부터 9일까지는 서품 동기 은경축 기념 일본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 모든 날짜도 길지만 제가 없는 시간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시간, 그리고 다녀와서 밀려 있는 일을 하느라 정신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밀린 일도 어느 정도 정리하면서 어제는 푹 쉬려고 했습니다. 월요일 새벽 미사를 마치고 곧바로 침대로 들어가서 하루 종일 잠만 자야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피곤하니까 잠을 자야 해.’라고 머리에서 말하는데, 점점 정신이 맑아지면서 해야 할 일이 떠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온종일 책 읽으며 공부하고, 또 글을 쓰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더 피곤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더 힘이 나는 것입니다. 사실 피곤하면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번아웃이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해야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가 필요할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새로운 변화를 계속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냥 세속적인 과거의 습관적인 모습에 갇혀 있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당시의 어린이는 아직 인간으로 보기에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무시했고,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이나, 병자들을 행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이 당시 사회의 풍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회 풍조를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고,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변화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세상이 원하는 변화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이고, 이 변화에 맞춰서 살아가는 모습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때 더욱 힘차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하늘 나라에서의 영광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변화는 자기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는 사랑의 완성을 따르게 됩니다. 더 큰 영광을 위한다면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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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 시대는 존재의 깊은 질문을 던지지 않고 무관심하다. 오직 어떻게 해야 성공할지 고민할 뿐이다(C. 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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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 18장은 마태오복음사가에 의한 네 번째 설교 집성문으로 교회설교 혹은 공동체설교라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야 지역에서 유다지역으로 가시기 직전에 교회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에 대한 설교인데, 교회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작은이들의 가치(1-14절)와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애(15-35절)를 다루고 있는데,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로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세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는 우선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야 그곳에서 큰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린이’란 열두 살이 되기 이전의 아이를 가리키는데, 고대인들은 ‘어린이’는 오늘날 우리가 여기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손이 많이 가고 책임감도 없고, 늘 어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하찮은 존재요, 율법을 모르는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된’ 사람이란 어른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함을 받아들이고, 주인께 신뢰로 의탁하는 죄인을 말합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5,3)고 선언하셨습니다.
<둘째>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인지’를 밝히십니다. 곧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명예나 권력을 가진 이나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이가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마태 5,19)이라고 제시하셨습니다.
<셋째>는 ‘누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곧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무력하고 미천한 이, 나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이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나에게 상처를 준 죄인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미천하고 무력한 이들을 당신 제자로 받아들이셨고,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되찾은 양의 비유”(12-14절)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마태 18,1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하찮고 비천한 이일수록 더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주님!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게 하소서.
아기가 어머니께 소중한 것처럼,
제가 당신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아기가 어머니께 속해 있듯,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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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장 큰 사람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18,4).하시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18,1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한 마음, 어린이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듯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미아 발생으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보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 자신을 낮추어 비우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애당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더해서 많이 갖고, 현명한 사람은 자꾸만 덜어서 많이 갖습니다”(이규경). 노자도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18,17). 회개하여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랑이 담긴 일을 보시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1고린14,20).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마음이 넓고, 속이 깊은 사람, 생각하는 차원이 높은 사람이 되려면 주님을 꼭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큰 사람은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하루를 허물로 누벼놓았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 품에 안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큰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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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하늘의 선물이다
청주 내덕동 주교좌성당 반영억신부
시간은 하늘이 준 선물이다. 각 사람은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용하고자 애를 쓴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이지만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이 소중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더 좋은 기회이다. 허투루 낭비할 수 없는 보물이다.
어느 수도원에서 보리농사를 지었는데 장상은 두 형제에게 보리를 베어 단으로 묶어 놓으라고 했단다. 보리밭 양쪽에서 보리를 베고 있는데 한 형제가 보기에 상대는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중간중간 쉬는 것이 보였다. “좀 성실하게 일하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은연중에 화가 나서 불평불만 하였는데 저녁에 마무리할 때 보니,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 자기보다 더 많은 양의 일을 해 놓은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그 비결을 물었더니 그 형제가 하는 말, “나는 틈이 날 때마다 낫을 갈았네!”
시간을 관리하면서 사는 사람과 시간에 쫓기면서 사는 사람의 미래는 다르다. 게으르면서 늘 바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일하면서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다. 우리에게는 시간에 끌려다니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편안하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그것은 자칫 게으름의 늪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지각없는 자들과는 시간을 줄이고, 사려깊은 이들과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집회27,12). 자기주장이 커가는 시끄러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시간의 여유를 갖기를 소망해 본다.
파리 올림픽 경기가 끝나면서 기쁨과 안타까움의 순간이 마무리되었다. 메달을 획득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이날을 기다리며 혼신의 노력을 다한 수고와 땀은 값지고 소중하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단련되었던 시간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산이다.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세계의 넓은 벽을 실감한 순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메달을 통해 돈방석에 앉은 사람을 기억할지 모르지만 땀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늦추어진 성공을 기약하며 또다시 정열을 쏟는다. 다음 기회가 올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오늘을 가꾼다. 실패는 좋은 경험이고 승리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며 성공을 위한 최상의 연습이다. 내일을 희망하는 만큼 오늘은 활력을 얻는다.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는 나이가 들어간다. 그러나 어느 가수가 노래하였듯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깨어 있는 영혼에는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순의 청춘이 있을 수 있고, 스물에도 청춘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디 있는가?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어르신이 되는 것은 특권이고, 어르신의 지혜는 소중한 자산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하면서 오늘을 낭비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늘 청춘이다. 나의 고유한 빛깔을 내면서 품격을 지키는 이 순간은 참 아름답다.
사람에게 시간은 유한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낭비한 시간은 복구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사실 ‘과거는 흘러간 역사이니 하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신비이니 하늘의 섭리에 맡기며 오늘은 주어진 선물이니 이 순간을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매 순간순간을 알차게 살아가는 것은, 하늘이 준 선물에 대한 감사이고, 동시에 하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살아야 한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라.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른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라”(로버트 해리). 지금 아니면 내일은 이미 늦을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하고자 하는 일을 지금 시작하라. 그리고 최선을 다하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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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입니다. 앞에는 안덕 저수지가 있고, 뒤에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집 앞에는 채석장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돌을 캐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선산이 있고, 집안의 장손이 있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가끔 다녀왔습니다. 말 그대로 해님만, 달님만 알아준다면 만족한다는 두메 꽃처럼 깊은 산골입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아랫마을에 쉼터가 생겼습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라 아픈 사람들이 요양차 내려왔습니다. 입소문이 나서인지 외지에서 건강 회복을 위해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예전에 도시는 정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교통이 발달하고, 도시화 되면서 도시의 형태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망하는 사람이 출생하는 사람보다 적어지면서 도시의 기능과 모습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도시는 상주인구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잠시 머무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합니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강남으로 몰렸는데, 요즘은 강북으로 사람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강북만이 가지고 있는 정과 문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강북에는 고궁이 있고, 한옥이 있고, 오래된 문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젊은이들의 취향과 입맛을 끄는 콘텐츠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인적이 드문 마을들에 사람들의 생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명동에서 8년을 살았기에 강북의 맛과 멋이 있는 곳을 찾곤 했습니다. 명동에서 나오면 바로 남산 한옥마을과 남산길이 있습니다. 을지로로 내려오면 도심 속의 쉼터인 청계천 물길이 있습니다. 종로로 나가면 광장시장이 있고, 혜화동으로 나가면 대학로와 낙산이 있습니다. 홍대, 연남동, 경의선 길, 성수동, 이태원에도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서울에 한정된 게 아닙니다.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있고, 여수에는 벽화 거리가 있고, 남해에는 독일마을이 있습니다. 순천에는 습지가 있습니다. 양양에는 서핑 해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늙음과 낡음은 다릅니다. 비록 오래되었을지라도 멋지게 늙어가면, 새로운 콘텐츠가 접목된다면 사람들은 그곳을 찾기 마련입니다.
미주 지역에는 140여 개의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이민과 유학생들이 많았을 때는 한인 성당이 늘어났고, 공동체도 활기가 넘쳤습니다. 몇 가지 이유로 한인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동체 인원의 감소입니다. 고령화되면서 고인이 되는 분들이 늘어납니다. 젊은이들은 미국성당으로 가거나, 성당에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민과 유학생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둘째는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와 공동체의 갈등입니다. 사소한 이유도 있지만, 본당의 신축과 이동이 관련된 갈등도 있습니다. 사제의 독선과 권위주의가 더해지면 갈등의 폭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한국과는 다른 사목 환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렇습니다. 먼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제 나의 뜻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회개는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면서 시작됩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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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먼저 마신다.’라는 말 다 아시지요? 미리 앞서간다는 뜻이지요. 오늘 제자들이 꼭 그 꼴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주님께 합니다. 제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는 벌써 하늘나라에 들어가 있고, 그 안의 일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너희가 회개하여……. 어떤 모습을 제자들이 가졌기에 회개해서 어린이와 같은 모습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잠시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이 어린이 한 명을 자신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제자들이 빙 둘러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당당하게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자신만만한 자세로 서 있을까요? 아니면 부끄럽고 무서워서 주님의 옷자락을 잡고 꼭 어머니의 치맛자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듯이 그렇게 서 있었을까요?
저는 그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주님 뒤로 비스듬히 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아이를 보호해 줄 사람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 아이는 전적으로 주님께 의지합니다. 주님이 아이에게 좋은 것을 주든 나쁜 것을 주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그 아이에게 놓아서는 안 될 생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제자들은 그러한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늘나라에 벌써 들어가 있었으니까요. 자기들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고 있었습니다. 정작 하늘나라에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 말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로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다른 곳을 바라보며 걷던 사람이 하느님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께 매달려 있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꼭 자기 혼자 자란 것같이 부모의 은공을 모르는 그런 자녀가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어봅시다. 주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그분께 의지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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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눠 먹는 것이 왜 더 맛있을까?
‘혼밥’이란 말 아시나요?
‘혼자 밥 먹기’를 줄여 ‘혼밥’이라고 합니다.
저의 본격적인 혼밥은 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였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도 혼밥이고 학교에서도 혼밥이었습니다.
근처 아는 사람이 생기고 학교에서는 친구가 생기기 전까지 그랬습니다.
그때부터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맛이 좋은 ‘산해진미’가 있다. 하더라도 혼밥보다 함께 나눠 먹는 것이 맛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눠 먹으면 맛있습니다.
혼자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습니다.
가끔 이런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함께 먹는데 혼자 먹는 것처럼 먹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무런 말 없이, 아무런 교류 없이 함께 있어도 혼자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함께 드셔보세요. 마음을 나누며, 일상을 나누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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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
“온갖 재산 다 얻은 듯,
당신 법의 길 걸으며 기뻐하나이다.
당신 법이 저의 즐거움, 그 법은 저의 조언자이옵니다.“(시편119;14,24)
오늘 강론 제목은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도 이런 공동체일 것입니다.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 "인(人)"자 글자 자체가 공동체적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공동체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공동체를 만듭니다. 공동체의 붕괴와 파괴가 인간성 상실의 원인이 됩니다.
예전 마을은 하나의 커다란 가정과도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요즘은 마을도 사라져 갑니다. 인구도 줄어들고 또 사람들도 편중되어 있어 균형과 조화의 마을 공동체를 이루기도 쉽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소속감을 지니고 싶어하며 나름대로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갑니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공동체의 지지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고 허약한지요! 날로 늘어나는 1인가구에 가톨릭교회 공동체의 역할이 날로 증대되고 있습니다. 홀로든 함께든 모두를 하느님 품에 안고 하나의 인류가족공동체로 살아가도록 하는 가톨릭교회의 미사전례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남남의 사람들이 미사은총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범(汎) 인류의 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미래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도대체 가톨릭교회의 미사전례가 아니고 이렇게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지요!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공동체 생활에 지혜를 제공합니다.
“작은 문턱에 걸려 넘어질지언정 산에 걸려 넘어질 일은 없다. 그러므로 마무리를 지을 때의 자세는 낮고 또 낮아야 한다.”<다산>
“발걸음은 항상 정중하게 하고, 손놀림은 항상 공손히 하라, 걸을 때는 땅을 가려서 밟고, 개미 한 마리(개미집)라도 밟지 마라.”<경재잠>
경재잠(敬齋箴)은 주자가 서재의 벽에 써붙이고 스스로 경계한 잠으로, 옛날 서원학생들 기숙사 중 하나인 경재(敬齋) 앞에 내걸어 학생들을 훈계하였기에 경재잠(敬齋箴)이라 부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전 공부는 주로 군자가 되는, 성인이 되는, 즉 참사람이 되는 공부였음을 봅니다. 오늘날 문사철의 인문학은 날로 쇠퇴하고 실용학문의 공부가 주류인 세상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평생공부는 참사람되는 공부임을 봅니다. 사제가 수도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성철 스님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 “사람 못된게 중되고, 중 못된게 수좌되고, 수좌 못된게 도인된다”라면 선방 수좌들을 세속의 기준으로 가장 못된 인간들이라고 일갈했습니다. 토마스 머튼에 대한 후대의 평가, 즉 “머튼은 가톨릭인이기보다는 크리스천이었고, 크리스천이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 보다는 인간이었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참사람이 되는 공부가 얼마나 힘든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되기 위한 공동생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는 참사람되기 위한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의 비결을 배웁니다. 참으로 어린이처럼 편견이 없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예수님을, 작은이들을 끔직히 사랑했던 예수님을 배워 닮는 것입니다. 공동체 성원들이 서로 맞추려 하다보면 공동체의 일치는 요원합니다. 그러니 모두가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자기를 맞춰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살아서 몸소 깨달아 실천한 진리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사람이 되는 비결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편견이 없고 순수하며 개방적이고 유연합니다. 이 또한 부단한 회개의 열매입니다. 이런 이는 그대로 주님의 현존이요 이런 이를 받아들임은 그대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작은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애정의 관심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있는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작은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사는 그대로 하느님의 관심사를 반영합니다. 작은 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그대로 주님께 대한 무시의 대죄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대로 끊임없는 회개로 어린이처럼 낮아져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참사람이 되는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의 참사람들이라면 끊임없는 회개로 어린이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는 공부와 더불어 작은 이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사랑 공부는 평생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답은 단하나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과의 일치의 우정관계를 날로 깊이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불림받은 에제키엘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에제키엘이 삼킨 두루마리가 상징하는바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성체요 말씀입니다. 주님은 두루마리를 에제키엘 입에 넣어주며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에제키엘이 먹었더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합니다. 주님은 두루마리를 먹이신 다음 말씀을 선포하라 명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에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에제키엘 역시 후대의 바오로처럼 똑같이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이시다.”(갈라2,20) 라고 고백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예닮의 여정’중인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성체와 말씀을 두루마리를 먹이심으로 당신과의 일치를 깊이하시고, 당신을 닮은 참사람으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당신 법은 제 마음의 기쁨, 영원히 저의 재산이옵니다.
당신 계명을 열망하기에,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이나이다.”(시편119;103,111,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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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작은 이>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4-5)
애써
작은 이에게
눈길 건네니
나도 따라
어느덧
작아지고
내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작은 이
스스럼없이
내 품에 안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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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어린이는 성령을 나타낸다
이런 단순한 해석 말고 또 다른 방식으로도 설명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신 어린이는 어떤 종류의 어린이인가에 대해 신학적이며 윤리적인 성찰을 해 봅시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어린이는 당신을 낮추신 성령이십니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성령을 불러 당신의 제지들 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은 무시하고 성령께서 보여 주신 본보기로 돌아가기를, 곧 어린이들(제자들)처럼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들은 변화하여 성령과 같이 된 사람들입니다.
“보라, 주님께서 니에게 주신 자녀들괴 나야말로”(이사 8,18)라는 이사야서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이 어린이들을 구원자에게 주셨습니다. 세상적인 것들에서 돌아서서, 성령을 지닌 그 어린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완벽한 온전함속에 계시다가 인간들애게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을 불러 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이 커다란 보물, 이 값진 진주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지금 존재하고 있으며, 시칸만큼이나 가까운 곳에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여기는 어디인가? 여기는 하느님만큼 가까운 곳, 나의 존재만큼 가까운 곳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다. 나는 하느님만큼 내 “가까이” 있는 것도 없다고 확신한다. 하느님은 나 자신보다도 더 내 가까이 계시다. 나의 존재는 하느님이 내 “가까이” 계시느냐, 하느님이 나를 위해 현존하시느냐에 달려 있다. 하느님은 어느 곳에 가까이 있는가? 하느님은 어디에나 가까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바다에 푹 잠기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맑고 투명하게 살 것이고, 하느님도 우리 안에서 살 것이다. 그러면 그 나라는 어디에나 있을 것이고. 모든 것 안에 있을 것이고, 모든 것이 그 나라 안에 있을 것이다. 엑카르트는 에제키옐서(12,13)와 호세아서(7,12)에서 한 이미지를 차용하여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 위 에 그물올 던진다”고 말한다. 이 이미지는 만유내재신론의 세계관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219)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협력하며 감시롭고 기쁜 마음으로 생명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어머니들을 봉헌합니다.
그들을 축복하여 사랑으로 깨끗이 씻어주시고 모든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소서. 그들이 자녀한테서 뿌듯한 기쁨을 발견하게 하소서! 또한 죄와 두려움과 번민으로 흔들리며 필요한 도움을 찾지 못한 채 생명의 선물을 거부하며 고통 가운데 깊은 회한에 빠져 있는 이들을 봉헌합니다.
주님, 그들을 치유하여 그들이 겪은 부정적 체험을 긍정적으로 이용하는 사도가 되게 하소서. 그들이 죄를 보속하여 부정적인 모든 영향에서 자유로워지고 생명을 받아들이고 섬기면서 기쁨과 평화로 살아가게 하소서!
0 예수님, 당신의 자비는 언제나 승리하고 판단을 없애며 저희를 생명으로 이끄시니 당신을 찬미하나이다!(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64)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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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18,1)
남보다 높은 지위, 남보다 더 귀하고 막중한 책임을 맡기 위해서 수도원에 입회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자기의 소임과 직책에 따른 미묘한 갈등과 유혹은 남녀 수도자를 불문하고, 그로 인해 겪을 수 있는 갈등이며 상처이기도 합니다. 때론 동기 사이에 그리고 선후배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싸움은 이미 가정에서부터 비교와 경쟁을 은연중에 받았고 주입된 결과물입니다. 관구장으로 봉사하고 있을 때, 이미 죽은 형제가 술로 인해 침대에 누워서 제게 “아오스딩 신부는 수도원에서 해 볼 것(=직책) 다 해봤지만, 나는 지금껏 아무 직책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다.”라는 그의 속 깊은 말을 들었을 때, 무척 당황스러웠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녀 수도자들은 무엇이 되어 누구와 비교 경쟁하기 위해서 입회한 것은 아니고, 분명 하느님을 살기 위해서 수도 생활을 선택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살다 보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외부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시선과 질문을 받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누가 큰 사람이며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마르꼬 복음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 도착하셔서 제자들에게 “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묻자, 그들이 답변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9,33~34 참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등을 전제로 마태오 복음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의문을 먼저 묻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8,1) 조금은 생뚱맞은 질문입니다. 웬 하늘나라!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는 지금 여기서 주님을 따르면서 누가 더 큰 사람인가에 대한 갈등인데 막연히 하늘나라를 핑계 대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최측근으로 12명을 사도로 선임하였고, 이들은 분명 다른 제자들보다 더 큰 사람, 크다는 것은 키가 크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아마도 소임이나 책임에 따른 표현임에 분명하고, 12명 중에서도 일단은 베드로가 더 큰 사람인 듯싶지만, 당시엔 다른 제자들 사이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계급이나 직위 그리고 연장자 순으로 서열이 정해집니다만, 당대 유다 사회는 그 우위가 뚜렷했고 그에 따른 대우받는 것을 즐긴 풍조가 있었기에 제자들 가운에서도 이런 서열논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는 지금도 지속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던진 질문의 심각성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그냥 말씀으로 대답하기보다 확실히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기에,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확답을 내리십니다. 말씀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시기 전에 하신 예수님의 작은 몸짓이 중요합니다.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셨다.”(18,2) 이 광경이 눈에 들어오시나요. 실제 키가 큰 어른들 가운데 키가 작은 어린이 하나가 서 있는데 이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입니까? 어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이 어린이는 낮추지 않아도 실제로 어른들에 비해 작고 낮습니다. 작고 낮은 어린이는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낮출 필요도 없었고, 어른들의 키에 맞추려고 발꿈치를 들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선 이런 어린이와 같은 존재임을 예수님께서 깨우치기 위해 이런 구도를 만드셨다는 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가장 크시고 크신 존재인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작은 자, 낮은 자일뿐입니다.
이런 이해 맥락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먼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18,3.4)하고 제자들에게 명백히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회개는 통상적인 죄에서 회개라기보단 지금껏 관습과 인습에 젖어 살아왔던 사고와 행동양식 곧 존재 방식을 바꾸라는 의미로 알아듣습니다. 주입되고 교육되어 당연시하고 살아왔던 유대인의 삶의 태도처럼,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우받고 자만하면서 늘 높은 자리에 연연했던 존재의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 곧 하늘나라에 적합한 존재의 태도로 태어나야 하고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실제로 지금 여기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어린이와 같이 실제로 작고 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의 참뜻은 그러기에 높임과의 상대적인 낮춤이 아니라, 이분법적인 높임과 낮춤의 개념이 없는 순수한 상태의 지금 여기 있음으로써 높임도 낮춤도 없는 작은 자로, 낮은 자임을 깨닫고 그것 때문에 전혀 열등감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존재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럴 때 어떤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더 높아지려고 발버둥 치지 않고 자신이 지금 여기 서 있는 어린이와 같은 상태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어린이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낌새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채 다만 예수님 앞에 서 있다는 그 자체, 하늘나라에서 행복했으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하늘나라에선 어떤 누구도 큰 사람도 작은 사람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되라, 는 말씀은 다 큰 어른이 다시 어린이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도 정말로 나이 들면, 정말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사리 분별 못하시는 분들을 저는 노인병원에서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어른이면서도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 되시지 마시고, 어른이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마음만은 순수하고 무심한 듯 비교하지 말고 주어진 현실에서 만족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저도 이제 나이 들어가면서 주책없고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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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한 마리 잃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마저도 /
박윤식 [big-llight] 2024-08-12 ㅣNo.174985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이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그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으면, 길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는 더욱더 기뻐할 것이다. 이처럼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사실 예수님 셈법은 우리와는 다른 것 같다.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모두를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신단다. 아흔아홉 마리를 잘 지키려면 길 잃은 한 마리쯤은 의당 포기하는 게 우리 식이다. 그러나 그분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 양이 더 중요하단다. 그분의 이 셈은 이렇게 우리를 훨씬 넘어선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목자의 마음을 아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은, 참으로 마음 든든하고 행복하리라.
그것은 어쩌다 내가 대열에서 이탈되어 잃어버린 양이 되어도 나의 목자이신 주님은 나를 그대로 내버리지 않고 어떻게 하든 자신을 찾아오시리라 믿기 때문일 게다. 그러기에 아흔아홉 마리 양들은 더욱 안정감을 갖고 목자를 따르리라. 길 잃은 양도 목자가 자신을 꼭 찾아 주리시리라고 믿기에 그 목자를 어디 어디서나 조바심 없이 여유롭게 기다린다. 길 잃은 양을 찾으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은 이렇게 너무나 인상적이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낭만적이다.
어쩜 양을 사랑하지 않는 목자라면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길 잃은 양을 찾고는 화를 낼 게다. 너 찾고자 자신이 무척 고생했다면서. 그러나 양을 사랑하는 목자는 분명히 다르다. 자신의 그 고생보다도 양을 찾은 기쁨을 더 크게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 선택을 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게다. 교회 사목은 양을 치는 착한 목자와 같다. 예수님도 사목의 본질은 가난한 이, 길 잃은 이를 교회에서 가장 소중한 자리에 두고 돌보는 것이란다.
우리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삶을 살면, 비록 한 마리이지만 모든 것을 얻는 삶이 된다. 교회는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이럴게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뢰하듯이 전적으로 그분을 향해 다가가야만 한다. 그렇지만 때로는 그분께서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실지라도, 우리 힘으로는 최선을 다해야만 할게다.
이는 우리 나름대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기만을 기다리면서 게으르고 한가하게 머무르는 것을 그분께서 결코 바라지 않기에.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처럼 겸손이 따른 살아야 한다. 하느님 계명에 따라 우리가 비록 힘겹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의 삶을 갈지라도 그분께서는 늘 우리를 당신에게로 이끄시고자 온 정성을 다 쏟으신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이 사랑을 깨닫고 그분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을 기꺼이 따를까? 때로는 세상일에만 몰두하기에, 그분 영광 드러내는 일에는 너무나 소홀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 사랑이란 새로운 공동체의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이 세속의 일보다 하느님 사랑과 작은 이 사랑에 더 매달려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은 본질적으로 가난하고 길 잃은 이를 교회에서 가장 소중한 자리에 두고 돌보는 것이리라. 이 사목 정신을 외면하면 결국 아흔아홉 마리마저도 잃어버리게 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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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마태오 복음서 18장은 교회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읽은 어린이에 관한 말씀 다음에는 그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고, 그다음에 다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말씀 다음에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의 문제는, 나 혼자만 죄를 짓지 않고 나 혼자만 구원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백 마리 가운데 나를 포함한 아흔아홉 마리가 길을 잃지 않고 집으로 잘 돌아갔다고 하여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아먹은 에제키엘에게도, 동족에게 가서 경고하라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에게, 그가 경고를 하지 않는다면 악인이 죽은 책임을 그에게 묻겠다고 하십니다.
오래전 일이 떠오릅니다.
어떤 신부님과 꽤 먼 길을 가던 중에, 작은 휴게소 같은 가게에 들렀습니다. 가게에 있던 자매님은 자기가 오래전부터 냉담 중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그 자매님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고해성사를 보게 하였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솔직히 신부님이 너무 강요하는 것처럼 보였고, 자매님은 그 자리에서 성사를 보아도 내일부터 다시 냉담을 할 텐데 괜히 마음에 걸리는 일을 더 만드는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십 년도 더 지난 그 일이 왜 이렇게 뚜렷이 기억날까요? 그 일을 저만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 자매님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혹시 그 뒤에 또다시 냉담하였다 하더라도, 그날의 기억은 이 자매님을 계속 교회로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 신부님의 모습에서 저는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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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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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가리키십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사람 숫자를 세는 데
성인 남자만 그 숫자에 포함되었지
성인 여자와 아이들은 거기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서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라는 표현으로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가장 큰 사람이라고 지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같은 의미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를 한 사람으로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잃어버리지 않게 소중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위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을 통해
내가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모습이 연결되지 않는 것을
위선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을 자신과 비교해서
좋지 않게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그가 보여주기식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결코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소중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돌아볼 때
내가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겸손한지 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남들이 말할 때 어린이라고 생각해서
무시해도 된다고 하는 사람을
나도 똑같이 무시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주위의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존중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해 주실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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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세상은 언제나 호기심 천국이요 즐길 거리로 충만한 멋진 무대입니다!
여름 신앙 학교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루 쉬는 날이라 만사 제쳐 놓고 ‘방콕’을 하며 밀린 잠을 실컷 잤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 본인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고 아파라! 아이고 쑤셔라!”
잠을 자면서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 정말 오랜 만이었습니다.
오래전 주택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세 달 정도 한적이 었었는데, 일 시작하고 일주일 내내 밤마다 그렇게 앓았습니다.
온 몸이 쑤시고 아프고, 그런데 딱 일주일 지나니 적응이 되더군요.
요즘 산업 현장에서 땀흘리며 일하시는 노동자들, 참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힘든 때 인데, 두꺼운 작업복에 작업화, 작업모에 안그래도 더워죽을 지경인데, 철판 위는 복사열로 달구어져 계란 프라이를 해도 될 정도입니다.
다시 한번 현장 근로자들의 노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요즘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찐하게 체험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덥다 덥다 하면 더 덥습니다.
왜 나만 이래야 해, 하고 불평불만 하며 더 힘듭니다.
이왕 일 하는 것, 짜증내지 않고 환하게 웃으면서, 여름에는 땀 흘리는 것이 정상이지, 건강에좋고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생각으로 기쁘게 일하면, 그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이요,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 복잡하게, 너무 인상 쓰면서 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철부지처럼 희희낙락하면서 재미있게 살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 3-4)
인생의 고수는 사실 매사를 재미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만사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만사를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나 시련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이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밋밋한 내 일상에 자극을 주시는구나, 나를 재미있게 해주시려나 보다 하고 생각해야겠습니다.
고수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언제나 호기심 천국이요 즐길 거리로 충만한 멋진 무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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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도
제자들은 주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절) 물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3절)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셨다. 그 어린이는 성령을 지닌 어린이이다. 성령을 지닌 그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어린이는 부모를 따르고 사랑한다. 이웃에게 해를 입힐 생각도 못 하고, 재산에도 관심이 없다. 교만하지도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자기가 들은 말만 믿고 진실이라고 들은 것을 지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4절) 누구든지 당신을 본받고 당신처럼 자신을 낮추면, 즉 당신이 종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당신을 낮추었듯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5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으며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
순결하시고 어떠한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는 우리도 거룩하게 살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어린이를 본보기로 세우셨다. 어린이와 같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어린아이는 말을 들으면 믿는다. 무엇을 가르치면 따지지 않는다. 아이는 온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어린아이가 가진 순수함을 되찾아야 한다. 이렇게 죄 없는 어린이가 된 사람은 당연히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절)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0절) 하셨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바로 이러한 작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구원하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이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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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 앞에 서면 겸손해진다>
며칠 전 밤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 앞에서 작은 짐승이 튀어나와 급정거를 했지만 결국 그것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로드킬이라 기분도 좋지 않았지만 한 생명을 의미 없이 죽였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차를 뒤로 빼서 가만히 살펴보니 고라니 새끼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온 몸에 부스럼이 났고 털이 다 빠진 불쌍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불쌍해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차에게 더 밟히는 일이 없도록 길가에 던져주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디선가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예전에는 짐승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혐오감을 주는 것들은 없애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뱀 일가족 3마리를 몰살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물론 그래야 용감하게 보였기 때문에 하긴 했지만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그렇게 갇혀 있는 뱀을 죽이기보다는 다시 산에 풀어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벌레들도 잘 죽이지 않습니다.
혐오스런 다리가 많이 달린 소위 돈벌레나 나방 같은 것들이 방으로 들어와도 잘 잡아서 창문 밖으로 던져줍니다.
내가 그 생명 하나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왔음을 반성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살이 하나도 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생명을 주신 분만이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날파리나 인간이나 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어린이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어린이와 과부는 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부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어린이와 같이 낮아진다는 말은 어린이와 같이 낮은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뜻과 같음을 말씀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내가 낮아지면 낮은 이들을 잘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물을 받아들이는 곳은 높은 산이 아니라 낮은 계곡입니다.
자신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이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 마리의 가치가 구십구 분의 일이 아니라 나머지 구십구 마리만큼이나 소중하단 뜻입니다.
작은 생명 하나도 소중히 여기고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지려면 겸손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 초보 강도가 어떤 집에 들어가서 누워 있는 집 주인에게 “꼼짝 마, 손들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강도가 “왜 손을 안 들어. 죽고 싶어?”라고 협박했더니
그 사람은 “제가 오십견이어서 손을 들 수가 없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집 주인의 말을 들은 강도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 오십견이세요? 저도 오십견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오십견에 대한 정보를 주고는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아파봐야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고, 내가 작아져 봐야 작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부모가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처지입니다.
그런 처지이니 아이들은 자신처럼 불쌍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큽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혼자 힘으로 살 수 있게 되면 자신처럼 자립하지 못하는 이들은 게으르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며 판단합니다.
그러면 다시 어린이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린이가 어린이인 것을 알 때는 부모 앞에서입니다.
모든 것을 대 해주시는 부모 앞에서 비로소 작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없으면 부모 없는 어린이와 같은 운명입니다.
주님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겸손해질 수 있고 그런 사람이라면 세상 모든 사람을 품에 안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아이가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우려면 부모 없이는 안 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기도 안에서 하느님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가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는 앞으로 고꾸라집니다.
이는 요한 묵시록의 요한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이 모시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는 엎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 앞에 서야만 우리가 아무런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린이처럼 될 수 없습니다.
항상 하느님 앞에서 사는 자는 모든 존재하는 것을 포용할 능력을 지닌 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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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길 잃은 양’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0.12-14).”
1)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가르침이고,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어라.”,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 라는 말씀은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는, 뜻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회개’는, 여기서는 각자 자신의 교만을 버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나는 교만했던 적이 없다.
나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다.” 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말은 그렇게 안 하더라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백 퍼센트 위선자이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위선과 교만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2) ‘되찾은 양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잃은 양’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이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는 의인들의 실제 수가 아니라, 양을 잃었을 때의 목자의 슬픔과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의인들과 죄인들의 실제 비율은 ‘99대1’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면 ‘1대99’ 라고 말해야 할 텐데,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길 잃은 양’이고, 회개해야 할 죄인들이고,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지옥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고,
하늘나라는 ‘회개한 죄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또는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성모님 외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또 늘 하느님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회개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이 말에서 ‘손님’은 ‘낯선 나그네, 뜨내기’를 뜻하기도 하고, ‘작은 이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천사들’을 접대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접대했다는 뜻입니다.
‘나보다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곧
주님께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작은 이들이 곧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오실 때 ‘나보다 작은 이’의 모습으로 오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천사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말씀은, 작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수호천사들이 곧바로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자기보다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하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이고, 그것은 심판 때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되는 죄입니다.
4) 그러면 그 죄를 짓는 사람 쪽에는 수호천사가 없는가?
있다면 왜 그렇게 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가?
위선자들, 교만한 자들, 작은 이들을 학대하는 자들 쪽에도 분명히 수호천사가 있고, 양심을 통해서,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통해서, 또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그러면 안 된다고 계속 타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과 교만한 자들 쪽에서 그 ‘사랑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수호천사의 반대쪽에는 마귀들이 있습니다.
마귀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해도 된다.” 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너는 지금 충분히 겸손하다.”, “너는 죄가 없으니 특별히 회개할 것이 없다.” 라고 유혹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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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어제 복음에서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내야 할 성전세를 직접 마련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그래서 자기들보다 더 높아졌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자기도 특별한 무엇인가를 해야만 주님께 인정과 사랑을 받아 그분께서 이 세상에 세우실 ‘하느님 나라’에서 더 높은 지위와 권력을 누리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은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사람이 되신 것으로도 모자라 당신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주려고 하실 정도로 스스로를 낮추시는데, 당신의 제자라는 이들은 어떻게든 남들 위에 올라서서 자신을 높일 생각만 하니 그 모습에 참으로 기가 막히고 마음이 착잡하셨겠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시고자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인가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일단 그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니 먼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란 열 두 살이 되기 이전의 아이를 가리키는데, 예수님 당시 근동지방 사람들은 어린이를 ‘자기 힘으로는 살 수 없어 손이 많이 가고 책임감이 없으며 세상 물정을 몰라 어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하찮은 존재, 율법을 모르는 죄인’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회개하여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은 약하고 부족한 어린이가 어른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그 지시에 전적으로 따르는 것처럼,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그분 말씀에 전적으로 순명하라는 뜻입니다. 이미 머리가 큰 어른은 자기가 잘 났다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그러지 못하지만, 자기 부족함과 약함을 잘 아는 어린이는 언제든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어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회개’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로 그러지 못하는 어린이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온전히 순명하지 못하고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아이는 그 고집 때문에 부모의 손을 놓치고 길을 잃어 ‘미아’가 되곤 하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본인 탓으로 길을 잃은 어린 양 한 마리도 포기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기꺼이 멀고도 험한 고생길을 떠나시는 분입니다. 그 과정에서 산에 남겨진 아흔 아홉 마리 양의 입장에서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들을 위험 속에 무책임하게 방치하시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끝까지 찾으시겠다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겠다는 뜻이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시겠다는 뜻인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시니 우리도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겠습니다. 세상의 하찮은 것들에 마음을 함부로 내주어 길을 잃지 말고, 하느님께만 그분 뜻에 맞는 일에만 마음을 두고 전념하여 하느님께 기쁨을 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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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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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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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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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삶
<2024.8.13> 아침을 여는 묵상 (렘 49:23~39절)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삶❞
❚ 하나님이 인생을 다스리시고, 통치하고 계심을 믿고 신뢰할 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 우리 안에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육체의 탐욕을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23~27절).
다메섹에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다메섹은 당시 교통, 군사, 상업의 요충지에 위치한 아람의 수도로써 매우 번성했습니다. 다메섹에 멸망의 심판이 선포된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주변 나라들처럼 우상 숭배와 선민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이 심판의 주요 원인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찌하여 찬송의 성읍, 나의 즐거운 성읍이 버린 것이 되었느냐...”(25절).. 다메섹의 전성기에 붙여진 별명으로 온갖 영화와 찬사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망할 것 같지 않은 다메섹이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 몰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알려 주십니다. 특별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복과 화를 명백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달콤한 유혹과 개인의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화려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한들 그 인생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인생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살기 좋은 곳이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지 않으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정결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육체의 탐욕을 버리고 정결함을 가지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 복음의 능력을 믿지 않는 죄악을 버려야 합니다(28~33절).
게달과 하솔이 받을 심판에 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의 후손으로 주로 사막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는데, 활을 잘 쏘기를 유명했습니다. 반면에 하솔의 거주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런데 ‘동방 자손’(28절)이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하솔은 게달 민족의 거주지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던 유목 민족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장막을 비록한 모든 기구와 양 떼 등, 게달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모든 수단이 바벨론에 의해 약탈될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29절)라는 말은 바벨론의 외침에 게달은 겁을 먹고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입니다. 바벨론 왕의 공격은 게달에 이어 하솔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멀리 도망하여 사막의 깊은 곳에 숨어 살라는 명령이 하솔에게 주어집니다(30절). 하솔 사람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의 침입을 받지 아니하고 비교적 평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당신의 심판의 도구인 바벨론을 통해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재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31~32절). ‘...큰 뱀의 거처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결국 하솔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영원히 황폐하게 되어 아무도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32절).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아주 미미한 민족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민족이나 개인도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지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통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튼 게달이나 하솔은 군대도 없었고, 교역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정세에 휘말릴 일도, 큰 전쟁을 벌일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노략과 탈취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하나님을 섬긴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선한 양심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법 없이 살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가장 큰 죄는 복음의 능력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지 않는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34~39절).
엘람에 대한 심판 경고가 주어집니다. 엘람은 바벨론 동쪽에 있던 지방입니다. 엘람은 한때 앗수르 같은 제국과 힘을 겨룰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때 그돌라오멜이 엘람 왕이었는데, 그 세력이 바벨론이나 요단까지 미쳤습니다(창 14:1~11). 엘람 사람들은 몹시 거칠고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가장 능숙하게 사용하는 무기인 ‘활을 꺽을 것이요...’(35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멸망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표현입니다. ‘...엘람에서 쫓겨난 자가 가지 않는 나라가 없으리라...그들을 멸망시키라...’(36~37절).. 엘람의 철저한 파멸을 의미합니다. 즉 엘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경고나 그들을 돌이키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고, 그들을 멸절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방으로 흔터진 엘람의 포로들을 ‘말일’에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39절).
하나님은 자신의 힘을 믿고 큰 소리치는 자들을 미워하십니다. 우리 자신들이 의지하는 활을 꺾어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을 때 세상을 이기고 죄와 마귀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실로 교만은 마귀가 가장 처음 범한 극악한 범죄입니다. 하나님이 물리치시고(약 4:6) 대적하시는(벧전 5:5) 참담한 범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삶을 살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의 덕목을 쌓아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처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생명까지 던질 수 있는 사명자로 발견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인생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삶의 전 영역에서 인정하는 복 있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자신을 의지하는 활을 꺾어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아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렘 49:23~3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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